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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을 공부하되 모두 수용해서는 안된다. 동양을 공부하되 언제나 벗어나야 한다. 고독에 익숙해 지되 고독과 결코 벗하지 말아라’
아주 여러 해 전 가을, 남편이 갑작스레 여행을 가자고 했습니다. 시어른 세분께서 잇따라 세상을 뜨시고 본인이 해오던 작은 사업을 접으면서 마음의 정리도 필요했나 봅니다. 그런데 목적지가 홍콩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결정 장애를 가지고 있고 반대로 남편은 늘 결정 확정자였기에 무탈하게 잘 살아왔지만 이번에는 좀 서운했습니다. 뜻을 두고 가는 여행일텐데 하필이면 가나마나한 홍콩, 가다 마는 것 같은 홍콩이냐구요. 또 한가지는 친한 친구의 딸이 결혼을 하는데 당시에는 드믈게 초특급 호텔에서 하였고 제가 꼭 가야 하는 결혼식이니 날짜를 좀 바꾸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제 생일에 맞추어 가는 것이라며 변경은 불가라고 딱 잘라 말했지요. 저도 친구도 많이 서운했지만 별 도리 없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막상 가서 보니 남편은 그 곳이 자신의 인생 중에 시발점이 된 적도 있었고 전환점 되기도 했다며 이곳 저곳을 다니면서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제 생일 당일에는 배를
타고 가는 유명한 점보 레스토랑에 갔는데 대중 식당층이 아닌 근사한 분위기의 조용한 층에 가서 멋진 식사를 하면서 제게 말을 했습니다. 이제 돌아가면 자신도 은퇴를 하게 되니
일년에 두세번은 여행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웬떡이냐 드디어 내 인생이 꽃길로 접어들었구나 하며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 해서 돌아왔지요. 얼마전에
작은 아들이 말하기를 그때 여행에서 돌아와서 제가 그리 들떠 이야기 했노라며 그런 엄마의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고 했지요. 그때 아들 앞에서 파를 썰다 흥분해서
손을 빈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말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유럽 땅에 한발도 디뎌보지 못한 현대의 별난꽈에 속한 여자로 남아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점보레스토랑 보다 더 좋은 곳은 못 갈 줄 알았는데 그보다 훨씬 좋은 식당에도 갔고 궁금해 하던 호화 결혼식에도 다반사로 가게 된 것을 보면 일상에서도 예상외의 일들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럼 왜 ‘돌다리를 두들기고도 안 건넌다’는 유형의, 새 차를 몰고 집에 들어와서도 말을 안하던 과묵의 상징이던 제 남편이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스스로 제안하고 저는 그 말에 그리도 흥분을 했던 것일까요. 여행이 대체 뭐길래.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짧은 영어로 살펴보니 travel(장거리 여행이나 이동), journey(특히 멀리 가는 여행), trip(특히 짧고, 관광이나 어떤 특정한 목적을 위한 것, 여기엔 환각 체험이란 뜻도 있네요), tour(여러 도시나 국가등을 방문하는 여행, 도시나 건물 등을 걸어서 둘러보는 관광)로도 각각 표현이 됩니다. 제가 듣기로는 교통 수단이 발달되기 전 여행의 필요 조차 느끼지 못할 때 순례의 길을 걸어야만 하는 데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이 여행으로 발전 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오랜동안 자유로운
해외 여행이 막혀 있었고 어쩌다 비행기를 타는 특별한 경우엔 세계일주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남들은 엄두도 못 내는 전혀 다른 세계를 구경할 수 있다는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지요. 그러던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자 봇물처럼 터지는 단체 여행으로 인해 초기에는 여행의 본연의 뜻보다 관광만을 목적으로 또한 과시용으로 전락해 버리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여행은 점차 일상화 되어 갔고 이제는 세계 구석구석 발이 닿지 않는 곳이 없고 여행의 유형도 무척이나 다양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행을 그리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세상을 보는 것도 있지만 찌들었던 일상을 훌쩍 떠나는 것에 있기도 할 것입니다. 공간의 이동은 우리들에게 일탈의 짜릿함을 주기도 하고 모든 일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만끽하게도 합니다. 그런데 일탈을 그리며 출발을 해도 여행길에서는 다시 새로운 일상을 시작하게 됩니다. 느긋함만을 즐기기에 여행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요구합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여행에 대한 요구가 많은 것이겠지요. 휴양지에서 조차 다시 피치못할 일상을 가지게 되곤 합니다. 그래도 여행은 많은 이들에게 그 무엇보다 큰 즐거움을 줍니다.
그러나 저는 예상보다 잦아진 원거리 가족 방문으로 인해 계획했던 그런 흥미로운 여행의 기회를 잃게 되었습니다. 그 지역의 지리마저도 훤한 방문은 일상의 연속이므로 제게는 여행이 아니라고 항변하건만 남편은 바다를 건너는 일은 매한가지이니 자신이 약속을 어긴 것은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곤합니다. 오늘로부터 꼭 5년전 2013년 2월 10일 구정 날, 저는 당시에 방문 중이던 미국의 시아주버님 댁에서 노트북을 켜고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 나타난 장면에 입을 벌린 채 다물 수가 없었습니다. 세상에 어째 저런 일이… 잊을 수 없는 아니 결코 잊지 못할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이름하여 ‘악어의 눈물’. 방문 여행 길에서의 그 순간부터 갱신의 기나긴 여정은 이미 시작이 된 것 같습니다.
여행은 돌아올 집이 있어 그 의미가 더한 것이기에 이내 고향과 같은 강남의 마당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신앙의 여정에서 일탈하여 다시 새로운 일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전혀 알지 못했던 다른 세계도 넘치게 많이 알게 되었고, 순례의 험한 길을 가기도 했고, 마치 방관자처럼 구경을 하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한자리에 앉아서 아프리카, 섬, 부산, 광주 등등 각처에서 찾아와 주시는 분들을 통한 다양한 말씀의 여행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상은 사람을 지치게도 하고 다른 일탈을 꿈꾸게도 합니다. 그렇게 이 여정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반면 의외의 선물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험한 길, 좁은 길이라고 표현하는 이 여정은 언제까지인지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르면서도 함께 하는 길벗들이 있어 생각보다 지루하거나 힘이 들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때로는 시간의 여행을 해 보기도 합니다. 그 자리에서 일어났던 30년 전의 일, 10년 전, 1년 전의 일들을 떠올려 보기도 합니다. 과거는 우리들에게 좋은 추억으로도 남아있지만 원망, 회한, 상처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그 중에 한가지 잊지 못할 일은 홍콩 여행 후 10여년 지난 뒤에 맞은 제 환갑날의 일입니다. 교회가 서초로 이사를 간 후에 금요마당기도회를 그곳에 가서 하기로 결정하여 실행하게 된 첫날이 바로 제가 인생을 한바퀴 돌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되는 날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제가 갱신의 일에 적극적으로 몸을 담고 있던 때라 가족들도 아무 말 못하고 미리 당일을 피해서 한주전 주말에 모두 모여서 식사를 했는데 어디서 무얼 먹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센타 앞 식당에서 행동대원격인 청년들과 젊은 집사들과 국밥을 먹고 제가 한방 쏜 기억은 생생합니다. 그때만해도 분위기가 살벌했고 마치 레지스탕스 작전을 펴듯 긴장감을 갖고 임했고 당시엔 제가 센타로 부터 공격을 받던 때라 그 식당에서 센타 전도사님 등이 저를 손가락질하며 구경하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2013년 11월 말의 일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제에 집착하면 비록 오늘을 살아도 오늘이 될 수 없다. 인생은 멈추지 않고 떠나는 것이다. 시간은 마치 흐르는 강물과 같아서 그 흐르는 물을 따라 순리대로 살아내는 것,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다. 어제의 나를 버리고 오늘의 나를 세워서 새로운 내일의 나를 만나야 하며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야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다. 우리 인생의 시계가 멎어 내일이 사라질 때에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나라에 우리를 심어 주실 것이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씀입니다.
집을 떠난 여행 길에서도 시간의 여행을 하게 됩니다. 발길이 닿는 곳은 어디에나 시간의 켜가 쌓여 있고 거기에 담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보게 되면 어린아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보다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보다 못하다.’ 우리는 이 말을 역으로 실행하는 것은 어떤지요. 여행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 될 수도 있지만 여행을 좋아하고 그 결과로 아는 것이 생기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지요. 어느 일에나 목적이 있고 알게 모르게 얻는 유익이 있습니다. 여행의 유익을 눈치 채고 자신의 마음에 담아서 변화를 가지면 내일의 자아는 점점 어른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내면의 여행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흥겨운 여행 중에서도 나를 찾는 것을 여행에 담지 못하면 쉽지 않게 떠난 여행길이 허망할 수도 있겠지요. ‘끊임없이 계속되는 휴일이란 지옥이나 다름없다.. 버나드 쇼' 그냥 즐기기만 하는 여행은 지구 끝까지 찾아다녀도 또 다른 것을 찾아 헤매일 뿐이 아닐지요. 방문을 해도 여행을 가도 관광을 즐겨도 그 안에서 시간 여행을 하고 자신의 내면의 여행은 얼마든지 병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갱신운동을 길로 표현합니다. 길이라고 하면 쉽게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와 루쉰입니다.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 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 (2014년 창비)
이 시에서 작가가 의미하는
바를 떠나 저는 마지막 싯구만으로 갱신의 길을 비유하여 자의적인 해석을 해 봅니다. 사람들이 잘 선택하지 않는 길을 택했는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어찌했을까 하는 다행스런 큰 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 내린다고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으면 큰 건물 속에서 오리무중의 신앙의 길을 여전히
가고 있었을 자신을 생각하면 모든 것이 달라진 것에 감사하노라고요.
그리고 루쉰의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길이 없는 곳에서 길을 내며 먼저 가다보면 길이 생기고 또 많은 사람들이 그 길에 동행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갱신의 여정도 그러할 것입니다.
이 험한 여정 중에 새롭게 맞닥뜨리는 일들을 모두 수용하지 않고 익숙한 자신에서 항상 벗어나기 위해서는 홀로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하나님과 벗하지 않으면 이 길의 끝에서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지 않을까요. 이 여정을 마쳤을 때 우리들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을런지요.
‘<우리는 모두 떠도는 사이에 어른이 된다>… 중요한 건 여행이 끝난 뒤 생활에서 실제로 변화하는 것이다. 낯선 사람을 꺼리던 사람이 여행 후 낯선 이를 돕고, 겁 많았던 사람이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내는 것이다. 상처 받고 괴로워했던 일들을 되돌아보고 쓰러진 자기 자신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며, 생활의 작은 부분을 변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여행에서 돌아와 제일 먼저 할 일이다’ …. ‘돌아온 여행자에게’ 중에서
첫댓글 2013.02.10을 다시 떠오르게하여 기억하게 하심 감사합니다. 그날이 구정 설날 이였습니다.
장로님께서 지난 번에 말씀해 주셨던 기억해 두어야 할 시점 중에 한가지를 더 넣었습니다. 잠시 깜빡했어서요.
2013년 11월의 일입니다.
구정날 표절과 대필의 측은함을 가장한 용서의 구정물을 쏟는척 했군요
피아노 반주 깔고 미리 연습했을 그 가증함을 생각하니 저런 뻔뻔함은 하루아침에 얻어지는게 아니라는것을 다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제천서 정상유급 휴가 보내고 고뇌한 척 악마의 수염 보이며 하나님이 당하셨습니다(??) 라는 멘트로 보디가드 대동하며 김밥부대 동원이라 ~~ 대한민국의 이벤트 기획자들 긴장하셔야 할듯요
지난 추수감사절에는 한복 차림으로 성도들을 권징하는 재판을 치루었으니.
그 분은 기억할만한 날만 골라서 거사를 치루네요.
워낙 출중한 저질 환상속 이벤트의 달인이라
정상의 이벤트 기획자들은 감히 못 따라 갈듯 합니다
신앙여정의 길을 적절하게 표현하여 주셔서 많은 은혜 받았읍니다.
갱신의 여정에 함께하신 갱신공동체에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으며 은혜의 길을 뚜벅뚜벅 걷게습니다.~~^^^
비록 잡문이지만 이렇게 공감해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 그리고 성도님들이 함께 하는 길이니 은혜가 넘칩니다
많은 여행 중에서 영적 여행은 포함시키시지 않은 이유가 특별히 있으신지요? 그 양심에 화인 맞은 불쌍한 자가 영적이라는 표현을 왜곡시켜 사용하기에 제외시키시지는 않았겠지요? 우리의 나그네 길에서 주께서 우리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 갱신 성도에게 상을 배푸시고 풍성한 말씀의 잔치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은 진정 오묘하십니다. 이 나그네 길에서 주님의 형제 자매로 샘솟는 신선한 위로를 공급하시는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무늬만 권사인지라 영적인 세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
그저 하루하루 말씀 안에서 자기 자신을 돌아볼 뿐입니다.
앞으로는 그 미지의 세계에 도전을 해 보아야겠습니다.
주께서 베푸시는 상을 받는 잔치 또한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디.
@온마음 도전의 결과도 같이 나누자고 말씀드리고자 하면 너무 용감한가요?
@repentance 아이고 무서버라...
도전에 결과가 있겠나요. 그저 그 과정 중에 점점이 깨우침이 있을 뿐이겠지요.
그리고 저는 단순하게 제가 느낀 점들을 이곳에서 나누고 있을 뿐이고요.
교회당의 뜰만 열심히 밟는 교인들은 그만 그 발걸음을 멈추기를 바란다.--->우리들은 뜰만 열심히 밟는 것이 아니라 교회회복과 갱신의 광야 길로 주님을 찬양하며 이끄심에 감사하며 당당히 나아갑니다
온마음 권사님^^ 마치 갱신의 초기에라도 와 있는듯 합니다 급박하고 처절한 사투 가운데 절절한 글들은 우리를 붙들어주고 어김없이 다시 힘을내어 그 선한싸움을 감내케 했지요
어느새 5년이 지났습니다ᆢ우리중 누구도 이렇게 긴시간이 걸릴줄 알았을까요
숲속의 두 갈래길 중 다른사람들이 선택하지 않은길을 선택한것이 오래오래후에 가슴을 쓸어내릴것이라고ᆢ그러나 오랜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아니 벌써부터 그곳에서 벗어나
특별한 하나님의 만지심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도를 깊이 체험하고 은혜를 알아가는
사랑의 성장통을 앓고있는 시간임을 고백하며
감사와 알수없는 기쁨이 있습니다
설혹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진다해도~
잔잔한 감동의 글 감사합니다.
그 전에 숲이었고, 산이었던 곳이 누군가가 걸어가기 시작하면 길이 되듯이, 지금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정말, 산 이나 숲이었을 것입니다. 그 험준한 곳에 길을 내는 우리들이 지쳐 그만두지 않도록 늘 새롭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간구하며 나아 갑니다.
희망을 가지고 가면 되는 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