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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3일 연중 7주일
제1독서 : 1사무 26,2.7-9.12-13.22-23
제2독서 : 1코린 15,45-49
복 음 : 루카 6,27-38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29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30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31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32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33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34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35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36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37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38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기름부음받은이”(1사무 26,9)는 축성된 이를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는 왕, 사제, 예언자가 물질적인 기름부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도록 축성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임금으로 기름부음받아 성별된 사울에 대한 다윗의 충정은 영웅적입니다.
이는 사울을 존경해서라기보다는 그를 임금으로 축성하신 하느님에 대한 경외와 충실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면 단연 탁월하게 축성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물리적인 기름이 아니라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으로 기름부음받고 축성되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말하듯이 구약에서 물질적인 것으로 예표되던 것들은
이제 신약에서 영적인 것으로 실현되어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고’(그리스 말로 ‘크리스토스’는 ‘기름발린 이’라는 뜻) 우주의 임금이 되십니다.
다윗이 물질적인 기름으로 축성된 사울 임금에게 보인 존경이 그러하다면
성부에게서 성령으로 기름부음받으시어 축성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존경은 어떠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이 요구하는 행동 방식은 인간적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동기는 결국 “지극히 높으신 분”(루카 6,35) 하느님이십니다.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다니던 사울을 살려 줌으로써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원수 사랑의 탁월한 본보기를 보여 주는 다윗이
하느님에 대한 경외심으로 그러하였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용서와 자비의 기준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6,36) 자비로울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
우리가 베푸는 용서와 자비는 더 높은 수준으로 돌려받을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하와이 군도 북쪽에 있는 ‘키우아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지금은 1959년 미국의 오십 번째 주로 편입되면서 살기 좋은 곳이 되었지만,
그전에는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고, 주민 상당수가
범죄, 알코올 중독, 정신 장애 등으로 고통받는 곳이었습니다.
교육 수준도 낮고 청소년 비행 문제도 아주 심각했습니다.
1955년에 태어난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종단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이들 중 빈곤 정도, 가정 파탄 수준, 부모 정신 장애 등
세 가지 조건이 심각한 201명을 고위험군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잘못된 길로 빠졌을까요?
실제로 범죄, 정신 장애, 미혼모가 되어 있는 경우가 많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 숫자는 약 28%에 해당했고, 나머지 72%는 큰 문제 없이 성장했고
그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보이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무엇일까요?
성장 과정에서 자기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 인물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바른 성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한 명이 부모이기도 했고, 친척 혹은 주변 인물 중의 하나이기도 했습니다.
즉,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기에
어렵고 힘든 환경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이 점점 타락하고 악으로 기울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한 사람의 역할을 내가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선’이 가득한 세상을 위해 ‘나’를 보내셨는데,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를 ‘직무 유기’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만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나로부터 잘 사는 세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의 계명이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우리의 사랑 실천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철저히 ‘남’에게 맞춰 있습니다.
나에게 잘하고 친절한 사람을 위한 사랑이 아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과 같이 우리도 자비로워야 했습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심판하지 말아야 심판받지 않을 것이고, 단죄하지 말아야 단죄받지 않을 것이며,
용서해야 우리도 하느님께 용서받게 됩니다.
모두가 ‘나’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잘못되었다고, 환경이 어렵다고, 힘이 든다고….
등의 이유를 들어서 사랑을 실천하는 역할을 거부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도 못하고, 하느님 자녀가 되는 길에서 멀어집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루카 6,38)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자비’입니다.
제1독서에서,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찾아 헤매는 사울 왕을
원수 갚을 기회가 생겼음에도 살려줍니다.
모든 결정을 하느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자비와 용서를 베풉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흙에서 나서 썩어 흙으로 돌아갈 첫 인간과
하늘에서 나서 하늘로 돌아갈 새로운 생명을 구별하여
그들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니게 될 것”(1코린 15,49)을 말해줍니다.
곧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화답송은 주님께서 자비롭고 너그러우심을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후,
이어서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곧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31)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곧 우리는 자비를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내어줄 수가 있으며, 또한 받은 그 자비를 내어주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의 백성을 가리켜
“자비의 그릇”(로마 9,23)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7)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지난 2015년에 제2차 바티간공의회 폐막 50주년을 기념하여,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시면서,
모토를 “아버지처럼 자비로워라”(misericordes sicut Pater)로 정하시고,
칙서인 <자비의 얼굴>을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의 얼굴이십니다.”(1항)로 시작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시며, 또한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자비는 하느님 아버지의 본질이며 활동이심을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비를 베푸는 것이 하느님의 고유한 본질입니다.
바로 그 자비 안에서 하느님의 전능이 드러납니다.”(6항)
또한, 교종께서도 이 칙서에서 자비를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25항)이요,
“복음의 뛰는 심장”(12항)으로 말씀하시면서,
교회는 이를 알려야 할 사명이 있음을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커다란 희망과 심각한 모순으로 가득 찬 이 시대에
교회의 첫째 직무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모든 이를 하느님 자비의 위대한 신비로 끌어들이는 것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먼저 교회는 자비의 참된 증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계시의 핵심인
그 자비를 찬양하고 실천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이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소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좀도 적극적인 행동지침으로서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겠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선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일이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로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의 <자비를 비는 기도>를 바치면서 마칩니다.
"저는 당신의 살아있는 모상이 되기 위해 온전히 당신의 자비로 변하고 싶습니다.
주님, 하느님의 가장 큰 특징인 무한하신 자비가
제 마음과 영혼을 통해 제 이웃들에게 전해지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눈이 자비롭게 바라보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겉모습으로 의심하거나 판단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이웃의 아름다운 영혼을 보고 도울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주님, 제 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의 어려움을 듣게 하시고,
이웃의 고통과 한탄에 제 귀가 무뎌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혀가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절대로 이웃을 험담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위로와 용서의 말을 건넬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두 손이 자비로워져서 선행을 많이 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들에게 좋은 일만 하고,
어렵고 힘든 일을 제가 떠맡을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 제 두 발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제 이웃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지치거나 피로해하지 않고 항상 달려갈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의 진정한 휴식은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자비로워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래서 이웃 사람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게 해 주시고,
어떠한 경우에도 제 마음의 문을 닫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제 선의를 악용하는 사람도 신실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저 자신은 지극히 자비로우신 예수님의 성심 안에서 머무를 것입니다.
저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는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의 주님, 당신이 자비가 제 안에 머물게 해 주십시오.
저의 예수님, 당신은 전능하시니 저를 당신으로 변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36)
주님!
당신께서 자비하신 것같이 자비로운 자 되게 하소서!
제 안에 심어진 자비가 저를 다스리게 하소서.
제 안에서 자비가 흘러나게 하소서.
자비 안에 심어 둔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잘못,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고,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고 말합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이 있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사랑은 대단합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닙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그리고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십자가의 성요한).
‘사랑하면 보게 되고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지니면 모든 것이 선하게 열매를 맺게 됩니다.
많이 사랑하면 많이 행할 수 있고, 사랑하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배은망덕”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변함없이 사랑하십니다.
그 큰 사랑을 받으면서도 우리의 마음은 왜 그리 좁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커졌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실 때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루카23,46)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시며
먼저 자신에게 못을 박는 이들을 용서하시고, 아버지 하느님께 간구하셨습니다.
스테파노도 역시 그랬습니다.
“주님, 주 예수님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지우지 말아주십시오.”(사도7,60)
스테파노는 주님이 사신 그 사랑을 죽기까지 살았습니다.
주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스테파노도 용서하였습니다.
이 용서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적 요소입니다.
우리 모두가 반드시 얻어야 할 구원은 바로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없으면 우리가 무슨 선행, 무슨 공로로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용서는 사랑의 고귀한 표현입니다.
용서는 우리 사회가 인간다운 사회가 되기 위하여 꼭 필요합니다.
각박한 사회, 미움과 분열의 골이 깊어 가는 이 시대에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지역, 계층 간, 부모 자식 간, 부부간, 형제간 등
상처 난 곳곳에 이해와 양보의 덕이 필요하고 그 뿌리에는 용서가 있습니다.
용서는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까지도 내어주셨습니다.
아드님은 당신을 낮추시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을 내주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 목숨을 버리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용서하는 사랑, 내어놓는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주시는
주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거나, 있다가 없다가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국물이 뜨거울 땐 국물 속의 기름이 잘 나타나지 않듯이
사랑이 뜨거울 땐 상대편의 단점이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물이 식을 땐 국물 속의 기름이 떠오르듯이
사랑이 식을 땐 상대편의 단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이 그립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왕, 다윗을 생각해 봅니다.
다윗은 사울의 시기 질투로 인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시기하여 창을 이용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두 번이나 몸을 피할 수 있었고,
주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으므로 가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사울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손을 이용하여 다윗을 죽이려고 사위로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점점 더 다윗을 두려워하게 되어 평생 그와 원수가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로 작정하지만, 사울의 아들 요나탄은 다윗을 무척 좋아하였기 때문에
다윗을 감싸주고 다윗이 죽을 고비를 넘깁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울이 동굴 안에서 뒤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역전의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겉옷 자락을 자른 후에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인 나의 주군에게
손을 대는 그런 짓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어쨌든 그분은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아니시냐?”(1사무24,7).
다윗은 사울을 살려 주었습니다
이 사연을 안 사울은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너를 나쁘게 대하였는데도, 너는 나를 좋게 대하였으니 말이다.
주님께서 나를 네 손에 넘겨주셨는데도 너는 나를 죽이지 않았으니
네가 얼마나 나에게 잘해 주었는지 오늘 보여 준 것이다.
누가 자기 원수를 찾아 놓고 무사히 제 갈 길로 돌려보내겠느냐? ..
이제야 나는 너야말로 반드시 임금이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 왕국은 너의 손에서 일어설 것이다.”(1사무24,19-21)
그래 놓고 다시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뽑은
부하 삼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사울은 진지 한가운데에서 자고, 그의 주변에는 군사들이 야영하고 있었습니다.
역으로 사울이 죽을 수 있는 처지가 되었지만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못하게 하고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오게 하였습니다.
결국, 사울은 다윗에게 “내가 잘못했다”고 선언합니다.
다시는 해를 끼치지 않겠다.
내가 정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고 고백합니다.
사울은 자기의 시기 질투, 욕심을 버리지 못하였고
다윗은 끝까지 원수를 사랑하였습니다.
우리도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알게 모르게 상처를 주고 아프게 하였던 이들에게 용서를 청하고 또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하셨으니
모두를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입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줄 뜻을 품으십시오”(로마12,17).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콜로3,13).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3,9).
혹 나를 아프게 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더 많이 사랑해 주지 못했음을 용서 청하고 자비를 간구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혜를 청했으면 좋겠습니다.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의 마음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용서하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이 사랑의 예가 다윗에게서 나타난다.
다윗은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 26,2) 죽일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주님은 누구에게나 그 의로움과 진실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주님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넘겨주셨지만,
저는 주님의 기름 부음 받은 이에게 손을 대려 하지 않았습니다.”(1사무 26,23).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이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다윗이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0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고,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두어라.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고, 네 것을 가져가는 이에게서 되찾으려고 하지 마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때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LA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때였다. 한인들이 큰 피해를 보았던 사건이었다.
한 신자는 흑인이 많이 사는 곳에서 조그만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흑인들이 들어오면 그냥 훔쳐 가는 일이 많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까 하고 생각한 끝에
그때부터 그들에게 “너를 믿어!”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얼마가 지나자 그들은 주인 앞에 와서 돈을 치르면서,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고 자기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과의 관계가 좋아졌을 때, 흑인 폭동이 일어났다.
그때 흑인들은 한인들의 상가를 불을 지르면서 피해를 줬다.
그러나 그 상점은 피해를 보지 않았다.
거기에 오던 흑인들이 모두 지붕 위로 올라가서
“이 가게를 불 지르려면 우리도 함께 타 죽겠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 가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하면서,
인격적인 관계는 이 위험을 피하게 해 주었다는 말을 들은 일이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이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35절).
우리가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 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35절)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으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온 힘을 다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오늘의 코린토 서간은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 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 되고
하느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토핑 경제’라는 말이 있습니다.
피자에 소비자가 원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올려놓는데
그렇게 올려놓는 재료를 ‘토핑’이라고 합니다.
상품에는 ‘포디즘(Fordism)’이 경쟁력이 있었습니다.
포드 자동차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를 조립형 라인으로 생산했습니다.
조립형 라인으로 자동차의 생산이 증가했고,
소비자는 더 싼 값에 자동차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산 방식은 전 산업에 확대되었습니다.
소비자는 맞춤형보다는 기성품에 만족하였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비자는 선택한 제품에
자기만의 ‘토핑’을 더하면서 자기만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아이스크림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아이스크림을 찾아내고,
옷에도 여러 토핑을 첨가해서 자신만의 옷을 입으려 합니다.
이는 신발, 스마트 폰, 가방, 가구에도 적용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 AI가 등장하면서 여성들이 바르는 파운데이션에도 새로운 모델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사람의 피부 색조와 어울리는 파운데이션을 AI가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전에는 색조가 3개였는데, 파운데이션의 색조가 30,00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있는 물건의 기능도 잘 모르는 저와 같은 세대는
‘토핑’이라는 말이 생소하지만, 저도 토핑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2005년입니다. 저는 당시 토론토에서 지냈습니다.
거리의 핫도그 가게에서 핫도그를 먹으면서 다양한 토핑을 보았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토핑을 골라서 핫도그에 넣어 먹었습니다.
요즘도 이런 토핑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가는 샤부샤부 집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5가지 정도의 국물이 있어서 입맛에 맞는 국물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고기를 찍어 먹을 양념장도 여러 가지 양념을 배합해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묵, 조개, 계, 라면, 떡, 채소를 골고루 선택해서 국물에 넣어 맛을 낼 수 있습니다.
고기의 종류도 여러 가지여서 취향에 따라서 고기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토핑은 획일적인 삶에 다양성을 제공하며 활력을 줍니다.
토핑은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줍니다.
토핑이 케이크의 크림처럼 돋보이려면 기본적으로 케이크의 빵이 맛있어야 합니다.
빵이 맛이 없다면, 기본이 충실하지 않다면 토핑이 많아도 소비자는 외면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토핑’이 있습니다.
여러 신심 단체가 있습니다.
레지오, 성가대, 헌화회, 제대회, 독서단, 해설단, 반주단, 복사단이 있습니다.
구역 모임이 있습니다. 한국학교가 있습니다. 주일마다 미사 후에 친교가 있습니다.
사목회를 중심으로 여러 행사가 있습니다.
사순 피정, 부활절, 세례식, 견진성사, 성모의 밤, 청소년 음악회,
유소년그룹 피정, 본당의 날, 성령 찬양의 밤, 걷기 대회, 자선 음악회,
대림 피정, 성탄절, 송년 미사가 있습니다.
재정이 허락하면 더 많은 토핑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시니어 아카데미도 만들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취미 교실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토핑이 있지만 신앙생활의 중심은 ‘미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마지막 유산은 ‘미사’이기 때문입니다.
미사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이루어집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미사에 온전히 참례하기 위해서는 주님의 성체를 온전히 모셔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의 몸을 ‘감실’로 만들어야 합니다.
고백성사로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겸손과 순명으로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오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흙으로 된 그 사람의 모습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도 지니게 될 것입니다.”
흙으로 된 사람의 모습은 ‘토핑’과 같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세상이 것들을 추구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 재물, 학력, 건강, 직장은 우리들이 좋아하는 토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땀을 흘리고, 밤을 새우고, 노력합니다.
앞에 가는 사람은 끌어 내리려 하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하늘의 속한 그분의 모습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은 나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는 겁니다.
나를 죽이려고 했던 사람까지도 용서하는 겁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사울은 시기와 질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했지만, 다윗은 사울을 용서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늘에 속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속한 사람이 가져야 할
삶의 태도를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까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둘째는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라는 겁니다.
셋째는 하느님께서 자비하시니,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하늘의 것이 나의 삶에 자리 잡을 때,
우리는 세상의 것들을 토핑으로 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 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 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루카 6.27-29)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자주, 누군가를 향해 미워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저주하였는지 모릅니다.
이거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 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미워하는 마음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또 다른 순교라고 할 수 있는 원수 사랑은 그냥 맨정신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인 기도 속에는 원수 사랑이라는 기적이 가능합니다.
매일 매 순간 우리 손에 십자가와 묵주를 쥐고,
예수님과 성모님의 일생을 정성껏 묵상할 때,
우리는 하루 온 종일을 주님 현존 속에 머물게 되고,
그때 또 다른 순교인 원수 사랑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수시로 주님께 쏘아 올리는 화살기도 역시
주님 현존을 우리 매일의 삶 속으로 하느님의 현존을 불러와
원수까지 사랑하게 하는 힘입니다.
위대한 우리의 순교자들은 혹독한 고통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끊임없이 묵주를 돌리면서, 수시로 화살기도를 쏘아 올리면서,
주님께서 자신들의 삶 속에 굳건히 현존하심을 기억했습니다.
그 결과가 자신의 목을 내리치는 휘광이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 결실은 영예로운 순교로 이어졌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 실천의 완성’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 준다.
그러나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에게 잘해 주고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꾸어 주어라.
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기 때문이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심판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단죄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단죄 받지 않을 것이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루카 6,32-38)
1)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이웃이고, 형제입니다.
따라서 ‘원수’인 사람은 원래 없습니다.
‘원수’는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에 포함되는 계명이고,
‘이웃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실천 지침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할 때 이웃 사랑 실천이 완성됩니다. 여기서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이
마태오복음에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로 표현되어 있는데,
두 말씀을 합해서 생각하면,
‘하느님의 완전한 자비’를 본받는 사랑 실천을 해야만
‘완전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2) 사도 요한은 ‘완전한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되었다는 것은,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분처럼 살고 있기에
우리가 심판 날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두려움은 벌과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는 이는 아직 자기의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1요한 4,17-18).”
이 말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심판 때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만일에 ‘원수 같은 사람’은 미워하고,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심판 때에 구원을 확신할 수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구원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해야 하는 것은, 바로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입니다.
바로,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원수 같은 그 사람도 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그와 내가 화해한다면,
두 사람이 함께 구원받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고, 주님께도 큰 기쁨을 드리는 일이 됩니다.
3)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실제 예로,
스테파노 순교자와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할 때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라고 기도했습니다(사도 7,60).
그 기도는 박해자들을 용서한다는 기도이기도 하고,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간청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기도는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하나니아스는 주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박해자 사울에게 가서
안수를 해 주었고, 또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 9,10-19).
주님께서 지시하셔서 한 일이지만,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니아스는 진심으로 주님 말씀에 순종했을 것입니다.
그가 박해자 사울에게 안수를 해 주고,
세례를 준 일도 원수 같은 사람을 사랑한 좋은 예입니다.
바르나바는 박해자였던 사울의 회심을 믿지 못하는 당시의 교회 공동체가
그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중개 역할을 했습니다(사도 9,26-27).
박해자 사울이 회심해서 위대한 사도 바오로가 된 것은,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일이지만,
이렇게 스테파노와 하나니아스와 바르나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을 적극적으로 실천한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4)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예수님의 계명은, ‘악’을 내 버려두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악’을 물리치고 ‘정의와 선’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은 ‘복수’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바로 그 문제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9-21).”
<바오로 사도는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의 위대함을 자신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선으로 악을 굴복시킬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이 당신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말입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의 관행 따라 살지를 않습니다.
이 세상의 관행을 따라 살지 않기에
신앙인은 불편을 겪기도 하고 불이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먼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원수는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면, 나는 계속 피해만 입을 것입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하다가는 둘밖에 없는 뺨이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안나스 대제관 관저에서 심문당하실 때,
대제관의 하인 하나가 그에게 손찌검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른 뺨을 내밀지 않고, 항의하셨습니다.
“내가 잘못 이야기하였다면 그 잘못의 증거를 대 보아라.
그러나 내가 옳게 이야기하였다면 왜 나를 치느냐?”(요한 18,23)
오늘 복음은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고도 말했습니다.
겉옷 뺏어가고 속옷마저 벗겨가면, 유대인은 알몸입니다.
“달라고 하면 누구에게나 주어라.”고도 말했는데,
달라는 대로 주면, 나를 위해서는 무엇이 남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法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법을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율법에 얽매여 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새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기지는 않았다.”(마르 2,27)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도와주는 율법이지 그것을 지키기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살려는 사람들에게 하신 권고입니다.
하느님이 자비롭고, 용서하고, 베푸시는 분이라, 우리도 그렇게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의 관행도 나열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고, 우리에게 잘해 주는 사람에게만 잘해 주고,
되받을 가망이 있을 때만 꾸어 줍니다.
그것을 조금 고상하게 표현하면 相互主義 원칙에 입각해서 행동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가 가진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것을 第一 順位로 한 행동 원칙입니다.
예수님이 믿은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에게 골몰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소중히 보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세상에 獻身的 사랑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해를 떠오르게 하시는 분”(마태 5,45)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밝은 것은 태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헌신적 사랑이 있는 것은 하느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사랑의 源泉이십니다.
사랑은 자비와 용서로 나타납니다.
당시의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제거한 것은
그분이 사랑이신 하느님을 가르쳤기 때문이었습니다.
유대교의 지도자들은 인간을 기준으로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이 사랑이라는 사실을 거부하면서 하느님을 잃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자비하게 행동하면서 자기들의 權威만 찾았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는 아버지의 생명을 삽니다.
그 생명은 사랑입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이다.”(호세 11,9)라는 「구약성서」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언서」는 하느님을 인간과 전혀 다른 분이라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불쌍해서 간장이 녹는 분,
아무리 노여워도 분을 터뜨리지 않는 분”(호세 11,8)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랑이 아니십니다.
오늘 복음은
“그분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고... 자비하시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지키고 당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남을 배척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을 믿고,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고 보존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하느님이라 흔히 상상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잘하면, 우리 편이 되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우리가 잘 바치면 바친 이상으로 우리에게 갚아주시는 분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그분과 교섭을 잘한 그만큼, 내세에서 갚아주실 것이라고도 상상합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의 慣行에 준해서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입니다.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소위 民俗종교들이 상상하는 神들도 우리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 신들은 음식도 대접받고, 돈도 탐내며,
많이 바치는 사람이 하는 청을 더 잘 들어 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을 후하게 대접하면, 많은 혜택을 받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하느님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행에 준해서 상상하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 곧 사랑과 자비와 용서를 우리가 실천하여
하느님의 자녀 되라고 그리스도 신앙은 권합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들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行動綱領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우리도 실천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 각자가 자유롭게 실천하라는 초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면,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라.”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겠다는 고백이고, 약속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생명이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쉬운 실천이 아닙니다.
어떤 작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살고 사랑하고 웃어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용서하고 자비롭게 베푸는 것이, 살고 사랑하고 웃으며 살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쉽게 실천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모험이기도 합니다.
삶은 하나의 모험이고, 그 결과가 보장되지 않은 모험입니다.
많은 연습과 실패 후에 서툴게 조금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하느님을 全能하시다고 말하는 것은
자비와 용서와 사랑에 전능하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일에 무능하지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신앙인은
그 실천에 초대되었다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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