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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19일 연중 6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창세 8,6-13.20-22
복 음 : 마르 8,22-26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은 22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23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 말씀하셨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베사이다, 복음서 서두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지명입니다.
바로 처음 부르심을 받은 사도들,
베드로와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의 고향입니다.
‘어부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에서 사도들은
사람 낚는 어부로 세상에 파견됩니다.
그런데 이 사도들의 마을에 눈먼 이가 있습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사도들의 고향을 눈멂이 다스리고 있다고,
“눈먼 이”(마르 8,22)는 사도들의 마을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이라고 풀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쳐 주시기 전에 먼저 마을 밖으로 나가십니다.
눈멂이 지재하는 마을에서 그를 떼 내시는 것입니다.
그가 똑똑히 보게 된 뒤에 그를 집으로 보내시면서도
마을로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집이 마을 안에 있는데도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려면 그때까지 몸담고 있던 어둠의 세계를 떠나야 하고,
다시는 그 어둠의 세계로 들어가지 말아야 함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기적과 치유 방식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다양합니다.
직접 만나시지도 않고 먼 곳에서 말씀 한마디로 간청하는 이의 신앙을 시험하신 뒤,
본인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또는 나인의 과부에게 하신 것처럼 요청 없이 기적을 행하십니다.
대부분의 기적은 한 번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치유가 단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회개와 새롭게 태어남도 바오로 사도처럼
한순간의 강력한 체험으로 이루어지는가 하면
더 많은 경우에는 단계적으로 계속해서 이루어집니다.
점차 어둠에서 멀어져 빛으로 다가가는 여정인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중국 고전 서적인 이담속찬(耳談續纂)에 등장하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삼세시습 지우팔십(三歲之習至于八十),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입니다.
지금이야 기대 수명이 80을 훨씬 넘었지만, 그 옛날에 80까지 산다는 것은
거의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프로에 나올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만큼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바뀌지 않을까요?
뇌과학자의 말에 의하면,
우리 뇌는 새로운 습관을 형성하고 새로운 기술을 배우며
심지어 우리의 사고방식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합니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데, 스스로 할 수 없다는
단정을 지으면서 바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캐럴 드웩은 마음을
고착형 마인드셋과 성장형 마인드셋으로 구분합니다.
그는 어느 정도의 지능, 성격, 윤리관을 가진 사람이라면
원하는 바를 충분히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 어떤 마인드셋을 가져야 할까요?
답을 구하기 힘든 어려운 문제에 고착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역시 나는 이런 문제를 풀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않아.’라는 마음을 갖고,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아직 문제를 풀지 못했네.’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성장형 마인드셋을 가져야 합니다. ‘아직’의 힘을 믿어야 합니다.
충분히 변화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너무 쉽게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아직’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한다면
나를 통해 하느님의 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벳사이다에서 눈먼 이를 고쳐 달라는 청을 받습니다. 그
런데 두 번에 걸쳐서 낫게 하십니다.
먼저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신 다음,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을 볼 때, 완전하게 회복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십니다. 그러자 똑똑히 보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 역시 이와 같지 않을까요?
처음부터 주님의 뜻을 선명하게 아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냥 어렴풋이 짐작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길에 계속 맡기면서 선명하게 주님의 뜻을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성장형 마인드셋의 모습입니다.
‘아직’은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이지만,
분명히 계속해서 주님 뜻에 다가서면서 주님과 일치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완성됨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뚜렷이 볼 수 있도록 계속해서 성장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는 ‘눈먼 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눈먼 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눈이 감겨 보지 못하는 이뿐만 아니라, 눈이 열려 있어도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이,
곧 어둠에 덮여 빛을 보지 못하는 이를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장미꽃의 아름다움을 보지 못하고서 가시로 찔러 상처를 주는 것으로 알며,
불이 주변을 환히 밝혀줌을 보지 못하고서 태워 상처 입히는 것으로만 아는 것과 같습니다.
곧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온 구원을 보지 못하는 이입니다.
이처럼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요한 1,5),
자신의 어둠에 갇혀 그 빛을 보지 못하는 이가 바로 ‘눈먼 이’입니다.
곧 진리이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가 바로 ‘눈먼 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무엇이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일까요?
어제 복음인 앞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느냐?
~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느냐?”(마르 8,18)하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하게 시력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포함합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세 개의 눈’을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는 ‘육안’, 속을 들여다보는 보는 ‘심안’(마음의 눈),
그리고 복음의 빛으로 보는 신앙의 눈인 ‘영안’(영의 눈) 입니다.
우리는 신앙이 깊어가면서 ‘영의 눈’이 밝아져 갑니다.
이는 <시편>에서 “당신 빛으로 빛을 보옵니다.”(시 35,10)라고 노래하고 있듯이,
‘성령의 인도로 하느님의 신비를 보는 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먼 이의 두 눈에 ‘당신의 침’을 바르십니다.
이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신 이야기’(마르 7,31-37)에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혀에 대신 것처럼(마르 7,34),
‘영의 도유’를 통해 치유된 눈을 말해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혹 사람들만 보이나요?
이제는 ‘육안’으로 사람의 형상만 보지 말고,
‘심안’으로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보고,
‘영안’으로 그 사람 안에서 구원을 펼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두 눈에 ‘당신 손’을 얹어주시기를 청해야 할 일입니다.
주님,
겉 형상의 사람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아픈 마음을 헤아려 볼 줄 알게 하소서.
나아가, 그 사람 안에 구원을 펼치시는 당신의 현존을 볼 수 있게 하소서.
풀 한 포기에서도 당신의 능력을 보게 하시고, 베푸신 자비를 보는 눈을 열어 주소서.
지금 우리가 살아있는 바로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제 행복은 오직 당신을 뵙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무엇이 보이느냐?”(마르 8,23)
주님!
제 눈이 상처를 볼 뿐,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을 보지 못했습니다.
빛이 어둠을 들통 내도 어둠을 볼 뿐,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오니, 이제는 겉 형상만 보지 말고, 그 안에 펼쳐지는 구원을 보게 하소서.
당신의 빛으로 제 눈이 밝아지게 하소서.
당신의 영으로 제 영혼을 도유하소서.
바로 지금 이 자리에 함께 계시는 당신 뵙겠나이다. 아멘.
영의 눈을 떠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눈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권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는 물음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혜안(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그러나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떤 이는 장미꽃을 보면서도 장미꽃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한 채, 가시만 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 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 보아라”(루카11,34-35).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일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지만
자기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눈먼 사람입니다.
지식이나 재물도 꼭 필요한 때 쓰지 못한다면 눈먼 이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눈먼 이가 다니면서 제일 많이 부딪친 것이 무엇일까?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권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똑똑히 보기 위해서는 한두 번으로 안 됩니다.
반복과 훈련이 필요하고 서서히 알아보게 되고 깨치게 됩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 것에 눈이 멀면 결코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보게 되었으면 어두운 과거의 마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신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 앞에서 그를 치유해 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23b).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가짐과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이다.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품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한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 점차로 이루어진다.
눈을 가지고 있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갖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빛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설날에 반가운 메일을 받았습니다. 잠시 메일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신부님.
육군 장교로서의 직업군인 생활을 정리하고 2018년 신학교에 입학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제가 다음 주 2025년 2월 6일 목요일 오후 2시, 명동성당에서 부제 서품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기 전 성소에 대한 고민을 지니고 있을 때,
성소 국장 신부님께서 성소국 홈페이지에 올려주는 오늘의 묵상 말씀이
직업군인으로서의 군 복무 생활을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쁘게 생활하는데 큰 도움이 되곤 하였습니다.
성소국 홈페이지에 상담 글을 남기면 답변도 주시며 휴가 내어 종종 성소국에 방문하면
차 한 잔 주시면서 상담해 주시던 국장 신부님,
그리고 예비신학교에서도 함께 용기에 불어 넣어 주시던 가브리엘 신부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제 인생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주심과 동시에 거룩한 부르심에 대한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해주셨던 신부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곧 부제 서품을 받게 되면 성직자가 되는데
더욱 기쁜 마음으로 직무에 충실하고, 사제직을 향해 더욱 기쁘게 나아가겠습니다.
신부님께서 지금 미국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사목하시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먼 곳에서 늘 건강과 기쁨, 은총 가득해지시길 기도드리며
저도 더욱 기쁘게 정진하고 있겠습니다.
한국은 설날이네요! 2025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부족한 제가 젊은 군인에게는 ‘마른 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컴퓨터에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작동이 잘되지 않듯이
하느님을 닮은 사람에게도 ‘사탄’이라는 바이러스가 들어왔습니다.
그 바이러스는 하느님을 닮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전쟁과 폭력으로 하느님이 창조한 세상을 파괴하고, 타락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물의 심판’으로 병든 세상을, 타락한 세상을 다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도록 하셨고 물의 심판이 끝난 후에
하느님께서는 노아에게 새로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40일 동안 방주에 있던 노아는 넓은 세상이 그리웠습니다.
40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방주의 뚜껑을 열고 까마귀를 날려 보냈습니다.
까마귀는 물밖에 없는 곳을 한참이나 날다가 돌아왔습니다.
노아는 이번에는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비둘기는 올리브 잎을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노아는 이제 물이 빠지고 땅이 조금씩 드러난 것을 알았습니다.
노아는 다시 비둘기를 날려 보냈고,
비둘기는 이제 마른 땅에 머물며 배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에게 마른 땅은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심판하는 방법을 포기하셨습니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박탈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에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방법을 찾으셨습니다.
그것은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외아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거룩함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세상을 말씀하셨습니다.
전쟁, 폭력, 정복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닌
나눔, 희생, 사랑으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성공, 명예, 권력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이 아닌
자비, 인내, 희생으로 이루어지는 행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인간의 죄와 인간의 잘못 때문에 세상을 심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가 밀을 뽑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밀과 가라지는 품종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가라지의 모습일지라도 뉘우치고 회개하면 밀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밀의 모습일지라도 악의 유혹에 빠지면 가라지가 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옹기장이와 진흙’의 비유를 이야기합니다.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은 무엇이 될지 모릅니다.
다만 옹기장이의 뜻에 따라서 화병도 되고, 그릇도 됩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화병이든, 그릇이든 쓰임새에 맞게 사용되면 됩니다.
주어진 나의 삶에 감사한다면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고, 소경은 이제 새로운 세상을 보았습니다.
욕망과 교만으로 닫혀있는 우리의 눈을 순명과 겸손으로 새롭게 뜰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해 주시는 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다가오는 사순시기, 예수님께서 몸소 겪으셨던
수난과 십자가 죽음의 신비에 대한 깊이 있는 묵상으로
우리를 안내할 따끈따끈한 영적 독서책이 막 도착했습니다.
제목이 특별합니다. ‘나를 구하시지 않는 하느님’(로널드 롤 하이저 著, 생활성서)입니다.
로널드 롤 하이저 신부님은 오블라티 선교 수도회 소속이시며,
헨리 나우웬 신부님 이후 대표적인 가톨릭 영성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영성가이십니다.
고통과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성숙하고도 친절한 안내가 돋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의 고통을 면제하시지 않은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의 고통을 면제해 주시지 않는답니다.
너무나 신박한 표현들 앞에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구조해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굴욕과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려 개입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일이 벌어진 후에 굴욕, 고통, 죽음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병에 대한 면역을 만들어 주시고
죽음을 피하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며
고통을 감내할 힘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일은 우리 삶의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입니다.
우리는 삶의 여정에서 다른 모든 이가 겪는 굴욕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똑같이 겪을 것입니다.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은
구조하시는 하느님 아니라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보여 줍니다.”
부끄럽게도 우리 한국 교회 안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예수님 인류 구원 사업의 정점인 골고타 언덕으로 올라가는
고통스런 여정은 생략하고 싶습니다.
그저 현세의 지속적인 축복과 끝도 없는 치유,
나와 내 가족만의 안녕만을 갈구하는 미성숙한 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사회 현실은 외면한 채 고상함과 경건함, 신비함과 달콤함만을 추구하는
‘값싼 신앙’의 천박한 그림자가 남아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승승장구와 만수무강만 추구하는 싸구려 신앙을 거부해야겠습니다.
고통과 십자가 없는 구원은 기대조차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의 분위기나 가르침은 조금 밋밋해 보입니다.
가톨릭 교리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통상적이어서 그렇습니다.
이성적이고 평범한 것이어서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실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모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단박에 뒤집힐 것이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우리 눈앞에 신천지가 나타날 것이라고 사기 치지 않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끔찍한 병고 즉시 치유시켜 주겠노라고 과장하지 않습니다.
목돈을 갖고 오라고 협박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 가톨릭교회는 고통스럽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도
너그러운 마음을 지니자고 초대합니다.
기도 속에 주님의 뜻을 찾아보자고 안내합니다.
호의적이지 않은 이 현실,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자고 가르칩니다.
천천히 가자고, 인간의 때가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자고 권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눈먼 이를 치유하십니다.
그 과정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를 군중 사이에서 따로 불러내십니다.
세상 다정하게 그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접촉과 함께 그의 장애를 풀어주십니다.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손을 얹으십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을 펼쳐 안수를 해주십니다.
“무엇이 보이느냐?” 등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치유 받은 사람 입장에서 묵상해 보니 얼마나 은혜롭고 축복된 순간이었는지.
놀랍게도 주님께서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될 일인데,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가십니다.
가는 길에 이것 저것 물어봐 주십니다.
이름이 뭐냐? 어디 사는가?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그간 살아오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예수님의 따뜻함과 자상함에 그의 눈에서는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예수님과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걸어가는 그 짧은 순간,
이미 그는 모든 것을 다 얻었습니다.
깨달았고, 치유 받았습니다.
구원받았고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육체의 치유는 사실 덤이었습니다.
이전으로 돌아가지 마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지난주 금요일 우리는 마르코복음 7장 끝부분 얘기를 들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와 입을 열어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서 고쳐 주십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은 8장의 얘기로 눈먼 이를 눈 뜨게 하시는 얘기인데
오늘은 주님께서 그를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거기서 고쳐 주십니다.
그런데 두 얘기 모두 다른 복음에는 없고 마르코복음에만 있는 얘기이고,
두 얘기 모두 주님께서 그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 은밀히 고쳐주시는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이렇게 주님의 은밀함은 마르코가 좋아하고 강조하는 것인데
두 가지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주님의 은밀한 사랑입니다.
내밀한 사랑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주님의 공적이고 공개적인 사랑도 좋고 필요합니다만
내게는 내밀하고 사적인 사랑이 더 좋고 더 필요합니다.
나만 사랑해주신다는 느낌 말입니다.
이는 아빠가 나만 데리고 가 선물을 사주시며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시는데 아빠가 내게만 이렇게 해주시는 것이 아닌 줄 알면서도
나한테는 이렇게 사랑을 느끼게 해주시는 것이 좋고 필요한 것과 같습니다.
가끔 그런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달이 모든 곳을 비추지만 내 창으로 들어온 달이 아주 특별한 느낌 말입니다.
세종대왕이 지었다고 하는 월인천강지곡이 있고 월천강이라는 말이 있지요.
월인천강(月印千江)은 달은 하나이지만 천 개의 강에 비춘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우리 믿음으로 바꾸면 하느님은 한 분이시고,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마음에 각기 달리 각인됩니다.
주님의 은밀함은 둘째로 감추심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의 신성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시는 것입니다.
낮추심과 겸손하심의 뜻이 있고,
우리와 같아지심의 뜻도 있으며,
낮추시어 우리와 같아지시는 겸손한 사랑의 뜻이 있습니다.
이렇게 마을 밖으로까지 데리고 나가 밀애를 나눈 다음,
주님께서는 눈먼 이에게 마을로 돌아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을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떠벌이지 말라는 뜻도 있지만,
제 생각에 이전 생활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을 겁니다.
주님 사랑에 의해 신적인 사랑에 눈뜬 사람이
이전 인간적 사랑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뜻도 있지 않을까요?
영적인 慧眼을 주시려는 예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예수와 일행을 태운 배가 베싸이다에 도착했다.
베싸이다는 북쪽의 요르단강이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동쪽 호숫가에 위치한 어촌으로서 베드로와 안드레아와 필립보의 고향(요한 1,44)이다.
예수께서는 베싸이다에서 많은 기적을 베풀었지만
이곳 사람들이 회개하지도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가파르나움과 코라진과 함께 불행을 선언 받은 마을이기도 하다.(마태 11,21)
오늘 복음은 이곳 베싸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한 이적사화를 들려준다.
그런데 이 소경치유기적은 어제 복음과 상당한 관련이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기적들 중에 단순한 하나의 기적으로 볼 수 있는 소경치유를
마르코가 굳이 이곳에 배치하였는지 하나씩 짚어보자.
우선 마르코복음을 펼쳐 예수님의
‘물 위를 걸으시고 풍랑을 그치게 하신 기적사화’(6,45-52)를 되살펴 보아야 한다.
이 이야기는 5천 명을 먹인 빵의 기적 직후 예수께서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태워 호수의 북동쪽 베싸이다로 먼저 가게 하신 것으로 시작된다.
그동안 예수께서는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다.
그런데 얼마 후 제자들은 역풍을 만나 배를 젓느라고 심한 고생을 한다.
결국 배는 방향을 잃고 호수 위를 맴돌게 된다.
이를 보신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하시며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쳤던 것이다.
와중에 제자들은 스승을 유령으로 착각하고 비명을 지르며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도 제자들은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그러는 동안에 배가 베싸이다 아닌
호수 북서쪽 겐네사렛 마을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 또한 제자들의 靈的 맹인 상태를 암시하는 것이라 하겠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제자들은 船上에서 스승의 꾸지람을 들었다.
달마누타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배를 타고 떠나야 했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경고의 말씀도 흘려듣고
턱없이 모자라는 빵 걱정을 하고 있었던 제자들이다.
그들에게 스승은 ”너희는 눈이 있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고
귀가 있으면서도 알아듣지 못하느냐?“(8,18)고 질타하셨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을 곁에 두고 일용할 양식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진정 주님을 제대로 볼 수 있는 靈的인 慧眼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오늘 소경의 치유에는 또 한 번 제자들의 영적 맹인 상태를 지적하는
마르코의 편집의도가 담겼다고 하겠다.
맹인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예수께서는 상당히 예외적인 수고를 하신다.
소경의 손을 잡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고 손을 얹으시는(23절) 수고는 다 무엇을 의미하는 거일까?
다른 때 같으면 말씀만으로도 단번에 치유하셨을 그분께서
이런 수고를 하신 후에 ”이제 보이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좀 보이느냐?“(23절)고 물으신 것을 생각해 보라.
치유된 소경에게 ”저 마을(베싸이다)로는 돌아가지 마라“(26절) 하시고
집으로 돌려보내신 이유는 또 무엇일까?
예수께 대한 믿음에 단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단계가 참으로 어려운 과정이라는 말이다.
예수의 말씀과 업적을 놓고 영적인 혜안을 얻는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마을로 가서 開眼을 자랑할 것이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
그 경위를 정리하고 묵상하며 그분께 감사를 드리며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