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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숭리와 함께하는 행복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문숭리
초등학교 총동문회 한마음 잔치에서 만난 사람 -------------------------------- 문숭리
필자는 1971년도에 충북 충주시에 속해 있는 동락초등학교 제21회 졸업생이다.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이듬해에 설립되어 한국전쟁 시작 다음해인 1951년 1회 졸업생을 배출한 이래 금년 2월에 59회에 8명 졸업생을 포함하여 총 3038명의 졸업생이 졸업한 전형적인 작은 농촌 초등학교이다.
현재 유치원생 10명과, 초등학생 38명과 함께 총 48명으로 통폐합 대상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존속되고 있는 것은 이 학교가 가지고 있는 역사성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한국전쟁 최초 승전지에 대한 이견이 다소 대두되고는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현재까지는 한국사에 있어서 한국전쟁 당시 최초의 승전지가 음성 무극전투라는 것이다.
보병 제6사단 7연대가 보명 1개 대대병력으로 북한군 1개 연대병력을 섬멸하는데 그 당시 피난을 가지 않고 학교를 지키고 있던 김재옥 여교사가 적군에 대한 세밀한 정보를 죽음을 무릅쓰고 우리 국군에게 제보함으로써 승리가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 유명한 전쟁영화 <전쟁과 여교사>라는 것이 그 여교사를 기리기 위한 영화로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유명한 도끼에 의한 일가족 살인사건인 고재봉 사건의 희생자 가족이 바로 이 여교사 일가족 이었다는 사실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 전쟁사에 빛나는 초등학교를 필자가 졸업한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지도 어연 40여년이 다 되어가건만 필자는 각종 동창회 참석실적이 거의 미미한지라 가장 많이 모인다고 하는 초등학교 기수 동창회조차도 서너 번이 전부인데 마지막 참석해본 것이 십여 년도 더 지나고 있는 중이었다.
사는 것이 뭔지?
더불어 총 동문회 행사도 간헐적이나마 지속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건만 총동문회는 한번도 참석해 보질 못했다. 그러던 날에 금년부터는 사회적인 활동을 재개하면서 기수별 동창회는 말할 것도 없고 총동문회 행사도 참석하기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총동문회를 참석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는 간헐 적으로 실시되던 총 동문회는 이제 정기적으로 매년 8.15일 실시해 오고 있는데 금년이 10회째란다. 그러니까 필자가 42살 되던 해였는데 필자는 그런 날에는 삶과 투쟁하느냐고 총 동문회라는 단어자체도 입에 오르내릴 수 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러다가 금년에 이런 저런 이유로 처음 참석을 하게 되었다.
이제는 삶에 대한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하던 중에 더불어 이번에 출판된 필자의 <내 고향 충청도>를 출간했는지라 홍보와 총동문회에 참가하는 기회를 가졌던 것이었다.
총동문회 한마음 축제는 체육대회에 앞서 김재옥 여교사 기념관 2층 강당에서 개회식과 더 불어 체육대회를 하고 전 동문이 한자리에 모여 노래자랑과 함께 경품추첨으로 막을 내리게 되어있었다. 개회식에는 늘 그랬듯이 한해에 한, 두 명씩 총동문회에서 학교를 빛낸 동문에 게 감사패가 주어지고 있었다.
(모교 제11회 졸업생인 이민영 변호사가 한춘희 총동문회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있는 모습)
또한 농촌학교의 총 동문회임에도 불구하고 충주시 국회의원과 시의원을 비롯해 내외인사가 대거 참석하여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내빈석 맨 우측이 민주당 소속 충주시 지역구 이시종 국회의원과 그외 지역 시의원과 내빈들)
(총 동문회 한마음 잔치에 대한 축사와 더불어 동락전투에 대한 역사성을 부가시키고 있는 이 시종 국회의원, 매년 7월 7일에 동락전투 전승 기념행사가 본 초등학교에서 보병 6사단과 충주시 공동주최를 열리고 있다고 한다.)
모름지기 내연 상반기에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었는지라 관련 유지들이 얼굴을 안 내밀 수도 없었다지만 그래도 총 동문회가 체계가 잘 잡혀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하루 종일 총 행사를 통틀어 필자에게 오늘 이 글을 쓰게 만들었던 것들 중에 백미는 학교를 빛낸 2명의 동문 중에 한명(필자의 모교 11회 졸업생 이민영)이 필자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필자는 거의 비슷한 환경 에서 부보형제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공식적인 법대를 졸업하고도 고시패스라는 꿈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 선배는 초등학교만 졸업하고도 중.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제25회 사법고시를 합격해서 현재 경남 창원을 기반으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고 해서 그의 행적을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 결과 그가 오래전에 남긴 사법고시 합격후기를 읽을 수 있었다.
여기 그의 사진과 더불어 검정고시인 수기모음집1, [내 삶의 가장 소중한 선택, 황종완외, 1996]에 <나오는 나는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 이 민영>는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다.
이민영
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던 해인 1948년 10월 26일,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에서 태어났다. 산으로 둘러싸인 그 조그만 마을은 교통이 불편한 외딴곳이었지만 지나온 36년의 인생행로를 반추해볼 때 그 그곳은 가장 행복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유난히 개구 쟁이었던 나는 달도 없는 캄캄한 밤에 친구들과 달리기 시합을 하다가 넘어져 무릎을 기도 했고,가을이면 남의 산에 올라가 밤을 따다 주인에게 들켜 혼 구멍이 나기도 했다.
어느 해던가…. 유독 눈이 많이 내리던 겨울, 그 근처 몇 동네를 통틀어 제일 큰 20칸이 넘는 집에서 나는 밤새 내린 눈을 혼자서 다 치우겠다고 고집을 부렸고, 결국 그 눈을 다 치운 덕에 동상에 걸려 한 동안 고생을 하기도 했다. 아침저녁으로 아령 체조와 역기를 한 덕으로 나이 많은 형들과 팔 씨름을 해서 이길 정도로 주위에서는 기운 센 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형님과 팔씨름을 해서 이길 정도로 주위에서는 기운 센 아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형님과 싸우다 아버지 앞에 불려가 벌을 서던 일….모든 것이 평화롭고 따듯하고 포근했던 시절이었다. 부족함이 없던 생활…. 그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는 뼈저린 가난을 경험하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4․19혁명이 나던 1960년, 우리 식구들은 정든 고향을 등진 채 무거운 걸음으로 산을 넘어 중원군 신니면 동락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이 되던 해 봄이었다.충주사범학교를 나오tu서 교편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맹동면장을 거쳐 그 무렵 감찰위원회 음성군 책임자로 계셨는데 4․19와중에 직장을 잃으셨고, 무슨 일인지 가세가 차차 기울어 더 이상 고향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0여 칸이나 되는 큰집을 팔아버리고 세 칸 짜리 오두막에 들어서면서 왜 갑자기 이런 집으로 이사를 해야 하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때는 철부지였다.
가세는 점점 기울고 아버지께서는 뒤늦게 한의학 공부를 하시어 한약업 허가를 얻어 약방을 차리셨지만 낯선 것에서 제대로 영업이 될 리 없었다. 집에서 가사를 돌보던 누님은 외삼촌이 계신 부산으로 기술을 배우러 떠나고 중학교 2학년이던 형님은 학교를 중퇴 할 수 밖에 없었다.
개구쟁이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초등학교 졸업식에서는 도지사상과 6년 개근상을 탔다. 하지만 그것이 부슨 소용이랴! 졸업식이 끝나고 급우들이 다 떠나고 난 뒤 나는 화장실 뒤에서 서럽게 울었다. 그 눈물이 바로 그 이후의 내 앞길에 고난과 슬픔을 예고해주는 비운의 서곡이 될 줄이야.
진학 못한 슬픔에 젖어볼 겨를도 없이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나이가 어린데다가 동작이 둔해 일꾼 한사람의 반 몫도 해내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품삯을 받지 못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게 고작이었다. 집에서는 쌀 몇알 들어가지 않은 잡곡밥이나 나물죽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고, 때로는 굶기도 했지만 남의 집 일을 열심히 해주면 흰 쌀밥을 먹여주니 그 정도라도 감지덕지 였다. 배고픔은 참을 수 있었지만 진학하지 못한 슬픔은 한이 되어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내가 일을 해주는 주인집 아이들과는 한때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기도 했는데 이젠 그들에게 시커멓게 그을고 야윈 몰골로 퇴비를 나르는 내 모습을 보인다는 것은 가슴에 못이 박이도록 부끄럽고 슬픈 일이었다. 처음에는 어찌된 일이냐고 묻던 친구들도 어색하고 부끄러워하는 나를 동정해서 자기네들이 먼저 나를 피해주었다.
“공부하리라 꼭 다시 시작하리라!” 나는 이때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한약방의 경영이 어렵게 되자 선비이신 아버지는 이웃집의 사랑방을 빌려 한문 서당을 차려 아들을 가르치셨고, 일하는 사람을 두고 집안 일을 하셨던 어머니는 이제 남의 집일을 하러 다니셨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손끝이 터지고 나중에는 뼈마디가 튀어나올 정도로 일을 하신 어머니의 희생은 지금도 가슴을 찡하게 한다.
공사판에 나가 일을 하다.
- 15세가 되면서부터는 자주 근로사업장이나 공사판에 나가 일을 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6~7킬로미터나 떨어진 공사장에 가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어두운 밤이었고 온몸은 매맞은 것처럼 아프고 저려왔다. 말 씻고 자는 날조차 드물 정도로 고된 나날이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일이 좀 편할 것 같은 기와공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사장보다 일은 쉬웠지만 잠시도 귈 틈을 주지 않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일을 하다 쓰러질 것 같으면 몰래 화장실에 가서 쉬었다 . 그러다 한번은 감독에게 들켜 멱살을 잡히고 또다시 꾀를 부리면 쫓아내겠다는 호통을 들었다. 어머님의 품이 그리웠다. 이렇게 희망 없는 생활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 차라리 사는 것이 두렵기조차 했다. 그래 나도 공부를 하자.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예전처럼 산에 가서 나무를 해다 팔기도 했고 남의 집 농사일을 도우면서 우선 아버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기로 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초등학교를 나온 주제에 한문은 배워 무엇하나, 다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하여 공부하겠다는 마음은 꿈에도 안 가졌지만 객지에서 어린 나이에 겪은 고통은 이제 무엇이든 배워야 한다는 굳센 신념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아버지로부터 틈틈이 한문을 약 6개월간 배우고 나니 조금씩 흥미가 생기고 공부에 대한 강한 열망이 일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열심히 한 덕분에 아버지 대신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같은 또래의 학생들에게 선생님 소리 들어가면 가르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욕을 먹었던 기억은 없으니 큰 실수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신문을 읽게 되자 사회의 움직임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독학 2년만에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이대로 일생을 시골에서 취생몽사 할 수는 없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배워야 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지 않는가 그러나 끼니 걱정을 해야 하는 마당에 부모님께 공부 하겠다고는 조르는 것은 철없는 짓이었다. 나의 고민을 눈치채신 부모님이 먼저 이야기를 꺼내셨다.“네 가 하다하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하는 데까지는 힘껏 해보아라.” 아버지는 전에 따놓으셨 던 한약방 허가증을 반납하시고 책을 사주셨다.
꿈같은 일이지만 나도 대학에 가고 싶었다. 어엿한 대학 배지를 달고 싶었다. 그러나 생계 유지도 급급한 형편인데 대학생이 되기 위해 검정 고시 준비를 한다는 것은 대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보다는 공무원 시험을 쳐서 면서기가 되어 가계를 돕는 것이 부모님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되었다. 말이 독학이지 막상 착수하고 보니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벌써 고등학교에 다니는데 뒤늦게 공사장에서 일을 해가며 공부하는 것이 무모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뒤지지 않기 위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웠다. 영양실조로 쓰러지기도 했고, 피곤이 쌓여 코피를 쏟기도 했지만 용케도 견디어냈다.
한번은 공사장에서 지게를 진 채 단어를 외우며 일을 하다가 널빤지 위의 큰 못에 발을 찔려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정신없이 못을 빼고 발을 감싸쥐었는데 벌써 피가 신발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공사장 현장감독이 뛰어와 내의를 찢어 상처를 싸매고 시골병원으로 데려갔다 말의 상처도 컸지만 온몸의 타박상은 더 심했다. 죽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 일로 인해 나는 한 달을 누워 있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와 몸이 저리도록 차가운 방에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넌 왜 유복한 환경에서 공부하지 못하느냐, 그래 공부가 네 목숨을 걸만큼 중요한 거냐, 무엇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느냐, 이게 무슨 분수 넘치는 짓이냐, 쓰라린 자기 비하와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원망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내 손에는 책이 잡혀 있었다.
너무나 추워 화로를 껴안은 채 책을 보다 잠든 일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온몬이 후끈후끈할 정도로 따뜻해서 잠을 깼다. 뒤집어쓴 이불에 불이 붙어 조금씩 타들어오고 있었다. 불이야! 소리 지르며 뛰쳐나와 타 죽는 것은 면했지만 불을 끄고 나니 방이 온통 엉망이었다. 방 한구석에는 아버지가 한약방 허가증을 반납하여 사주신 책이 물에 젖은 채 나뒹굴고 있었다.
이렇게 사연 많은 독학을 시작한 지 2년만에 나는 중․고등 과정을 마칠 수 있었다, 1966년, 만 18세 되던 해 봄이었다. 이제는 어엿한 공무원이 되어 펜대를 잡나보다 하고 흐믓한 생각으로 군청에 가서 공무원 시험 일자를 알아보니 만 20세가 되어야 응시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닌가. 하늘이 노랬다. 지방 공무원이 되어 이 고생을 벗어날 수 있고, 부모님께 도리를 할 수도 있다는 소박한 꿈마저 산산조각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제는 또 무엇을 해야 하나. 2년을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 나는 좀더 눈을 크게 뜨고 이 세상을 보고 싶어졌다. 차라리 더 어려운 시험을 찾아보자. 무모한 생각인 줄은 알았지만 그때까지의 체험으로 열심히 하면 무언가 손에 잡힐 거라는 믿음이 생겼다.
신문에서 본 기억으로 이웃 마을에 사는 대학 출신인 현에게 가서 고시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형은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쓸 데 없는 생각은 집어치우고 열심히 일을 해서 고생이나 면해보라고 나를 타일렀다. 여러모로 생각한 끝에 고시 계통 잡지사에 문의를 해 보았다.고등고시에 대해 상세히 안내된 답장이 왔다. 당시에는 학력 제한이 있어서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해야만 사범시험이나 행정고시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 독학자는 사범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을 치러야 했다. 시험과목은 국어 ․국사․영어․정치학․문화사․철학개론․법학개론․경제원론․자연과학개론 등 도합 10과목이었다.
- 첫 번 도전으로 고등고시 예비시험에 합격하다
고등고시 예비시험을 준비하겠다고 하니 부모님은 펄쩍 뛰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며….주위에서는 중학교도 못 간 애가 공부에 미쳤나보다, 괜히 젊은애 하나 버렸다고 쑤군거렸다. 그러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기쁜 소식이 날 찾아왔다. 아버지께서 한약방을 하실 때 사정이 어려운 손님에게 무료로 약을 지어준 젓이 있는데 이를 감사하게 여긴 그분이 내 어려운 사정을 듣고 친척 되는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느 아주머니께서 날 만나자고 하셨다. 나는 그 댁에 머물면서 난생 처음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고시 응시티켓을 따느냐, 미친놈 소리를 듣고 물러서느냐의 한판이었다. 약 9개월간 피나는 노력을 했다.
1966년 11월 말 드디어 첫 번의 도전으로 제7회 사범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당당히 합격했다. 그것은 나의 보람인 동시에 부모님의 기쁨이었고, 나를 대신해 가계를 꾸린 동생 화영, 화숙의 고생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리고 도와주신 아주머니의 은혜에 대한 조그마한 보답이었다. 나의 합격이 믿어지지 않았던지 동네 유지 한분이 응시표를 확인하고 나서 기뻐하시는 것도 보았다.
합격이 확인되자 갑자기 주위의 시선이 달라졌다. 나는 차츰 자만심에 빠졌으며 곧 고시에 합격할 것 같은 착각에 들떠 있었다. 뚜렸한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오직 승부 기질 하나만으로 합격했다는데 문제가 있었다. 지나친 자만심은 자신을 게으름과 방종의 구렁으로 몰아넣었다. 예전처럼 일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고시에 대한 방향도 제대로 잡지 못한 채 세월만 허송하다가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 그때 허비된 시간들은 나에게 내면적 성숙이 따르지 않은 외면적 성공이란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여실이 보여주었다는 의미에서 차라리 값진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
- 군 생활을 마치고 다시 생활전선에 나서다
군에 입대하자 나는 철없던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단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로소 나의 시야가 얼마나 좁았던가를 느꼈다. 자신의 내적 충실을 이룬 후에 눈을 뜨고 큰 것을 보자, 내실 없는 외적 화려함은 사상누각이 아닌가? 이제 제대 후 자력으로 공부할 수 있는 학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더 이상 남의 신세를 질 수는 없었다. 숙고 끝에 월남에 지원하기로 했다. 백 만 부대 30연대에 배속되어 20개월간 수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기적적으로 살아난 것도 여러 번이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의 체험은 어떠한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력과 인내심, 그리고 살아 숨쉬는 것만으로도 신에게 감사할 수 있는 겸허함을 가르쳐주었다.
1972년 여름, 월남에서 돌아왔을 때 내 손에는 제대 후 2년 정도는 공부할 수 있는 약 30만원이란 돈이 쥐어져 있었다. 고향에 돌아오자 나는 너무나 엄청난 현실에 망연자실해야 했다. 고향에 돌아오자 나는 너무나 엄청난 현실에 망연자실해야 했다. 1972년 8월 중순, 충주 지방 일대에 가옥과 농경지를 휩쓴 큰 물난리가 나서 당시 충주 달천에 이사해 있던 우리 집은 가재도구 하나 건지지 못하고, 실의에 빠진 가족들은 탈진한 상태에서 무작정 상경을 하고 난 뒤였다. 제대하고 착실히 공부 하리라던 꿈은 산산조각이 났고 이미 학자금은 내 몫이 될 수가 없었다. 고생하는 부모 형제를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한 가닥 희망의 여지도 없이 제대를 하고 사회에 나왔을 때, 그 절망감은 스물 일곱 살인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제대 후 얼마 있지 않아 국가고시에 학력철폐라는 대 개혁이 있었다. 독학자들에게는 일대 복음 같은 이 학력 제한 철폐가 나에게는 현실적인 불이익으로 다가왔다. 어렵게 따낸 나의 예시 합격증이 휴지가 되는 순간 나는 단지 국졸에 불과한 원위치로 돌아오고 만 것이었다.
남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하여 자리를 잡았을 27세에 이제는 무든 것이 쓸모 없게 되었구나 하는 심경에서 자포자기가 되어 방향감각을 잃고 있었다. 어떠한 일도 안중에 없다는 듯 그저 우직하게 일만 해댔다. 방 한 칸 전세 낼 돈이 없어 사 글 셋 방을 전전하며 그날 그날의 호구도 어려운 부모 형제를 보면서 한없이 슬픔에 잠겼다 . 추운 겨울에 밤을 지새우고 돌아갈 때에는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도 서러워 별을 보며 울었다. 이렇게 흘린 눈물은 어느덧 기뻐도 슬퍼도 울지 않는 딱딱한 사감으로 자신을 단련시켜가고 있었다. ‘나는 울지 않는다. 결코 울지 않는다. 언제인가 기뻐할 수 있는 그날이 오면 그날을 위해 눈물이라도저축해두어야지.’ 이러한 생활이 계속되면서 또다시 나에게는 생명의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옛날에 그 고통 속에서도 책을 잡았던 자신이 아닌가? 한때 나를 붙잡아 세웠던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일을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서서히 솟아올랐다. 곰팡내 나는 음지를 비칠 수 있다면 비록 작은 빛이라 할지라도 불행한 이들에게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배웠다. 이 체험을 동한 확고한 신념은 그 뒤 역경 속에서도 나를 지탱시켜주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 낮에는 아파트 공사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면 나는 내 자신의 육체와 끈질기고 외로운 싸움을 했다. 솜방망이처럼 풀어진 온몸이 정신집중을 방해하였지만 절대로 굴복할 수 없었다. 공부의 성과보다도 그 어려움 속에서도 나의 정신자세가 다시 확고해질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값진 시기였다.
- 누님의 도움으로 사시준비에 돌입
이렇게 기약 없는 생활이 계속되고 있을 때 부산 주님에게서 소식이 왔다. 만사제치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나의 고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그 뜻이었다. 누님은 중학 2학년을 중퇴한 형을 부산으로 데려가 중학교에 복교시키고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켜주었다. 호영 형님은 이것을 토대로 자신의 길을 개척 , 감리교 신학대학과 동 대학원을 거쳐 현재 구로구 시흥동에 있는 지혜감리교회 목사로 봉직하고 있다. 고생하는 가족들을 두고 혼자 떠나는 것이 마음 아팠지만 뒷일을 동생들에게 부탁하고 부산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부모님께서는 네가 다시 공부를 하게 되니 죄를 벗는 것 같다며 오히려 기뻐하셨다. 누님 댁에 기숙하며 독서실에 나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누님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조차 모르는데 능률이 오를 리 만무했다. 나의 심정을 알고 누님은 무리를 해서 고시 준비 생들의 하숙인 부산법우회관으로 보내주셨다. 당시 법우회관에는 부산․경남 일대의 쟁쟁한 고시 생들이 포진하고 있어서 그들과 접하면서 처음으로 주먹구구식 공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어려운 처지를 안 그곳 원장님은 하숙비를 면제해주는 온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동생들에게 맡긴 채 떠나온 죄책감, 책값․잡비 들 일체의 보조지원을 약속하셨던 누님의 파간이 겹치게 되었다. 원장님의 크나크신 후의에도 불고하고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제 21회 사시에서는 1차에도 낙방하고 제22회에는 겨우 1차에만 합격하였으나 정든 법우회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법우회관 생활 중 파산한 누님을 대신해서 형을 돕겠다며 원양 어선을 타고 외국에 나가는 등 애써주던 동생 화영은 진한 형제애를 느끼게 해준 동생이었다.
- 공무원 고시학원 강사 생활
어느 조그만 암자에서 잡일을 해주며 쉬고 있을 때 법우회관 원장님으로부터 새로 부산고시학원에서 강사로 일해보면 어떻겠느냐는 전갈이 왔다. 나 자신 스승에게서 배워본 적이 없는 처지에 공무원 시험준비생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부족한 실력은 열성으로 극복하리라 마음먹고 강사생활을 시작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내일을 위해 공부하는 학생들을 보니 새삼 용기가 솟았다. 나보다 더 불우한 청소년들이 많은데 내가 좌절해서는 안될 일이었다.
학생들과 생활하는 가운데 이들에게 하나의 좌표를 제시해주어야만 한다는 사명감이 서서히 불타올랐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로만 가르치는 용기를 주었다. 집을 옮길 때마다 이삿짐을 날라다주던 학생들의 성의와, 수강을 마치고 난 후에도 개인적으로 찾아주던 정은 지금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제22회 사시 2차에 떨어진 거는 그래도 좋았는데 23회는 1차에마저 간발의 차이로 패배하는 쓰라린 상처를 남길 줄이야!
1차 시험에서의 패배, 그것은 일년간의 피땀어린 노력을 물거품처럼 만들어버렸다. 실해에는 이유가 있을 수 없다. 또 변명을 해서도 안된다. 시험에 떨어질 때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괴로워했던 일이 어디 한두번이랴만 그때의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이 광활한 대지 위에 다시 홀로 서게 된 나! 승리의 기쁨을 찾기보다 패배의 괴로움을 피하기 위해서 싸움에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을 뼈아프게 느끼게 해준계기였다. 나는 이겨야 한다. 그리고 이길 수 있다,
- 본격적으로 고시와 대결한다.
조용히 아무도 몰래 부산을 떠나기로 했다. ‘고시여! 그대는 얼마나 많은 젊은 가슴에 한과 눈물을 한긴 채 살과 뼈를 깎게 했던고, 이제 그대와의 일대일의 대결에서 기필코 그대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 나의 콧대를 꺾어 나의 응어리진 설움을 꼭 풀고말리라.’ 부산을 떠나며 꼭 합격해서 도와주신 분들에게 사죄하리라 마음먹었다. 서른네살 노총각의 비애를 아무도 모르리라. 시험준비 자체뿐만 아니라 합격․불합격에 대한 기대와 예측으로 빚어지는 인간적 갈등과 좌절이 극복의 드라마를 당해보지 않고는 누군들 쉬이 짐작이나 한 수 있겠는가? 무작정 내가 도착한 곡은 통도사 S암이었다. 앞길에 방향이 설 리 만무했지만 어떻게든 2년 후면 꼭 합격하겠노라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아무도 모르게 부산을 떠나버리자 몇 개월 후 나의 주소를 수소문하신 누님이 찾아오셨다. 더 이상 고생하는 누님께 짐을 지워드리기 싫어 몰래 떠나온건데….
이젠 딴 일에 매달리지 않고 오직 공부에만 몰두할 수 있게 해줄테니 운명을 걸고 한번 더 해보라는 것이었다. 가세가 기울어진 누님이었지만 동생에게 거는 눈물겨운 마지막 열의였다. 마음이 아팠으나 합격 후 갚아드리기로 하고 꾹 참았다. 오랜 세월만에 처음으로 공부에 전념 할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진 셈이다 피나는 노력을 했다. 한여름의 대나무 죽순처럼 실력이 죽죽 느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인생사는 마음먹는 대로되는 것이 아닌지 통도사에 온지 몇 개월 못되어 묘한 인연으로 본사 박물관에 근무하는 J양을 만나게 되었다. 오랜 떠돌이 생활 속에 메말라버린 심신에 J양과의 만남은 횟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었고, 네 24회 시험을 불과 3개월 앞둔 중요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는 향하는 마음을 정지시킬수가 없었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합격하기 전에는 절대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고 다짐 하시던 누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온갖 정성을 다해 뒷바라지를 해주시는 데 아가씨와 연애를 하다니 아무래도 용납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해도 J양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좋다. 내 분명히 다 성공해 보이겠다. 어쨌든 약속한 2년 안에 합격하면 되는 것이 아니가. 잠을 줄였다. 1시간 만나면 1시간 덜 잤다. 긴장 덕분으로 24회 1차에는 아주 좋은 성적으로 합격하였지만 2차에는 민사소송법 과락으로 불합격되고 말았다. 원래의 목표가 25회 합격이었기에 큰 충격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2차 시험의 성적은 나를 고무하시에 충분했다. 그러나 은근히 합격을 기대하셨던 누님은 더 이상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을 정도로 지치셨고, 더욱이 자기 말을 듣지 않고 연애를 해서 떨어졌다는 누님의 노여움은 풀릴 줄 몰랐다. 연애를 안했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텐데….변명이 통할 리 없었다. 또다시 모르는 곳으로 떠날 계획을 은밀히 세웠다. 이러한 나의 표정을 눈치챈 J양이 밤새워 자신의 부모님을 설득시켰는지 어느 날 갑자기 J양의 부모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마을로 내려가니 학자금 지원을 해주시겠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절했다. 어려우신 그분들에게 폐를 끼쳐 드리기도 죄스러웠지만 이제 고지 가까이 와 있는데 마지막에 여자 쪽 도움을 받는다는 것이 싫었다. 몇 번 강력하게 거절하는 의사표시를 했지만 결국에는 고사하기 몇번만에 그분들의 진심에 설득되고 말았다. 이제 J양의 부모님께서 생활의 이모조모를 자상하게 보살펴주셨고 J양의 진실 된 마음은 재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주었다. 누님의 노여움도 차츰 풀리셨기에 더욱 공부에 박차를 가했다. 이제껏 산발적으로 쌓였던 실력이 차곡차곡 정리되는 것 같았다.
- 팔전구기로 사법시험에 합격
1983년 여름, 서울에서 나흘간 제 25회 2차 시험을 치렀다. 이상하게 마음이 평온했다. 마지 막 도전이리 생각하고 최선을 다했기에 아쉬움은 없었다. 2차 시험 발표 날이 가까워 올수록 된다는 생각만을 하기로 했다. 떨어진다는 것은 상상조차 두려웠기 때문이다. 오후에 합격소식을 들었다. 칠전팔기가 아닌 팔전구기의 순간이었다. 지나온 20여 성상을 되돌아보며 그 발자국 하나하나에 눈물은 줄줄이 뺨을 타고 흘렀다. 부모님께 마지막 도리를 다했다는 기쁨, 누님․동생들에게 정신적이나마 해방감을 드렸다는 안도감이 생겼다. 도와주신 부들에게 비로소 죄를 벗었다는 느낌이었다. 2차 발표 후 3차 시험까지는 상당히 지루했다. 기다리던 때의 초조감에 비해 3차 시험은 비교적 무난했던 거 같다. 3차 발표날은 공교롭게도 35번째로 맞는 내 생일이었기 때문에 다시 태어난다는 기분으로 최종 합격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합격 후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고, 몸은 피로에 지쳐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은 뿌듯했다. 오랜 세월 헤어져 있던 가족들이 10여년만에 다시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지나온 파란 만장의 역사를 청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글을 맺으며
고시에 있어 ‘하면 된다’는 신념은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문제는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느냐에 있다. 고시 자체, 아니, 합격의 영광에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무슨 일에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집념, 소기의 목표에 도전해서 뜻을 이루었다는 성취감 그 자체에 고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현재의 어려운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굳센 전진을 계속할 때 승리는 반드시 자신의 것이 되리라 믿는다. 인간적인 최선 앞에 신인들 외면할 수 있겠는가? 이제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겸허한 자세로 성실하게 사는 길만이 오늘이 있게 해주신 여러분께 보답하는 길임을 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분 외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이 많다. 20회 1차 실패 후 방황하던 때 거제도로 안내해주신 H형, K형, 행정고시를 중단하면서 고시 잡지 50여권을 몽땅 넘겨준 K형, 통도사 생활 중 친절을 다하신 H형 그리고 법우회관, 암자 등지에서 고락을 같이하던 고시 동지들, 특히 절친했던 C, P, L, N 형들께 감사드리며 빨리 그분들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시기를 빈다 이 많은 분들이 나에게 베풀어주신 온정에 나는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감사하고 싶다. 그리고 어려운 처지에도 꿈을 버리지 않는 많은 젊은이에게 힘찬 격려를 보낸다. 지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굳세게 도전하는 그들의 불굴의 의지에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빈다. 나와 같은 불우한 이웃을 위하여 무언가 보탬이 될 수 있는 길에 최선을 다할 때 고시합격이 결코 출세의 길이 아닌 진정 봉사의 길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 이 글을 읽으면서 이민영 선배는 현재까지 세인들의 입에 회자될만큼 많은 것을 이루고 총동문회에서 감사패를 받는 입장이고 필자는 젊은 날에 이루지 못한 그런 모습을 등뒤로 하고 이제 여생을 걸고 도전장을 내는 의미에서 첫 자전적 문집을 들고 총동문회에 참가했던 날이다.
(좌측 첫번째까 필자 문숭리... 바로 위 기수 선배들과 더불어 / 같은 마을이 고향이다)
이미 살아서 그 꿈을 다 이루기에는 많은 과정이 필자앞에 놓여있다. 살아서 세인인들에게 인정과 평판을 기대하려 했던 것이 아닌만큼 사후에 내가 남기고자 한 단 한편의 농민소설 -대통령의 아들-을 위한 타산지석으로 이 글을 내 마음에 되새겨 본다.
2009. 8.18. 내 고향 충청도 충주에서(김대중 제15대 대통령이 서거하던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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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상 일이 억지로 맹글아 지는 거시 아닝깨... 변호사는 낫고 보부상은 낮고가 아니라.. 시방까지 얼매나 재미나개 살았고 앞으로도 얼매나 재미나개 이웃들 허고 어울리서 사느냐가 중헌거것제... ^^
물론 입신양명이 다 자신의 영화를 위한 것이지만 그러다가 조금은 이웃을 돌아볼 수만 있다면 좋은 일이지요. 이 글에 나오는 사람은 권영길 정도는 아니지만 창원에서는 많은 명성과 좋은 일을 한다고 전설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귀가 아프게 듣던 사람인데 이번에 직접 만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