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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0일 연중 6주간 목요일
제1독서 : 창세 9,1-13
복 음 : 마르 8,27-33
그때에 27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그리고 길에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28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29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31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32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3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살아가면서 우리가 때때로 되새겨야 하는 물음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참조)일 것입니다.
베드로가 내놓은 답은 모든 이에게 공통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교리상의 정답만이 아니라
개인적인 체험과 고백이 담긴 답을 요구하실 것 같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베드로는 출제자가 바라는 정답을 맞히고도 칭찬 대신 말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아마도 그가 “그리스도”(8,29)의 의미까지는 아직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였기에
예수님께서는 그가 당신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섣불리 알리기를 바라시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과연 시험을 멋지게 통과한 바로 다음 순간 베드로는 스승에게서
“사탄”(8,33)이라는 극단적인 꾸지람을 듣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8,33)라는 말씀은
그리스 말 원문을 볼 때 “내 뒤로 가거라.”입니다.
스승에 대한 인간적인 사랑으로 스으의 앞을 가로막은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제자의 자리로 곧 스승의 뒤로 가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할 때 사탄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그분을 닮고자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뿐만 아니라 진짜로 그리스도인이어야 한다.”
라고 강조하고 순교를 향하여 가는 길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도록”
교우들의 기도를 청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인은 삶으로 증언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초등학교 다닐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큰형님께서 일본으로 회사 출장을 갔다가 선물을 사 가지고 오셨습니다.
샤프펜슬이었습니다. 너무나 좋았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모두 연필을 사용할 때였고,
여유 있는 집의 아이들만 샤프펜슬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샤프펜슬을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기분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루 만에 샤프펜슬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분명히 필통 안에 넣었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문득 아침에 내 샤프펜슬이 너무 좋다면서 빌려서 써 본 친구가 생각났습니다.
의심이 가득 생겼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친구만 보게 되었고,
이 친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다 의심스러운 것입니다.
훔쳐서 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고, 의심받지 않기 위해 저런 행동을 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의심은 점점 커졌고, 그 친구에 대한 미움도 커졌습니다.
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틀 후, 문제의 샤프펜슬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책상 서랍 깊숙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찾고 나서도 친구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러웠을까요?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말과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의심, 부정적인 생각은 문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합니다.
주님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이 과연 제대로 알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제대로 알고, 참 진리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정답을 말한 사람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한 베드로였습니다.
이 정답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까지 이야기하시지요.
그러자 베드로가 반박합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그런 수난과 죽음을 겪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지요.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인상적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고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을 부정하게 되면 믿음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의심하고 부정하는 믿음 없는 곳에서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사람의 일로만 생각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믿지 못합니다.
사탄의 길이 아닌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합니다.
진정한 평화와 행복은 바로 주님의 길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신 다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합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은 알았지만,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아들여야 할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직접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마르 8,31-32)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반드시”(Dei) 말과
‘명백히’(행전;담대히,parresia)라는 말을 사용하십니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명백히’(parresia)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피해서도 안 되고,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고 ‘반드시’ 실행해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제시하십니다.
첫째는 ‘많은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곧 한두 번이 아니라 ‘많은 고난’을 겪는 일이요,
그것을 자신을 지키기 위해가 아니라, 타인을 살리기 위해서 겪는 일입니다.
둘째는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는 일’입니다.
곧 배척당하는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는 일’까지도 받아들여, 그것이 진정 사랑임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비록 타인으로 부터 당하는 수동태로 이루어지는 길이지만,
자유로이 흔연히 가는 길입니다.
셋째는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일’입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삶이 되는,
곧 예수님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야 하는 의탁과 믿음의 길입니다.
바로 이 세 가지 일이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실행해야 할 일이요,
또한 그분을 따르는 우리가 ‘반드시’(담대히)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께서 이 길을 실행하고자 하자,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베드로는 왜 예수님이 그 길을 가는 것을 가로막았을까요?
그를 꾸짖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 그 이유가 드러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그렇습니다.
그는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지만,
실제로는 ‘하느님의 일’보다 ‘자신의 일’을 앞세워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자 가시고자 하는 길을 막아섰던 것입니다.
곧 자신의 신변 안전을 도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자신의 신변 안전과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며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가로막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
비록 눈앞에 벌어지는 일이 당혹스럽고 황당하더라도,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그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마르 8,31)
주님!
피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
당신께서 반드시 걸어야 했던 길이기에, 당
신을 따르는 이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길을 기꺼이 걷게 하소서.
비록 한두 번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많은 고난을 겪고,
죽을 때까지 겪는 길일지라도 담대히 걷게 하소서.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흔연히 끌어안고 가게 하소서.
배척받으면서도 배척하지 않는, 죽어 사라지기까지 사랑하는
그 길을 당신과 함께 걷게 하소서. 아멘.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아침에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미사 봉헌을 하고 성체를 모시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을 만큼 잘 살아야 하는 데
돌아보면 후회도 많고, 말씀을 들은 사람인지?
미사를 봉헌하고 성체를 모신 사람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속 좁게 살기도 합니다.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주님을 모신 감사함을
성당 문을 나서기가 무섭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주님의 마음에 드는 일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하고 싶은 일을 하고 나면 영락없이 주님의 마음을 상해드리고 맙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8,5). 그리고
“육 안에 있는 자들은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로마8,8).
그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육적인 욕망을 따르고 있으니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순위에’ 놓고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8,29).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며
‘사람의 아들이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베드로는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8,33). 하는
꾸지람을 듣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반박을 하였습니다.
사실 지금껏 스승을 믿고 따라왔는데
당신이 떠나시면 우리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하는 마음도 있고,
당신이 불행한 길을 가신다는데 어떻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하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지금껏 걸어온 길이 성공적이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계획이 바뀐다면
그것은 스승님에게도 자기들에게도 실패하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스승과 함께 영광을 누리고 싶은데 수모와 배척을 당한다니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제자들 모두가
스승의 깊은 뜻을 아직도 헤아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인간적인 것에 매이는 것, 진리의 길을 가로막는 것이 사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계획인데
그것을 반박하고 그 길을 가시고자 하는 예수님을 방해하였으니,
베드로는 사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 일을 먼저 하려 한다면 우리도 역시 사탄이 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지 않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현실적인 나의 잇속을 챙김으로써 얼마나 자주 사탄이 되고 마는지요.
예수님을 따르려면 희생과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고통 없이 영광 없습니다.
이 시간 쉽고 편한 일, 쾌락을 즐기며 돈 되는 일을 쫓고,
소유와 지배, 명예에 맛 들이고자 하는 마음,
내 생각이 다 인양 남에게 주지시키려는
사탄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참고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인데,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이다.
그리고 ‘메시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뜻이다.
왜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한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애쓰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간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들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시리라 믿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또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다.
그런데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이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다 (손희송주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필립보의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은 당신에 관해서 물으신다.
베싸이다의 소경을 치유하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신앙의 눈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알아보고 계시다.
예수께서는 공생활을 통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기적을 통하여 육체적, 정신적 병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의 나라가 어떻게 실현되고 있는가를 알려주셨으나,
제자들이 당신에 관한 생각이 어떤지를 아시고 고쳐주시려고 하는 것이다.
먼저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신다.
대답은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하나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27절) 하신다.
이때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고백하였다.
예수님은 이 말을 칭찬하신다. 그러나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펄쩍 뛰며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만류한다(32절).
이에 예수께서는 가장 혹독하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고 책망하셨다.
우리는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왔다.
신앙생활을 통하여 내 생활 속에, 내 삶 속에서
예수님은 나에게 어떤 분으로 생각하고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베드로와 같이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있다고 하여도,
베드로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세상의 행복을 위한 정복자로서의 그리스도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당신 스스로 말씀하시듯이
고난을 겪고 십자가라고 하는 어려운 길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시며, 하느님 나라를 완성하시어
모두에게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해주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는지?
그래서 그분의 삶을 본받아 그분을 따르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그분의 십자가는 고통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부활이라는 영광으로 변화되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십자가의 신비 혹은 고통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 십자가와 고통은 항상 영광의 신비로 부활의 신비로 연결됨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에게 있어 주님은 어떤 분이며, 어떤 관계로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항상 그리스도의 신비를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표징(sign)과 상징(symbol)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교통 신호등, 결혼반지, 국기 등은 모두 특정한 의미를 지닌 표징이며,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주셨을까요?
오늘 저는 구약의 무지개와 신약의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와 맺으신 언약과 사랑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창세기의 말씀은
노아의 홍수 이후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신 첫 번째 언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홍수가 끝난 후, 하느님께서는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운다.”라고 말씀하시며
무지개를 그 표징으로 세우셨습니다. 무지개는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그리고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상징입니다.
우리가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사랑과 평화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의 무지개는 하늘에서 바라볼 뿐,
그것을 통해 직접적인 생명의 은총을 받지는 못합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리게 하는 역할을 할 뿐이지, 우리를 변화시키지는 않습니다.
신약에서는 어떤 표징을 통해 하느님의 언약이 완성될까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언약의 표징을 주시는 장면을 듣습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축복하신 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잔을 들어
“이것은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한 기념의 표징이 아니라,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며 새로운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성체성사는 무지개와는 달리, 단순한 눈에 보이는 표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제로 받아들여지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표징입니다.
고인이 된 소설가 최인호는 본당 신부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체가 몹시 고프답니다.” 당시 최인호는 암 투병 중이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최인호에게 성체를 영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성체를 모시면서 우리의 몸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감실(龕室)’이 됩니다.
우리는 최초의 감실이었던 성모님처럼 순명과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하느님과 노아입니다.
표징의 형태는 하늘에 나타나는 무지개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홍수로 멸망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자연 현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주체는 예수님과 모든 인류입니다.
언약의 형태는 빵과 포도주입니다.
언약의 성격은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언약의 방식은 미사를 통해서 지속해서 이루어집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외적인 표징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내적인 은총의 표징입니다.
무지개는 인간이 바라보기만 하는 것이지만,
성체성사는 우리가 직접 받아 모시며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우리는 무지개를 볼 때마다 하느님의 약속을 떠올립니다.
우리는 성체를 모실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을 묵상하며
성체성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무지개는 하느님의 언약을 기억하게 하는 표징이라면,
성체성사는 하느님의 언약을 우리 삶 속에서 실현하는 표징입니다.
우리가 미사에서 성체를 받아 모실 때, 그것이 단순한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실제적인 하느님의 은총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에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듣고 크게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맡긴다고 말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신앙고백을,
삶을 통해서 실천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고난의 잔, 십자가, 나눔, 희생을 통한 신앙고백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이야기하십니다.
“너의 신앙고백을 너의 삶을 통해서 드러내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너의 신앙고백은 참된 신앙고백이 아니다.”
참된 신앙인은 십자가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주님께서 늘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바오로 사도의 극적인 삶의 전환에 대한 묵상도 은혜롭지만,
수제자 베드로 사도의 신앙 여정에 대한 묵상도 참으로 풍요롭습니다.
어찌 보면 베드로 사도는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는
오늘 우리의 모습을 대변하는 듯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나약하고 흔들리는 모습은 꼭 저를 보는 느낌입니다.
어찌 그리 저와 빼닮았는지 모릅니다.
정말 제대로 된 제자로 한번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그래서 결심하고, 시작은 잘하는데, 뒷받침이 그렇게 안 됩니다.
머리로는 분명히 될 것 같은데, 삶이 받쳐주지를 못합니다.
첫출발 때 목숨이라도 바칠 것 같이 달려들던 그 열렬한 마음,
예수님을 향해 활활 타오르던 그 불같은 열정, 순수한 신앙,
그런 초심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는데...
생각뿐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일단 용감히 따라나서기는 했지만,
워낙 신앙의 기반이 약하다 보니, 의지력이 부족하다 보니,
뱁새가 황새 쫓아가는 분위기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 수제자 직분까지 맡다 보니 거기서 오는
부담감이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직도 갈 길이 멀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세속의 물이 제대로 빠지지 않았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아직도 영적인 삶보다는 육적인 생활에 익숙해 있던 제자단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단의 대표 격이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요청과 제자단의 미성숙 사이에 끼여 참으로 고생이 많았습니다.
학창시절, 돌아보니 한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담임선생님들께서는 당신들이 담당하셨던 학급에
문제가 생기거나 뭔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때,
먼저 반장을 불러 혼을 내거나 족쳤습니다.
제자단의 반장이었던 베드로 사도 역시
자신이 맡았던 직책상 무수히 교무실로 불려 갔습니다.
제자들을 대표해서 혼도 엄청 많이 났습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서도 베드로 사도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으로부터 엄청, 야단을 맞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옛 삶의 방식, 옛 사고방식을 떨치지 못하는 제자들,
무조건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 엄청난 꾸중을 하시는데,
반장인 베드로 사도가 대표로 꾸중을 듣습니다.
꾸중의 강도가 엄청납니다. 화들짝 놀랄 표현까지 등장합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베드로 사도의 문제점은 다른 무엇에 앞서 십자가 신비에 대한 이해 부족이었습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은총으로 다가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개방성 부족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 말씀에 베드로 사도는 크게 실망합니다.
그간 예수님께 걸었던 모든 기대가 수포로 돌아감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따졌던 것입니다.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이토록 우둔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깨달음에 도달하려면 한참 기다려야만 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지속적으로 수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오늘 우리 역시 마찬가지겠지요.
아직도 제대로 된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한 우리지만,
아직도 고통의 신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지만,
그래서 너무나 부족한 우리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를 부르십니다.
제자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복음 선포의 사도로 파견하십니다.
이토록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길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게서 물러가라”는 주님 말씀을 직역하면
내 앞에 있지 말고 내 뒤에 있으라는 뜻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가실 길을 앞에서 막지 말라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하는데 그 앞을 막고 있으니, 뒤로 빠지라는 말입니다.
축성 생활 문헌을 보면 주님의 길을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첫 번째 길은 ‘아버지로부터 아버지께(A Patre, ad Patrem)’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이 세상에 왔다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인데
그 사이에 있는 두 번째 길이 ‘타볼산으로부터 해골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길이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면
피할 수 없는 길이요, 반드시 가야 할 길인데
베드로는 지금 이 길을 앞에서 막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베드로가 이 길을 막고 나선 것은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길을 잘못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하지만, 베드로처럼 잘못 사랑하여
구원의 길을 따라가지 않고 그 길을 막아섭니다.
고통을 이겨내게 하는 것이 참사랑이고 구원의 길인데
고통받지 않게 하는 것이 사랑이요,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계신 높은 산을 오르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힘들게 산을 오르지 않게 되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산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산에서 내려오는 것이 구원의 길인데
인간의 산 정상으로 오르는 것을 구원의 길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시편 저자처럼 읊조립니다.
“주님의 산에 오를 이 누구인고?”
베드로의 남은 숙제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 대한 베드로의 신앙고백(27-30절)과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 예고(31-33절)에 관한 대목으로서 곧 있게 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9,2-29)의 도입부 역할을 한다.
이에 관한 기사는 공관복음 모두에 실려 있다.
공관복음서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까지 같은 순서를 따르고 있는데,
그 순서는 ‘베드로의 메시아 고백’ →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 ‘예수 추종의 길’ → ‘종말의 시기에 관한 토막어’
→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이다.(마태 16,13-17,0; 마르 8,27-9,10; 루카 9,18-9,36)
베싸이다에서 소경을 치유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곧장 필립보의 가이사리아 지방으로 길을 떠나셨다.
가이사리아는 헤로데 대왕의 아들 필립보가 헤르몬 산맥의 지하수가 샘솟는 곳을 골라
기원전 2년경 건설한 도시로서 갈릴래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소경의 치유를 통하여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영적 혜안을 주신 것일까?
가이사리아로 향하는 길목에서 당신의 정체에 관한 질문을 던지신다.
이 질문은 마치 하나의 필기시험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3년가량 따라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근거로
‘예수가 누구인지’를 답하라는 것이다.
에수의 정체에 대한 질문은 두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우선 사람들이 당신을 누구라고 생각하는지에 대하여 물으신다.
세례자 요한을 목 베어 죽였던 히로데 안티파스는
예수를 ‘되살아난 요한’(마르 6,16)으로 착각하는 정신분열증을 보였고,
대부분의 삶들은 엘리야, 예레미야, 또는 다른 예언자로 여기는 등
예수의 정체에 대한 분분한 의견을 보였다.
다음으로 제자들을 향하여 질문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이 질문에 제자단의 대표격인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하고 대답한다.
마태오복음에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16,16)로,
루카복음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9,20)로 고백하는 반면,
마르코복음에는 단순히 ‘그리스도’로 돼있다.
하여간 공관복음서의 공통 고백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란 도유된 자로서 메시아를 뜻한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예수께서는 즉각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 하신다.(30절)
마태오복음에도 함구령이 붙어닜지만(16,20)
그 사이에 베드로의 고백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찬사,
그리고 세 가지 약속을 첨가하였다.
이는 마태오 자신의 독자적인 편집임이 확실하다.
함구령 다음에 이어지는 대목은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에 관한 예고와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이다.(31-33절)
예수께서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하신다.
많은 고난과 죽음에는 치욕적인 놀림과 침 뱉음과 채찍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마르 10,34; 14,65; 요한 18,22)
그런데 이에 대한 베드로의 반응은 지나치게 예민하다.
그는 스승을 붙들고 펄쩍 뛰었다.
베드로의 과민반응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 또한 준엄하기 이를 데 없다.
베드로를 물러가야 할 ‘사탄’이라 꾸짖으신 것이다.
그런데 이 질타의 말씀은 베드로가 ‘사탄’이라기 보다는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사탄을 향한 것으로 봄직하다.
그 사탄이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기’(33절) 때문이다.
오늘 복음의 전체적인 이해를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이라는 개념으로 시도해 보자.
베드로의 고백은 필기시험으로 볼 때, 100점이다.
예수님께서는 달리 채점하지는 않았으나 예수 정체에 대한 정답으로 간주된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제자들이 함께 겪어야 할 실기시험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0점을 맞은 것이다.
필기 100점과 실기 0점의 현저한 편차는 중간에 삽입된 ‘함구령’으로 풀어야 한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아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제자들이 [예수님 = 그리스도+고난과 죽음과 부활]의 도식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베드로가 내어놓은 정답이 고난과 죽음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난 예고에 대한 베드로의 지나친 반응은
그의 마음속에 있는(사탄의) 생각을 드러낸 것이었다.
이 생각이 겉으로 정확한 고백(필기 100점)을
실제로는 형편없는 고백(실기 0점)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이제 마음속의 사탄을 몰아내고 진정한 그리스도로서의 예수 정체를
깨달아야 하는 것은 베드로의 인생 숙제가 되었다.
베드로는 자신의 남은 생애를 통하여 이 숙제를 풍어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이 숙제는 우리들에도 똑같은 비중으로 주어져 있을 것으로 믿는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