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보면 누구나 리듬을 타게 되므로 걷기는 음악이면서 체육이기에 몸과 정신을 함께 고양한다. 아름다움, 침묵, 느림 등은 숨을 고르게 하고 사유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도시의 소음, 더러움, 광란과 같은 온갖 독소들로 인하여 파괴된 조화를 균형 있게 재생시켜 준다. 자연이 뿜어내는 생명력과 햇살이 쏟아내는 원초적 원기를 온몸으로 받으며 이루는 재생과 회복은 더할 데 없는 자연치유이고 치유 인문학의 태반이다. 몸을 토대로 완성되는 몸에 대한 노동은 우리를 물질과 이해타산으로부터 우리를 풀어준다. 정신을 정화하기도 하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또한 자기 몸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한계와 부딪힌다. 걷는 자는 기만도 허세도 없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박동이나 차오르는 숨소리, 비 오듯이 흐르는 땀을 듣고 체감하며 자기 몸을 본다. 그 몸의 한계를 본다. 그래서 걷기는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곧바로 연결될 수 있다. 그래서 장 자크 루소는 “우리의 첫 철학 스승은 우리 발이다”라고 했는지 모른다. 19)루소는 말레르브(Malherbe)에게 1762년 1월 26일 보낸 편지에서 느림과 산책 그리고 사유의 관계를 이렇게 드러낸다.
아무리 타는 듯한 날에도 한 시 이전에는, 내가 미처 달아나기 전에 누군가 나를 붙잡으러 올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대낮부터 출발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어느 곳을 넘어서게 된 다음에는, 구원받은 느낌으로 숨을 쉬기 시작하고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늘 남은 시간 동안은 내개 내 자신의 주인이구나!” (......)
머리는 다소 피곤하지만 마음은 기쁜 채, 나는 잔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나는 사물들이 주는 느낌에 자신을 내맡기며, 그러나 아무것도 놓치지 않고, 아무것도 상상하지 않고, 평온과 내 행복한 상황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즐겁게 휴식을 취했습니다.20)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류의 조상들이 더 안락한 환경을 찾아 이동함으로써 길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었다. 따라서 길은 우선 생태 환경적 속성을 갖는다. 그러나 어떤 길을 보면 실크로드처럼, 한 부족 혹은 어떤 특징을 갖는 집단이 지나간 길 위에서 피어난 문명이 길에 문화적 속성, 그리고 경제적 속성 요컨대, 뒤르켐(Emile Durkheim)의 용어를 빌자면, 문화사회학적 속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최초에 ‘길’이라는 사물, 길이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겼을까? 태초의 인류는 해와 달과 별의 운행에서, 그것들이 그리는 궤도에서 길을 보았을 것이고 개념화했을 것이다. 그 길을 알고자 천문학이 생겨났으나 하늘의 길은 여전히 너무 멀어 운명적인 길이었다. 반면에 대지 위에 물길은 가까이 있었고 짐승과 인간이 살고자 찾아가는 길이었다. 소설가 최인훈에 따르면 “이렇게 해서 ‘물길’과 ‘짐승의 길’과 ‘사람의 길’이 어우러진다. 반드시 물을 마시러 와야 하는 짐승을 잡고자 인간은 ‘길목’을 지켰다.
물의 길인 강과 짐승들이 그곳으로 가는 ‘물에의 길’은 인간의 지배 밖에 있는 객관적인 사물이지만 그것들을 길목으로 사용하는 사냥의 길은 인간이 선택한 길이다. 인간이 생존의 ‘수단’, ‘방법’, ‘기술’로서 지배하는 주체화된 길이다. 주체화된다는 과정은 ‘길’이라는 말의 용법 속에 정착되어 있다. ‘길들인다’는 용법이 그것이다. 길들인다는 것은 주체가 아닌 것을 주체에게 본질적인 것으로 만든다는 뜻인데, 그 현상을 우리말에서는 ‘길들인다’고 나타낸다. 밖에 있는 길을 안에 들여놓는다는 표현이다. ‘안’이란 물론 인간의 안, 인간의 의식, 인간의 감각 ‘안’에 ‘들여놓는다’는 뜻이다.21)
우리말은 길로부터 ‘길들이기’를 거쳐 ‘기르기’로 생존의 기술을 확장하면서 마침내 공간적인 개념이면서 동시에 시간적인 개념으로서 ‘길이’라는 추상적인 형식을 만들어 낸다. 이처럼 '길'은 많은 언어에서 “실체, 관계, 운동, 시간, 공간, 기술이라는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다.”22) 이렇게 보면 길은 분명 효율성과 미지의 세계에 대한 예측을 가능케 하였던 인류의 상상력에 의하여 만들어졌을 것이다. 즉, 길이 지닌 다양한 속성들은 인문학적 속성에 기대고 있다.
정착 생활 이후 부락과 부락 사이, 부족과 부족 사이에 ‘길’이 열리면서 이제 ‘길 떠나기’가 시작된다. 여행의 길은 길이 아닌 길, 길이 없는 길, 잘 모르는 길을 찾아가는 모험이다. 이를테면, 서양 문학의 근간인 고대 그리스의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는 뒤이어 따르는 서양 문화가 재현한 모든 창의성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서사시의 핵심적 줄거리는 주인공이 창조하는 방랑이며, 또한 주인공이 귀향을 목표로 둔 채 발견하고 경험하는 수많은 형태의 길들에 의해 이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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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루소, 『에밀』, 크리스토프 라무르의 같은책 61쪽 재인용
20) 위의 책 82쪽
21) 최인훈, 『바다의 편지』, 삼인, 31쪽
22) 위의 책 32쪽
( 계속)
첫댓글 이제부터 좀 심오한 길로 들어가는군요
대전둘레길 어디를 가도 알려지지않은
작은산 이라도 길이 있지요
또 산소가 명당에 자리하고 있지요
사견으로는 행여와 조상성묘등을 위해
만들어 졌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ㅡ 길 아닌 것이 없어요 ㅡ
서울에 가면
세종로 퇴계로 을지로 충무로 가 있지요
세종임금 퇴계선생 을지문덕 충무공 이순신
이들 위인들만의 삶만이 길인 줄 알았지요
눈으路
입으路
손으路
발路 귀路 코路
내몸 오대삭신이 다 길이라는 것
사랑으路 마음으路
눈물路 웃음으路
믿음으路 의심으路
길아닌 것 아무것도 없다는 것.
큰길 샛길 골목길 갓길 굽은길 곧은길
길 아닌 길 가리지 말고
서로들 서로에게 길이었다는 것.
다시한번 생각해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