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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장 … 그후 한 달
지옥성 지옥연무장 제이 관문.
야광충은 책을 읽었다.
그렇지 않을 때는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는 수련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관문돌파를 시도하는 것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그를 둘러싸고 지옥성에서는 묘한 소문들이 돌았다.
적어도 전관주들보다 무공이 고강해야만 가능하다는 팔관돌파
의 네번째 도전자라는 것만으로도 그는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이전의 세 명과는 다르게 그는 정체가 비교적 알려져 있
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지옥성에서 자란, 순수 지옥성 출신!
관주 중 하나, 그것도 한족과 몽고족을 통틀어 가장 인망이
높은 예충의 제자로 팔관돌파를 시도한다는 것이 그의 주변에
묘한 후광을 드리우게 했다.
특히 한족들에게 그것은 더했다.
멀리 이역(異域)에 와서 수적으로 먁은 몽고족에게 눌리는 기
분을 은근히 느끼고 있던 한족들에게 야광충의 행보는 초미(焦
眉)의 관심거리였다.
야광충 개인의 묘한 특징도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누구의 입에서부터 새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그가 낮
의 해를 볼 수 없는 체질이라는 것이 알려졌다.
밤에만 돌아다니는 그늘 속의 사내!
창백한 얼굴에 은발, 온몸을 검은 옷, 검은 장갑으로 감싼 사
내 야광충!
인세에 보기 드문 그런 특징만으로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지옥
성에서 그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그가 하석과 요륵을 은 것, 그리고 총옥주의 명으로
모종의 임무를 수행한 것, 최근에 지옥연무의 일, 이관문을 통
과한 것들이 모두 그의 주변에 신비한 안개를 드리우게 했던 것
이다.
사람들은 그 이후, 팔관돌파 과정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잠시 움 이지 않고 있지만 다시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뭔
가 전에 볼 수 없었던 일들이.생길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야
광충을 둘러싼 시선들에는 담겨 있었다.
야광충은 보고 있던 책을 덮어 버렸다.
한 손으로 들기 어려울 정도로 굵은 책의 겉장에는 금박으로
<현문구검총요(玄門九劍總要)>라고 씌어 있었다.
유명한 무공비급은 아니었다.
사실은 그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조차 거의 없는 책이었다.
한 문파의 무공을 기록한 것도 아니고, 더구나 누군가에게 알
려진 적도 없는 책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본다면 웬만한 무림인들은 눈이 뒤집어질
정도로 흥분할 책이었다.
그 안에는 화산파(華山派)의 매화검(梅花劍), 육합검(六合
劍), 태을검(太乙劍), 공동파( 派)의 복마검(伏魔劍), 곤륜파
(崑崙派)의 태허도룡검(太虛屠龍劍), 분광검(分光劍), 칠보유홍
분심검(七步流紅分心劍), 청성파(靑城派)의 청운적하검(靑雲赤
霞劍), 원나라 당시 최고의 세력을 떨쳤던 전진교(全眞敎)의 무
극검(無極劍)까지 주석(註釋)을 곁들인 도해(圖解)가 수록되어
있었다.
과거 원나라 지배하에서 감찰부가 수집한 무공이 바로 이것이
었다.
지옥성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책들이 상
당수 있었다.
그 중 현문도가(玄門道家)의 검법만을 모아 눙은 책을 지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야광충은 책의 걸장을 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애초에 책을 보고 뭔가를 익힐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것은 아
니었지만 막상 확인하고 보니 새삼스럽게 실망스러웠다.
그 검법들이 쓸모없는 것들은 아니었다.
아니, 당금 천하에서 그보다 뛰어난 검법들도 찾기 어려울 정
도의 것들이었다.
그러나 생명이 없었다.
책에는 동작도, 구결도 있었지만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걸 보고 익혀 봤자 원숭이 흉내짓에 불과할 것이다. 웃음거리
가 되기에나 좋은 것이지, 뭔가를 배울 때 쓰는 것은 아니었다.
설흑 배울 수 있다 해도 역시 쓸모가 없었다.
그가 원하던 것은 이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바라고 찾던 것은 무언가 좀더 다른 것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모습이 있었다.
폭죽처럼 비산하던, 그리고 나비처럼 흩어져 내리던 눈부신
검기(劍氣)!
여문량의 환검호접몽(幻劍蝴蝶夢)이었다.
환상처럼 아름답던 검!
그러면서도 쏟아지는 달빛을 하나하나 갈라 버리던 그 파괴적
인 검기!
꿈처럼 아름답고, 달빛처럼 차갑던 그 검무(劍舞)를 그는 잊
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다시 눈을 떠 <현문구검총요>를 바라보았다.
저 책 속세 나와 있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호접몽, 그리고 화영에게 전해 줬다는 그 심검(心劍)이 달빛
이라면 저 검술들은 반딧불에 불과한 것들이었다.
검은 살아 있지만, 글은 죽은 것이라서 그런 것인지, 즉 책을
통해서만 보았기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도 그런지
는 아직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적어도 책을 통해 그런 경지에 갈 수가 없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혹시 가능하다 하더라도 지금은 그럴 시간이 아니었다.
적어도 일조일석에 이루어질 일은 아닌 것이다. 거기 매달리
는 것보다는 좀더 가능한 일에 전념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 보름여의 시간 동안 그가 확인한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점을 보완하기보다는 장점을 살리는 것이 현명한 일이었다.
시간이 없을 때는 더욱 그랬다.
야광충은 전에 없이 시간에 쫓긴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를 누구에게도, 심지어는 사부에게도 말할 수
가 없었다. 그 자신, 그것을 설명하기에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무언가 위험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저 동물적인 직감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지도 몰랐다.
아직은 사실의 편린(片鱗)들만이 나타나고 있었지만 위험은,
그리고 그와 그의 사부를 둘러싼 음모는 분명히 존재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음모가 그와 사부를 둘러싸기 시작한 것은……!
해를 마주 대하지 못하는 그의 체질, 지옥성 지하에 갇혀 있
던 엽장청, 비슷한 방법으로 고란고성 지하에 갇혀 있던 귀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성주…… !
이 모든 것의 배후에 하나의 이름, 한 사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로부 옹고트였다.
천산오조가 모이는 그 시간, 그 장소에 그가 가게 된 것도 그
의 안배였을까?
그렇다면 그가 엽장청의 진전을 이어받았다는 것도 알고 있었
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그가 엽장청을 만나게 된 것 자체가 로부 옹
고트의 안배는 아니었을까?
지나친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야광충은 그 가능성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 모든 추측이 그에게 귀일된다고 해도 문제가 남았다.
그리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는 무엇을 원하는가?
왜 이런 일들을 했을까, 라는 것이었다.
그것이 명확해지지 않으면 어떤 의문도 해소되지 않을 것이었다.
--너는 그와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다!
엽장청은 그렇게 말했었다.
귀조도 그렇게 말했다.
야광충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와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라
고……
하지만 맙소사……!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이유도 없이 싸워야 한단 말인가?
야광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마음속이 답답해지고 있었다.
지난 십오 일 간 무공방면에서는 전혀 진전이 없었다는 것이
그 답답함의 원인이었다.
적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를 둘러싼 음모라는 것도 사실은 없을지도 모른다.
엽장청이나 귀조나 정신나간 늙은이들의 헛소리에 불과할 수
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가 로부 옹고트와 싸울 이유도 없었다.
한족이면 어떻고, 몽고족이면 어떤가?
전날 고란고성에서 로부 옹고트와 그들이 말싸움을 벌일 때
그는 뒤에서 웃었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들을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것이 가소
롭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더할 수 없는 고통을 치뤄야 하는 처
지에 조국은 무엇이고, 민족은 무엇인가?
충(忠) 이니 의(義)니 하는 고상한 가치들, 그 어느것도 생존
의 절박한 욕구 앞에서는 침묵하는 법이었다.
심지어 생존 그 자체마저 의미를 잃는 시점에서랴……!
여기 이관문에서는 지하 통로를 따라 걸으면 어떻게든 연무장
을 거치게 되어 있었다.
한정된 지하공간을 유용하게 쓰기 위한 구조였다.
거의 원형, 흑은 장방형에 가까운 공간의 대부분이 연무장으
로 만들어져 있고, 그 주변에 생활공간이 있는 것이다.
문득 야광충은 그런 모양이 방어에도 유용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관문으로 통하는 통로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길을 따
라 들어오면 연무장 중앙으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방에서 포위공격이 가해진다면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형편
이 된다.
이 지옥연무장의 팔대관문이 원형으로 벌려선 것이 아닌가 하
는 생각도 최근에 떠오른 것이었다.
지옥성 구석에서 수직으로 내려온 통로,
통로가 방사형(放射形)으로 펼쳐져 있었다.
그렇다면 팔대관문 자체도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는 통로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에는 지상의 고성 바로 아래에는 팔대지옥이 차례로 있는
줄로만 알았었는데 거기에 팔관문을 더한다면……?
야광충은 문득 묘한 생각을 하고 표정을 굳혔다.
지하의 구조를 알아낸다는 것은, 그것도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얽히고 설린 좁은 통로를 돌아다니며 그 전체의 구조를 알아낸
다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방금 그가 한 추측이 정확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했다.
'이 지옥연무장에는 다른 비밀이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는 어느새 연무장에 도착해 있었다.
연무장에서는 삼십여 명의 수련자들이 상음의 지도하에 창술
을 연마하고 있었다.
수련자들은 모두 몽고족이었다.
며칠 동안 한가할 때마다 구경해 본 바에 의하면 여기에서는
십팔반 병기로 알려져 있는 각각의 병장기를 연마하고, 어느 정
도 기본이 잡히면 바로 대련으로 들어간다.
실전을 중시하는 방각의 성격을 반영하는 것이겠지만, 여기에
서의 대련이란 정말 실전을 방불케하는 것이라서 죽고 다치는
자들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지금 창술을 연마하는 몽고족들은 제법 기본이 잡힌 자들 같
았다.
흠잡을 데가 별로 없이 잘 짜여진 창술을 보여 주고 있는 것
이다.
야광충은 그 창술을 보며 문득 고란고성에서 만났던 혈문룡을
생각했다.
지금 효에서 창술을 연마하는 자들에 비교해 보니 비로소 그
가 얼마나 뛰어난 창술을 지녔는지 알 수가 있었다.
'뭘 하고 있을까?'
야광충은 그때 만났던 여러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여문량은 죽었을 것이다.
고란고싱을 떠나올 때 야광충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여문량은 그때 이미 생기를 잃고
있었다.
부상을 입거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
다. 노쇠해서도 아니었다.
삶의 지표를 잃은 사랍은 오래 살지 못하는 법이었다.
여문량은 더 이상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둣했다. 그것이
생기를 잃는 것으로 결과되어진 것이다
'그럼 화영은?'
여문량이 죽고 나면 화영은 어디로 갈까?
아마 그도 여문량이 곧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야광충보다 그런 면에서는 훨씬 감이 빠른 화영이었으니까!
'어쩌면 여문량이 죽기 전에 뭔가 시켰을 수도 있겠지! 중원
으로 갔을 수도……!'
야광충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화영이 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
득 했다.
'석두의 후예라……!'
그를 생각하면 야광충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정체는 짐작하고 있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수께끼의 알
수 없는 자였다.
'겐나그라.…… 라고 했던가?'
겐나그라……!
바로 황룡이었다.
고란고성에서 그는 스스로를 겐나그라 라마, 즉 황룡라마라고
소개했던 것이다.
그가 석두의 후예를 자청하고 나타났을 때, 야광충은 바로 그
를 알아보았다.
장공(掌功)을 쓸 때 금광(金光)을 발하는 사람은 흔치 않으니
말이다.
그것을 확증시켜 준 것이 서장어였다.
한어는 못해도 서장어로는 의사가 통했던 것이다.
여기 지옥성에서 얻은 양인장이 그에게 갈 것이라는 것도 우
연이라면 묘한 우연이었다.
조구에게 모든 걸 전해 주고 죽었다는 라마승은 누구였을까?
설마 그가 석두는 아닐 것이다.
'양인장……!'
야광충은 연무장 한구석에 앉아 아까 하던 생각의 끝을 이었다.
이런저런 이유를 따질 것 없이 싸우게는 될 것 같았다.
안 싸우면 모르되 이왕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것 또한 당연했다.
작게는 무공에서부터 지략(智略)에 이르기까지 준비를 해 둬
야 했다.
둘 중 어느것도 급성(急性)으로 되는 얼은 없었다. 충분한 준
비와 노력이 있어야 제대로 싸울 수 있었다.
거기에 양인장은 의외의 소득이라 할 것이다.
야광충은 숨겨 둔 무공이 없었다.
예충이 전수해 준 현음진기가 그의 내가기공의 전부였다.
그것으로 충분한가?
일단은 충분했다.
남들이 몇 십 년을 갈고 닦아야 이루어지는 내공을 그는 체질
덕에 급속도로 이룰 수 있었다.
절정의 경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고수들과 상대해서 내
공이 모자라 이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절정의 고수를 만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내공은
이런 경우 고려할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어떤 것보다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 그것이니 모자라다고
한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보완할 수 있는 것이 초식이었다.
싸움에서 내공은 기본이지만 모든 것은 아니었다.
찰나의 순간에 승부의 기점은 몇 십 번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병장기에 대해서는 일단은 접어 두기로 하자.
그의 연형칠장은 경계를 않았던 상대에게 의외의 일격을 가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을 믿을 수는 없었다.
요행수는 한 번도 많은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둘밖에 없었다.
경공과 제맥금나술!
귀영종의 오대신법은 적어도 그의 목숨을 몇 번은 구해 줄 수
가 있었다.
정 안 되면 도망가면 그만인 것이다.
그가 마음먹고 도망갔을 때 잡을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드물
것이다.
제맥금나술은……?
조화십삼수, 그리고 양인장이었다. 아니, 하나 더 있었다.
야광충은 귀조가 전수해 준 전륜나를 떠올렸다.
그가 배운 가장 뛰어난 무공이 하나같이 손에 관련되는 것들
이라는 점도 그에게는 행운이었다.
기본도 없이 검을 쓰다고 하는 것보다는 말 그대로 손에 익
은 무술을 보완하는 것이 훨씬 유망한 일일 것이다.
조화십삼수……!
열세 개의 초식으로 구성된 조화십삼수는 원래는 소매치기를
하기 위한 필요에서 오랜 세월 귀종문에서 갈고 닦인 것이었다.
적어도 누구든 이 초식들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무림 최
고의 제맥금나술이었다.
양인장은 아직은 초보단계에 불과하지만 무상금강행의 수련이
어느 정도 단계에 오르면 이 일장에 견딜 수 있는 사람도 드물
것이다.
전륜나는……?
야광충은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에 써야 할지를 알 수가 없는 무공이었다.
내공도 거의 없는 귀조가 몽고기병들을 집어 던진 것을 보며
뭔가 대단한 무공이기는 한데 적을 제압한다는 측면에서는 어떨
지 몰랐다.
단지 집어 던지는 것만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야광충은 자신이 외운 책의 내용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기의 흐름!
힘의 방향!
힘의 조정!
야광충은 벌떡 일어섰다.
그의 뇌리 깊숙한 곳에서 무엇인가가 반짝였던 것이다.
'어쩌면……!'
무립역사상 전무후무한 어떤 것이 그의 손으로 이루어질지도
몰랐다.
조화십삼수를 중심으로 양인장과 전륜나가 합쳐진다면……!
그가 그것을 완벽하게 익혀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는 그 생각에 깊이 잠겨 들었다.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작업이지만,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그 작업을 해야 할 것이라고 그는 결정하고 있었다.
* * *
지옥성 무간지옥.
무공의 세계에 친이 잠겨 있는 사람은 여기에도 하나 있었다.
양인장 조구였다.
그는 야광충에게서 배운 현음진기의 도입 구결을 암송하고 있
었다. 그도 사실은 약간의 내공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양인장을 익힌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
이다.
그러나 건강도인술(健康導引術)도 내공에 들어가는 것일까?
길거리에서 기예(技藝)를 파는 사내들이 몽둥이 몇 개를 부러
뜨리는 기합법(氣合法)도 내공이랄 수 있을까?
이십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강호를 이리저리 구르며 어깨 너
머로 배운 심법(心法)이요, 행공법(行功法)이었기에 이렇다 할
공력이랄 것도 없는 것이 여태까지의 조구였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제대로 된 내공심법을 익히는 것이다.
물론 나이가 들어 내공세 입문하면 어렸을 때만큼은 진전이
빠르지 않다.
기경팔맥(氣經八脈)이 이미 굳어져 있기 때문에 새로이 내공
을 익힌다는 것이 어렵고 익힌다 해도 고수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양인장이 있지 않은가?
어설픈 건강도인술로 쌓은 어줍잖은 내공으로도 청석판을 뚫
을 정도의 위력을 보였지 않은가?
모두 잘할 필요는 없고, 그런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한 가지만 잘하고, 나머지는 대강 기본만 갖추면 그도 일류고
수로 행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류고수!
삼류무사에게 일류고수라는 것은 단순히 무공수준 이상의 의
미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천민이 왕후장상을 바라보는 기분과도 흡사했다.
한 번 천민이면 거의 영원히 철민인 것처럼 한 번 삼류무사가
된 자가 일류고수로 올라갈 길이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이제 그 실낱 같은 기회를 잡은 것이다.
조구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야광충이란 자가 좋아서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누구도 강도짓을 당하고 강도를 좋아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조구는 그가 적어도 위선자(僞善者)는 아니라고 봤다.
그는 필요하다면 자신을 죽여서라도 구결을 빼앗으려 했었다.
또 그 의도를 조금도 감주려 하지 않았었다.
그것이 중요했다.
적으로 삼으면 위험한 사람이지만, 같은 편이 된다면 가장 믿
을 수 있는 사람이 그런 유형의 사람일 것이다.
"독하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라는 말도 있지!"
조구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리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여전히 잡념이 많았다.
그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구결을 암송하려다가 문득 인상을
썼다.
어디선가 짐승의 울부짖음 소리가 들리는 둣했다.
운기행공 중에는 감각이 극도로 예민해지기 때문에 외계의 사
물을 민감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곳에 짐승이 있을 까닭이 없지 않은가?'
석실은 무간지옥에서도 극히 비밀스러운 장소에 있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찾지 않는 곳, 그리고 그가 여기 있다는 것
을 아는 사람은 야광충과 여기 무간지옥의 대주 이상 수뇌급밖
에 없었다.
사람도 잘 찾지 않는 곳에 짐승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환청(幻聽)인가?'
조구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귀를 의심했다.
'내공을 쌓기 위한 초보단계에서 그런 일이 많다고 하는데……!'
조구는 이것이 혹시 말로만 듣던 심마(心魔)에 빠지는 초기증
상이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심마는 외부의 방해로도 생기지만 스스로의 마음속에서도 만
들어 내는 것이라, 운기행공의 중요한 시기에 거의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나타났다.
최초 하단전(下丹田)에 기를 모으는 축기(蓄氣)단계에서 소주
천운기행공(小周天運氣行功)으로 넘어가는 단계, 그리고 소주천
에서 다시 대주천(大周天)으로 그 상위의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
등, 내공이 일보 진전할 때마다 나타나 시련을 주는 것이다.
심약해서 여기서 꺾이게 되면 처음부터 기를 다시 쌓아야 할
뿐 아니라 심한 경우 병신이 되거나, 죽는 경우도 있어서 극도
로 조심해야 할 시기였던 것이다.
--그럴 땐, 쉬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하도록!
야광충이 심법을 알려 주고 주의시켜 준 말이었다.
쪼구는 숨을 크게 내쉬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긱고 그는 더 크게 눈을 떠야 했다.
그의 눈앞에 피에 물든 손 하나가 보였던 것이다.
마치 핏속에 푸욱 담궜다가 꺼낸 것처럼 아직도 붉은 피가 떨
어지고 있는 손이었다.
조구는 잠시 아무 말도 않고 그 손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놀라지는 않았다.
과거 몇 년 동안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만났었던가!
그를 찾아온 사람들은 다들 그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고, 그래
서인지 하나같이 놀랄 만한 무엇인가는 준비해 왔던 것이다.
단지 여기도 안심할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그는 몰래 양인장을 격사할 준비를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젠 지옥성에 그걸 모르는 사람도 드물 텐데……!"
그는 말을 다 맺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다, 당신이……?"
그 목에 피묻은 손이 와서 조였다.
조구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일순간에 마혈(魔血)이 제압당해 버린 것이다.
"야광충에게 말한 대로를 말한다면……."
피묻은 손의 주인이 나직하게 말했다.
"고통없이 죽여 주겠다!"
* * *
지옥성 제이 관문.
"술 마시러 갈까?"
고개를 들어 바라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 줄은 알고 있
었다.
조금 전 그녀가 나타날 때부터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술은 별로 즐기지 않는 야광충이었지만 그녀와 술을 마신다는
것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갈 수 없었다.
그에게는 달리 할 일이 있었다.
"아니! 난 할 일이 있어!"
야광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월몽영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
했다.
처음 만났을 때, 자기답지 않은 행동을 했기 때문에 야광충은
그녀와 말할 때는 신경을 쓰고 있었다.
최대한 명확하게 생각하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실수래야 정체를 확인하지 않은 것에 불과했지만, 야광충은
그것을 상당히 꺼림칙한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작은 실수지만 실수를 했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 이유를 모른다는 것, 그녀를 만날 때마다 왠지 모호해지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 터욱 불쾌했다.
그녀가 아니라 그 자신에게 향하는 불쾌감!
정리되지 않은 감정이 스스로 싫었던 것이다.
월몽영은 더 조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몇 번 만났을 때마다 보여 주던 것과 같은 모호
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야광충의 옆을 떠나 몇 발자국 걸어가다가 고개만 돌
리고 물었다.
"일이 끝나면?"
야광충은 잠시 그대로 앉아 있다가 일어서며 대답했다.
"밤에!"
월몽영은 다시 고개를 가볍게 끄덕여 보이고 돌아섰다.
"데리러 가지!"
야광충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약간은 후회스러운 감정
에 사로잡혔다.
'왜 승낙챘지?'
술을 마시러 가는 것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귀찮고 번거로웠다.
어쨌든 이미 결정한 일이니 후회해도 소용없는 것이다.
그는 이관문을 나와 여덟 개, 사실은 지옥연무장의 입구에서
거기까지 통하는 통로까지 포함한다면 아흡 개의 통로가 모이는
지하광장으로 나완다.
정상적으로 여기를 나가려면 들어왔을 때의 그 통로를 이용해
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야광충은 제오 관문으로 통하는 통로로 들어가고 있었다.
거기에도 역시 세 개의 갈림길이 나왔다. 그리고 다시 세 개
또다시 세 개였다.
제대로 된 길을 가지 않으면 그의 앞에는 이와 같이 끝없이
세 개의 통로만이 나올 것이다.
통로의 미로는 일종의 진식(陳式)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주 와 본 길처럼 야광충은 그 미로를 거침없이 걸어가고 있
었다.
어디쯤 왔을까?
누군가 그를 감시하는 인물이 있었다면 두 눈을 크게 뜨고 방
금 헛것을 본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야 했을 것이다.
순간적으로 야광충이 통로 가운데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주격자가 야광충이 사라진 지점에 와서 자세히 살펴
본다면 통로의 한쪽 벽, 그늘진 곳이 손으로 한 뼘 정도 너비로
갈라져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저어야
했을 것이다.
누가 가슴팍 두께만큼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야광충은 그렇게 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사막의 돌 틈에 사는 도마뱀처럼 영활하게 움직여
벽면에 스치는 것 같지도 않게 미끄러지듯 가고 있었다.
귀영종 오대신법 중의 하나인 마형귀적(魔形鬼跡)이었다.
손바닥만한 틈만 있으면 연기처럼 빠져 나갈 수 있는 신법이
바로 이것, 생각해 보면 도둑에게 가장 필요한 신법이랄 수 있
었다.
그렇게 오 장여 움직여 갔을까?
야광충은 비교적 넓은 또 다른 통로에 몸을 내밀 수 있었다.
둥불 하나 없는 어두운 통로!
곳곳에 무너진 바위조각들이 쌓여 있는 버려진 통로였다.
야광충은 그 돌들에 걸리지도 않고 유유히 걸어갔다.
그는 처음부터 지옥연무장에 단 하나의 통로만이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가 들어간, 그리고 대부분의 수련생들이 들어간 그 길만으
로 귀찮아서 어떻게 다닌단 말인가?
수련생들이야 자주 들어올 일이 없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교
두나 각 옥주들은?
백 보 양보해서 비밀 엄수를 위해 그 번거롭고 긴 길을 지나온
다고 해도 다른 통로는 반드시 있어야 했다.
전략적인 필요에 근거해서 추측한 것이었다.
여우도 굴을 팔 때 통로를 세 개는 뚫어 놓는다고 했다.
만약의 경우 지옥연무장이 공격을 받는 일이 생긴다면 도망갈
구멍이 없는 것이다.
하나의 통로라는 것이 들어오는 적을 막는데는 효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어린애나 할 소리였다.
공격하는 쪽이 바보가 아닌 이상 누가 그 좁은 굴로 기어들어
올 것인가!
막고 있기만 하면 나오는 적들을 하나씩 베어 버릴 수 있을
것인데……!
또 하나의 이유는 지금 그가 걷고 있는 그 통로의 존재였다.
지옥성은 지금 여기 있는 몽고족들이 만든 성이 아니라 과거
의 유물이었다. 그리고 고란고성의 예에서도 알 수 있었지만 어
느 고성이든 비밀 통로는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여기 대막의 성들은 더욱 그랬다.
지상보다는 지하에 생활공간이 있는 경우, 거미줄 갈은 통로
가 없이는 불편해서 살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지옥성으로 변화하면서 새로 공사를 했다고 해도, 토목지학
(土木之學)의 기본상 그런 통로들을 버려 둘 리가 없었다.
최대한 있는 것은 활용하는 것이 기본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 중 누락된 것들, 필요가 없어서 입구만 봉쇄하고
버려진 통로들 중 하나를 지금 걸어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의 방해도 받지 않고 그의 또 다른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지금 무간지옥으로 가고 있었다.
* * *
지옥성 무간지옥.
완벽한 어둠이었다.
마치 먹물 속에 잠겨 있는 것 같은 그런 막막함만이 눈앞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런 어둠 속에 오래 있으면 막상 밝은 곳에 가서도 사물을
볼 수 없는 법이다. 사람이란 애초에 어둠 속에서만 살도록 되
어 있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람이 사는 곳에서는 완벽한 어둠이란 자주
만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는 달랐다.
무간지옥의 미로 속, 폐허처럼 내버려진 통로의 한구석에는
도대체 빛이라고는 구경도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그런 장소가
얼마든지 있었다.
그 폐허 속 돌 틈에 음풍영(陰風影) 형사랑(邢四郞)은 누워
있었다.
야유신 예충의 밑에서 어둠 속에서 싸우는 법에 대해서는 이
골이 나도록 훈련을 받았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지금 같은 경우
는 처음이었다.
오갛 중에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을 완벽하게 앗아가 버리
는 이런 환경 속에 그와 그의 마흔아흠 수하들은 던져져 있는
것이다.
상대는 하나였다.
그리고 적어도 이 상황에서는 천하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가
바로 그였다.
야광중!
그들 음풍대의 대원들은 옥주의 제자 야광충을 상대로 오십
대 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훈련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실전보다도 더 위험하고, 더 의미가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여기서 진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소위 어둠 속에서 싸우도록
훈련받은 그들이 단 한 명에게 졌다는 공전절후의 치욕을 이름
앞에 달고 다니게 되는 것이다.
형사랑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둠 속이라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손상된 자존심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추한 몰골을 만들고
있을 것임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와 그의 대원들은 야광충과의 대결에서 이미 다섯 번이나
졌던 것이다.
야광충이 지옥연무 제이 관문에서 쉬는 보름 사이의 일이었다.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제아무리 어둠을 집으로 삼아 살아온 옥주의 제자라지만 그들
도 허수아비는 아니다.
시각을 잃었을 때 사물을 느끼는 방법은 그들도 훈련받았고,
남못지 않게 경지에 달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움직이지 않기만 해도 그들 전원을 포착한다는
것은 불가눙에 가깝다.
자신의 종적을 드러내지 않고 그렇게 한다는 것은 더욱 어려
울 것이다.
반수 이상이 야광충에게 제압당하더라도 반드시 그 전에는 그
의 위치를 짐작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고야 말았어야 쌨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승리의 비결이며 유일한 길이었다.
그와 그의 수하들은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사흘 이
상은 버틸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과 야광충의 인내심 대결이 될 수도 있었
다. 그 경우는 당연히 그들의 승리였다.
그러나 그들은 졌다.
그것도 다섯 번이나 연속해서 졌다.
형사랑은 야광충이 왜 이런 훈련을 시키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의 광오(狂傲)하기까지 한 자신감이 불쾌해 견딜 수
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하는 그 자신이 너무 싫었다.
'오늘만은……!'
형사랑은 모든 정신을 귀에 집중시키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조
차도 놓치려 하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다.
이렇게 완벽한 고요함도 인간세(人間世)에서는 있기 힘들다.
들리는 것은 호흡을 조정해 평범한 사람의 열 배나 느리게 움
직이는 심장의 느린 고동 소리뿐이었다.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귓속에서 울림 소리가 들릴 것 같은
그런 고요함…….
그의 감각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는 전갈마저도 살지 않는 모양이었다.
벽을 기어가는 움직임마저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그의 심장 소리 이외의 것이 그의 감각에 와
닿았다.
그것은 서늘함이었다.
그는 그의 목에 딸은 그 서늘함이 쇠붙이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일장의 결투에서 그와 그의 수하들이 또 한번 졌다
는 것도……!
"불을 켜도 좋다."
자부심도 기쁨도 담겨지지 않은 차가운 목소리가 형사랑이 다
음으로 느낀 감각이었다.
목덜미에서 서늘함이 사라졌다.
형사랑은 차라리 이대로 죽고 싶은 굴욕감을 억누르며 자리에
서 일어나 불을 켰다.
천리화통의 불빛에 비친 통로 벽을 기대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야광충이었다.
그 외에는 달리 없었다.
"따라와라."
야광충을 따라서 걷고 있는 형사랑의 마음속에는 미로에 깔린
어두움만큼이나 무거운 앙금이 내려 앉고 있었다.
그가 걸어가는 그 길목마다에 무간지옥의 자랑이었던 그의 정
예 음풍대원들이 숨어 있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의 모습에서도 적의 접근을 감지했다는 표정은
없었다.
하나같이 허수아비처럼 누워만 있었던 것이다.
오십 명이 단 한 사람에게 전멸당한 것이다.
음풍영 형사랑은 야광충이 마혈(麻穴)을 제압당해 누워 있는
그의 수하들을 깨우며 통로를 걸어가는 동안 굳은 얼굴로 뒤를
따랐다.
제압당했던 음풍대원들이 모두 일어나 그의 앞에 서자 비로소
야광층은 입을 열었다.
"어둠 속에서 이기는 방법에는 특별한 요령이 없다. 혹시 있
다고 하더라도 너회들이 여태 배우지 못한 것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 어떤 요령도 대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극도로
조용히 움직이고, 극도로 생기를 감추며, 극도로 전신의 감각을
끌어올려 주의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한다."
형사랑과 음풍대원들은 침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입을 벌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요한 통로 속에 야광충의 말만이 감돌다 사라졌다.
"전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나를 이길 때까지는 어떤 진
보도 가치가 없다. 끝내 승리할 때까지는 너희들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내일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버티기를
기대하겠다."
야광충은 어두운 통로를 걸어서 멀어져 갔다.
그 뒤를 형사랑이 따랐다.
"조구는?"
"하루 한 번 식사를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꺾여진 통로를 돌아서자 야광충이 뒤돌아보았다.
"내게 무슨 할말이라도?"
형사랑의 손에서 검광이 번뜩였다.
"수하들을 제대로 훈련시키지 못한 책임을 지겠습니다."
야광충은 얼음같이 차가운 눈으로,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차
가운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책임을 지!다는 건가?"
형사랑은 손에 든 단검을 들어올렸다.
"이런 경우 저는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모릅니다."
야광충의 손이 들렸다.
짝!
형사랑은 그 손에 검을 빼앗기고 다음 순간 뒤로 나가떨어졌다.
뺨을 움켜쥐고 멍하니 바라보는 형사랑에게 야광충이 말했다.
"너 따위의 목숨에 무슨 가치가 있단 거냐? 네 시체로 내게
뭘 하라는 뜻이냐?"
형사랑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너와 네 대원들의 시체 따위는 원하지 않는다. 나는 제
대로 된 수하들을 원한다. 그렇게 될 때까지는 너희들은 죽고
싶어도 죽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너희들이 책임을 지는 유일하
방법이다."
야광충은 다시 돌아서서 걸었다.
형사랑은 말없이 그 뒤를 따랐다.
그 침묵은 그들이 조구의 거처로 통하는 통로에 접어들 때까
지 지켜졌다.
그 다음은 달라졌다.
여전히 침묵은 유지되었지만 종류가 다른 침묵이었다.
형사랑은 방금까지 그를 지배하던 수치심에서 완전히 벗어나
야광충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다.
야광충은 허리를 굽히고 석벽과 통로 바닥에 남은 핏자국을
살펴보고 있었다.
무슨 핏자국인가?
아마도 통로 저 안쪽에서부터 시작했을 둣한 핏자국이 옆으로
꺾여진 통로의 갈림길에까지 혼적을 남기고 이어지고 있었던 것
이다.
통로의 안쪽에는 핏자국이 더욱 선명했다.
선혈이 낭자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통로의 벽과 바닥에는 마치 피가 가득한 주머니를 양손으로
눌러 터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에 피가 튀어 있었다.
그리고 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는 피……!
통로 안에 가득한 피비린내에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형사랑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야광충의 옆을 스쳐 뛰어나가려 했다.
이 통로의 한쪽에 있는 숨겨진 방,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조구
의 안위(安危)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야광충이 팔을 옆으로 들어 그를 막았다.
그는 석벽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형사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야광충이 보는 곳을 봤지만 너무
어두워서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는 야광충처럼 어둠 속에서도 대낮처럼 사물을 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 무슨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야광충은 뒷짐을 졌다. 그리고 말했다.
"불을 켜라!"
불이 켜졌다.
야광충은 핏자국을 가리켰다.
"이 정도의 피를 홀리고도 살아 있을 사람이 있을까?"
없을 것이다.
사람에게 이 정도로 많은 피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하물며 그렇게 피를 홀리고서야!
"그러나 피를 흘린 '무엇'은 흔적을 남기면서 도망을 갔다."
그렇다.
옆 통로로 점점이 떨어진 피는 그렇게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
가 없었다.
"그것이 무엇일까?"
야광충은 석벽을 가리켰다.
"저 흔적을 남긴 것!"
석벽에는 다섯 줄기의 날카로운 자국이 그어져 있었다.
한 치 깊이의 날카로운 자국!
시작선과 끝이 일정하지 않고 중심으로 갈수록 긴 자국이었다.
형사랑은 더듬더듬 말했다.
"발톱…… 자국? 맹수란 말입니까?"
무간지옥에 왜 맹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말하려던 그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있었다.
야광충이 얼마 전에 데려왔다는 맹수 한 마리!
그렇다면 이 자국은 그것이 낸 것이란 말인가?
야광충은 뒷짐을 진 자세 그대로 통로를 걸어가며 말했다.
"내게 표범이 한 마리 있었다. 그걸 여기 풀어놓았지. 누군가
를 지키기 위해서 였는데……, 지키던 것이 저런 흔적을 남겼으
면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
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조구의 방안에 시체는 없었다.
단지 시체로 추정되는 것만이 있었다.
마치 거대한 망치에 눌려 터지기라도 한 것처럼 벽에 납작하
게 붙어 있는 사람의 가죽!
그 주위로는 온통 조각난 내장과 뼈, 그리고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피였다.
"우…… 욱!"
어지간히 처참한 일들을 많이 보고, 겪었다고 자부하는 형사
랑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입을 가리고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첫댓글 즐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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ㅈㄷㄳ
ㅈㄷ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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