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의 <추성부도秋聲賦圖>, 가을바람 소리의 예술
◦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특별전
◦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 <추성부도> 전시기간 2022. 6. 1. ~ 6. 30.
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 〈추성부도 秋聲賦圖〉, 조선 1805년,
종이에 엷은 색, 55.8×214.7cm, 보물 제1393호, 국립중앙박물관
예술은 공감각을 자극한다
좋은 예술은 여러 감각을 동시에 일깨운다. 비발디의 <사계>를 듣노라면 계절마다의 정경이 눈에 보이는 듯 떠오른다. 동아시아에서는 문학의 심상과 회화의 시각성이 하나가 된 예술을 높게 평가했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詩中有畫, 畫中有詩)”는 소식蘇軾(1037-1101)의 평어는 서화書畫 예술의 본질을 꿰뚫은 말이다.
중국 북송의 문인 구양수歐陽修(1007-1072)는 소리를 문학으로 옮겨놓았다. ‘추성秋聲’, 즉 가을바람 소리에서 느낀 자연의 엄숙한 섭리를 산문시의 일종인 ‘부賦’로 표현했다. 그로부터 칠백여 년이 지난 1805년, 조선의 화가 김홍도金弘道(1745-1806 이후)는 「추성부」의 심상을 그림으로 풀어내었다. 스산한 가을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그림, <추성부도>이다. 즉,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修(1007∼1072)가 지은 글 '추성부秋聲賦'를 그림으로 그려낸 시의도詩意圖이다.
문인화의 경지를 넘어선 거장 김홍도
조선의 도화서圖畫署 화원畫員은 나라를 대표하는 화가라는 명성을 누렸지만, 붓끝 기술로 먹고사는 환쟁이라는 멸시도 받았다. 도화서 화원은 중인 가문끼리 혼인을 거듭하며 집안 내에서 그림 기술을 전수하는 방식으로 독점적 지위를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홍도는 자신의 재능과 노력만으로 도화서의 으뜸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가 친인척의 도움 없이 도화서에 들어가 정조正祖(재위 1776-1800) 임금이 총애하는 화가로 성장한 배경에는 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그는 다방면의 그림을 모두 잘 그렸는데, 옛이야기인 고사故事나 시의 심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솜씨가 특히 뛰어났다. 정조는 김홍도가 주희朱熹(1130-1200)의 시를 그림으로 옮긴 《주부자시의도 朱夫子詩意圖》(리움미술관 소장)를 극찬하기도 했다. 문학과 철학의 깊은 뜻을 붓으로 곧장 풀어내는 것이 문인화라면, 김홍도는 직업화가이면서도 문인화의 경지를 넘어섰다고 할 수 있다.
구양수와 동자의 문답
김홍도의 낙관
김홍도가 들려주는 가을소리
<추성부도>는 내용과 형식의 두 가지 측면에서 시의 뜻을 제대로 옮긴 그림이다. 그림에 묘사된 장면은 「추성부」의 전반부에 해당한다.
화면의 오른쪽에는 메마르고 성근 수풀과 함께 산이 그려져 있고, 화면 한가운데에는 초가집이 있으며, 둥근 항아리 창 안으로는 어렴풋이 구양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주인공이 책을 읽다 동자에게 무슨 소리인지 나가서 살피라 했더니 “하늘에서 달과 별은 맑게 빛나 천하를 비추고 사방은 고요한데 소리는 수풀 사이에서 들린다.”고 동자가 대답하는 장면을 그려낸 것이다. 이 그림에서 동자는 수풀의 바람소리 나는 쪽을 가리키고 있고, 마당에는 두 마리 학이 목을 빼고 입을 벌리고 있으며, 나무들은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진 낙엽들도 드문드문 흩날리고 있다. 왼쪽에는 둥치 굵은 나무가 두세 그루 서 있고 그 옆쪽에는 초가집 하나가 대숲에 둘러싸여 있으며 위로는 달이 떠 있다.
옆으로 길게 펼쳐진 이 그림은 좌우에 겹겹이 배치된 산과 언덕, 그리고 수풀이 화면 가운데의 초가집과 마당을 에워싸듯 묘사되었는데, 주된 소재를 한가운데에 배치하고 주위를 배경으로 아우르는 김홍도 특유의 화면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마른 가지들이 이리저리 꺾인 채 뻗어 오르며 끝이 갈라지는 나무들 모양 또한 김홍도가 즐겨 쓰는 화법임을 알 수 있다.
구양수(歐陽修)가 바야흐로 밤에 책을 읽는데, 서남쪽으로부터 어떤 소리가 들려와 섬뜩 놀라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고 말하였다.
“이상도 하구나!” 처음에는 빗소리 같더니, 소슬한 바람 소리 같다가, 문득 기운차게 솟구친 물결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 내가 동자에게 말하기를,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너 나가서 보고 오너라.”라고 하니, 동자가 대답했다. “별과 달은 희고 맑고 은하수는 하늘에 있는데, 사방에 사람 소리는 없고,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 있습니다.(성월교결星月皎潔 명하재천明下在天 사무인성四無人聲 성재수간聲在樹間)” 나는 말하였다. “아! 슬프도다! 이것이 가을의 소리로다. 어찌하여 왔는가?”
◇ 추성부도秋聲賦圖 - 가을의 소리가 눈으로 보인다.(추성부 전문)
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 悚然而聽之, 曰:"異哉!"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다가 서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섬짓 놀라 귀 기울여 들으며 말했다. "이상하구나!"
初淅瀝以蕭颯, 忽奔騰而澎湃, 如波濤夜驚, 風雨驟至. 처음엔 우수수 스산한 소리를 내더니 갑자기 물결이 거세게 일고 파도치는 소리같이 변하였다. 마치 파도가 밤중에 갑자기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같은데,
其觸於物也, 鏦鏦錚錚, 金鐵皆鳴, 又如赴敵之兵, 銜枚疾走, 不聞號令, 但聞人馬之行聲. 그것이 물건에 부딪쳐 쨍그렁 쇠붙이가 모두 울리는 것 같고, 마치 적진으로 나가는 군대가 입에 재갈을 물고(銜枚:함매) 질주하는 듯 호령 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만 들리는 듯하기도 했다.
予謂童子:"此何聲也? 汝出視之." 내가 동자에게 물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 네 좀 나가 보아라."
童子曰:"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 동자가 말하길 "달과 별이 밝게 빛나며, 하늘엔 은하수가 걸려 있으며 사방에는 인적이 없으니 그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나고 있습니다."
予曰 "噫嘻, 悲哉!此秋聲也, 胡爲而來哉? 나는 말했다. "아, 슬프도다! 이것은 가을의 소리구나. 어찌하여 온 것인가?
蓋夫秋之爲狀也;其色慘淡, 煙霏雲斂, 대저 가을의 모습이란, 그 색은 암담하여 안개는 흩날리고 구름은 걷히며,
其容淸明, 天高日晶, 그 모양은 청명하여 하늘은 드높고 태양은 빛나고,
其氣慄冽, 砭人肌骨, 그 기운은 매우 차가워 피부와 뼛속까지 찌르는 듯하며,
其意蕭條, 山川寂寥. 그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적막해진다.
故其爲也, 凄凄切切, 呼號憤發. 그러기에 그 소리가 처량하고 애절하며 울부짖는 듯 떨치고 일어나는 듯 한 것이다.
豊草綠縟而爭茂, 佳木蔥籠而可悅 풍성한 풀들은 푸른 무늬로 무성함을 다투고, 아름다운 나무들은 울창하게 우거져 즐겁게 하더니
草拂之而色變, 木遭之而葉脫, 풀들은 가을이 스쳐가자 누렇게 변하고, 나무는 가을을 만나자 잎이 떨어진다.
其所以摧敗零落者, 乃其一氣之餘烈. 그것들이 꺾이고 시들어 떨어지게 되는 까닭은 바로 가을 기운이 남긴 매서움 때문이다.
夫秋, 刑官也, 於時爲陰, 무릇 가을은 刑官이요, 때로 치면 음의 때요
又兵象也, 於行爲金, 또 전쟁의 형상이니, 오행으로는 금(金)이 된다.
是謂天地之義氣, 常以肅殺而爲心. 이를 일러 천지의 의로운 기운이라 하니, 항상 초목을 시들어 죽게 하는 본성을 지니고 있다.
天之於物, 春生秋實. 하늘은 만물에 대해 봄에는 나고 가을에는 열매를 맺게 한다.
故其在樂也, 商聲主西方之音, 夷則爲七月之律. 그러므로 음악으로 치면 가을은 상성으로, 서방의 음을 주관하고, 이칙으로 칠월의 음률에 해당한다.
商, 傷也, 物旣老而悲傷. 夷, 戮也, 物過盛而當殺. '상(商)'은 '상(傷)'의 뜻이니 만물이 이미 노쇠하므로 슬프고 마음 상하게 되는 것이다. '이(夷)'는 '륙(戮)'의 뜻이니 만물이 성한 때를 지나면 마땅히 죽게 되는 것이다.
嗟乎, 草木無情, 有時飄零. 아! 초목은 감정이 없건만 때가 되니 바람에 날리어 떨어지도다.
人爲動物, 惟物之靈, 사람은 동물 중에서도 오직 영혼이 있는 존재이니,
百憂感其心, 萬事勞其形, 온갖 근심이 마음에 느껴지고, 만사가 그 육체를 수고롭게 하니,
有動於中, 必搖其精. 마음속에 움직임이 있으면 반드시 그 정신이 흔들리게 된다.
而況思其力之所不及, 憂其智之所不能, 하물며 그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그 지혜로는 할 수 없는 것까지 근심하니,
宜其渥然丹者爲槁木, 黟然黑者爲星星. 윤기나게 붉던 낯빛이 마른 나무 같이 되고, 까맣던 머리가 백발이 됨은 당연한 것이다.
奈何以非金石之質, 欲與草木而爭榮? 어찌하여 쇠나 돌도 아니면서 초목과 榮華를 다투려 하는가?
念誰爲之戕賊, 亦何恨乎秋聲!" 생각건대 누가 이들을 죽이고 해치고 있는가? 어찌하여 가을 바람소리를 원망하는가?"
童子莫對, 垂頭而睡. 但聞四壁蟲聲喞喞, 如助余之歎息. 동자는 아무 대답 없이 머리를 떨구고 자고 있다. 다만 사방 벽에서 찌륵 찌륵 벌레 우는 소리만 들려와, 마치 나의 탄식을 돕는 듯하구나.
서안 앞의 선비와 바깥 상황을 알려주는 동자의 몸짓은 인물의 서사를 드러내고,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달은 시공간의 배경을 보여준다. 김홍도는 화면 전체를 엷게 먹칠하여 밤의 분위기를 연출했고, 나무와 바위를 마른 붓으로 그려내어 건조한 가을 산하의 인상을 포착했다.
메마른 나뭇가지가 바람에 서로 부딪치고, 떨어진 낙엽이 사각거리며 굴러다니는 소리가 붓질에서 느껴진다. 돌풍에 흩날리는 나뭇잎은 그림에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재현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그 소리마저 들릴 듯하다.
어느 대가의 마지막 계절
김홍도는 「추성부」의 그림 왼쪽 위에 찍은 백문타원인白文楕圓印[한자로만 새긴 타원형 인장]으로 '기우유자騎牛游子[소를 타고 노니는 사람]'라 찍혀 있고, 추성부 전문이 단원의 자필로 쓰여져 있으며, 끝 부분에 ‘을축년동지후삼일乙丑年冬至後三日 단구사(丹邱寫)’라 하였으므로 이 그림은 1805년 즉, 단원의 나이 61세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해는 단원이 죽기 바로 전 해로 추정되므로 그의 마지막 기년작紀年作[만든 해가 기록된 작품]이자 죽음을 앞두고 그린 작품으로 믿어진다.
예순하나의 김홍도는 힘겨운 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장 든든한 후원자였던 정조 임금이 붕어한 후, 김홍도는 아들의 수업료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고, 병이 깊어 고통스러운 날이 이어졌다. 김홍도가 <추성부도>를 그린 동기는 분명히 알기 어렵다. 종이 두 장을 이어붙인 큰 화면에 「추성부」를 그림과 글씨로 옮기는 작업에는 만만치 않은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화가는 아픈 몸을 일으켜 마지막 대작이 될지도 모를 <추성부도>를 묵묵히 그려내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어느 수집가의 초대-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에서 이번 유월에 <추성부도>를 선보인다. 김홍도 만년의 걸작이 여러분을 맞이한다.
✺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201family | 어느 수집가의 초대 –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 - Daum 카페
[참고문헌 및 출처: 참고문헌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장진성, 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미술은 아름다운 생명체다』(정병모, 다 미디어, 2001), 문화재청(www.cha.go.kr), 국립중앙박물관 박물관 신문 2022년 6월호 전시정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글. 이재호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
첫댓글 감사합니다 ~
건강하세요 ♡
고봉산 정현욱 님
추성부도
자세히 잘 담아오셨네요
한점 한점 확대해서 보니 歲寒圖 처럼 느껴지기도 히지만 세한도가 겨울풍이라면 추성부도는 가을풍이란 점이 다르고 세한도는 여백의 미가 특징인데 추성부도는 좀더 섬세하게 그린 느낌이네요
송나라 구양수는 가을소리를 산문시로 표현하고 김홍도는 구양수의 산문시를 그림으로 昇化시켰다니 그림속에 시가 있고 시속에 그림이 있다는 이치를 깨닫게 해주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더 느낀점이 있다면 사진속에도 시가 있고 시속에 사진이 있다는 생각에 詩寫集이라도 한번 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