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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2월 26일 연중 7주간 수요일
제1독서 : 집회 4,11-19
복 음 : 마르 9,38-40
그때에 38 요한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의 묵상>
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우리 가운데 자기 집단 중심의 사고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나에게 유익한 일이나 공동선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자기 집단이 그 선을 행하고 인정받는 것을 중요하게 여겨 다른 집단을 비난하는,
이른바 진영 논리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스승을 자기들이 독차지해야 한다는 듯 자기 집단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는 것을 견제하는 제자들의 옹졸함과
반대하지 않는 모든 사람을 지지자로 여기시는 예수님의 관용이 대조적입니다,
사실 누가 선을 행하는지보다는 선이 행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복음이, 공동선이 실현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은 명시적으로 예수님의 일행이 아니라 해도
예수님을 믿었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그리스도인들만의 것이 아니고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한 이름입니다.
칼 라너가 말한 ‘익명의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듣지 못하였거나
스스로 그리스도 신앙을 부정하거나 무신론자라고 해도
삶으로 복음과 그리스도교의 가치를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 일치에 대한 가르침에
이바지하기도 한 이 표현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한편으로는 본인의 종교나 종교적 신념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는듯한 인상을 줄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닐지라도 복음과 예수님을 위한 실천으로
인간의 구원에 협력하는 이는
예수님께 지지자로 인정받으리라는 희망을 드러냅니다.
누구에 의해서든, 복음의 가치가 널리 퍼져 가기를 바라고 기도합시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스마트폰에 소변이 튀었습니다. 이때 여러분의 반응은 어떠하십니까?
1) 손으로 쓱 문질러 닦는다. 2) 마를 때까지 가만히 둔다. 3) 물티슈로 깨끗이 닦는다.
아마 기겁하면서 3번을 대부분 선택하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십니까?
방금 만들어진 소변에는 세균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오히려 스마트폰 표면에서는 7,000여 종이 넘는 세균이 득실거립니다.
스마트폰이 화장실 변기보다 500배 더럽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하지만 화장실 변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주저하면서도
스마트폰 만지는 것은 전혀 망설이지 않습니다.
하루에도 2,000번 이상 맨손으로 만지고 있는 우리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만 믿으면 당연히 변기보다 스마트폰이 깨끗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또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자기 판단이 올바르고 현명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판단이 먼 훗날 크게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요한이 예수님께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을 모르면서도 당신의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사람은 잘못되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요.
요한은 자기 판단이 맞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주님을 믿지는 않지만,
윤리적으로 누구보다도 바르게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이야기하지 않고,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지 않았다고 해서
성령에게서 나오지 않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진리, 아름다움, 그리고 선함은 어디에서 나오든
그 궁극적인 원천은 성령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만의 울타리를 만들어서 그 울타리 밖은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때 성령의 움직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 안에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나를 넘어서는 진리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행히도 세상의 역사 안에서 영적 체험을 한 많은 성인 성녀의 말씀에서,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참 진리 안에서 참 기쁨에 얻게 될 것입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앞 장면에서, 마귀를 쫓아내지 못하여
예수님으로부터 믿음과 기도가 부족함을 질책당한 제자들은,
이제 마귀를 쫓아내는 이들을 보고는 참으로 옹졸한 태도를 보입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하게 막아보려고 하였습니다.”(마르 9,38)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라는 말을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를 보았고, 그는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고,
‘저희’는 그를 막으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잘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을 따르는 사람들’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교회공동체에 속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양들인 것이지,
‘우리’라는 자신들의 양들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유일한 목자는 그리스도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 떼일 따름입니다.
우리가 공동체 속해 있는 이유는 목자이신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위해서이지,
‘나’ 혹은 ‘우리들’이라는 자신들에 속해 있기 위함이 아닙니다.
공동체에서 ‘우리’가 주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금방 분열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을 위한 공동체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를) 막지 마라.”(마르 9,39)
그러므로 요한처럼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고 말하는 것은
제자의 본분을 잃은 자세입니다.
사실 바로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마르 9,37) 하시며,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셨습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파의식은
참으로 오만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나’ 혹은 ‘우리’를 따르는 사람인가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일을 하는가입니다.
교회는 항상 열려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 혹은 ‘저희’만을 위해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2코린 5,15) 때문입니다.
교회는 독점되어서도 안 되고, 배타적이어서도 안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이들뿐만 아니라,
원수마저도 받아들이는 혁명적인 전환을 요청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게 하소서!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이 잘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도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심과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오늘도 제 손과 발이 형제와 이웃을 막는 도구가 아니라
친교를 맺는 도구가 되게 하시고,
제 눈이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편협하지 않고 모두를 품습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 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는 독점적이어서도, 배타적이어서도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않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 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 “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 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 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 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 하게 하였다고 한다.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다.
넓은 의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께로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으로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여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인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하느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하느님의 모습을 가지고 이 세상에 현존하는
살아있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하여야 한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모습이기에 사랑의 모습으로 태어났고,
사랑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다.
사랑 안에 우리가 모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그러한 사랑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어긋나는 사랑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간혹, 아니, 흔히 자기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잘못인데도
눈감아 주거나 심지어 두둔하고,
내 편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옳은 일을 해도
어떤 식으로든 헐뜯거나 글러 먹었다고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참사랑이 아닐뿐더러 정의롭지도 않습니다.
왜 참사랑이 아닐까?
누구 또는 한쪽을 배제하기에 참사랑이 아닙니다.
원수까지 사랑해야 참사랑인데 배제하는 사람이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이 참사랑이 아닌 더 큰 이유는 이것이 아닙니다.
내 편만 사랑하는 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기 사랑에 불과하거나
그가 내 편에 서지 않거나 돌아서면 즉시 미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가 정의롭지 않은 것은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정의는 불편부당해야 하고 늘 옳은 것을 따라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 말입니다.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이러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오늘 주님의 제자들 특히 사도 요한이
주님의 제자답지 않은 짓을 하고 태도를 보입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 추방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했다고 자랑스럽게 보고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이 어떤 사람입니까?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의 사랑을 받은 제자 아닙니까?
그리고 물론 어떤 제자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했겠지요?
그런데도 그는 주님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짓을 합니다.
동족이나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원수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 어긋나는 짓을 하고,
주님의 사랑을 독점하려고 했으니 말입니다.
어긋나는 사랑.
그렇습니다.
주님 가르침에 어긋나는 사랑을 우리도 요한처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거나,
이웃을 사랑하더라도 내 편만 사랑하거나,
주님과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사랑을 할 수 있지요.
이웃 사랑은 잘못해도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 하진 않는다고요?
이웃이 나보다 뭘 더 잘하거나 선한 일을 하면 시기 질투하고,
이웃이 주님께 칭찬받는 것을 시기 질투하면
그것이 바로 주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겁니다.
어쨌거나 오늘 얘기를 남 얘기처럼 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요즘 계속 봉독 되고 있는 집회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인류 역사상 지혜로움으로 따지면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솔로몬은
지혜를 인격체처럼 여기며 지혜를 찬미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가 지니고 있는 스무 가지 이상의 속성을 쭉 나열하고 있습니다.
하나하나 짚어보니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게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혜는,
명석합니다. 거룩합니다.
유일합니다. 다양합니다.
섬세합니다. 민첩합니다.
명료합니다. 청절합니다.
티 없이 맑습니다. 분명합니다.
손상될 수 없습니다. 선을 사랑합니다.
예리합니다. 자유롭습니다. 인자합니다.
항구합니다. 확고합니다. 평온합니다.
전능합니다. 모든 것을 살핍니다.
명석합니다. 깨끗합니다. 빠릅니다.
모든 것을 통달하고 통찰합니다.
남은 인생 여정을 좀 더 지혜로운 사람,
그래서 하느님으로부터 칭찬과 사랑을 듬뿍 받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해 봐야겠습니다.
外柔內剛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내용의 구성으로 보아 마르코복음 9,38-40(오늘 복음)과 9,41-48을 한데 묶어서
묵상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다음의 복음을 먼저 성독 하겠습니다.
[마르 9,41-48]
4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 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4)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6)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9 “모두 불 소금에 절여질 것이다.
그러면 위 복음을 묵상해 보겠습니다.
겉으로는 부드럽고 순한 태도를 보이나
마음속은 단단하고 굳센 의지를 지니고 있음을 뜻하는 外柔內剛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스승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았다는
요한의 옹졸함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이를 말리지 말라는 外柔의 태도를 보이십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예수를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며,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지지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냉수 한 잔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에게 보상까지 약속하십니다.
타인에 대한 예수님의 한량없이 넓은 도량입니다.
2000년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교회가 진즉 배워야 할 도량이 아니던가?
사실인즉, 우리 교회는 적어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
타종교와 비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하여 단호한 외강의 입장을 취하여 왔습니다.
우리 교회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acclesiam nulla salus)는 철의 장벽을 치고
구원을 위한 말씀과 성사를 우리들만의 것으로 여겼고,
이에 대한 타인의 참여를 철저하게 배제하였습니다.
뒤늦은 감은 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헌장, 교회 일치에 관한 교령,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등의 문헌을 통하여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기본공식을 수정하였습니다.
공의회는 우리 가톨릭교회 밖에도 얼마든지 聖化의 요소가 발견되며,
타종교 안에도 하느님 ”말씀의 씨“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과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것을
”기쁨과 경의를 가지고 발견하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천명하였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죄를 짓게 만드는 사람과
실제로 죄를 짓게 하는 신체의 일부에 대하여 예수님은 內剛의 태도를 보이십니다.
그것도 소름 끼칠 정도로 단호하고 엄격한 차원입니다.
남을 죄짓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연자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훨씬 낫다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씀인가.
그뿐이 아닙니다.
손이 죄를 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짓게 하면그 발을 찍어버리며
눈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눈을 빼어버리라는 말씀은
실로 엄청난 요구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때로는 듣지 않고 피해버리고 싶은 부분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결코 지킬 수 없는 과장된 요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공동체의 한 구성원이 다른 구성원의 믿음에 책임이 있으며,
신체의 일부라 할지라도 그것이 죄를 우발시킨다면
몸 전체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뿌리부터 잘라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과 발과 눈은 어떤 것인가?
사람의 행동을 성취하고, 그 행동을 얼마든지 악행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신체의 기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들 신체의 기관들이 악행의 도구가 될 바엔
아예 없애버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말 그대로 따라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매일 죄를 지으며 사는 수억 명의 신자들이
四肢가 멀쩡한 채 그대로 살고 있지 않은가 말입니다.
사실 손과 발과 눈은 인간의 내적 지향이 결정하는 대로
따라 움직이는 외적 표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신체의 기관, 즉 도구들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의 내적 지향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런 결론으로 오늘 복음의 말씀을 쉽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비록 과장되고 무리한 요구이긴 하지만, 죄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깨닫고,
우리 신체의 모든 기관들이 善行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