글쓴이 : 변영희 | 날짜 : 11-05-27 16:59 조회 : 2044 |
| | | 눈에 보이는 모든 식물들이 서울 근교의 것들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부모님 사랑 듬뿍 받고 자라는 아기같이 그 푸른 빛하며 튼실한 줄기와 꽃모양이 확연히 비교가 된다. 아카시꽃 향기가 사라졌다고 하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지금 이곳엔 들장미와 아카시꽃 향기가 온 천지에 가득하다. 옥수수는 키가 쑥쑥 자라오르고, 감자며 고추가 깜작 놀랄만큼 성장속도가 빠른 것 같다. 모내기를 끝낸 논에는 그렁그렁 물이 차 있고 상추며 시금치 취나물 두릅나물도 산책길에서 지천으로 만난다. 회촌교를 지나 마을로 올라가는 길 좌우에는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예쁜 집들이 여러 동 들어서 있어 도시에서 이곳으로 이사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집 앞에는 맑은 개울물이 돌돌 흘러가고 탐스런 불두화꽃이 전원주택에서 제철 만난 듯 함빡 웃고 있다.
한적하고 고요한 일상에 친구가 찾아왔다. 친구에게 내가 대접할 것이라곤 아침에 식빵을 구워먹으러 식당에 올라갔다가 큰맘 먹고 가져온 인스탄트 커피 두 봉지가 고작이었다. 내 방의 소형 냉장고에는 토요 일요일을 위한 비상식량으로 달랑 햇반 몇 개가 있을 뿐이다. 집에서 떠나올 때 노트북이 하도 무거워서 멸치볶음이며 김부각, 장아찌 종류들을 준비했으나 무겁다는 이유로 다 빼놓을 때 간식거리도 몽땅 내려놓고 온 때문이었다.
친구가 들고온 가방에선 떡 벌어지게 상을 차려도 좋을 만큼 온갓 먹을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약식 쑥개떡 호박떡 군고구마 삶은 계란 유부초밥 김밥 매실장아찌와 멸치볶음 등등. "아니 이게 다 뭐야? " 내가 입주한 그 이튿날이 공휴일이어서 종일 강냉이 한 보시기와 돌김에 잣만 싸서 5끼니를 떼웠다고 했더니 그 얘기를 들은 것인가?
나는 다른 친구로부터 메시지가 와서 즉각 답을 보낸 일이 있다. "좋은 데는 다 다니네! 좋은 글 많이 쓰고 와라!' 를 받자마자 나는 "좋은 데 와서 배가 고프다! 비는 온종일 주룩주룩 쏟아지고 길도 모르고 아는 사람도 없고 나는 지금 6.25을 만났어!" 라고 했던 것이다..
돌김에 잣이 얼마나 영양가도 많고 든든한지 안 먹어보면 모를 걸 하면서 장난섞어 과장표현을 했던 것인데 난데없이 이 친구가 용인에서 버스 타고 원주에서 또 시외버스 갈아타고 먹이를 잔뜩 짊어지고 나에게 오다니. 장편소설이고 단편소설이고 돌아볼 정신이 없었다. 낮 1시가 거의 다 되어 친구는 덥고 배고프고 할 터인데 이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하나 하고 걱정이 만만치 않았다. 시내로 나가는 버스가 금방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너 배고프지? 어휴 내가 언제부터 너한테 밥 한 번 거하게 해줄려고 했는데 그걸 여태 실행에 못 옮겼잖아 어서 먹어!" 감동 잘하는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친구 성화에 유부초밥과 쑥개떡을 집어 먹으며 영 기분이 야릇했다. 야릇이 아니라 콧마루가 시큰거렸다. "무거운 걸 짊어지고 여기 올 생각을 왜 했어?" 내 방의 소형 냉장고에는 뒤져봐야 더 나올 것이 없었다.
나는 친구를 데리고 고 박경리 선생님 박물관-유품이 전시돼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그리고 도서관이며 세미나실, 김지하 선생님 서재와 뒤란의 야외 무대 언저리에 피어난 붓꽃을 보여 주었다. 내가 먼길 찾아 온 친구에게 줄 것은 그것 밖에 없었다. 친구는 부지런히 셧터를 눌러댔다. 귀래관 앞 연못가에 이제 막 피어난 모란꽃도 찍고 시간이 아까워 제대로 잠을 못잔 내 꺼실한 모습도 카메라에 담았다.
내 일에 방해 된다며 친구는 빈 도시락을 챙겼다. 친구를 그냥 보낼 생각을 하니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 때 승용차 한 대가 우리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만 흥업까지만 태워 주실 수....." 나는 용기를 내서 씩씩하게 말했다. 그러고 있을 때 길가의 하얀 민들레가 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얼른 하얀 민들레를 꺾어 친구에게 주었다.
승용차가 출발했다. 생면부지의 내 부탁을 기꺼이 들어 준 승용차 아저씨가 나는 고마웠다. 그리고 하얀 민들레 한 포기도 고마웠다. 친구를 태운 차가 매지리 종점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차가 사라져간 큰 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매지리의 저녁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웠다. |
| 이희순 | 11-05-27 17:44 | | 선생님을 걱정하며 정성스럽게 장만한 음식을 챙겨들고 먼 길을 한걸음에 달려온 분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친구에게 건네주신 별 볼품도 없을 하얀민들레꽃 하나가 어찌 그리 고운지요. 참 좋은 벗을 두신 선생님은 행복한 분이군요. 선생님께서 살아오신 역사를 보고있는 후학도 어느덧 행복에 잠깁니다. | |
| | 변영희 | 11-05-27 20:04 | | 오늘은 모처럼
내 방에서는 인터넷이 안되어요. 다른 분들은 노트북을 끌고 도서관으로 휴게실로 가더군요. 거기가면 인터넷이 된다면서. 근데 나는 그 노릇이 버거워서 잠깐씩 휴게실에 옵니다. 어떤 날은 앉아보지도 못하고 가고 오늘은 모처럼 내일 퇴실하는 사람들이 많은 때문인지 저가 차지하고 앉아서 글 한 편 올렸습니다. 이희순 선생님 대단히 감사합니다. 시골이 참 좋군요.모두가 생생하게 살아있어요. | |
| | 임병문 | 11-05-27 18:17 | | 선생님의 그런 여유 부럽습니다. 어디 그것이 마음먹는다고 쉽게 그리 될 수가 있겠습니까. 눈에 선합니다. 그 맑고 푸르름, 그리고 생동감 넘치는 여유와 운치, 그 귀한 곳에서 좋은 글 많이 쓰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 |
| | 변영희 | 11-05-27 20:12 | | 저는 집에 있을 때보다 이곳에 머물면서 사실은 더 쫓기고 있답니다. 고 박경리 선생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리고 있지요. 문학 후배들에게 이처럼 좋은 환경 만들어 주시고 당분간이나마 걱정근심없이 창작에 전념하게 해주신 것을 생각하면 한시도 게을러질 수가 없더군요. 오늘도 새벽 3시에 눈떠서 종일 모니터만 들여다 보았습니다. 대개 젊은 친구들이 많이 와 있고요. 저는 상당히 용기를 낸 편이랍니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 |
| | 민문자 | 11-05-27 21:08 | | 어! 글 쓰러 원주 박경리문학관에 가셨군요. 마음 먹은대로 좋은 작품 써가지고 오세요. 5월의 여왕으로 산골의 야생화와 교감하며 행복 많이 누리세요. | |
| | 변영희 | 11-05-28 13:09 | | 뼈꾹이
뻐꾹이가 진종일 울고 있어요. 뻐꾹이란 녀석은 무슨 애달픈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나는 불현듯 6.25때 피난가면서 듣던 뻐꾹이 소리를 떠올립니다. 6.25를 생각하면 서러움이 북바칩니다. 뻐꾹이도 나의 6.25를 알고 있는 것일까..... | |
| | 이진화 | 11-05-28 00:17 | | 토지 문학관에서 좋은 작품 낳아오시기 바랍니다. 작년에 수필의 날 세미나 갔던 때가 생각납니다.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날이었지요. 많은 흔적을 돌아보며 박경리 선생님이 정말 큰 어른이시라는 걸 느꼈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열정을 이어받아 멋진 작품 써오세요. 그런 친구분이 있다는 것 크나큰 복이십니다. ^^ | |
| | 변영희 | 11-05-28 13:16 | | 이곳에서의 시간이 매우 소중하게 느껴지는 오후입니다. 3개월 혹은 2개월 한 달 이렇게 머물다가 이번 주에는 많은 분들이 귀가를 서두르고 있습니다. 나는 전에 쓴 장편을 손보면서 그냥 써지는대로 일부러가 이나라 '그냥 써지는 대로'.....지낸답니다. 고맙습니다.. | |
| | 김자인 | 11-05-30 09:35 | | 변영희 선생님 부럽습니다. 작품 쓰시러 박경리 문학관에 가계시고. 그곳의 전경이 눈에 선합니다. 반찬 해오신 친구분이 읽는 독자에게도 고맙게 느껴지네요. 부디 좋은 작품 많이 쓰세요. | |
| | 변영희 | 11-06-01 07:10 | | 산찔레(들장미)와 아카시꽃이 온산야를 향기롭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붓꽃과 모란꽃은 또 얼마나 우아한지요. 병원에 갈겸 집에 잠시 왔습니다. 진이 다 빠져버린 것만 같아서요.한 일도 없이 잘 쉬고 있는데도. 김자인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 |
| | 변영희 | 11-06-01 07:15 | | 원명화 선생님 떠나보는 것, 집과 가족을 한동안 떠나는 것. 그것이 가끔은 필요한 일 같습니다. 젊은 날 산부인과에서 지낸 2박 3일 말고 완전히 혼자가 되어보는 것도 우리 인생에 좋은 휴식이 되는 것 같습니다.나는 그곳에서 내 버거운 삶의 짐을 내려놓고 후유! 하고 큰한숨을 뱉어내고 있습니다. 그동안 너무 오래 자기자신을 방치했다는 자성과 더불어. 고맙습니다. | |
| | 정진철 | 11-06-01 11:28 | | 잘읽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리고 하얀 민들레 그것 참 귀한 꽃인데 건강하세요 | |
| | 변영희 | 11-06-01 21:49 | | 참 귀한 꽃 하얀 민들레가 마을로 내려가면 더 많아요. 집에 오기 전 그것들을 찍으려고 나갔더니 세상에나. 하루 아침에 제초제로 다 죽여버렸네요. 시커멓게 타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지요. 탐스럽던 질경이, 쑥 애기똥풀 엉컹퀴 클로버 망초 씀바귀 냉이 모든 풀들이. 그래서 하얀 민들레 대신 달리아꽃을 선보입니다. 그 뿌리가 혹 살아났으면. 감사합니다. 선생님! | |
| | 박원명화 | 11-06-01 13:59 | | 먼 곳을 가신다더니, 좋은 곳에 가계시네요. 막경리선생님이 우리 후학들에게 남겨놓으신 좋은 자산이 되는 그곳 지필실에서 선생님의 가슴에 담겨진 문심을 몽땅 풀어 내시는 좋은 작품 기대합니다. 그래도 선생님은 행복한 분이신 게 분명합니다. 그런 좋은 친구가 있다는 게, 어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일이던가요. 부럽습니다. 저 역시 마음으로는 어디 깊숙한 곳에 숨듯, 한 달쯤이라도 숨어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요즘이랍니다. 아무튼 건강 잘 챙기시고, 문운의 꽃을 활짝 피울 좋은 작품 써오시기를 | |
| | 최복희 | 11-06-04 10:53 | | 선생님은 역시 문학인이십니다. 전 수필 쓰는 일에서 외도를 하고 있는 기분이예요. 두 가지 토끼를 다 잡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이지요. 좋은 감상 잘했습니다. 무엇을 예사롭게 보지 않으시고 작은 것도 문학으로 크게 승화시키시는 솜씨에 놀라곤 합니다. 아프지 마시고 좋은 글 맍이 남기세요. | |
| | 변영희 | 11-06-04 15:01 | | 6월2일 토지문화관에 중요한 행사가 있었어요. 외국 분들, 그리고 토지문화관 입주해서 작업하는 모든 분들이 관장님 내외분과 함께 원주시내 투어하는 날이었어요. 치악산 절에 가서 절밥도 먹고, 단구동 박경리 문학공원에도, 그외 여러 곳을 둘러보고 모처럼 외식하는 행사였지요. 1일이 실버넷뉴스 교육이어서 저가 몸도 아프기도 했지만 돌아온 거지요. 최복희 기자님이 '부족'이라고 하니 이리 말이 길어지네요. 걱정 마세요. 그 재능 어디가겠습니까. 저도 몇 년만 더 이렇게 바쁘게 살고 싫컨 놀겁니다.노래도 많이 부르고요.ㅎㅎㅎ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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