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9장 … 어느 날 밤
고란고성(皐蘭古城).
그는 사막의 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다.
끝없이 광막한 대막의 한가운데에 그렇게 신기루(蜃氣樓)처럼
서 있었다.
조훼는 자신이 정말 신기루를 보고 있지는 않은지 의아했다.
달라 물든 모래언덕에 그림처럼 서 있는 사내!
그에게서는 그렇게 비현실적인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앗!"
짧은 외침을 발하고 복군무가 말을 달려 모래언덕을 달려 올
라갔다.
사내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조뤠는 자신이 왜 그 생각을 않았을까 의아해 했다.
다른 때에는 항상 그가 먼저 하던 일 아닌가!
오늘처럼 이렇게 대열의 선두에서 말을 달리고 있을 때는 더
욱 그랬다.
어쩌면 달빛과, 모래언덕과, 그 아래 선 사내의 모습에 홀렸
을지도……!
그는 내심 자책하며 말의 배를 걷어찼다.
그러나 이미 복군무는 모래언덕을 거의 다 올라간 참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혈문룡이 빨랐다.
어느새 혈문룡이 거대한 체구의 흑마에 올라탄 채 모래언덕
위에 서 있었다.
조훼가 놀란 것은 혈문룡이 그 사내를 아는 둣하다는 것이었다.
혈문룡은 사내를 향해 반갑게 말했던 것이다.
"오랜만이군!"
사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혈문룡의 말에 대답을 대신했다.
수려한 용모의 젊은 사내였다.
무엇보다 그를 신비하게 보이도록 한 것은 보석처럼 빛나는
눈이었다.
그러나 사물을 볼 수 없는 고정된 눈이었다.
가까이 가 보고서야 조뤠는 그가 맹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그리고 그의 온몸에 흐르는 비현실적인 분위기의 정체도!
그것은 달관, 혹은 초연함이었다.
그는 오래언덕 위에 서 있었지만 마치 구름을 밟고 있는 둣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왼손에 든 장검 한 자루조차 현실의 물건같이 보이지가 않는
거리감이 사내와 그들 사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혈문룡이 묻고 있었다.
"여태 저기 있었나?"
그가 가리키는 것은 고란고성이었다.
지금 그와 흑룡사의 백여 혹룡기사들이 가고 있는 곳!
원도살은 거기 고란고성에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할 것을 제시
했다.
혈문룡도 이미 알고 있듯이 벤야시리 군은 애초에 흑룡사를
겨냥한 것은 아니었다.
그날의 사태는 흑룡사가 억울하게도 천산파의 내부분쟁에 휘
말렸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특히 천산노조 로부 옹고트와 다른 네 장로들 사이의 분쟁이
었다.
그렇다면 복수의 칼날은 누구를 향해야 하는가?
로부 옹고트였다.
혈문룡이 애초에 벤야시리 군을 복수의 대상으로 잡은 이유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요컨대 로부 옹고트가 지금 어디 있느냐가 문제인 것이다.
그날 대군을 몰고 온 것으로 보아 그는 벤야시리 군에서도 중
요한 지위에 있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 혈문룡의 추즉이었다.
그런 그를 치려면 당연히 벤야시리 군을 쳐야 했다.
설사 그들이 벤야시리 군을 건드리지 않으려 해도 벤야시리
군이 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다.
원도살의 생각은 달랐다.
벤야시리 군에서 중요한 지위에 있는 자라면 그도 안다.
로부 옹고트가 아니라 아루타이였다.
로부 옹고트의 제자이자 현천산파의 장문인, 벤야시리의 오늘이
있게 해 준 장본인, 현몽고 제이(第二)의 세력자가 바로 그였다.
그러나 로부 옹고트가 벤야시리 군과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
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제자가 벤야시리 군에서 그런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니
그도 어떤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날의 일로만 미루어 짐작해도 능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벤야시리 군을 건드려서 그가 나올까?
그를 끌어내기도 전에 혹룡사가 전멸하는 것은 아닐까?
원도살의 결론은 그것이었다.
--로부 옹고트를 찾아서 직접 쳐야 한다!
어떻게 찾을 것인가?
--고란고성에서부터!
로부 옹고트를 제외한 천산파의 인물들, 여문량, 화영은 그가
현재 있는 곳을 알지도 모른다.
설사 그렇지 않아도 거기밖에는 단서가 없다.
그날 혈문룡들이 만났던 괴물들은 당연히 벤야시리의 정규군
은 아닐 것이다.
차마도 로부 옹고트가 만든 것은 아닐까?
혈문룡은 그때서야 그것을 긍정했다.
여문량 일행익 대화를 들은 것으로는 그 괴물들이 로부 옹고
트의 작품이라는 것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그런 괴물들과 관련된 어떤 일을 하
고 있을지도 모른다.
혹은 벤야시리 군과 관련된 극히 비밀스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만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
이라면 벤야시리 군과 직접 싸우지 않아도 되고, 그것은 복수의
성공률을 높이는 것이 될 것이다.
혈문룡은 그 분석에 동의했다.
그 결과가 지금 고란고성을 향해 혹룡사의 전인원이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니 여기서 화영을 만날 줄이야!
고란고성이 멀리 바라보이는 대막의 모래언덕 위에서 그를 만
난 것이다.
혈문룡은 물었다.
"뭘 하고 있었나?"
화영이 무심히 대답했다.
"그냥……!"
"그냥?"
"그냥 서 있었어!"
"흑시……."
혈문룡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물었다.
"날 기다린 것인가?"
"음!"
화영이 긍정도 부정도 아닌 콧소리를 내었다.
혈문룡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전에도 이상한 녀석이었지만 지금 보니 더 이상해진 것 아
닌가!
손을 내밀어 만져도 아무것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함이
화영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비현실감……!
문득 혈문룡은 화영이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한 단계 더 발전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여문량에게서 느껴지던 범접하기 어렵다는 느낌
이 지금 화영에게서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자기 스승을 따라잡은 것인가?'
그는 다시 물었다.
"여노인은? 그러니까…… 네 사부!"
화영은 말없이 손을 들어 멀리를 가리켰다.
혈문룡이 그 손끝을 보았지만 어디를 가리키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천산으로 돌아가셨다는 뜻인가?"
"그보다 멀리……!"
화영의 손가락은 달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달!
"달 속에?"
혈문룡은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그러나 화영의 표정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화영은 전혀 농담을 하는 것같이 보이지 않았다.
'죽었다는 말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혈문룡은 더 이상 그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 뭘 할 건가?"
그 말을 듣고서야 화영이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미소를 지었다.
혈문룡은 그 순간에야 그가 예전에 보았던 그 화영이라는 느
낌이 들었다. 왠지 익숙한 느낌, 미소였다.
방금까지 그림 속의 인물과 얘기하다가 갑자기 현실의 세계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화영은 말했다.
"사부님이 그를 찾아가라고 하셨어!"
"누구?"
"야광충! 그리고……."
화영은 서쪽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로부 옹고트!"
그 말이 흑룡사의 진로를 바꾸어 놓았다.
* * *
무간지옥 조구의 방.
그는 공중에 세 치 정도쫌 떠 있었다.
가부좌 튼 그의 엉덩이가 누가 손으로 떠받들기라도 한 둣이
그렇게 공중에 떠 있는 것이다.
방안은 금빛으로 휘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온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금빛이었다.
금빛을 쏟아내는 라마승, 황룡이었다.
황룡은 반쫌 뜬 눈으로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이 공중에 뜬 그대로 한 바퀴 옆으로 회전했기 때문에
굳이 고개를 돌릴 필요가 없었다.
방안은 금빛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전혀 화려하게 보이지 않
았다.
방안 가득한 핏빛이 금빛을 상쇄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쪽 벽에 늘어붙다시피 한 사람의 가죽!
그가 원래 입었을 회색 옷과 섞여 구분하기조차 힘든 가죽이
었다.
방안은 야광충과 형사랑이 방금 보고 칸 그대로 전혀 변함이
없었다.
황룡은 그 처참한 모습을 보고도 토하지 않았다.
눈 하나 꿈쩍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조구의 잔해(殘骸)를 자세히 뜯어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철판 같은 것으로 조구를 벽에 밀어붙였다면 저런
모습이 될 것 같았다.
그것도 엄청난 힘으로……!
뼈대는 으스러졌는지 아니면 벽에 박혔는지 흔적도 없고, 가
죽만이 터진 채 그대로 벽에 붙어 있는 것이다.
살은……?
내장, 피와 함께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황룡의 눈이 조구의 온몸을 훌어 가다가 허벅지에서 멈주었다.
거기만 다른 곳과 달랐다.
다른 곳은 그대로 눌려서 터진 혼적이었지만 거기만은 예리한
물건으로 베어진 둣한 선이 보였다.
아마 손바닥 둘을 합친 정도의 너비……?
황룡은 그 흔적을 유심히 보다가 돌아섰다.
정확히 말해 그의 몸이 공중에서 빙그르르 돌아 문쪽을 향했다.
언제나 담담한 표정이었던 그의 얼굴에 지금은 옅은 회색과
약간의 흥분까지 떠올라 있었다.
드디어 그가 찾던 것을 찾은 것이다.
양인장이 아니었다.
그게 그에게 들어왔어야 될 것이긴 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것이 아니었다.
황교사대금기지학(黃敎四大禁忌之學)중 가장 무서운 것, 천
강마벽(天 魔壁)이 사용된 흔적을 발견한 것이다.
그것을 찾아서 회수해 오는 것이 그가 교단(敎團)으로부터 받
은 또 하나의 임무였다.
지옥성 안의 누군가가 그 가공할 살인지학(殺人之學)을 익첬다.
그를 찾아 제거하거나 교단인 황룡사(黃龍寺)로 데려가면 그
의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누가 조구를 죽였는가?
그것만 알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공중에 뜬 채로 천천히 유영하둣 날아 무간지옥
의 통로를 빠져 나갔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금팡이 통로 저편으로 사라지자
석벽에서 한 사람이 튀어나왔다.
붉은 가사의 라마승!
지옥칠살 중의 한 명, 서열 삼위인 혈사였다.
그는 조구의 방을 보고, 다시 황룡이 사라진 방향을 보더니
한 손을 들었다.
잠시 후, 그의 몸은 바닥에 눌러 붙은 핏자국 위로 녹아들 듯
이 사라져 버렸다.
* * *
지옥성 야무방(也無妨).
고통은 사람이 가는 곳, 어디든지 따라간다.
고통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통을 덜어 주는 최고의 약이자 유일한 약은 오직 술이다.
만일 술이 없었다면 세상은 좀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사람이 가는 곳 어디든지 술 또한 따라간다.
여기, 지옥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은 고통받는 사람이 차고 넘쳐, 술 또한 그렇게
넘쳐 흘렀다.
성곽 북쪽 안벽을 따라 홅으로 쌓은 사각형의 집들이 사람 하
나 지나갈 공간만 두고 촘촘히 서로 기대어 서 있었다.
한낮에도 이곳은 안개 낀 둣 뿌옇게 죽어 있는 모습만을 보
여 준다.
침몰한 배가 보여 주는 음울함이 아마도 이런 것일 게다.
사람의 종적도, 밥을 짓는 연기도, 노는 아이들의 소리도 들
리지 않는 죽은 거리가 이곳이었다.
그러나 밤이 되면 이 죽은 거리에 생기가 넘쳤다,
토옥(土屋)의 문 입구에 붉은 등이 걸리고, 안에서는 요염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술향기,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 홀러 나왔다.
물론 술과 여인을 찾아 이곳을 찾은 사내들의 거친 웃음과 욕
설도 이곳의 빠질 수 없는 부분이었다.
이곳에서는 은자만 있다면, 누구든 원하는 술을 마실 수 있
고, 원한다면 여자도 안을 수 있었다.
가장 인간을 자극하는 쾌락들을 누릴 수도 있었다.
이곳을 지옥성 사람들은 야무방(也無妨)이라고 불렀다.
그 중 환락굴(歡樂窟)은 야무방 최대의 주점이었다.
지상과 지하로 뚫린 넓은 팡장과도 같은 이곳에는 지금 사람
이 꽉 들어차 저마다 떠들고 있어서 시장터를 방불케 했다.
지옥성에 있는 다른 주점과 갈이 환락굴도 물론 술만 팔지는
않았다.
돈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기 환락굴에서도 할 수
있었다
여자와 도박이었다.
처음에 그 모습은 입구의 몇몇만 보았다.
그러나 이내 환락굴 일층 명실공한 주점에 자리잡고 앉아 술
을 기울이고 고기를 뜯던 모두가 그 모습을 보았다.
주점 안이 조용해졌다.
주점 안에 그야말로 특이한 용모, 특이한 분위기의 남녀가 들
어섰기 때문이었다.
여인은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사내들의 시선을 뗄 수 없도록
만들고 있었다.
방심한 것처럼 오호한 표정에 호리호리한 몸매가 묘한 매력으
로 사내들의 가슴에 깊이 파고들고 있었다.
바로 월몽영이었다.
그녀와 같이 들어선 야광충 또한 중인들의 시선을 끌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 한번이었다.
창백한 얼굴에 눈부신 은발이 특이해 눈이 절로 향해졌지만
한 번 본 사람은 누구도 다시 그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가슴이 졸아드는 것 같은 위압감이 그
의 무표정한 얼굴에서 픗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포였다.
지옥성의 거친 사내들을 두렵게 만들어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게 하는 무엇이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고 있었다.
그들은 낯선 곳에 처음 와 보는 사람처럼 들어와 잠시 어색하
게 서 있다가 그들을 보고 달려온 사십줄의 점소이의 안내를 받
아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처음에는 취객들이 낮은 목소리로 수근대다가 잠시 후에는 다
시 소란스럽게 떠들어대어 환락굴은 원래의 분위기를 되찾았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앉아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는 겉으로 표현은 않았지만, 사실 이런 곳에 오게 된 것이
싫었다.
단지 낮에 월몽영과 약속했기 때문에 온 것일 뿐이었다.
술도 마찬가지였다.
그리 좋아하지도 않았고, 마셔 본 적도 없는 것이었다.
월몽영이 부어 주니 받고, 마실 것을 권했기 때문에 마실 따
름이었다.
그녀도 사실 이런 곳은 처음인 모양이었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어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둘째치고,
술을 받아들고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겨우 한 모금도 넘기지 못
하고 기침부터 터뜨린 것이다.
'이 여인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곳에 나를 데려왔을까?'
야광충은 내심 궁금하게 생각했지만 묻지는 않았다.
다른 생각이 있었다면 자연히 밝혀질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월몽영은 한 잔을 입에 대 보고는 그 맛에 질렸는지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반쫌 찬 술잔만 만지작거리고 앉아 있더니 갑자
기 물었다.
"저 여자 알아?"
야광층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사람들로 들어 차 소란스러운 주점 저편에 눈에 익은 여인이
보였다.
붉은 읏에 무표정한 모습!
어쩐지 도사린 암고양이 같다는 느낌을 주는 여인, 혈부용이
었다.
"아까 전부터 당신만 보고 있던데?"
그녀도 남자와 같이 와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이십대 후반의 청년, 몽고족이었다.
그러나 야광충의 시선은 청년보다는 그녀에게만 고정되어 있
었다.
그녀 역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앉은 청년이 보통 정도의 자존심만 있어도 반드시 화를
내고야 말았을 만큼 노골적인 눈빛이었다.
월몽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수고양이를 기다리는 눈인걸. 그 수고양이가 누군지는 몰라
도……!"
그녀가 말을 하기 이전에 야광충도 이미 그렇게 느끼고 있었
다.
혈부몽은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월몽영이 그를 수고양이라고 빗대어 조롱했다는 것을 알
면서도 상대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는 그 말도 별로 틀린 것 같지는 않았다.
월몽영이 다시 그의 귓전에 말올 던졌다.
"당신을 데리고 온 건 만나게 할 사람이 있어서야!"
혈부용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앞에 앉은 청년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녀만 어디로 갔
다가 오려는 것일까?
혹은 그녀가 먼저 떠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당신이 꼭 만나 봐야 할 중요한 인물이야!"
혈부용은 출구가 아니라 반대편에 있는 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 앞에 서서 다시 한번 그를 돌아보았다.
그 눈빛의 의미를 야광충은 생각했다.
"지금 가 볼까?"
혈부용이 문을 열고 나갔다.
야광충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후에!"
그는 월몽영은 바라보지도 않고 짧게 말한 후, 혈부용이 나간
문을 향해 걸었다.
그가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며 월몽영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둣한 표정!
그녀는 그대로 자리에 앉아 술잔을 손가락 끝으로 잡고 돌리
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술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려다가 멈칫하더니, 짧은 한숨
을 쉬었다.
"오백 번만 더 세자!"
그러나 그녀는 백 번만 더 세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야광충과
그 전에 혈부용이 나갔던 문으로 다가갔다.
문 밖은 좁은 통로였다.
그리고 그 한편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야광충은 문을 나서서 잠시 멈칫하다가 계단을 향해 걸었다.
계단의 입구에 붉은 손수건이 떨어져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 연꽃이 새겨져 있는 붉은 손수건!
그는 그것을 집어 들어 코에 대었다.
손수건에서는 향기가 났다.
그가 처음 맡아 보는 향기였다.
그는 손수건을 접어 품속에 넣고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자 도박장이었다.
천장을 받친 돌기둥들이 줄지어 서 있는 사이로 도박판들이
늘어서 있다.
그 도박판들을 중심으로 숱한 군상들이 돈과 승부에 탐닉해
악머구리떼처럼 부글거리고 있었다.
위층의 주점과 다른 것은 술을 마시는 자들이 긴장을 풀고 있
는데 반해 여기서는 오히려 극도로 긴장감을 쌓고 있다는 것 정
도, 각자의 세계에 열중해 있는 것은 서로 마찬가지였다.
야광충은 그 도박장 귀퉁이에 나 있는 빈 공간을 가로질러서
또 하나의 계단으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망설일 것이 없었다.
그 계단으로 내려가는 혈부용의 뒷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걸음을 늦추어 그를 기다린 것일 게다.
이렇게 그녀를 따라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왜 그녀를 따라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사실은 그런 것은 생각
하기도 싫었다.
그저 이 순간은 그녀를 따라가는 것에만 전념하고 싶을 뿐이
었다.
그렇게 내려간 지하에는 개미집처럼 복도들이 뚫려 있고, 그
복도 양쪽우로 문도 없는 방들이 따닥따닥 붙어 있었다.
야광충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얇은 천 하나씩 드리워진 그 방안에서 픗기는 냄새와 소리들
로 이곳이 뭘 하는 곳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여기는 바로 매음굴(賣淫窟)이었다.
저 많은 방 하나하나에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여인들이 하
나씩 들어앉아 있는 것이다.
도박장 구석에 이곳과 통하는 통로가 있다는 것도 이상한 일
은 아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을 하고, 생각이 나면 매음굴에 내려와 땀
을 홀리고…….
그럴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 놓은 곳이 바로 환락굴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매음굴의 복도 저편으로 붉은 옷자락 하나가 사라지는 것
이 보였다.
야광충은 걸음을 빨리 해 그 뒤를 따랐다.
복도를 돌아서자 붉은 옷자락은 한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단지 그리 두껍지 않은 휘장 하나로만 가려진 방이었다. 그러
나 안은 보이지 않았다.
복도에 밝혀진 등불에 비해 방안은 어둡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앞에서 야광충은 멈추어 섰다.
여태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그의 머리로 밀려들
어왔다
혈부용은 왜 여기 매음굴로, 그리고 이 방으로 온 것일까?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니었을가?
아까 그를 본 그 눈빛이 그를 부르는 눈빛이 맞았을까?
혹시 아니라면……?
지금 그가 따라온 그 붉은 옷자락이 그녀의 옷자락이 맞을까?
혹시……?
그의 생각은 더 진행되지 않았다.
휘장 사이로 하얀 손 하나가 나오더니 그의 손을 잡아 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방안은 어두웠다.
그러나 야광충은 별빛처럼 반짝이는 두 눈을 볼수가 있었다.
그 눈빛, 혈부용의 것임이 분명한 두 개의 눈빛은 그의 눈 바
로 앞에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점점 가까워졌다.
'이렇게 키가 크지는 않을 텐데……?'
야광충은 자신이 직면하게 된 사태와 별로 관계가 없는 엉뚱
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콧가에 향기가 풍겨졌다.
아까 주웠던 손수건에서 풍기던 바로 그 향기였다.
입술 위로 촉촉한 무엇인가가 닿았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그리고 달콤한 감촉이었다.
야광충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어루만졌다.
손길은 그를 당기고 있었다.
톡,톡!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혈부용이 그를 안고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야광충은 두 손을 내리고 빳빳하게 굳어서 그녀의 손길에 기
울어지둣 따라가고 있었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발소리로 보아 그녀는 발끝으로만 걷고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눈빛이 그의 눈 바로 앞에 있었던 것은 그렇게
발끝으로 서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녀의 팔에 안긴 채 푹신한 침상 위에 넘어지고 있었다.
조구의 시체가 갑자기 그의 눈알에 떠올랐다.
왜 이런 때에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일까?
혈부용은 그를 안고 침상에 누운 채 가만히 있었다.
야광충은 그녀의 몸 위로 깔아뭉개둣 누워 있었지만 역시 가
만히 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귓가에 들려 오고, 숨결이 입가를 간지럽히
고 있었다.
'조구는?'
야광충은 필사적으로 생각쌨다.
'누가, 왜 죽였을까?'
혈부용이 몸을 움찔 들어을리는 둣했는데 아니었다.
단지 그녀의 손이 그의 가슴팍으로 파고들고 있었을 뿐이었다.
'조구를 죽일 이유를 가진 자는 많다. 너무 많아서 살인자를
짐작할 수조차 없을 정도지!'
혈부용의 손이 그의 허리띠, 척혈구절대를 풀고 있었다.
일반적인 허리띠라면 금방 풀었겠지만, 척혈구절대는 달랐다.
어디를 매어 놓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걸어 놓은 것도 아니
었다.
그녀의 손은 한참이나 만지고만 있을 뿐 풀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아니 거의 없다
고 봐야겠군! 들어 보지도 못하던 살인방법이었다.'
차칵!
혈부용이 제대로 찾았다.
척혈구절대의 머리 부분에 돋아 나와 있는 장치를 누르면 풀
어지는 것이다.
그녀의 손은 이제 야광충의 윗도리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몽고의 옷6!는 읏고름이 없다.
있어도 거의 장식용이었다.
그저 허리띠를 풀고 위로 해서 벗는 것이다.
'그 무공을 쓰는 자가 하나 더 있군! 양인장을 제대로 쓰는
자를 찾으면 그가 바로 범인일 것이다.'
그의 윗도리가 가슴 위까지 올라갔다.
그때, 야광충이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
그는 혈부용의 양손목을 잡아 침상에 누르고, 상반신을 들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두웠지만 그는 충분히 볼 수 있었다.
발그레한 흥조를 띤 혈부용의 얼굴, 그러면서도 눈을 동그랗
게 뜨고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그 모습을……!
야광충의 머릿속이 다시 텅 비어 버렸다.
그는 무너지듯 그녀의 위로 몸을 눕혔다.
그녀는 뜨거웠다.
검은 눈동자 깊숙이 숨은 유흑의 불길이 그랬고, 붉은 입술,
하얀 피부, 그의 손을 잡은 작고 부드러운 손이 역시 그렇게 뜨
거웠다.
그녀의 속살과, 한 손에 들어오는 작으면서도 단단한 젓가슴
과, 그의 허리를 감아 오는 하얗고 긴 다리와……!
그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하고 있었다.
그녀의 짧고 억눌린 듯한, 그러나 참을 수 없이 발해지는 탄
성을 귓가로 들으며……!
종리매는 낯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매음굴이란 곳이 원래 억인과 같이 들어와 서 있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더구나 두 사람이 다 알고 있는 어떤 사람들의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는 더욱 아니엇다.
그는 차마 바로 보지는 못하고 곁눈으로 월몽영의 표정을 훔
쳐보았다.
평소처럼 오호할 뿐이었다.
단지 평소보다 약간은 반짝인다 싶게 보이는 눈빛은 휘장 너
머 방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한 호기심일까, 아니면 그냥 통로
의 불빛에 반사되어서일까 몰랐다.
그는 속으로 약간은 의아하게 생각했다.
'소주인을 쫓아하는 것이 아니었나?'
만약 그렇다면 안에서 야광충과 혈부용 사이에 벌어지는 일을
짐작하면서도 저렇게 태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야광충을 좋아한다면 말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도대체가 이런 소리를 남자와 같이 들으면서도 태연한 여인은
어떤 여인일까?
'순진한 건지, 아니면 무감각한 건지……?'
종리매는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휘장이 열리고 혈부용이 먼저 나왔다.
뺨이 약간 붉어진 것을 제외하면 그녀는 평소와 같이 무표정
했다.
휘장의 바로 밖에 서 있는 그들을 보고도 그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종리매와 월몽영을 무감동하게 바라보며 그 옆을 스쳐
지나갔다.
야광충은 한참이나 더 있어서야 나왔다.
그의 표정 역시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여전히 차갑고 냉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휘장 밖에 서 있는 두 사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같이 그를 기다린 이유를 묻는 빛이었다.
월몽영이 말했다.
"이 사람을 따라가면 될 거야!"
그녀는 돌아서서 사라져 갔다.
야광충은 종리매를 바라보았다.
"안내해 드리습니다."
종리매가 돌아서서 걸었다.
그들은 좁은 복도를 걸어서 계단을 올라 다시 도박장으로 들
어갔다.
여전히 열기가 넘치는 도박장이었다.
종리매쓴 그를 도박장 한구석에 있는 문으로 안내했다.
붉은색이 칠해진 철문이 그들의 효에서 열렸다.
십여 명의 장한이 방안에 앉아 있다가 그들을 맞이하는 것처
럼 일어섰다.
중앙의 탁자에 마작패(麻雀牌)가 흐트러져 있는 것으로 보아
한참 마작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들이 마작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패들의 배열이 그랬다.
마작을 하는 척하느라 대충 모양만 늘어눙았다는 것이 확연했
다. 한 자리에서는 점수가 났는데도 쓸데없는 패를 끌어다 놓고
있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그 자신일 것이다.
이 방안에 감도는 긴장감은 도박판에 있기 마련인 후끈한 열
기와는 다른 긴장감이었다.
야광충의 등뒤에서 철문이 굳게 닫히고, 누군가가 쇠빗장을
가로질러 놓는 둣 신경에 거슬리는 소음이 났다.
야광충은 다가오는 장한들의 선두에 선 뗬 사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음명귀 가오륙, 그리고 이빨이 왕창 나가 버린 두 사람, 색명
귀와 요풍귀였다.
하번 부러져 나간 이빨을 다시 해 넣는 방법은 없으니 그들은
아마 살아 있는 동안은 영영 그렇게 합죽이로 살아야 할 것이다.
'걸어다니는 걸 보니 대충 나은 모양이군!'
야광충은 혈부용퍄익 혼동스러웠던 일어 한 생각을 뒤로 미
뤄 두고 눈앞의 일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되찾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졌을 것임이 분명한 세 사람과 그 일당들을
앞에 두고도 위협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들에게서는 살기를 느낄 수 없었다.
희미한 적의(敵意)정도는 색명귀와 요풍귀에게서 느껴지긴
했지만…….
종리매와 그는 그들의 사이를 태연하게 뚫고 지나가 방 한구
석 모퉁이에 섰다.
바닥에 깔린 나무판을 들추자 다시 아래로 내려가는 사다리가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내려갔다.
가오륙의 옆에 서 있던 삼십줄의 사내가 그들이 완전히 내려
간 후 혀를 찼다.
"대단한 강심장이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우리들 사이를
지나가다니!"
가오륙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내가 이미 말했잖은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인물
이라고……!"
또 한 사내가 색명귀와 요풍귀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자네들이 보복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은데, 그만 원념
을 푸는 것이 신상에 이롭겠군!"
색명귀 하석이 노한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도모하면
그도 편지만은 않을 것이오! 사람을 그렇게 무시하지 마시오!"
그 사내는 하석의 반응이 의외로 격렬한 데 놀랐는지 주춤 물
러서는 빛을 보였다.
"너무 화내지 말게! 내 말은 그저…… 한패가 될지도 모르니
분기(憤氣)를 달래라는 뜻으로……!"
하석은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아니라는 것이 결정되면 나는 정말 목숨을 걸고 그를 해(害)
할 것이오!"
이때 누군가가 손뼉을 쳤다.
"자, 이제 시작하자!"
다른 누군가가 엄살부리둣 중얼거렸다.
"난 요즘 몸도 안 좋으니 너무 세게 때리지 말게나들!"
조용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다음 순간, 방안은 거친 욕설과 물건 부서지는 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방금까지 도란도갈 얘기를 나누던 그들이 갑자기 싸움을 벌이
기 시작한 것이다.
도박장에서 싸움판이 벌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고, 누군가를
불러 몰매를 주는 것 또한 이상한 일은 아니다.
더구나 색명귀들이 야광충에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은 지옥
성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 헙공을 했다 한들 의심을 품는 사람
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을 안 열어 준다고 해도 말이다.
종리매와 야광충이 내려간 지하는 다시 매음굴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아까 그가 혈부용과 갔던 곳과는 달랐다.
어쩌면 같은 곳이었을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싯이 다른 것은
알 수 있었다.
종리매는 구석에 있는 큰 방으로 그를 안내했다.
그곳은 제법 장식도 되어 있고, 문도 달려 있었다.
그러나 다른 아무것도 없었다.
방안에는 단지 침상 하나만이 있을 뿐이었다.
보통사람 열 명은 충분히 누울 수 있을 둣한 침상에 속이 횐
히 비치는 망사의판 걸친 여인이 누워 있었다.
그런데도 별로 요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녀가 사
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비대했기 때문이엇다.
홉사 코끼리가 한 마리 비스듬히 누워 있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종리매가 그녀를 가리켰다.
"현현소녀(玄玄素女)! 이 환락굴의 여주인이십니다."
현현소녀라 불린 여인이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뜨고, 어른
의 허리만큼이나 굵은 팔을 들어올리려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녀의 온몸에서 살집들이 출렁거렸다.
그것이 인사였다.
야광충은 무표정하게 고개만 까닥거려 보였다.
그는 일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여인과 아이, 그리고 노인을 경계하라는 말이 강호에는 전해
온다.
이 여인은 남보다 몇 배로 특이하니 몇 배로 경계해야 할 여
인일지도 몰랐다.
종리매가 어색한 표정으로 그의 소매를 잡았다.
"올라가시죠!"
야광충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 방안 어디에 을라갈 곳이 있는가?
그의 눈살은 종리매가 침상으로 을라가 현현소녀의 옆에 눕는
것을 보고 더욱 찌푸려졌다.
종리매가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사정은 나중에 알게 되실 테니 일단 을라오십시오!"
야광충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한마디 던져 물었다.
"각오하고 하는 일이냐?"
종리매는 잠시 그를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진작에 그 정도는 생각해야 했었다.
야광충을 이 정도로 귀찮게 하고 별것도 아닌 일이었다는 것
이 밝혀지면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사전 설명도 하지 않았지 않은가!
그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고개를 2덕였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각오도 없이 제가 소주를 모시고 왔겠습니까?"
야광층은 종리매의 옆에 누웠다.
현현소녀가 힘겹게 손가락을 움직여 침상의 한 부분을 누르자
침상이 한 바퀴 완전히 뒤집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침상 위에는 현현소녀 혼자뿐이었다.
야광충은 돌바닥 위로 소리도 없이 내려섰다.
옆에서 미세하게 들리는 소리는 종리매의 것인 모양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금 그가 떨어져 내린 곳을 올려다보았다.
마 하나 새어들어오지 않는 석실의 천장은 완벽하게 막혀 있
었다.
누구도 저 위에 침상이 있고, 그 침상이 문이라는 것을 짐작
하지 못할 것이다.
한번 들어와 보기 전에는 말이다.
그보다도 야광충은 자신이 현현소녀를 잘못 보지는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침상이 한 바퀴 회전하는 동안 비록 미리 준비했다고 하더라
도 그 덩치가 침상바닥에 그대로 붙어 있었다는 하나만으로도
그녀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화악--!
석실 한쪽에서 불이 밝혀졌다.
야광충은 석실 한쪽 벽에 등을 기대고 그 불빛을 바라보며 섰다.
팽거의 안내로 왔지만 만사 경계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불빛 속에는 네 명의 얼굴이 보였다.
야광충은 눈을 빛내었다.
그 중 두 명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이었다.
붉은 얼굴에 무성한 수염을 자랑하는 위인, 노염군 위대봉과
한쪽 눈만 번뜩이고 있는 독목야차 방각이었다.
다른 두 명은 노인과 복면인이었다.
노인은 양쪽으로 축 늘어진 새우눈에 주독(酒毒)으로 붉게 달
아오른 주먹코를 하고 있는 초라한 시골 영감 같았다.
야광충은 그의 모습을 보고 그가 누군지 금방 알아차렸다. 사
부에게서 익히 들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바로 대규환지옥의 옥주인 소선건곤 팽호였다.
복면인은 복면이라기보다는 검은 휘장을 포대처럼 만들어 위
에서부터 아래까지 덮어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위대봉이 말했다.
"잘 왔네! 자네를 다시 보기를 기다렸다네!"
야광충은 오늘의 일이 정말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째달았다.
팔대지옥주 중 셋이 남의 눈을 피해 이런 매음굴의 지하에 있다
는 것은 아무리 좋게 이해하려 해도 비정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최대한 냉정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날 부른 이유는?"
월몽영은 주루의 한쪽 구석에서 찾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빛내었다. 그리고 이내 인상을 썼다.
혈부용은 아까의 술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옷깃에 끈이 달리고 소매가 좁은 착수포(窄袖袍)를 입
은 몽고 청년과 함께 앉아 있었다.
월몽영이 인상을 쓴 것은 그 몽고 청년과 혈부용의 모습이 지
나치게 다정스럽다는 것 때문이었다.
몽고 칭년의 한쪽 손은 혈부용의 어깨에 돌아가 있고, 다른
한쪽은 혈부용의 손을 만지고 있었다.
아무리 남녀의 구별이 엄하지 않은 몽고 땅이라지만 그냥 아
는 사이로서는 조금 지나치다 할 정도의 모습이었다.
부족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몽고족은 축제 때 눈이 맞은
청춘남녀가 연애를 결정하고 사귀는 풍습이 있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마음껏 즐길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고나
할까?
그러나 그 관계에도 규칙은 있어서, 두 사람을 동시에 연애
상대로 삼을 수 없고, 결흔 후에는 더 이상 연애 상대를 만들
수 없다.
그 규칙을 어긴 사람은 부족으로부터 배척받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챘다.
몽고의 가혹한 자연환경 속을 홀로 살아간다는 것이 바로 죽
음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지금 혈부용이 그 금기를 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두 사람은 거의 연애 상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야광충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가?
문득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혈부용의 일은 야광충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녀가 신경쓸 일
이 아니었다.
연애상대인 척자가 다른 남자랑 놀아나서 치욕을 받든 말든
야광충의 문제이지 그녀의 문제는 아닌 것이다.
오늘은 그를 그들과 만나게 한 것만으로 그녀의 일은 끝난 것
이다.
그녀는 환락굴의 문을 나섰다.
* * *
"벤야시리가 케레이트 족을 멸족시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위대봉의 첫마디는 의외의 말로 시작됐다.
이미 알려진 것처럼 벤야시리는 현몽고 최고의 실력자다.
중원에서 쫓겨난 몽고족은 원조 최후의 황제인 순제(順帝)가
죽자 황태자인 아유시리다라가 몽고제국의 옛 수도 카라코룸에
서 칸(大汗)의 자리에 올랐다.
그가 소종(昭宗)인데 그의 손으로 국력의 회복이 도모되었지
만 세력대립이 끊이지 않아, 그 뒤를 이은 토구스 테무르는 왕
족의 한 사람인 에스델에게 살해되었다.
이러한 북원(北元)의 정통을 잇는 부족을 타타르[ ]라고
한다.
이 무렵 몽고고원 서부에 신홍세력인 오이라트[瓦刺] 부(部)
가 대두했다.
그들은 수렵으로부터 막 목축으로 이행한 삼림민(森林民)들이
었지만 토구스 테무르의 세력을 패퇴시킨 에스델과 결합하여 급
속히 세력을 신장시킨 후, 동부의 타타르 부에게 대항했다. 몽
고 내부에는 타타르와 오이라트의 대립항쟁이라는 정세가 출현
했던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대제국 사마르칸드를 건설한 티무르에게는 벤야
시리가 투항해 있었다. 그는 몽고황실의 정통인 토구스 테무르
의 손자였는데, 부장 아루타이의 옹립을 받아 사마르칸드로부터
돌아온 후, 칸의 지위에 오르기 위해 타타르 부 통일전쟁을 벌
이고 있었던 것이다.
몽고족이 중원을 정복할 때부터 몽고 내부에는 권력투쟁이 있
었다.
몽고고원을 중심으로 이북쪽의 여러 한국(韓國)을 건설한 형
제들과 굳이 중원으로 내려와 원제국을 건설한 쿠빌라이 칸 사
이의 분쟁이었다.
물론 쿠빌라이 칸이 최후에 승리함으로써 형식상 모든 한국이
원제국의 지배아래 들어가 있게 되었지만 그것은 쿠빌라이 칸이
살아 있을 그 당시만이었다.
각 한국은 몽고의 전통을 지키는 보수적인 체제가 되었고 원
제국은 상대적으로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다.
원제국이 나중에 명에 망하고 몽고고원으로 다시 돌아왔을 때
원래 이 지역에 있던 부족들이 그들을 보는 눈이 고울 리가 없
었다.
북원의 빠른 패망에는 그런 배경 또한 있었던 것이다.
몽고의 전통을 고집하는 부족들을 몽고파(蒙古派)라 하고 한
족의 문화에 동화된 부족들을 한지파(漢地派)라 불었는데 케레
이트 족이 바로 한지파의 최강세력이었다.
그 케레이트 족이 열렬한 몽고파인 벤야시리에게 멸족되었다
는 것이다.
위대봉은 잠시 말을 멈추고 반응을 보려는 둣 야광충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야광충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벽에 기댄 채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이게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겠나!"
노소포가 답답한지 다그치둣 물었다.
야광충은 천천히 눈을 들어 그를 보았다.
"우리? 누구를 가리켜 우리라 부르는가?"
노소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야광충이 처음부터
반말로 대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지금 말을 듣는 태도에 이르기
까지 전혀 마 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우리!"
그는 손가락을 들어 자기 코를 가리키더니, 다시 위대봉, 그
리고 방각과 야광충을 가리켰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 지옥성에 있는 한족 모두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는 야광충의 냉정한 눈을 보더니 더욱 화가 치밀어 오르는
지 주먹을 불끈 쥐고 다가갔다.
"이제 알겠느냐?"
위대봉이 그의 어깨를 잡았다.
"그만 두게!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화부터 낼 건가?"
노소포는 그가 말리자 더욱 기승을 부렸다.
"말리지 말게! 내가 이 애송이에게 노인공경이 어떤 것인지부
터 가르쳐 줘야겠어!"
그렇게 그와 위대봉이 티격태격하는데 야광충이 나직하게 말
했다.
"더 할말이 없나 보군!"
노소포와 위대봉이 말을 뚝 그치고 그를 바라보았다.
야광충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나갈지를 생각하는 둣한 모습이었다.
위대봉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말을 너무 돌렸던 모양이군.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하지……!"
"그러게 바로 본론을 애기하자니깐……!"
노소포가 꾸중 들은 아이처럼 투덜거렸다.
"자네, 지옥성이 벤야시리의 휘하세력이라는 걸 알고 있나?"
위대봉은 의외의 사실을 먼저 말하고 듣는 사람들이 놀라는
것을 보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지금도 그렇게 남들이 모르는 사실부터 던지둣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취미도 통하지 않았다.
야광충은 그 말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알고 있던
일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표정에 나타내지 않는 것인지 짐
작할 수가 없었다.
위대봉은 내심 입맛을 다시며 더 이상 말을 돌리지 않고 핵심
을 내놓았다.
"최근 삼 년 간 지옥연무를 통과하며 죽는 사람이 거의 없어
졌네. 예전에는 참가인원의 반 이상이 쭉었고, 그 대부분이 몽
고족이었는데……, 이젠 아닐세!"
연무의 강도가 예전보다 약해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렇다
면……?
"어디서 그런 인원들을 모아 오는지 몰라도 하나같이 자질이
뛰어난 자들이 참가하고 있기 때문이지! 나는 그들이 벤야시리
의 병영(兵營)에서 나온 자들이라고 믿고 있네!"
애초에 지옥성이 만들어질 때부터 위대봉은 누군가의 도움이
뒤에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몽고에서 대단한 힘을 가진 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별달리 하는 일도 없이 무사만 키우는데 어
디에서 자금이 나올 것인가?
처음에 그는 성주가 몽고의 여러 부족들을 위협해서 세금을
받아 내는 정도로만 알았다. 그 배후에 있을 세력자와도 그저 헙
력관계 정도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었다.
몇몇 정보에 의하면 여기 지옥성에서 연무를 마친 자들이 대
거 벤야시리 휘하로 유입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들이 애초부터 그곳에서 왔다면 이야기는 맞아들어간다.
지옥성은 지금 벤야시리의 무력을 키워 주는 훈련장, 혹은 군
관양성소처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야광충이 처음으로 그의 말에 관심을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어렴풋이 위대봉이 하고자 하는 말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 말이 듣기 싫었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그러나 위대봉은 결국 짐작했던 말을 했다.
"이 몽고가 우리 한족이 살아가기에는 좋지 않은 곳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일세.
"언제는 좋은 곳이었나?"
노소포가 끼여들어 한 말이었다.
"전에도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제는 더 좋지 않은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일세.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불가능해질 정
도로……."
몽고족이 볼 때에는 그들은 자기 땅에서 도망쳐 나온 도망자
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과거 몽고족의 나라에 층성을 다했던 사람들
도 있다.
그러한 모든 것이 한지파가 세력을 잡고 있을 때에는 어느 정
도 인정을 받았지만 이제는 인정을 받기란 어럽게 되어 버린 것
이다.
"어쩌면 벤야시리가 세력을 잡은 후의 첫 행동이 우리를 제거
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위대봉은 침중한 안색으로 그렇게 말했다.
석실 안세 잠시 무거운 공기가 홀렀다.
야광충은 여전히 무관심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게 나와 무슨 관계인가?"
노소포가 인상을 썼다.
"무슨 관계냐고? 너도 한족인 이상, 이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텐데?"
그가 잡아먹을 둣이 으르렁거렸지만 야광충은 눈 하나 까딱
않았다.
"한족이든 몽고족이든 무슨 상관인가? 당신들은 중원이 싫다
고 도망쳐 나온 사람이야. 이제 몽고마저 싫다고 도망칠 셈인
가? 이번엔 어디로?"
노소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위대봉은 반대로 더욱 무겁게 그를 바라보았다.
"자네 말대로 민족도, 나라도 버리고 온 사람이 우리지. 이제
와서 민족을 따진다는 것도 우스운 일일 것이야. 그러나 지금
중요한 것은 민족이 아닐세."
그는 결연한 어조로 말했다.
"생존! 지금 우리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야."
노소포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살기 힘들어 중원을 도망쳐 나왔는데, 여기서 죽을 수는 없지."
위대봉과 노소포는 주거니받거니 하며 지옥성 내의 상황을 알
려 주고 있었다.
위대봉이 야광충에게 물었다.
"수심결(首心結)이라고 들어 보았나?"
야광충은 대답하지 않았다.
위대봉도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냥 설명하기 시작했다.
수심결은 지옥성에 있는 한족들의 모임이었다.
권력이나 다른 어떤 것이 목적이 아니라 몽고족에 의해 위협
받는 생존을 지키기 위한 모임.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고사성어(古事成語)를 따서 만들어
진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목단체였지. 그러나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
니 이제는 모여서 고향 얘기나 하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네."
"지옥성에 있는 총숫자는 자네도 알지만 무사가 일천, 그
딸린 식구와 그외 인물이 오백, 해서 모두 천오백을 헤아리네.
그 중 한족이 삼백 정도 되지. 우리 수심결에 가입한 사람은 백
여 명일세. 소염라(少閻羅), 정확한 숫자가 어떻게 되지?"
소염라는 노염군 위대봉의 별명이었던 모양이다.
위대봉은 별명을 불려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런 기밀 사항
을 함부로 말한다고 그런 것인지 잔뜩 인상을 썼다.
그러나 이왕 말한 것인데 어쩔 수 없었다.
"백이십이 명이지."
지옥성의 무사들이 다 가족을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 가족도 없는 혈혈단신이 대부분이었다. 극히 일
부만이 가족과 함께 있는 것이다.
무사를 제외한 오백여 명의 대부분은 무사들의 시중을 드는
자들이었다.
여기 환락굴의 여인들도 모두 그런 인원에 들어갔다.
피가 끓는 젊은 사내들의 정욕을 달래 주는 창녀들이었던 것
이다.
한족은 삼백여 명 거의 전원이 무사였다.
그 중 백이십이 명이 수심결에 가입했다고 위대봉은 말하고
있었다.
"그래서……, 자네도 여기 가입할 것을 권하는 바이네!"
그것이 위대봉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를 여기로 불러
온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야광층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얼음으로 깎아 만든 조각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가입을 권하는 위대봉도. 여태까지 시끄럽게 나서던 노소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야광충이 생각하는 것을 그들도 느끼고 있는 둣챘다.
분명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단순히 중원을 그리워하는 한족들의 단체에 가입한다는 단순
한 문제가 전혀 아닌 것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쌨을지 몰라도 이제는 분명 그것이 아니
었다.
수심결은 최악의 경우, 지옥성의 몽고족에 대항하는 한족의
결사조직이 될 가능성이 컸다.
그것은 지옥성 자체에 대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가 단지 한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중원을 구경도 못 해 본 그
가 한족의 피를 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싸워야 할 필요가
있을까?
야광층은 그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한족이니 몽고족이니의 문제는 그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명나라니 원나라니 하는 문제도 그에게는 역시 아무것도 아니
었다.
그것은 추상적인 이름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민족을, 나라를 느껴 본 적이 있었던가?
그가 태어나서 살아오는 동안 민족도, 나라도 그가 이 황량한
땅에서 살아야 되는 이유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좋은 쪽으로 작용한 적은 단 한번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한족이기 때문에 그가 여태 같이 살아온 몽고조
과 싸운다?
웃기는 이야기였다.
수심결을 만들었다는 이들도 비웃어 마땅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민족이 있었던가?
그들은 원나라의 백성일지는 몰라도 명나라의 백성은 분명히
아니다.
명나라가 싫어 여기로 도망왔지 않은가?
여기서 태어난 야광충 같은 경우를 제외하고 지윽성의 한족
누구도 민족을 주장할 권리도, 나라를 주장할 권리도 없다.
그렇게 전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야광충이었지만 선뜻 반
대를 못하는 것은 상황이 묘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처음 보는 그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비밀의 핵심이
라고 할 수 있는 수심결의 존재와 숫자까지 털어놓았다.
그들이 그만큼 그를 믿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들은 믿는 것이 있다. 그가 가입하고야 말 것
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세 명의 옥주라면 그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그들 셋이 협공하면 그도 상당히 곤
란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런 번거로운 일을 할 필요가 있을까?
애초에 아무 비밀도 모르던 자에게 비밀을 알려 주고, 거절하
면 그 입을 막기 위해 죽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내게 더 말할 것이 있지 않나?"
무언가 그가 더 끌릴 수 있는, 아니연 어쩔 수 없이 가입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위대봉과 노소포가 마주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뒤에 있는 복면인을 돌아보았다.
야광충은 그 순간, 이 결사(結社)의 진정한 지휘자는 그 복면
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추즉이 맞았던 모양이었다.
복면인의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가 말하기로 하겠소!"
야광충은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하니 서 버렸다.
익히 들어오던 목소리!
복면인은 바로 그의 사부인 예충이었던 것이다.
"뭐라고?"
야광충은 돌아보았다.
현현소녀는 힘겹게 입을 벌렸다.
말을 한 번 하기 위해서 일곱 겹이나 되는 목 아래의 비곗살
까지 함께 움직이는 거창한 작업을 하는 것이니 힘겹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좋아하는 여인이 있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영롱한 것이었다. 그
리고 묘하게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음성이었다.
야광충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스로도 놀라 버렸다.
누구에게도 표현해 본 적이 없는 마음의 조각이었다.
대답을 하고 보니 스스로가 그랬던가 하는 놀라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좋아했던 것일까? 그래서 그녀와 정사(情事)를 벌인 것일
까?'
그는 혈부용을 생각하고 있었다.
현현소녀의 다음 말이 그를 더욱 놀라게 랬다.
"그녀가 혈부용이 아니길 빈다."
야광충은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혈부용의 일에 대해서 이 돼지가 알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단지 액면 그대로 혈부용을 경계하느라 한 말일까?
"미안하지만 그녀야!"
현현소녀가 커다란 머리를 들어서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감기다시피 한 그녀의 실눈에서 의미를 알 수 없는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야광층은 그 눈을 흔들림없이 마주 대하고 있었다.
현현소녀가 탄식하둣 말했다.
"무슨 말을 해도 안 되겐군! 그러나 너를 본 기념으로 한마디
만 해 주지."
야광충이 바로 대답했다.
"하지 마!"
현현소녀가 묘한 웃음을 지었다.
"뭘 두려워하는 것이냐? 내 말을 짐작하고 있나?"
야광충은 침묵했다.
왜 그녀의 말을 듣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는지 그 자신도 잘 알
수 없었다.
단지 들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었다.
현현소녀는 말에 무게를 실어 한마디씩 또렷이 말해 주었다.
"네가 그녀를 사랑하면 할수록 그녀는 네게서 멀어질 거다!"
야광충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돌아서서 나가 버렸다.
매음굴의 좁은 복도를 지나 사다리를 타고 가오륙들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을 때, 그들은 아직도 싸우는 척 소리를 내고 있
었다.
야광충은 문가로 다가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마작상(麻雀床)
을 바라보았다.
방안이 난장판인데도 용케도 상은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그 위에 놓인 엉터리 마작패들도 그대로였다.
야광충은 발을 들어 상을 걷어차 부식 버렸다.
"삼색동순(三色同順)인데 패를 더 끌어 모으고 있나?"
야광충은 내뱉둣 말하고 입구로 걸어갔다.
그의 앞에서 철문이 열렸다.
지상에 있는 주점으로 올라갔지만 그가 찾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러리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지하에서 보낸 시간이 생각보다 길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갔을 수도 있다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혈부용이 그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자
원인 모를 쓰라림이 가슴을 스치는 것 같았다.
야광충은 걸음을 빨리해서 밖으로 나왔다.
환락굴의 밖은 한밤중이었다.
오월의 그믐달이 나지막한 바위집들 사이로 흐리게 빛나고 있
었다.
그 그믐달 아래를 야광충은 걸었다.
등뒤로는 높게 치솟은 바위 절벽, 앞에는 성벽이 높이 둘러쳐
져 그늘을 드리우고 있어 마치 협곡을 걷는 둣했다.
이곳 야무방에 있는 작은 주점들 안으로부터 불빛이 새어 나
오고, 나무문 사이로는 숨이 넘어갈 둣한 여인의 교성과 웃음소
리들이 퍼지고 있었다.
어둡고 음침한, 퇴폐적인 냄새가 가득 흐르는 거리를 걸으며
찾아봤지만 혈부용은 보이지 않았다.
야광충은 어쩐지 공허한 기분이 되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그녀가 그를 기다릴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왠지 그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대화다운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은 느낌이었는데……,
그녀는 그를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는 문득 추워지는 것을 느꼈다.
겨울이 끝나고 몽고의 짧은 봄이 지나가고 있는 와중에 그는
추위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흔란스러웠다.
오늘 그가 뭘 했는지 모를 정도였다.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말을 들었는가?
지금 그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의심이 생겼다.
분명 제대로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 한두 달 이내에 그가 몸담고 있는 지옥성은 대폭풍에
휘말릴 것이 분명했다.
막대한 유혈을 동반한 태풍일 것이다.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휩쓸리기보다는 태풍의 중심에
서서 주도권을 잡는 것이 피를 덜 홀리는 길일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준비하던 과정이었는데……, 혈부용은 의외
의 복병이었다.
그녀조차도 익도된 것이라면 적은 정말 강한 것이 분명했다.
단순한 음모가 아니라, 약점을 파악하고 힘으로 그를 압박해
오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예정된 파멸의 길을 걷고 있음이 분명한데 헤어나올
수가 없었다.
혈부용을 보는 순간,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이 텅 비어 버리
는 머리를 그 스스로도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때 그의 눈에 그녀가 들어왔다.
야무방을 막 벗어나는 거리의 끝이었다.
그녀는 얼핏 보기에 몽고족으로 보이는 한 청년의 팔목올 가
슴에 안다시피 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몸이 바짝 붙어 있었기 때문에 발걸음이 약간 어지
러워 보였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체중을 의지하고 있다는 뜻일까?
그때 그녀도 그를 본 것 같았다.
그들은 그늘 속에서 잠깐 멈춰 서더니 팔짱을 풀고, 그러나
손은 아직도 놓지 않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싱벽 그늘에 가려져 그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웃고 있는 것 갚았다.
야광충은 희미하긴 하지만 달빚 아래 서 있어서 완전히 드러
나 있었다.
귀기가 흐르는 창백한 얼굴은 무표정한 그대로였다.
혈부용과 몽고족 청년도 달라 아래에 드러났다.
야광충은 청년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소매가 좁은 착수포, 목 옆으로 갈라진 옷깃은 끈으로 묶도록
되어 있는, 전통적인 몽고족의 복장이었다.
"사촌 오빠야!"
혈부용이 청년을 가리켰다.
청년이 횐 이빨을 드러내고 워으며 이름을 말했다.
"데게룬고이 토고쓰!"
데게룬고이 토고쓰는 개병공작(開屛孔雀), 즉 깃을 활짝 펼친
공작이라는 뜻의 이름이었다.
그는 그 이름에 부럽지 않을 만큼 화사한 용모를 지니고 있
었다.
야광충의 얼굴이 왠지 귀기를 띤 그늘진 인상이라면 그는 해
아래 활짝 핀 밝은 모습이랄까?
야광충은 그를 바라볼 뿐 인사도 않았다.
그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데게룬고이 토고쓰……!
제사 지옥인 호규지옥의 옥주가 아닌가!
이 젊은 사내가 육십이 넘는 여타 옥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
여 옥주를 맡고 있다는 것인가?
토고쓰가 다시 미소를 지었다.
"잠깐 집안 일로 말할 것이 있어서 데리고 나왔었소! 형장이
없어서 미리 허락을 받지 않았으니 용서하시길!"
나무랄 데 엎는 훌륭한 태도였다.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은……!
야광충은 그래도 대꾸하지 않았다.
아무 할말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 지금 야광충의 심경이었
다.
토고쓰는 어색한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더니 인사를 하고는
가 버렸다.
혈부용이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돌아섰다.
야광충은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는 그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다.
여인네처럼 속좁은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짜증이 치밀어 오르
고 있었다.
그보다…….
토고쓰의 밝음 앞에 어쩐지 위축되는 둣한 느낌이 그를 더 화
나게 하고 있었다.
"화났어?"
혈부용이 따라와 그의 팔을 잡았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다시 후회했다.
화가 난 것이 불현둣 부러워진 이유가 뭘까?
무엇이 그를 감정에 솔직해지지 않도록 만들고 있는 것일까?
혈부용이 달라 아래에서 다시 배시시 웃었다.
야광충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홍조(紅潮)가 떠올랐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어색함을 피하려는 둣 물었다.
"몽고족이었나?"
"몰랐어?"
혈부용은 의외라는 듯 되묻더니 다시 웃었다.
오늘 그녀는 유달리 자주 웃었다.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아니면 토고쓰를 만났기 때문일까?
야광충은 불현둣 자신이 지금 혈부용을 의심하고, 어쩌면 토
고쓰를 질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그는 극도로 불쾌해졌다.
그런 감정은 생각하는 그 자체로도 모욕이었다.
혈부용이 말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원래 카쿡투 키킥, 목부용(木芙蓉)이었어."
그녀가 토고쓰와 사촌지간인 것이 맞다면 당연히 몽고족일 것
이다.
'혈'이라는 것은 칠살이면 누구나 이름 앞에 붙이는 것일까?
그의 손에 죽은 셋이 그랬듯이?
그도 팔대관문을 다 통과하면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게 될
까?
야광충은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이런저런 맥락없는 잡념
을 떠을렸다.
그러나 그의 입은 이미 그를 배신하고 있었다.
"그를 다시는 안 만났으면 좋겠군!"
그는 그런 말을 한 그 자신에게 놀라 발을 멈추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뱉어 버린 말은 취소할 수가
없는 것이다.
혈부용이 그의 팔을 놓고 그의 앞으로 돌아와 섰다.
야광충은 왠지 그녀의 눈을 마주보기가 싫었다. 사실은 어려
웠다.
혈부용의 얼굴에는 웃음기라고는 흔적도 없었다. 그녀는 약간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나와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아?"
야광충은 그러길 바랬다.
자신이 더 이상 흐트러지기 전에……, 그녀로 인해서 더욱 중
요한 일들이 망쳐지기 전에…….
더 이상 그녀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 전에!
그녀와 혜어져야 했다.
야광충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혈부용의 눈 속에 희미한 빛이 지나갔다.
야광충은 문득 그것이 조롱의 빛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만족한 미소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럼 그런 말 다사는 하지 마!"
그리고 돌아서서 야무방의 어두운 거리 속으로 다시 걸어갔다.
그녀의 행동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러나 야광충은 그럴 수 없었다.
가슴속에서 무엇이 빠져 나간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그는 멍
하니 그 뒷모숩만 바라보고 있었다.
달이 지고 있었다.
희미한 달빛이 부서지는 바위집 위에 월몽영이 흘로
첫댓글 즐독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합니다.``````````````````
ㅈㄷㄳ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ㅈㄷㄱ~~~~~```````````````
잘읽었습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즐독
즐독
즐독 ㄳ
즐독 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