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페르디낭 드 소쉬르, 에드문트 훗설, 가스통 바슐라르, 아인슈타인. 이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객관적인 진리가 있고 인간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계몽주의의 전제를 각기 자기 영역에서 무너뜨린 사람들입니다.
만약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대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구두를 사고 싶을 때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구두를 신고 있는지만 보입니다. 저희 집이 식당을 시작하려고 하니까 식당에 들어가도 조그마한 장식이나 조명 하나까지 예사로 보이지 않습니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는 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책을 교정할 때도 자기 원고는 좀처럼 고칠 것을 찾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너희에게는 무엇이 보이느냐?'고 물으십니다. 육의 눈이 아니라 영의 눈을 말합니다. 좀더 직설적으로 묻는다면, '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로 바꿀 수 있습니다.
2. 본문의 구조 1) 6:30-8:9 안에서
유대인 이방인 6:30-44 6:45-56 7:1-23 7:24-37 8:1-9 먹이심 치유 장벽제거 치유 먹이심 a b x b' a'
오늘 본문은 6:30부터 이어진 본문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유대인들에게 떡을 만드는 기적과 치유의 기적을 베푸신 예수님은 7장에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 동독과 서독이 하나가 되었듯이,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던 높은 장벽을 제거하셔서 이제 자신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독일이 원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듯이, 사실 정결법의 장벽도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기준으로 쌓은 담(장로의 유전)입니다. 그 파괴의 첫 수혜자로 등장한 사람은 수로보니게 여인이었습니다. '개가 되어도 좋은 만남'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과격한 자기 겸비, 철저하게 자신을 망가뜨린 그 한 마디, '옳소이다'로 예수님의 마음을 후련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내버린 여인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0:39)라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녀는 자기 딸을 살리기 위해서 기꺼이 개가 되기를 선택하였습니다. 철저하게 자아를 죽인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에바다'란 외침으로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여 복음을 들을 수도 없고,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는 한 이방인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8:1-9은 이방인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축복의 절정입니다.
2) 본문의 구조
본문 1-9절은 칠병이어의 사건입니다. 마가는 비슷한 사건을 두 번씩 기술하는 방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 급식 기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10-21절은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을 마무리하는 단락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영광스런 기적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이 예수님을 가장 잘 영접해야 했던, 그렇게 할 것이라고 기대되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13절까지 너무도 간절하게 메시아를 기다렸던 바리새인이 나오고, 21절까지는 거의 3년 반 가까이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들이 등장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반응은 아주 실망스럽습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이며, 그런 사람들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실 것인지를 22-26절이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22-26절은 마가복음 전반부의 결론이면서 동시에 후반부의 서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Ⅱ. 본론 1. 칠병이어의 기적(8:1-9) 1) 배경(:1) 칠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난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방금 전에 데가볼리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치유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저자는 '그 즈음에'라는 말로 새로운 사건을 시작합니다. 이것은 두 사건의 배경이 같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다만 시간만 흐른 것입니다. 이것은 마가복음 저자의 전형적인 '이음새'입니다. 시간적인 이음새를 통해서 앞의 두 사건과 칠병이어의 기적 사건을 하나로 묶고 있는 것입니다. 저자는 여전히 이곳이 데가볼리 근처, 즉 이방인 지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또 큰 무리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라면 언제 큰 무리가 있었습니까? 이것은 분명히 6:34에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킬 때 나오는 '큰 무리'를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자는 지금 의도적으로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리는 아마도 7:37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는 것을 본 사람들이 "그가 다 잘하였도다" 구약의 표현으로 하면 "보기에 심히 좋아더라"(창 1:33)라고 흥분되어 전파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온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중에는 이방인도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줄곧 따라다닌 유대인들보다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2) 예수님의 관심과 제자들의 불신앙(:2-4)
그런데 이들에게 문제가 생겼습니다. 먹을 것이 없는 것입니다. 더구나 4절을 보면 이곳은 '광야'입니다. 아무 것도 구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먼저 그 형편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환기시킵니다.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저희를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서 멀리서 온 사람도 있느니라"
그래서 어쩌란 말입니까? 왜 제자들에게 이 무리의 사정을 아주 상세하게 이야기해주셨을까요? 6:37처럼 이야기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먹을 것을 주라".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너희들은 아무 관심도 없구나"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이번에도 예수님은 참 무책임하게 보이십니다. 야이로의 딸을 죽이신 것도 그렇고, 수로보니게 여인의 청을 처음에는 거절하신 것도 그렇고, 이번에도 사람들을 사흘 동안이나 집에 돌려보내지 않고 가르치시면 그들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될 것을 모르실 리 없었을 텐데 데리고 계십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이 2-3절의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희미하게나마 그 이유를 볼 수 있습니다. 사실 무리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이 무리를 향한 불쌍한 마음을 요청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우리 먹을 것 밖에 없는데 빨리 보내자고' 재촉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신경도 안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형편을 먼저 상세하게 소개하신 것 같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목자 없는 양같은'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고, 그래서 참 목자로서 '가르침'을 주셨는데, 이번에는 먼저 사흘 동안 함께 하신 후 철저하게 그들의 육적인 필요를 염려하시면서 불쌍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냥 슬픈 정도가 아니고, 직역하면 '애간장을 태운다'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당장 길을 가다가 쓰러져 죽을 정도로 그들의 배가 오그라들었다는 것을 아시고 당신의 애간장이 타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목자 역할을 하던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이 영적으로든 육적으로든 이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던 상황을 생각하면, 예수께서 이 두 가지 필요 모두를 아주 공평하게 다루고 계신 것은 매우 실재적인 조치였습니다. 특별히 지금 무대가 되고 있는 이 갈릴리 지역은 척박한 팔레스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물게 물이 많아 농사가 잘 되는 곳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수탈과 착취의 대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이방인들의 '육적인 문제'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아주 적절한 반응인 것입니다.
큰 무리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좇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는 아주 멀리서 온 자도 있다는 것을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아마 유대 지역에서부터 줄곧 따라온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시돈과 두로에서부터 따라 온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 대한 열망으로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따라온 이들을 예수님은 결코 모른 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귀에는 시편 기자의 탄식이 들렸는지 모릅니다.
시 107:4-5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할 성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 영혼이 속에서 피곤하였도다"
그들 중에는 불과 몇 일 전에 있었던 오병이어의 기적을 생생하게 기억한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 사건이 이렇게 큰 무리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는 지도 모르고, 갈 길이 멀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은 채 예수님의 곁을 떠날 줄 몰랐던 것도 아마 그 같은 기적을 또 한번 기대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름 없는 익명의 추종자들에게 예수님은 한없는 '연민'을 보이신 것입니다.
어제 저녁에 전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목이 매었습니다. 배가 고파 길에서 기진하는 일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떠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주님께 붙어 있으면 세상에서 기진할 것이라고 계산하는 저의 멍청한 계산기를 집어던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주님이 먼저 아십니다. 제가 그런 계산을 하지 못하더라도 먼저 불쌍히 여기시고 먹을 것을 주십니다. 나를 통해서 또 누군가를 먹이라고도 하십니다. 불쌍히 여기라고 하십니다. 그냥 '힘들겠다'라고만 하지 말고 애간장을 태우라고 하십니다.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 힘들어 한 지는 얼마나 오래됐는지 알라고 하시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반응은 우리를 아연실색하게 만듭니다. "이 광야에서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도저히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반응입니다. 그래서 윌리엄 레인이라는 저명한 학자는 이 말이 얼른 보면 불신앙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만 할 수 있습니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합니다. 예수님의 책망이 나오지 않고 곧바로 자신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나오는 것이 그 증거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오죽이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마가복음 저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실제 제자들이 어떻게 말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마가복음 저자는 이 표현을 시 77:19-20의 칠십인역과 아주 흡사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말하기를 하나님이 광야에서 능히 식탁을 준비하시랴 저자 반석을 쳐서 물을 쳐서 시내가 넘쳤거니와 또 능히 떡을 주시며 그 백성을 위하여 고기를 예비하시랴 하였도다"
더욱이 '광야'라는 표현은 광야에서 거듭 하나님의 기적을 망각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떠올립니다. 또한 이 단어(광야)는 오병이어의 기적 때 빈들(직역하면 '광야')에서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았던 제자들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도 이 제자들을 보는 것과 똑같은 반응을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10재앙을 보고, 홍해를 갈라 건너고, 애굽의 군사들을 수장시키고, 쓴물이 단물로 변하고,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하늘에서 날마다 만나를 받아 먹으면서도 어떻게 저렇게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을까?
아직도 제자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 눈에는 '광야'만 보였습니다. 4절을 말할 때 제자들은 아주 격앙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무슨 소리 하십니까? 여기는 광야입니다. 광야. 우리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이럴 줄도 모르고 이 사람들을 붙잡고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책망하는 듯한 대답입니다. 특히 8:14-21에 두 번씩이나 기적을 경험하고도 여전히 예수가 참 떡임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면, 한 번의 기적으로 불신앙의 반응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이들의 태도는 이방인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부스러기만으로도 자기 딸을 고칠 수 있다는 고백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사천명을 먹이시는 예수님(:5-9)
예수님은 대꾸도 안 하십니다. 다만 당신이 하실 일을 하십니다. 아니 첫 번째 기적에서 보인 반응과 거의 흡사하게 대처하심으로써,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대신 제자들을 책망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너희에게 떡이 몇 개나 있느냐"라고 물으십니다. 6:38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가서 보라'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제자들은 "일곱이로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오병이어의 기적 때는 떡이 다섯 개였습니다. 떡이 이전보다 더 많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떡이 나올 곳은 바로 예수님 안이기 때문입니다.
현대 사회는 '속도'와 '양'의 싸움입니다. '보다 많이 보다 빨리'가 모토입니다. 속도는 정보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중요하게 대두된 문제입니다. 속도에서 뒤쳐지면 모두 광야에 내버려지게 된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아마 '빨리 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의 국민성 때문에 IT산업이 다른 나라보다 더 빨리 발전하고, 가정의 인터넷 보급률이 선진국 수준이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허망한 에덴의 동쪽 문화에 현혹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우리가 있는 곳이 설령 세상이 말하는 광야라 할지라도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목자가 쉴 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예수님을 놓치고 나니 '광야'만 남았던 것입니다. 광야는 매직아이 같다고 했습니다. '위기'와 '기회'가 동시에 존재하는 곳입니다. 믿음이라는 눈으로 보면 광야에는 또 다른 실체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내 기준대로, 아니 에덴의 동쪽의 기준대로 보면 그저 삭막하고 살아남기 살벌한 곳이 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 떡 일곱 개를 취하여 그 광야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십니다. 황량한 광야를 삭막한 땅을 풍요롭고 흥겨운 잔치 집으로 바꾸십니다. 먼저 떡 일곱 개를 축사하시고(직역하면 '감사하고', 6:41과 다른 단어)) 제자들에게 주어 무리에게 나눠주게 하십니다. 특히 6절의 '그 앞에 놓게 하시니'는 '광야에서 식탁을 준비하시랴'라는 시편의 목소리를 생각나게 하는 표현입니다. 즉 큰 무리 앞에 식탁을 차리라고 주문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광야에서 식탁을 누가 차리냐고 했던 제자들은 이것을 나눠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또 가슴이 무너져 내렸을 것입니다. 우리가 종종 경험하듯이 말입니다. '또 잊었구나. 난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왜 현실만 보았지'라고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일 것입니다.
그리고 물고기도 받아서 축복하시고(6:41의 '축사'와 같은 단어) 나눠주게 하십니다. 모두가 아주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꼭 필요한 만큼 거두게 하셨듯이, 모두가 공평하게 이 부요한 하나님 나라의 잔치를 누렸습니다. 그리고도 남았습니다. 그것도 7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시편 23편을 보면 크게 4절까지는 초장의 이미지가 5-6절은 잔치집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는 '목자' '푸른 잔디' '떼를 지어 비스듬히 앉다'라는 표현들을 사용하여 주로 초장의 양들이 풍성하게 먹는 장면을 그렸다면, 이곳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모인 이 식사에서는 그런 것들이 모두 생략됩니다. 6절에 보면 '땅에 비스듬히 앉으라'고 했고, 떡에다는 '감사 기도를 드리고' 생선에는 축복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생선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칠병이어의 장면은 유대적인 색채가 쏙 빠지고 범세계적인 잔치집 분위기로 그려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먹고 남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통해 더 분명해집니다. 앞에서 유대인을 먹일 때는 배불리 먹고 유대인의 12지파를 암시하는 것 같은 12 바구니를 남겼는데, 여기서는 바구니보다 훨씬 큰 광주리로 7을 남겼습니다. 이 광주리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도망칠 때 타고 내려왔던 광주리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떡도 일곱 개고 남은 광주리도 일곱인 것은-완전수를 사용한 것은- 아마도 이제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잔치의 문이 활짝 열렸음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2. 갈릴리 사역의 마무리(8:10-21) 1) 바리새인들의 불신앙(:10-13)
이렇게 해서 갈릴리에서의 모든 활동이 마무리됐습니다. 1-8장 여기까지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각종 기적과 말씀으로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영광의 책'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8:27부터 마지막까지는 예수님의 수난이 중심적으로 다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수난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 둘 사이를 모순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가 다르다는 것이지요. 참 순진한 발상입니다. 어떻게 수난의 메시아가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지가 마가복음 이해의 핵심입니다. 종교지도자들과 제자들을 당혹스럽게 한 것이 바로 이 역설의 진리입니다. 역설이란 표면적으로는 모순이지만 근본은 하나인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그 예수가 바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종말론적인 나라의 왕이라는 것이 마가복음의 기독론입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가 제자라는 것이 마가복음의 또 다른 축인 '제자도'입니다.
이렇게 영광스럽게 자신을 통해 임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자 사람들은 참 다양하게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요약한 것이 바로 4장의 씨의 비유였습니다. 대개는 아주 절박한 상황에 처한 이들이 예수님을 사심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좋은 밭에 떨어진 씨). 그들 중에는 유대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도 없는 부정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귀신 들린 자, 혈루병 걸린 자, '죽은' 아이 등).
하지만 가장 잘 반응할 것 같았던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첫 째는 유대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을 가장 잘 알고 지킨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가까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자세하게 가르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일 것입니다.
이제 10-21절에서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나와 있습니다. 먼저 10-13절에는 바리새인들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마태복음에서는 '마가단'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막달라 지방일 가능성이 있다고 추측할 뿐입니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이곳은 다시 유대 갈릴리 서쪽 지방이라는 것입니다. 골수 유대인 바리새인들이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바리새인들도 이미 이방인 지역에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들어 알고 있을 것입니다. 유대 지방에서 한 일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이 그 사실조차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사실들을 자기 마음대로 보았습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도 어떤 사람들은 "그가 다 잘하였도다"라고 선포하는 데 이 바리새인들은 믿지 못해서 "하늘에서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여기서 '표적'은 '이적'이나 '기적'과는 다릅니다. 표적은 "어떤 주장이나 행동의 진실성이나 정당성을 보장하여 주는 표식(token)입니다."(Willian Lane) 그렇다면 지금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 그의 권능을 보여달라고 요청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인 그 권능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증명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 만나를 하늘에서 내린 모세의 표적을 구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누가 이런 일 할 권세를 주었느뇨"라고 항의하는 모습과 같습니다(11:28)
왜 그런 요구를 했겠습니까?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하시는 권능을 보고 도저히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3장에서 "바알세불이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생각을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불순한 의도를 마가복음 저자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 목적이 '시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1:13에서 예수께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신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그들이 사단의 하수인 노릇을 하여 예수님을 시험하고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러니입니다.
이들의 완악함은 마치 애굽의 바로를 보는 듯 합니다. 한번 먹은 생각을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겉으로야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자기 잇속을 차리기 위한 속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이 '외식하는 자'다, '회칠한 무덤이다'라고 하시며 그들의 이중성을 폭로하신 것입니다. 잘 하려고 했는데 잘못하게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속이면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국 바로를 강팍한 마음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스스로 멸망의 길을 재촉하도록 두신 것입니다. 이 종교지도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바로가 첫출애굽을 방해한 인물이었다면, 종교지도자들은 새출애굽의 메시아로 오신 이 예수님을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마음의 완악한 속셈을 간파하시고는 깊이 탄식하십니다. 아마 지도자였기 때문에 더욱 자신을 죽이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자신의 안경을 벗기가 싫었을 것입니다. 그가 붙잡고 있었던 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자기 신념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가 되어도 하나님을 얻고 진리를 얻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기 신념에 반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희생을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잔인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예수께 분노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바로도 애굽의 왕이라는 자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낯 유목민의 목자에게 당한 것이 수치스러워 장자를 잃고도 철병거 칠백승을 보내 이스라엘을 추격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자신의 곤궁함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얼마나 자신이 무력하고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지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이미 받아 누리고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잘난 것 때문에 먹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자신의 신학으로, 패러다임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든 것은 틀린 것이고 위협적인 것이 된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이런 종교적인 광기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가장 주의해야 할 사람이 바로 말씀 전하는 저입니다. 지금이야 젊고 아는 것이 별로 없어서 그리 안보일지 모르지만, 점점 나이가 들고 경력이 늘고, 학위가 쌓이면 왠만한 사람은 물론 하나님도 안중에 없는 불한당이 될지 모릅니다. 이 바리새인들처럼 말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의 가르침만 옳고, 우리 교회처럼 작은 교회만 옳고, 매일성경으로 말씀 묵상을 해야만 제대로 신앙 생활 하는 것이라는 신념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전한 사람들과 담을 쌓아서는 절대 안됩니다.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가 날마다 사랑으로 베푸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들과 은혜를 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이나 회당장 야이로 같은 간절함이 없을 때 나는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서 내 삶 가운데 베풀고 있는 이 기적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불평할 것입니다. 그 불평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디 좀 증명을 해 보시지요. 왜 나는 이렇게 일이 안 풀리는 겁니까? 당신만 믿고 사는 데 왜 이렇게 꾀재재하게 살아야 합니까? 왜 내게만 이렇게 일이 꼬이게 하십니까?'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십니다. 이 탄식은 더 이상 소망 없는 자에게 보이시는 반응입니다. 이들이 해야 할 일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는 일입니다. 바로가 그랬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은 일언지하에 그들의 요청을 거절합니다.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 세대에게 표적을 주시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아멘, 만일 표적이 이 세대에 주어진다면..." 즉 조건문의 귀결절이 생략된 문장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것이 히브리인들의 관용어구라고 보는데 저도 이에 동의합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는 당연히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말이 생략됐을 것입니다. 대개 학자들은 "내가 죽기를"이나 "내가 저주 받기를!"이 생략되었다고 합니다. 즉 이것은 저주 맹세입니다. 단호하게 거절한 것입니다. 왜 거절했습니까? 그 어떤 표적으로도 그들의 마음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보일 표적은 단 한 가지뿐입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표적입니다. 자신들이 죽인 메시아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지 않고는 결코 이 목수 예수가 메시아라고 믿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2:18-22이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반역하는 '이 세대'의 대표들이었습니다. 이 세대는 사단의 세대입니다. 육의 세대입니다. 죄악의 세대요 사망의 세대입니다. 예수님은 간절하게 자신의 필요를 인정하고 겸손하게 자신을 죽이는 사람에게만 표적을 베풀어주십니다.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미 주신 표적을 누리는 자입니까? 아니면 표적을 요구하는 자입니까?
12절이 말로 거절하신 것이라면 13절은 행동으로 거절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냥 다른 장소로 옮기신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마가복음 저자는 '저희를 떠나'라는 표현을 통해 이젠 그들을 '유기'하셨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그들은 자기 갈 길을 갈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2) 제자들의 불신앙(:14-21)
14절부터는 하나님의 아들의 기적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 나타나 있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겉으로는 이들이 가장 인사이더 중에 인사이더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과 같습니다. 많이 보고, 듣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들도 그렇게 특별히 신경을 써서 사랑해주시고, 가르쳐 주신 대로 보고 있는지 아니면, 종교 지도자들처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지는 않더라도-물론 가룟 유다는 그랬지만-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종교지도자들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예수께서는 구약에서 약속한 능력의 메시아라고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14절은 아주 희한한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이 떡을 하나 밖에 안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즉 13명이 먹기에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에서 제자들의 반응을 지켜본 독자들을 불안하게 하는 도입입니다. 이것은 광야의 상황입니다. 시험을 받을 만한 상황입니다. 과연 제자들은 배 안에 계신 진정한 생명의 떡이신 한 분 예수님을 볼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한 떡을 볼 것인지 또 선택해야 합니다. '한 떡 밖에'가 될 것인지 '한 떡이나'가 될 것인지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이 14절을 이런 이중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의 염려와 불안을 내다보신 것 같습니다. 12절에서 자신을 시험하는 바리새인의 마음을 읽었던 것과 같습니다. 두 장면은 서로 대구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참 황당한 말씀입니다. 물론 이런 저런 말씀을 하시다가 이 말씀을 하셨는지 아니면 갑자기 이 말씀을 '툭' 던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전후 맥락이 없다면 참 다양하게 생각할 법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방금 전에 달마누다에서 있었던 바리새인과의 논쟁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바리새인의 불신앙 혹은 예수님께 대한 무지의 태도를 말하는 것일 것입니다. 놀랍게도 당시에 바리새인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헤롯을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동일한 위치에 놓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편은 민족적이고 다른 한편은 반민족적이기 때문에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하지만 3:6에 보면 이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데는 서로 한 패거리가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하니라"
여러분, 일본이 축구에서 이기든 한국이 이기든,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기든 한나라당이 이기든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IMF에서 구제 금융을 받든, 그 빚을 다 청산하든 하나님 나라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들 이해관계가 맞으면 절에도 가서 절하고, 교회에서도 기도하고, 문선명이 앞에서도 알랑거릴 것입니다. 단군상이 세워지는 것에는 열내면서 교회가 건물을 우상으로 삼아 크고 화려하게 지으려고 앞다투는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우리네 현실입니다. 그러니 마치 이 세상의 정의가 바로 서로 한국이 선진국이 되고, 월드컵을 잘 치루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가 될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 않아야 합니다. 너무 정치나 경제나 스포츠 때문에 열내지 말고, 쓸데없는 민족주의나 애국의식을 불어넣지 마십시오. 십자가 앞에서는 냉냉한 가슴이 애국가 앞에서는 가슴이 울컹거리는 것은 지나친 감상주의입니다. 이런 것을 조장하는 우민정치에 속아서 같은 그리스도인들끼리 이념 대립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 땅의 나라가 지금도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종교의 탈을 쓴 바리새인이나, 정치의 탈을 쓴 헤롯당이나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잘못 이해하고 결국 그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이라는 것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가르침이나 심지어 위협에 대해서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주목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이 비유는 인사이더와 아웃사이더를 구분하는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예수님의 통렬한 풍자에 골계적으로 응수함으로써 예수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고, 귀신을 쫓아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에게는 들을 귀가 없었습니다. 자기들 생각에만 골똘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에는 이 바리새인과 헤롯당에게 당할 죽음을 앞둔 자신의 운명과 그들에게 핍박을 받을 제자들의 잿빛 운명이 드리워져 있는데, 제자들은 한낯 떡 생각이나 하고 있었습니다. 보고 싶은 대로만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겨우 자기들 떡 걱정이나 하는 분으로 만든 것입니다. 그들은 누룩 이야기를 하시는 것으로 봐서 분명히 먹을 것 안 챙겨 왔다고 화내시는 것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지금 참 떡이신 예수님이 계신 데 그들은 떡이 없다고 아우성 치는 것입니다.
이젠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17-21절에서 예수님은 8장까지 오면서 제자들에게 가장 호되게 야단을 치십니다. 호렙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당신이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을 4가지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면서 애굽으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설득하고 또 해도 계속해서 못 가겠다고 핑계를 대자 결국 참다못한 하나님은 출 4:14에서 노를 발하십니다. 꼭 그 장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기적을 보고도 표적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을 향해서 탄식하시듯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기적을 보고도 의심하는 것이나 기적을 보고도 망각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아직도 알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심지어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다"고 책망을 듣습니다. 이것은 영적인 깨달음을 뜻합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생각으로 가득 찬 것입니다. 자신들의 기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찾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이 가슴에 박히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들에게는 지금까지 예수께서 한 모든 기적이 직접적으로 아무 유익이 안됐습니다. 다 남 좋은 일일 뿐입니다. 하지만 꾹 참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까지요? 이 예수님이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막 10:35-37). 그 날이 오기 전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볼 때마다 자신들이 믿을 만한 사람, 왕이 될 만한 사람을 따라 다녔다고 생각했지, 정말 이 분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가슴 절절하게 기억하려고 하지 않은 것입니다.
30년 간 알뜰살뜰 모아서 마련한 아파트 동과 호수를 기억 못할 사람 있을까요? 애뜻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이메일 주소가 아무리 길어도 그거 기억 못할 사람 있을까요? 사무치면 가슴에 박힙니다. 평생 기억에 남는 말씀은 명설교나 강의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 자아가 죽고 그 말씀 아니면 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런 사무침이 없었습니다. 그저 놀라운 일일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체적인 사례까지 제시하시면서 망각의 바다에서 그들을 구해내십니다.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제자들에게 꼬박꼬박 대답을 요구하셨습니다. 청문회를 여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국회의원들처럼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건 내가 가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습니다. 전 다만 지시만 했습니다'라고 둘러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아무리 많이 듣고, 아무리 많이 보고 배웠고 놀랐더라도 정작 그것이 믿음의 결단을 요청하는 순간에는 불안과 초조와 벙어리가 되게 한다면 아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영어를 십년 이십년 해도 외국인 앞에서 벙어리가 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눈 뜬 소경이요, 귀 있는 귀머거리였습니다.
저희들을 두고 하는 소리 같지 않습니까? 저희들도 이만하면 배울만큼 배웠고, 들을만큼 들었습니다. 참 좋은 스승들 도움을 많이 받은 드문 교회입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겁니까? 조금만 시련이 찾아와서 그것에 매몰되어 정신을 못 차리는 저를 보면 도대체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부정한 제의 하나 거절 못하는 수십 년의 신앙이 무슨 소용인가? 부인에게, 상관에게, 동료에게 자존심 한 번 꺾지 못하고 미안하다는 소리 한 번 못하는 나의 화려한 성경공부 경력이, 좋은 교회라는 자부심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종교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곤궁함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허상을 지키기 위해 예수님을 버렸다면, 제자들은 그 필요에 매몰되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예수님의 탄식이 설교를 준비하는 제 마음을 세차게 내리쳤습니다.
3. 벳새다의 소경 치유 사건(:22-26) → 갈릴리 사역과 '길' 사역의 연결고리
그렇다면 이 제자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니 우리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어디까지 맞고 어디까지 틀리는가? 이들이 정말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줄 깨닫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실 것인가? 아니 아주 작은 일에도 예수님을 부인하는 우리들을 예수님은 과연 어떻게 자신을 따르는 사람으로 만드실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22-26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과연 어떻게 자신의 길을 따르는 '제자'를 만드실 것인지를 22-26절의 사건을 통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아마 제자들은 이 기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의 저자는 제대로 깨닫고 이 사건을 아주 적절한 곳에 배치하고 있습니다.
* 샌드위치 구조 제자들의 무지와 소경 치유 -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길 -제자들의 무지와 소경 치유 8:14-26 8:27-10:34 10:35-52
위의 구조에서 보듯이 22-26절은 1-8장의 총 결론일 뿐만 아니라 8:27-10:52에 이르는 마가복음의 두 번째 큰 단락('길' 단락-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위에서 벌어진 일과 대화)의 도입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중간 단락은 수난 받는 메시아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과 그의 뒤를 따라야 하는 제자들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단락을 소경을 치유하는 사건이 감싸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중간 단락은 단지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소경 같은 제자들을 가르쳐서 깨우치는 내용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배를 타고 벳새다로 옵니다. 벳새다는 이방지역입니다. 마태복음 11장에 보면 고라신과 함께 메시아의 기적을 믿지 않은 아주 흑암의 고을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흑암의 고을에 빛이신 예수께서 찾아가신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께 사람들이 소경을 데리고 와서 손을 대어 낫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예수님은 7:33에서 귀먹고 어눌한 자를 고치실 때처럼 무리를 떠나 소경과 자신만의 장소로 가십니다. 그리고 눈에 침을 뱉으시며 안수하십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그런데 아주 희한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께서 한 번에 낫게 하시지 않고 2단계로 낫게 하시는 것입니다. 처음에 안수하시고 그 상태를 묻자 소경은 "사람들이 보이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사람들이 나무 같은 것들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정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자 다시 안수하십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만물을 밝히 보게'됩니다.
왜 이렇게 2단계로 치유하셨을까요? 앞에서 무리가 굶는지 알면서도 광야에서 사흘 동안이나 함께 있었듯이, 이번에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이렇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단락에서는 '보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락의 핵심이 예수님의 치유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앞 단락에서 제자들이 눈이 있으나 보지 못한다고 했던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이 소경의 치유를 통해서, 제자들도 단계적으로 눈을 뜰 것이라는 것, 즉 단계적으로 메시아이신 자신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단계적인 변화는 베드로를 통해서 대표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분명히 배 안에서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지적대로 소경이었습니다. 하지만 8:27에서 "주는 그리스도, 메시아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베드로의 고백은 이제 눈이 뜨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곧 뒤에 예수께서 자신이 수난 당하는 메시아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도 말라는 투로 발끈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하다'라는 말은 그 다음절에 나오는 '꾸짖다'(rebuke)라는 단어와 같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매몰차게 책망하십니다.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것은 알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어떤 이유에서 오셨는지는, 어떤 메시아고 그가 이루실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반쯤 열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8:38에서 예수님은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신 후 9:1에서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나중에 살피겠지만, 주님의 부활 사건을 뜻합니다. 그리고 9장에 나오는 변화산 사건은 그것의 그림자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진정 밝히 메시아가 누구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은 언제입니까? 바로 십자가와 부활을 거친 후에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종교지도자들에게는 심판의 표적이지만, 제자들에게는 구원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가복음 저자는 이렇게 밝히 깨닫는 사람의 모델로 제자가 아닌 이방인 백부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그 현장에서 "이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수난 받는 '인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한 최초의 사람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은 1:1에 나오고 여기에 다시 15:39에 다시 나오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이 말하는 복음을 제대로 깨달은 사람은 유대인도, 제자도 아닌 한 이방인이었습니다. 이 마가복음의 1차 독자가 로마의 교회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자신을 배반하고 죽일 마음을 품은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탄식은 그들에 대한 유기('버리심')를 의미했지만, 아직 자기 욕망을 포기하지 못해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제자들을 향한 책망은 그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Ⅲ. 결론 1. 광야를 볼 것인가 나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을 볼 것인가? 오늘도 여지없이 주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를 광야로 불러 세우십니다. 아니 우리가 선 곳이 광야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고 살아서 위기를 차초할 것인지, 아니면 참 떡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아 기회를 삼을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느라고 기진해진 우리를 주님은 그냥 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해도 기진하고 굶주리는 때가 오겠지만 주님은 당신의 사랑을 보이실 기회로 삼길 원하십니다. 기진할까봐 지레 겁먹고 주님을 적당히 따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진한 이들에게 주님은 당신처럼 애간장을 태우고, '네가 먹을 것을 주라'고 요구하십니다.
2.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필요 때문에 두려워하는 사람 종교 지도자들처럼 내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까지 희생시키는 사람은 날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은혜를 볼 수 없습니다. 다시 증명해 보이라고 생떼를 쓸 것입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망각해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3. 무엇이 보이느냐? 우리는 눈에는 무엇이 보입니까? 주님은 내게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내게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우리 교회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의 예배에, 찬양에, 설교에, 헌금에, 교제에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 가정에, 부부 관계에, 직장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기쁠 때, 슬플 때, 아플 때, 곤궁할 때, 직장을 잃었을 때, 진학에 실패했을 때, 큰 돈을 벌었을 때, 아무 걱정없이 잘 살 때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죽고 다시 사시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제자들은 소경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기 전까지 그들은 자기가 죽어야 그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것에 눈 감고 예수님의 시각으로 내 인생을 보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내가 죽고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결코 교리적인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실제적인 요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가 되어도 좋다는 수로보니게 여인의 태도가 바로 내가 죽는 것입니다. 부스러기만으로도 내 딸이 다시 온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광야에서, 배 안에서, 떡 하나 뿐인 현실에서도 예수님을 참 생명의 떡으로 인정하는 것이 바로 부활 신앙입니다. '날마다 가난하여'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이 곧 부활의 마음입니다. 지금 내 눈엔 무엇이 보입니까?
본문: 마가복음 8:27-9:1 제목: '길 위에서' -주의 길과 제자의 길-
Ⅰ. 들어가는 말 1. 도입
A. 'My Way' 미국인들은 20세기 최고의 팝송으로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의 'My Way'를 꼽았습니다. 우리들도 가사는 잘 모르지만 곡이 좋아서 흥얼거리다가 용케도 마지막 부분만은 알아듣고는 따라서 부릅니다. 'I did it my way'. '난 내 방식대로 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미국에 잘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뉴욕타임즈의 특집 기사 제목처럼 '중심에서 밀려난 하나님'의 자리에 '자랑스런 나'가 차지하였습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는 찬양은 사라지고, '나는 나다. 네가 어쩔 테냐'라는 식의 인본주의적인 자기 주장과 자유의 요구가 그들의 이념이 되어버렸습니다.
뉴욕타임즈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미국인들은 자신을 위해 종교를 재단하고 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하나님을 믿는지도 확실히 모르면서 점점 더 많이 종교로 돌아오고 있다" 'Amazing Grace'를 부른 후 눈물을 글썽이며 이슬람에 대한 피의 보복을 선언하는 그들의 모순은 분명 그들이 'Lord's Way'(주의 길)가 아니라 'My Way'를 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주의 길을 간다고 모인 사람들 아닙니까? 그런데 주께서 앞서 가시면서 닦아놓으신 길이 아니라, 쓸데없이 수고하며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My Way'를 닦고 있는 사람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동상이몽(同床異夢)이던가요.
B. 길 위의 길 제자들은 적어도 자신들이 판단하기에 크고 소중한 것을 위해 자신들이 가진 것을 기꺼이 포기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부르시자 '곧' 배와 그물과 형제와 가족을 버리고 예수님의 길에 나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자신 있는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막 10:28).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도 가기를 준비하였나이다"(눅 22:33). 엉겁결에 따라 나선 길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굳게 각오하고 떠난 '길'이라고 해도 반드시 원하는 것을 얻고 가고 싶은 곳에 당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부르신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My Way'를 고집하면 갈 수 없는 길입니다. 동상이몽을 하고 있는 사람은 결코 당도할 수 없는 길입니다. 길 위에 또 다른 길이 있는 것입니다.
2. 문맥 A. 문맥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1:1) ↓ 1-8장 8:22-26 8-16장 이적 소경의 개안 수난 ↓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8:29) :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감 ↓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15:39) : 만물을 밝히 봄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벳새다에서 한 소경을 두 단계로 치유하시는 장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제자들이 영적으로 눈이 열리는 과정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1:1-8:21까지 제자들은 줄곧 영적인 소경으로 묘사되어왔습니다. 가장 마지막 장면을 보십시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도 배 안에 있는 참 생명의 떡을 알아보지 못한 채 먹을 것을 염려하지 않았습니까?(8:14-21)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자들이라고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다(8:18).
아무리 길을 가겠다는 의지가 강해도 앞을 보지 못하면 제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앞서 가며 인도해주는 사람이 없다면 더욱 곤란할 것입니다. 소경이 인도하는 사람보다 앞서 간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많은 것을 포기하고, 또 희생할 각오도 하고 예수님을 좇았지만 그들은 소경이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주시려고 하신 것과 그들이 얻고 싶었던 것도 달랐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보다 한참이나 앞서 갔습니다.
오늘 본문부터는 마가복음 전체의 세 단락 가운데 중간 단락입니다. 이 단락은 예수님과 그 일행이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앞서 살핀 대로 소경이 눈뜨는 사건으로 시작해서 소경이 눈뜨는 사건으로 끝납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핀 1:1-8:21까지는 1:1에서 말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각종 이적과 기사 그리고 귀신을 쫓아내는 모습을 통해서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부터는 그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이 예고되고 또 실현되는 것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둘을 연결해주는 것이 바로 두 단계로 소경을 치유하는 사건입니다.
마가는 신약의 이사야 선지자라고 했습니다. 마가는 아마 이런 구조를 이사야에서 힌트를 얻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사야 35장은 장차 메시아가 왔을 때 회복될 모습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5절을 보면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사막에 대로가 놓일 것인데 그 길은 "깨끗치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마가는 이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가는 길이며, 예수께서 먼저 가신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즉 예수께서 수난과 죽음의 길을 가심으로 깨끗하게 된 백성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B. 문맥 2:
뱃세다의 소경 치유 - 예루살렘 올라가는 길 위에서 - 소경 바디매오 치유 '길 위에서' '십자가의 길' '길 위에서'
8:27-30 '노중에서' 예수의 신분에 대한 베드로의 고백 8:31-9:1 첫 번째 수난에 대한 예언 단위 8:31 수난 예언 8:32-33 베드로의 오해 8:34-9:1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9:2-29 다양한 기사와 어록들 9:2-13 변모 기사: '산 위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그의 말을 들으라" 9:14-29 치유 기사: '산 아래서' : 믿음이 없는 세대- "기도 외에는..." 9:30-50 두 번째 수난에 대한 예언 단위 9:31 수난 예언 9:32-33 제자들의 오해 9:34-50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10:1-31 다양한 기사와 어록 10:2-16 이혼과 어린이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예수 시험): 이혼문제 -제자들의 완악함(어린아이 꾸짖음) 10:7-31 소유 -'길에서 한 부자' : 재물이 많은 고로 떠남 -제자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10:32-45 세 번째 수난에 대한 예언 단위 10:32-34 수난 예언 10:35-41 제자들의 오해 10:42-45 제자도에 대한 가르침 10:46-52 '노중에서' 바디매오가 예수를 따름
그렇다면 8:27-10:52은 어떻게 그렇게 능력 많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수치와 모욕을 당하고 죽을 수 있으며, 또 죽어야만 하는 메시아인지를 '길 위에서' 소경인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 길은 '수난을 받으러 올라가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친히 수난의 길을 가시면서 가르치시고 또 따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중간 단락에는 유독 '길에'/'노중에서'(막 8:27; 9:33, 34; 10:17, 32, 46, 52)와, 수난에 대한 예언(막 8:31; 9:12; 9:31; 10:33-34; 10:45)과 '따른다'/'좇다'(막 8:34; 9:38; 10:21; 10:28; 10:32; 10:38; 10:52)라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위의 문맥 구조를 보시면 중간 단락이 세 번에 걸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 예고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노중에서 예수님의 신분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으로 시작했다가 '노중에서' 바디매오의 눈을 열어주시고, 그가 그리스도를 좇겠다고 고백한 내용으로 마무됩니다. 베드로는 베드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말을 들었지만 바디매오는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길 위에서'의 가르침으로 예수께서 얻고 싶었던 반응을 제자들이 아닌 소경 바디매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눈'이 열리고, '좇는' 삶은 앞으로 제자들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줄 참으로 깨달아서(영적인 눈이 열림-기독론) 해야 할(죽을 때까지 좇음-제자도) 반응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저희들은 과연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소경은 아닌지, 주님보다 앞서 가지는 않는지 점검하여 다시 주께서 앞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제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Ⅱ. 몸말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7-33절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내용이고, 34-9:1은 "그를 따르는 제자는 누구인가"에 관해 다루고 있습니다. 즉 앞 부분은 기독론을 뒷부분은 제자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둘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그가 어떤 길을 가셨는지를 알아야 제자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목표가 제자의 목표이고, 그분이 인도해 주셔야 갈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1. 기독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7-33) A.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27-28) -구약의 선지자로 이해함
예수님과 제자들은 벳세다를 떠나 갈릴리 바다에서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가이사랴 빌립보에 가셨습니다. 헤롯 빌립은 황제 가이사를 기념하여 도시를 만들고, 자기 이름과 황제의 이름을 따서 '가이사랴 빌립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은 '길 위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정치적인 야심이 있는 사람들은 늘 '여론'에 민감합니다. 제자들은 아마 예수님도 자신들처럼 청중들의 여론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세례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앞서 6:14-15에서 나왔던 반응입니다. 그들은 정작 세례요한이나 선지자들이 가리켰던 그분은 보지 못한 채 이 예수가 바로 메시아를 준비하기 위해 온 세례요한이나 엘리야 같은 선지자로 본 것입니다. 사람들이 구름 같이 몰려다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안에서도 점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선지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메시아상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성경에서 종말에 메시아가 오면 성취될 일들을 행하셨고 세례요한도 누누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기대한 것만 받아들인 것입니다. 보고 싶은 것만 본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도 적극적으로 그들의 메시아상을 교정시켜주는 노력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오해가 증폭되는 것을 막기 위해 피하셨을 뿐입니다. 따라서 어찌 생각하면 이 무리들이 이렇게 오해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메시아가 오셔서 자신이 메시아인 것을 밝히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성경이 8:26로 끝났다면 예수님은 위대한 선지자, 훌륭한 교사, 치유자, 이적을 베푸는 자로 간주되고 끝났을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당장 고통을 무마시켜주는 분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물론 그것마저 실제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심리적으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는 지금도 살아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죽은 목숨을 살려주시고, 새사람으로 만드시는 구주와 왕이신 하나님이 되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예수님의 질문은 '사람들이 나를 알아보는 영적인 눈이 있더냐?'라고 바꿀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해 꼭 적대적이지 않고 호의적으로 평가한다고 해서 그분과 관계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를 종교로 찾고 하나님을 자신들을 위한 우상으로 삼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영혼 없는 우리 시대의 문화에서 만들어 내는 나 중심의 신앙이 바로 여기에 속할 것입니다. 이 때 신앙은 자기 최면이 되고, 기독교는 뉴에이지의 한 부류에 지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과연 나는 마가복음 8:26까지만 계시된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 예수님만 따르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우리 시대에 유행하는 각종 '번영신학' '축복신학', 치유와 이적과 축귀를 강조하는 흐름은 모두 8:26까지만 계시된 반쪽짜리 메시아를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은 딱 한 번 자신들이 처음 믿을 때만 고백하고는 끝나버립니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병을 고쳐주고, 축복을 주고, 힘들 때 위로해주고, 가정에 평화를 주는 분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쪽짜리 메시아는 우리가 만들어낸 우상일 뿐입니다.
B.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29-30) -베드로의 고백: 눈이 반쯤 열린 상태- '메시아'
예수님은 무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별로 관심이 없으신 듯 이제 제자들을 향해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실 예수님이 묻기 전부터 제자들도 늘 이 질문을 갖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그들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을 때 가졌던 예수님에 대한 생각은 삼년 반 동안 그와 함께 다니면서 점점 바뀌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귀신이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오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1:24, 24)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또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3:11; 5:7)라는 말도 들었습니다. 또 풍랑을 잠잠케 하는 것을 보고는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41)라고 놀랐습니다. 많은 병자를 고쳐주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칠병이어의 기적도 경험했습니다. 당초 자신들이 생각했던 분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알게 되었을까요?
제자들의 대표로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지금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서 오시리라고 예언한 바로 '기름 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베드로는 예수를 그 메시아로 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직접 자신을 '메시아'로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인자'라는 말로 자신을 소개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한 말과 행동을 보고 메시아로 깨달은 것은 대단한 발전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깜짝 놀란 것 같습니다. 마 16:17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하지만 마가복음 저자의 입장은 아주 냉정합니다. 예수님의 칭찬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급하게 그 말이 다른 데로 퍼질까봐 노심초사하는 태도를 보이십니다.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계하시고"
'경계하다'라는 말을 통해 볼 때 맞는 말이기 때문에 감추시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꾸짖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거룩한 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큰 소리로 떠드는 귀신을 '꾸짖을'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막 1:25; 3:12). 앞에서 줄곧 예수님은 자신이 행한 기적을 발설하지 말도록 주의를 주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세속적인 기대가 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정치적으로 야심을 키우는 사람정도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베드로가 '메시아'라는 선언을 했음에도 예수께서 경계하신 것도 그 말이 맞기는 하지만 우려할 만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당대의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다윗과 같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들은 지금 저희들이 묵상하고 있는 사무엘하 7장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하셨던 언약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 7:16).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가져왔던 그 다윗의 영화가 메시아를 통해 다시 재현될 것이라고 기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다분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강력한 지도자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이 예비했던 '주의 길'(1:2-3)이 아니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보다 앞서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애매한 죽음을 당함으로써 뒤에 오실 메시아가 어떤 분임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도 이적을 일으키시면서도 자신을 '인자'라고 소개함으로써 자신은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메시아가 아님을 보이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메시아인 것은 알았지만 정작 어떤 메시아인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들은 소경이 예수님의 안수를 받고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본" 것과 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발설하지 말라고 꾸짖으신 것입니다.
C. 인자의 죽음과 부활(:31) -어떤 메시아인가? '인자' -인자: 단 7:13,14 ; 사 53장
하지만 이런 대답을 듣고 예수님은 이제는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 자신이 걸어가야 하고 또 자신을 따르는 자들도 가야 할 길이 어떤 길인지를 알려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하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상을 교정해줄 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메시아'나 '다윗의 후손' 등으로 부르지 않습니다.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줄곧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위해서 사용하신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십니다. '인자'라는 말은 직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라고 하는 정관사입니다. 흥미롭게도 "단 한 군데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1QS 11:20) 기독교 이전 히브리 문학에서 '사람의 아들'(단수)이란 문구가 정관사와 함께 나오는 경우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는 항상 정관사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예외. 요 5:27). 정관사가 붙지 않으면 '사람' '남자' '녀석' 등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또한 '나도''나 같은 사람'이란 말로도 사용되던 숙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심코 들으면 이 말을 들을 때 그냥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시면서, 이미 구약에 나온 '인자'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 인자는 바로 다니엘 7:13에 나옵니다.
다니엘서 7장의 환상은 왕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7장은 라이벌 제국들이 멸망하고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7:18)이 그들을 대신해 주권을 차지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이방 제국들을 상징하는 네 짐승(구체적으로는 '네 왕', 7:17)이 소개된 후 장면은 하나님의 보좌로 전환됩니다. 하나님은 눈부신 광채 가운데 심판주로 좌정해 계시며, 천상의 조신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고, 네 짐승의 한시적인 권력과 주권이 종말을 고합니다. 바로 이 천상적 영광과 심판의 상황에서 다니엘이 한 인물, 즉 '인자 같은 이'를 보게 되는데, 그는 하늘의 구름을 타고 와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와 그 앞으로 인도됩니다. 짐승들이 찬탈했던 주권이 그에게 주어집니다. 그의 통치는 전우주적이고 무궁할 것입니다. 이것은 보좌에 즉위하는 환상인 것입니다. 이 영원한 왕, 참되신 왕이 하나님의 보좌 곁에 좌정하시는 환상입니다.
그렇다면 이 '인자 같은 이'는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의 대표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았던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자신은 천상적 존재요 신적인 존재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는 신중히 자신의 신분을 나타내고 들을 귀 없는 자들에게는 감추기 위한 이중의 목적으로(메시아 비밀) 이 자기 칭호를 사용했을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자신을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내포적 대표자(혹은 머리)인 신적 존재, 즉 하나님의 아들들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로 자신을 나타내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이제 그를 믿는 백성들은 그들의 머리인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높아지고, 아들의 영광과 왕적인 통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될 종말의 날이 온 것입니다.
마가복음 저자는 1-8장에서 각종 이적과 기사를 통해서 이 영광스러운 인자에 대해서 소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자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가 이처럼 영광스런 보좌를 받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마가복음 10:45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의 또 다른 역할은 바로 '대속물'입니다. 이 표현은 이사야 53장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마가복음 10:45을 살필 때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서는 결론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사람의 아들의 또 다른 임무는 이사야 42-61장에 예언된 여호와의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운명을 대신하여 성취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기까지 순종하여,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속죄와 구속을 이루며,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을 중보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선교적 임무를 성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위해 죽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 단 7:13과 같이 왕권을 받으실 수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다 몰랐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야할 길을 담담히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저희에게 가르치시되"
성경에는 간단하게 기록되었지만, 아마 이 보다는 더욱 상세하게 가르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헬라어 'dei'라는 표현입니다. '...해야만 한다'(must 혹은 necessary)입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죽고 살아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결코 메시아가 될 수 없습니다. 결코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성취할 수 없습니다. '..해야만 한다'라는 필연성은 바로 그를 따르겠다고 하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요구됩니다. 결코 1-8:26까지의 메시아만으로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처럼 그 메시아만 따를 때는 결코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나라와 착각하게 만드는 '사람의 일'이고 '사단의 일'이라고까지 이에서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의 영광은 없습니다. 고난 없이는 거룩함도 없습니다. 거룩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없습니다.
D.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32-33)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꾸짖으매) -사단의 일: 막 1:12-13; 마 4:8-10
하지만 동상이몽을 하고 있었던 베드로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들렸을 것입니다. '예수가 죽다니... 아니 죽어야 한다니'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살아나야 한다는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죽은 자가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죽는다는 것도 그리 충격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이 산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헛소리이기 때문에 죽으셔야 한다는 말에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매" '간하다'라고 점잖게 번역된 말은 앞에서 30절에서 하신 '경계하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꾸짖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붙들고 꾸짖었습니다. 마 16:22을 보면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간청하듯이 말하는 것으로 번역했지만, 사실은 화가 나서 꾸짖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로서는 당연한 반응입니다. 안정된 삶을 버리고 거의 3년 가까이 따라 다니면서 고생했는데 이 수고와 바람이 물거품 되기 직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 돌아서셔서는 보시고 '꾸짖으십니다'. 같은 단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꾸짖자 예수께서 다시 베드로를 꾸짖으시는 것입니다. "사단아 네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아주 냉정하신 책망입니다. 이렇게 심하게 꾸중을 들은 것은 처음입니다. 순식간에 메시아를 고백한 사람에서 '사단의 하수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단은 줄곧 예수님에게 두 가지 시험을 했습니다. 첫째는 귀신은 그를 '하나님의 거룩한 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고 다녔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그렇게 고생을 사서하느냐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이와 비슷한 시험을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특히 사단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면서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유혹했습니다. 즉 이것은 명예나 지위에 대한 시험이 아니라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도 영광을 받게 해주겠다는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거절하십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도록 사람들을 사주했습니다. 위선적인 종교지도자들을 분노케 하였으며, 가룟유다를 매수하여 예수를 팔도록 부추긴 것도 사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외면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도록 만드는 전략이 실패하자,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처절하게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 예수님께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힘든 시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것이 더 큰 시험입니까? 내가 수고하고 희생하지도 않았는데도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성공과 부요를 가져다주실 때 유혹을 받습니까, 아니면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소중한 사람과 건강과 가진 것들을 거두워 가실 때 힘이 듭니까? 앞엣 것을 당연하고 여기고 뒤엣 것에 절망하고 하나님께 분노한다면 이 시험에서 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이 주실 때 잘 나누고 늘 상대화시키며, 거둬 가실 때도 욥처럼 의연하게 반응하며, 야고보 선생님의 권면처럼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길 때' 우리는 있고 없고의 차원을 넘어선 또 다른 차원의 자유함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소유'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가 사단의 전략의 앞잡이 노릇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 뒤로 물러가라.' 그는 예수님보다 앞서 가면서 예수님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고 했습니다. 아직 사물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사람을 나무 같은 것들로 볼 정도로 희미하게 눈을 떴을 뿐이면서 예수님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이용하려고 한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소경이 두 눈을 뜬 사람을 인도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또한 "군사적인 해방자를 기다리던 베드로의 메시아 이해는 모두 '사람의 일'을 생각한 결과라고 말합니다." 즉 이 세상의 관점에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예수님을 따랐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베드로의 입술의 고백에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됐다. 이젠 넌 죽을 때까지 구원은 보장 받은 것이다'라고 선언하시지 않았습니다. 그 고백의 가치를 아시면서도 그것이 베드로를 부른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에 그의 불순한 의도와 그릇된 이해까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우리의 찬양과 기도와 고백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만 하면 됐다'는 선언은 저 나라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서 한없이 긍휼 가득한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면서 하시는 말이지, 오늘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자신의 한계와 정직하게 직면하는 일은 늘 쉽지 않고 책망을 받는 일이 그리 유쾌한 것만은 아닙니다만, 그것이 참으로 우리를 영원한 나라에 합당한 백성으로 새롭게 지으시려는 주님의 열심인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까지 사람의 일을 생각하려느냐', '언제까지 소경인 네가 나를 이끌고 여기저기로 다니려 하느냐?'고 책망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하고, 주의 뜻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꾸짖는지 모릅니다. 우리 생각대로 되지 않을 때 화내고, 짜증내고, 꼭 드러내놓고 불평하지 않더라도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를 하지 않고 그저 냉냉한 가슴, 무감각한 상태로 나를 방치하는 방법으로 얼마나 자주 하나님께 시위를 하는지 모릅니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며 살았다고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에겐 실패한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았다고 하나님께서 실패하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치 앞도 못 보는 소경이면서도 하나님 앞서 가면서 따라오라고 기도했던 적은 또 얼마나 많았던지요. 최첨단을 자랑하던 미국의 복판에 떨어진 '검은 화요일'의 재앙을 알고 피한 사람이 누구더란 말입니까?
2. 제자도: 나를 따라 오려거든(:34-38) A. 개요(:34): 자기부인 + 자기 십자가를 짐
도입 8:34a 정의 8:34b a- 목적: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b-행동: 자기를 부인하고 b'-행동: 자기 십자가를 지라 a'-목적: 나를 좇으라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의 일'로 생각이 꽉 찬 사람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십니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첫 번째 부르심에 그들은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곧' 주님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따랐습니다. 알았으면 따라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 기대와 자기 야망에 불타서 따른 것입니다. 다 버렸지만 정작 버려야 할 자신은 버리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님은 그들이 진정으로 따라야 할 분이 누구인지 알려 주신 후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 꼭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버려야 할 것과 취해야 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에 있습니다. 문맥 안에서 본다면 '자기를 부인하라'는 말은 '그릇된 메시아 기대'를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부르신 이의 뜻을 따라야지, 따라오는 자가 자신의 뜻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부르신 이의 뜻은 무엇입니까? 부르신 이가 따라 오라며 먼저 가신 길은 어떤 길입니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이것은 단지 무거운 짐을 지며 수고하는 삶을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모울(S. F. Moule)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들은 처형장으로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은 목숨을 포함하여 전 생애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예수께서 순종하여 죽으실 그 길을 제자들도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자기 뜻을 포기하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참선을 통해 무아지경에 이르는 불교의 자기부정과는 다른 것입니다. 분명히 의지적인 자신은 있되 그 의지를 앞서 가시는 분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어놓으라는 뜻입니다.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이것이 바로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죽어야 한다는 것은 알고 그렇게 순종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 고통이 두려운 두 의지의 싸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싸움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이길 수 있었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그냥 내가 내 자신을 이겨서 순종해야겠다는 의지로 이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으로 배웠고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이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예수님의 적극적인 역할과 하나님의 적극적인 역할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것은 기도와 순종하고픈 마음과 경외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게 해주신 것은 하나님이라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그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일을 예수님께서 하신다는 의미에서 '구원의 근원' '대제사장'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 우리가 할 일은 은혜를 구하는 마음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부정'입니다. 자기의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잘 깨닫고 다음과 같이 표현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