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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2일 연중 6주간 토요일[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
제1독서 : 1베드 5,1-4
복 음 : 마태 16,13-19
13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15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16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18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도,
첫눈에 거짓 없다고 칭찬하시던 제자도, 독립운동에 투신하던 제자도 아닌
어부 출신의 단순하고 우직하며 열정적인 베드로에게 교회를 맡기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 이유를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뚜렷하고 분명한 신앙 고백에서 찾는데,
예수님께서는 그 신앙이
바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가르침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의 직무 수행에는 지식이나 인간적 능력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끌리는 신앙이 무엇보다 먼저 요구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교회에는 사목의 큰 책임을 맡는 사람에게
먼저 신앙 고백을 요구하는 전통이 이어져 옵니다.
이미 초세기 교부들이 인정하고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언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확인한 교황의 수위권은
하느님 백성의 ‘친교’인 교회 일치의 중심이자 주교단의 머리로서 가지는 권한입니다.
교황께서 국제 사회에서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시기는 하지만
베드로에게서 이어받은 직무는 행정이나 조직 운영, 또는 정치를 위한 것이 아니며
본질적으로 하느님 백성을 돌보는 일 곧 사목을 위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당신을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교회의 본당 사제요
로마의 주교라고 즐겨 부르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바로 그러한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 그분의 영광에 참여할 사람으로 소개하고,
다른 목자들에게 자진해서, 열성으로, 모범으로 양 데를 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 안에서 공동체를 돌보는 임무를 맡은 모든 이에게 해당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들을 위하여, 특히 교황님을 위하여 오늘 더 기도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구원받고자 하는 인간은 세 가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자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제 말이 아닙니다. 성 토마스아퀴나스의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생각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실 구원 자체를 염두에 두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믿음의 대상도 모르고,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로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을 이야기합니다.
구원 대신 ‘돈’이 자리 잡으면서, 믿음의 대상도 돈을 벌 수 있게 해 주는 것에,
원하는 것도 돈이고, 돈 벌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고
그렇게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로 살면서 분명한 깨달음은
돈이 나를 편하게 해 주기는 하지만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돈, 돈, 돈’ 하면서 돈을 애지중지하던 사람도
돈을 들고서 하늘 나라에 가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모든 것처럼 여겼던 ‘돈’이었는데, 더 소중하다고 할 수 있는 자녀들이
이 돈 문제로 남남보다 더 나쁜 관계로 돌아서는 경우도 참 많이 보게 됩니다.
무엇을 지향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구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해 줄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하늘나라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원해야 하고,
이를 위해 지금 하느님의 뜻인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시어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 베드로가 하늘나라의 열쇠까지 맡을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위를 얻기 위해서, 또 이 세상 안에서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누구를 믿고, 무엇을 원하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 베드로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점을 분명히 알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1독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 5,2.3)
구원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베드로 사도가 보여 주셨던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 영원한 생명을 원하는 마음,
그리고 지금 열성을 다해 기쁜 소식을 전했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살아야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 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드러내 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3중의 고백,
곧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신성을 지니신 분이요,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그리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곧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 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형제와 사랑을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고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교회의 최고 목자로 공경하는 이날
사도들의 후계자들과도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길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하고 대답하자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이 물음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너희에게 내가 어떤 존재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결국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는 질문 앞에서
‘저는 당신의 무엇입니다.’하는 답을 해야 합니다.
성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자신을 ‘주님의 손에 쥐인 몽당연필’로 표현하셨습니다.
연필을 사용하는 것은 주인 몫입니다.
설사 부러지더라도. 예수의 데레사 성녀는 환시를 통해 만난
아기 예수님의 ‘너는 누구냐?’는 질문에 ‘나는 예수님의 데레사’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누구냐?’고 묻는 데레사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데레사의 예수’라고 답해 주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너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물음에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의 연장입니다.”하고 답합니다.
저의 삶의 여정에 많은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와 자비를 베풀어 주신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앞으로도 그러실 것이고 저도 끝까지 주님의 도구로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분의 무엇인지를 생각할 수 있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기를 희망합니다.
텔레비전 시청, 핸드폰 보는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잡지를 보는 시간 중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봉헌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겨야 합니다.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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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택받은 민족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 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 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누구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 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쳤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 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아침 산책길에 가끔 코요테와 같은 동물을 만납니다.
보통은 서로 갈 길을 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저를 보더니 멈추어서 길을 가지 않았습니다.
저도 순간 당황해서 멈추었습니다. 옆을 보니 나뭇가지가 있어서 손에 잡았습니다.
그러자 코요테는 가던 길을 갔고, 저도 나뭇가지를 내려놓고 저의 길을 갔습니다.
문득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저를 향해 다가오는 유혹의 코요테가 많았습니다.
시기, 질투, 욕심, 게으름, 분노, 이기심의 코요테입니다.
저는 아무런 준비 없이 그런 유혹의 코요테를 만났고, 쉽게 넘어졌습니다.
유혹의 코요테를 몰아낼 영적인 나뭇가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좋은 나뭇가지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말씀과 나눔이 있습니다.
기도, 말씀, 나눔의 나뭇가지가 있다면
아무리 강력한 유혹의 코요테가 저에게 다가와도 쉽게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유혹하는 유혹의 코요테가 우리를 보고
무서워서 자기 갈 길을 가도록 영적인 나뭇가지를 준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에는 푸른 녹지와 사막이 있습니다.
녹지는 좋고, 사막은 나쁜 것 같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지구에 사막은 필요하고도, 소중한 존재라고 합니다.
사막의 뜨거운 열기 덕분에 지구의 대기는 흐를 수 있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는 바람을 타고 멀리 아마존까지 도달한다고 합니다.
사막의 먼지에 있는 미네랄 성분이 아마존 나무들을 울창하게 한다고 합니다.
사막에는 많은 지하자원이 있어서 우리의 삶에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지구에 사막이 없고 모두 울창한 녹지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면 지구에 큰 문제가 발생한다고 합니다.
지금 대기 중의 산소는 20%인데 만약 사막이 모두 녹지가 되면
산소의 농도가 40%까지 높아진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지구에는 엄청난 재앙이 초래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구에 그런 환경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석탄, 석유는 모두 그때 화재로 인해서 생겼다고 합니다.
좋은지, 나쁜지 결정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의 자리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생전에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자리를 내세운 적이 없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고, 동생 안드레아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을 만난 뒤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였습니다.
그런 베드로를 교회는 사도들의 으뜸이라고 생각하였고,
기꺼이 베드로에게 사도좌의 권위를 내어주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사랑하였고,
죽기까지 예수님의 뒤를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3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능력과 재능에 따라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겨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서 우리는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고 고백합니다.
베드로 사도를 계승하는 교황은 또한 예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한으로
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천국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지금 이곳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나누는 이곳이 이미 천국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셨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조건으로 용서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용서가 없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주장하고 내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권위는 유리와 같아서 쉽게 깨지고, 상처를 받기 쉽습니다.
진정한 권위는 아낌없이 내어주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 권위는 불의와 폭력 앞에서 위축되지 않으며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나기 마련입니다.
나의 자리가 없다고 생각하신다면, 나의 권위를 알아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된 권위가 아닙니다. 나의 체면과 나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권위일 뿐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참된 권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 나눔과 희생으로 사라지지 않는 우리들의 자리를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그 자리가 푸른 녹지라면 열매를 맺으면 좋습니다.
그 자리가 뜨거운 사막이라면 정화와 단련의 기회로 만들면 좋습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도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계속됩니다.
벳사이다를 떠나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는,
생각만 해도 마음 든든한 수제자,
언제나 듬직한 반석 같고 큰 바위 같은 제자 베드로를 축복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 17-18)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사도에게 막중한 임무, 엄청난 역할을 수여하십니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
정말이지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셨습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 하늘 나라의 열쇠를 쥐고 있다는 것은,
세상 전부를 쥐고 있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 사도는 존재 자체로 우리 후배 신앙인들에게
큰 위로와 희망을 선물로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손에 쥔 분으로,
그 어떤 시련과 박해의 칼날 앞에서도 눈 한번 까딱하지 않았던 분,
넓직한 반석같이 든든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에게도 한때 치명적인 과오, 치욕적인 흑역사가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과 더불어 참 제자가 되기 전,
그는 여러 측면에서 미성숙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베도로 사도의 성격은 과격했고 불같았으며, 마치 럭비공 같아 어디로 튈줄 몰랐습니다.
때로 조용히 있었으면 50점이라도 딸텐데,
괜히 먼저 나서다가 스승님으로부터 호된 질책을 받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수난의 시기, 그는 스승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며 배반하는, 결정적 과오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인재 양성의 귀재이신 예수님의 탁월하고 예술적이며 인내로운 단련에 힘입어,
베드로 사도는 그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참 제자로 거듭납니다.
작은 바람에도 쉼 없이 흔들리던 나약한 갈대 같았던 베드로는
그 어떤 시련과 고초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큰 바위로 재탄생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베드로 사도는 매일 새벽닭이 울면
일어나 ‘수제자 배반 사건’을 떠올리며 크게 울었답니다.
낮 동안에도 틈만 나면 송구한 마음에 울고 다녔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의 눈자위 주변은 늘 붉게 물들어있었으며, 짓물러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베드로 사도는 오늘 우리에게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이왕이면 작은 모난 돌멩이가 아니라,
크고 든든한 반석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 보시고 기뻐하시고 흡족해하실 반석,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편히 앉아 쉬고 갈 수 있는 그런 반석이 되기 위해,
뾰쪽하고 모난 부분들을 갈고 또 갈아야겠습니다.
key man에게 필요한 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위인설관(爲人設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지 않은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권력형 비리와 관련 있는 말이지요.
필요 없는데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고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떤 직위에 있게 되면 그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다는 뜻인데
환경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고 노력으로 그리되기도 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교회와 교회의 자리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시겠다고 하시고,
교회의 자리들에 필요한 사람도 오늘 당신이 임명하시며,
임명하신 다음엔 자리에 필요한 힘을 주십니다.
사실 베드로를 보고 또 베드로가 적합하여
당신 교회를 그 위에 세우시기로 작정하거나
그를 교회의 기초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교회설립의 Key man이 아니라는
곧 열쇠를 쥔 인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교회는 당신이 세우시겠다고.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Key man으로 삼으시고 만드시겠답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그에게 열쇠(key)를 주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열쇠는 본래 베드로의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주셔서 쥐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과 의탁과 순종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이 자리에 앉히시고
주님께서 그 자리에 필요한 힘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의 교회가 아니니 내가 너무 걱정하지 않고
주님께 현재와 미래를 맡기겠다는 자세입니다.
프란치스코가 한번은 작은형제회의 미래와 관련하여
크게 의혹에 휩싸인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게 번민하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의 기도에 나타나시어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프란치스코야, 누가 이 수도회를 세웠냐? 너냐? 나냐?
누가 이 수도회의 주인이냐? 너냐? 나냐?”
그때 프란치스코는 자기가 수도회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때 이후로 자기가 세운 수도회마저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리고 맡겼습니다.
그리고 내 뜻대로 교회와 공동체를 끌고 가려는 자세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님의 뜻대로 이끌려는 순종의 자세가 필요하고
형제들의 뜻이 주님의 뜻이라는 믿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