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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5일 연중 7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집회 2,1-11
복 음 : 마르 9,30-37
그때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30 갈릴래아를 가로질러 갔는데,
예수님께서는 누구에게도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31 그분께서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32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33 그들은 카파르나움에 이르렀다. 예수님께서는 집 안에 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 하고 물으셨다.
34 그러나 그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이다.
35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으셔서 열두 제자를 불러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36 그러고 나서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그들 가운데에 세우신 다음,
그를 껴안으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37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것이 벌써 두 번째인데도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할 뿐 아니라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수난과 죽음 부분에만 머물러
부활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알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지금 아는 것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게서 현세에서 지금 누리시는 존경과 권위에만 머물러
그분께서 겪으셔야 할 수난과 죽음은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세에서 지금 그분을 따르면서 큰 사람이 되려 하고
작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지요.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먼저 뿌리를 땅속 깊이 내려야겠지요.
낮은 곳에서 시작하지 않고는 높이 오를 수 없습니다.
그처럼 제자 직분은 낮아지고 작아지면서 성장하는 신비입니다.
일등이 되려고 모든 것을 거는 세상, 일등만 환호하는 세상에서 꼴찌가 되라는,
어린이와 같은 작은 이를 받아들이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진정한 첫째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높고 훌륭한 사람의 종이 되라고 하면 거부감이 덜 하겠지만
자신보다 작다고 여기는 사람이나 죄인들의 종이 되라고 하면 선뜻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와 당신을 동일시하셨고(마태 25,40 참조)
죄인인 우리의 종이 되셨습니다.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을 섬기시려고 스스로 사람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면
그분처럼 “모든 이”(마르 9,35)의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어떤 회사도 잘될 때만 있지 않고
잘 안되어서 큰 손해를 볼 때도 있습니다.
물론 계속 잘되어서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지만,
그렇게 좋은 일만 계속되는 때는 없습니다.
분명히 나쁜 일도 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낙하가 너무 가파르지 않게
잘 조절하는 사람이 훌륭한 경영자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잘 안된다고 모든 책임을 물어 경영자를 퇴출하면,
회사는 더 큰 위기를 맞이하곤 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일만 생기지도 않지만 반대로 나쁜 일만 생기지도 않습니다.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데,
그래도 인생의 그래프가 우상향하면 바람직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강의 시간에서 포기하고 절망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어리석은 선택이 됩니다.
‘나같이 무능한 사람은 필요 없어!’라면서 스스로 퇴출해도 안 됩니다.
나의 인생은 ‘나’가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늘 깨어 있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잘될 때는 교만을 멀리하고 더 큰 겸손을 갖춰야 하고,
잘 안될 때는 되돌아보며 지금 집중해야 할 것을 찾아야 합니다.
이를 생각하면 주님의 ‘늘 깨어 있어라.’라는 말씀이 떠올려집니다.
삶과 주님 말씀은 절대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집중할 때, 보다 바른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특히 희망의 주님이시기에 절망과 포기의 순간에서도
커다란 힘을 주님에게서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수난에 대해 예고하십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하십니다.
우리의 삶처럼 영광이라는 상승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하강도 있음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이 예고를 알아듣지 못하고 또 이에 대해 묻는 것도 두려워합니다.
제자들이 길에 서로 논쟁합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보다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관점에서 완전하게 벗어나야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그리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겸손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관점이 아니라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세상의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밖에 없기에
깨어 있어야 주님과 함께 주님의 뜻에 맞게
지금 커다란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와
그 길을 가는 예수님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제자들에게 행하신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이는 ‘첫째’가 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첫째’가 누구인가를 가르쳐줍니다.
뿐만, 아니라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도 가르쳐 주십니다.
곧 그 길은 ‘꼴찌’가 되고 ‘종’이 되는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꼴찌가 된다는 것’과 ‘종이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꼴찌가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뒤에’ 두는 것을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을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두는 사람이요,
‘으뜸 자리’가 아니라 ‘미천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자신을 앞세우지 말라’고만 하지 않으십니다.
나아가서, 남 ‘밑에’ 두라고 하십니다.
곧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나아가, 지체 높은 이들의 종이 아니라 ‘모든 이의 종’이 되라 하십니다.
곧 ‘미천한 이들의 종’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종이 된다는 것’은 자신을 타인보다 ‘아래에’ 두는 일입니다.
자신을 채우려 하지 않는 사람, 곧 자기실현을 내려놓은 이요,
오히려 타인의 실현, 곧 ‘주인의 뜻을 실현하는 일’을 하는 일이요,
자신이 아니라 주인을 섬기는 일이요, 주인을 위하여 자신을 바치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한 구체적인 모습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곧 어린이 같은 무력하고 미천한 이를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
바로 ‘당신을 받아들여 섬기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예고하신 무력한 어린이처럼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그들 손에 죽게'(마르 9,31) 될
바로 당신을 받아들이는 것과 연관됩니다.
곧 그렇게 ‘무력한 당신’을 받아들이는 일이
‘당신을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일이 될 것’(마르 9,37 참조)이고,
바로 그렇게 하는 이가 ‘첫째’가 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나 높아지고 ‘갑’이 되어
지배하고자 하는 이 시대에서, ‘을’이 되어 섬기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진정한 첫째’가 되는 길이라고 하십니다.
사실 이는 세속 정신이 다스리는 이 세상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요 혁명입니다.
그러나 ‘섬김’이 다스리는 ‘섬김의 나라’에서는 ‘섬기는 이’가 첫째가 될 것입니다.
곧 ‘섬김’은 ‘사랑’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9,35)
주님!
자신을 앞세우지도, 위에 두지도 않게 하소서.
이기기보다 질 줄을 알며, 억누르기보다 뒤집어쓸 줄을 알고,
업신여기기보다 존경하게 하소서.
자신을 낮추되 작은 이나 무능한 이에게나 다 같이 낮추고,
타인을 섬기되 낮은 이나 힘없는 이나 다 같이 섬기게 하소서.
자신을 실현하기보다 자신을 내려놓고,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게 하소서. 아멘.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동고동락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읽지 못할 때는 답답함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잠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꾼다는 말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야말로 동상이몽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마땅히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의 관심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아니라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기 전에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길에서 무슨 일로 논쟁하였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하였기 때문입니다”(마르9,34).
이 물음은 창세기 3장9절의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이나
카인에게 “네 동생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네 속을 보아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네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는가를 살피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큰 사람은 단순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품이 큰 사람을 말합니다.
아니 가장 크신 하느님을 내면에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높은 자리를 희망하고 있었으니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스승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씀대로 복음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논쟁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러한 상태에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으로 섬기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섬긴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대접받기는 쉬워도 상대방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을 중심으로 나의 것을 양보한다는 것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필리2,6-7).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자신을 낮추어 상대방에게 맞추는 겸손,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 할 모범입니다.
사랑은 가장 좋은 것을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눈높이 사랑이 필요합니다.
미숙하고 모자란 상대를 받아들이는 섬김이 필요한 때입니다.
내 마음 안에 하느님이 커지셔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이 세상에서 마음의 평화와 위안을 누리려 한다면
그것은 주님의 바람과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평화를 갈망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일시적인 수고와 땀, 희생의 봉헌을 새롭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차지한다면야 종이면 어떻고, 꼴찌면 어떻습니까?
결국 모든 것을 얻은 것인데 말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사랑은 한이 없으십니다.
그분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두 번째 들었으나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스승님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크나큰 은총이 오리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부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슬퍼할 수밖에 없었다.
수난을 앞둔 스승의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를 알지도 못하고
길에서 그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인가 하고 서로 다툰다(34절).
예수께서는 당신의 삶이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이었고
당신의 죽음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사신 분으로
아직도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참된 봉사의 자세를 가르치신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35절)
예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부름을 받아 신앙인이 된 이유를 말씀하신다.
우리는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초대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 초대되었다.
이 길이 십자가의 길이며, 이 길을 위해 우리가 초대받았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는 사람들이며,
그리스도와 같은 사람들이어야 하는데,
제자들처럼 부르심의 의미를 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섬기기 위한 봉사직무에 초대받은 사람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많은 사람 가운데 선택된 것은
많은 사람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길에로의 초대이며 부활의 영광에로의 초대이다.
우리가 갖는 지위는 우위 다툼이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봉사하기 위한 것이며, 이웃을 받아들이기 위한 것이다.
이런 봉사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많은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를 만나고 사랑해 드릴 수 있다.
우리가 모두 서로를 그리스도 안에서 만날 수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가 된 모습 일치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16년 전에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했다며,
아이의 할머니가 문자를 보냈습니다.
잠시 추억에 잠기며, 유아세례 주었던 아이와 찍었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이도, 저도 해 맑게 웃는 모습이었습니다.
‘얼굴은 가장 좋은 추천서’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년이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지는 나이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16년 전의 사진을 보며, 배우 ‘손지창’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배우 ‘더스틴 호프만’ 닮았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저의 얼굴보다 사진이 잘 나오는 건 저의 표정이 웃는 모습이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얼굴 때문에 유명해진 그림이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입니다.
저도 루브르 박물관에서 원본을 보았습니다. 표정으로 유명해진 그림도 있습니다.
아마 짐작하시는 대로,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입니다.
뭉크의 절규는 얼굴이라기보다는 표정에 가깝습니다.
거울 보고 활짝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인간은 얼굴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표정을 통해 마음을 표현합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얼굴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 단순한 신체의 일부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찾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하는 갈망을 뜻합니다.
시편 27장 8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셨으니, 주님, 당신 얼굴을 찾나이다."
우리는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며 살아갑니다.
모세는 하느님과 대면하며 대화했고, 그 만남 후 그의 얼굴은 빛났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즉, 예수님의 얼굴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깊어질수록 얼굴은 더 평화롭고 기쁨에 차게 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얼굴과 표정을 통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강조하셨듯이,
신앙인의 얼굴이 어두우면 다른 이들이 하느님을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극심한 고통을 겪으셨고,
얼굴에는 깊은 슬픔과 아픔이 서려 있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예수님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업신여김을 받고, 슬픔을 겪으며 병고를 아는 이였다."
그리스도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도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얼굴을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굶주린 이의 얼굴, 병든 이의 얼굴, 외로운 이의 얼굴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얼굴을 찾을 수 있습니다.
마더 테레사 성녀는 늘 가난한 이들의 얼굴에서 예수님을 보았고,
그들을 돌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표정과 태도를 통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야 합니다.
불친절한 얼굴이 아니라, 희망과 자비가 담긴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얼굴을 남겨 주셨습니다.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다가
빵을 떼실 때야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도 성체 앞에 머물며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볼 때, 그분과 깊이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얼굴은 하느님을 증언하는 도구입니다.
신앙인의 얼굴은 두려움과 불안이 아닌, 사랑과 희망으로 빛나야 합니다.
주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우리 또한 이웃을 향해
따뜻한 얼굴과 사랑의 표정으로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웅적인 순교의 비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돈보스코는 꿈의 聖人으로 불릴 만큼 많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꿈들이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곤 했습니다.
그는 100년도 훨씬 전에 자신의 제자들인 살레시안들이
이탈리아 반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방방곡곡에서 활동하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이런 돈보스코의 꿈 이야기를 전해 들은 주변 사람들은
그를 향해 ‘약간 맛이 간 사람’ ‘지나친 몽상가’라고 손가락질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꿈은 120%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살레시오회는 160여 개국에 진출해서
그가 못다 이룬 꿈을 지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돈보스코가 두 명의 살레시오 회원이
금으로 된 큰 성 잔을 들고 있는 꿈을 꾸었는데,
그 안에는 피가 가득 담겨있었습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하가 흐르는 중국이었습니다.
돈보스코가 꾸었던 그 꿈은 50여 년 뒤에 정확하게 이루어졌는데,
1930년 당시 중국에서 활발히 사목활동 중이던
베르실리아 주교, 카라바리오 신부, 두 살레시안이 공소 사목 방문 중에
악한의 습격을 받고 피살되었으며, 시성 되셨습니다.
베르실리아 성인 같은 경우 수도회의 꽃인
수련자들을 교육시키는 수련장 신부로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제자들과 함께 살아가며,
큰 스승으로서 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이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겸손했던 그는 이제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슬슬 뒤로 물러날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돈보스코의 후계자이자 2대 총장인 루아 신부님께서
당시 베르실리아 신부님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그의 출중한 자질과 성덕을 파악하고 뭔가 부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그 부탁이 뭔가 했더니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지금 마카오에, 홍콩에, 중국 본토에 수많은 가난한 청소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부님께서 선교단을 좀 이끌고 가주셨으면...”
짧은 순간이었지만 주교님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중국이라... 거의 지구 반대쪽 나라인데...
경제, 정치, 종교, 교육 등등 모든 상황이 최악의 상황이라던데...
가면 죽음을 각오하고 가야된다던데...
사랑스러운 수련자들은 어떡하고... 사랑하는 내 가족들은 또 어떡하지...
그러나 베르실리아 신부는 즉시 생각을 바꿉니다.
부정적인 생각, 인간적인 생각을 즉시 접습니다.
환하고 기쁜 얼굴로 즉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루아 총장님, 그럼 제가 언제 떠나면 될까요?”
중국에 도착한 베르실리아, 카라바리오 두 분의 선교사는 홍콩, 마카오를 거쳐
중국 본토 깊숙이 들어가 영웅적인 사목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가던 교리교사들을
안전하게 귀가시키려다가 안타깝게도 화적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십니다.
순교자들이 그 혹독한 현실을 기꺼이 견뎌낸 배경,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를 지닐 수 있었던 배경에
어떤 힘이 있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임마누엘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강렬한 신앙, 그것이 순교의 비결이었습니다.
허사요 공염불인 제자 교육?
박상대 마르코 신부
어제 복음에서 악령이 들려 말을 못 하는 어린아이를 구마치유한 기적으로
갈릴래아에서 펼치신 예수님의 공적 활동은 끝났다.(4,14-9,29)
이제 갈릴래아 활동기의 남은 부분(9,30-50)은 제자들의 가르침에만 공헌 될 것이다.
허나, 어제 복음의 마지막 구절(29절)이 강조한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 모두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고요하고 한적한 기도로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기도는 내세우는 힘이 아니라고 했다.
기도는 하느님께서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이며,
또 그렇게 한 조건이며 상태이다.
이는 모든 제자가 또한 마음 깊이 새겨두어야 할 일이다.
갈릴래아의 공적 활동을 끝내신 예수께서 예루살렘 上京 길에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몇 가지 중요한 가르침을 내리신다.
오늘 복음에는 두 가지 가르침이 들어있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바 있는 수난과 부활에 관한 두 번째 예고이고,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예수 추종에 관한 지침이다.
두 번째 수난 예고는 필립보의 가이사리아(갈리래아 호수 북쪽 40km 지점)에서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는 途上에서 이루어졌다.
길 위에서 예수님이 가실 길을 예고하신 것이다.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8,31-37)도 그랬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예고(10,32-34) 모두가 途上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가셔야 할 길이 결국은 길 위에 있음이다.
합해서 두 번씩이나 예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의 반응은 탐탁하지가 않다.
그들이 예고 말씀을 깨닫기는커녕 예수께 묻기조차 두려워했다는 것이다.(32절)
그뿐인가? 암담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있었던 바로 그 途上에서
제자들은 그들 간의 序列을 놓고 말다툼을 벌였던 것이다.(34절)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제자 교육이 모두 허사였고 空念佛이었단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그렇다. 그러나 실상은 아니다.
제자들은 이미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속으로는 곯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지는 제자 각자에게 물어 볼 일이다.
한 가지 짚어두어야 할 일이 있다.
길에서 제자 간의 서열을 두고 그들이 왜 다투었을까?
원인은 예수님 스스로가 제공하셨다.
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단 말인가?
산에서 내려온 후로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입에 자물통을 채우고 있으니
다른 제자들이 궁금증은 더할 수밖에...
게다가 예수님의 일행이 없던 사이에 남은 제자들이 곤욕을 치러야 했고,
믿음이 없다는 꾸지람을 들어야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예수께서 편애하거나 優位에 둔 제자들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다는 말은 없다. 왜일까?
제자 간에도 첫째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意中이다.
단지 그 첫째는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35절)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한 가지 더 짚어야 할 점은
예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가파르나움에서 있었다는 것이다.
가파르나움이 어떤 곳인가?
거기 인접한 곳 갈릴래아 호수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되었고,(1,14)
대부분의 제자들 또한 불림을 받은 곳(1,16-20)이 아닌가?
예루살렘 상경을 앞두고 다시는 밟지 못할 ‘첫 마음’의 땅으로 모두가 되돌아온 것이다.
첫 마음으로...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