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꼼꼼히 살폈다. 거울 속 성악가는 키 1미터32센티미터에 성장이 멈춰 있었다. 팔과 무릎관절, 허벅지는 제 모습을 갖추지 못했다. 손가락도 오른손은 4개, 왼손은 3개밖에 없었다. 엉덩이는 너무 컸다. 머리도 큰데다 대머리였다. 머리카락은 금발이었다." (본문 21쪽)
'세상에서 가장 작은 성악가' 토마스 크바스토프(46·베를린 한스 아이슬러 음악대학 교수)는 자서전 <빅맨 빅보이스>에서 자신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래미상을 두 차례나 받았고, 타임지가 '위대한 영혼의 승리자'라고 극찬한 베이스바리톤인 그는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로 태어났다.
탈리도마이드는 1950년대 유럽 임산부들이 입덧고통을 덜기 위해 먹은 진정제인 콘테르간에 포함된 성분을 말한다. 그 약성분의 부작용으로 팔다리가 없거나 짧고 뇌손상을 입은 약 1만여 명의 장애아들이 태어났다. 탈리도마이드 베이비는 그들을 일컫는 말이다. 당시 이들은 격리 수용됐다. 토마스 크바스토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일주이면 두세 번 면회실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그러면 간호사가 내 침대를 어머니 앞으로 밀어주었다. 어머니는 여위고 창백했다. 손바닥을 유리창에 대고 미소 지으며 무언가 얘기하기도 했지만 나는 어머니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릴 때면 아버지는 어머니의 어깨를 감싸고 함께 울었다."(본문 57쪽)
어머니는 아들의 장애가 자신의 잘못이란 죄의식에 시달리며 모든 걸 감내했다. 또 더 지극한 정성으로 아들을 뒷바라지하게 된다.
"어머니는 많은 것을 참아내야 했다. 이웃 사람들이 나를 마치 무슨 괴물 쳐다보듯 해도 의식하지 말아야 했다. 슈퍼마켓에서 나를 보고 수군거려도 못 들은 척해야 했다. 산책할 때 손가락질을 해도 무시해야 했다. 내가 장애아로 태어난 게 모두 당신 잘못이라는 수많은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아버지마저도 콘테르간 복용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고 다그친 적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받아들였다. 당신이 모든 걸 감내하고 짊어졌다."(본문 61쪽)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천만다행히 뇌손상은 당하지 않았다. 가족들의 헌신적 사랑과 뒷바라지로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걸을 수 있게 됐고, 두 살 위 형 미하엘과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학교 갈 무렵 장애인에 대한 첫 사회적 장벽과 부딪히게 된다. 당시 제도상 일반학교가 아니라 2년간 장애인 특수학교를 다녀야만 했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노력과 사회적 분위기 변화 덕에 일반학교로 옮길 수 있었다. 그 날의 풍경과 심정을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이렇게 묘사했다.
"의족을 한 채 학교 운동장을 뻣뻣하게 걸어가는, 팔 없는 난쟁이는 솔직히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지 않는가. 당연히 처음 일주일 정도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나는 부끄러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본문 87쪽)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과 신체적 장애도 잊을 만큼 축구를 즐겼다. 하지만 친구들이 축구에 시큰둥하며 하나둘 떠나 의아해 했다. 사춘기였다.
"어떤 여자애도 너와 함께 손잡고 아이스크림 가게에 가지 않을 거야. 너는 손이 거의 없잖아. 다리도 정상이 아니고. 그게 무지 뭐야. 그것도 아주 짧은. 자전거는 쳐다보지도 마, 그냥 가만히 있어. 왜냐고? 여자아이들을 위해서 자전거를 시내까지 밀고갈 수도 없잖아. 너는 무언가 속이고 있다고. 너는 다른 아이들과 달라. 너는 흉측하고 너무 작거든. 너는 기형적으로 생긴 난쟁이일 뿐이라고!"(본문 96쪽)
사춘기 상처로 가슴 아파하던 나날에 위로가 된 건 노래였다. 어머니와 결혼하려 성악가의 꿈을 포기한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덕이었는지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꼬마 카루소로 불리며 성악에 재능을 보였다. 어머니 친구 중 한 분은 "보기가 좀 그래서 그렇지 당신 아들은 정말 노래를 잘하는군요!"(본문 116쪽)라고 감탄(?)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흐뭇해 했고 소프라노 카를로테 레만 선생에게 개인교습을 부탁했다. 그러나 성악가로서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하노버대 음대에 지원했으나 당시 학장은 실기시험을 볼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학장은 "독일의 교육법상 성악과에 입학하려면 최소한 한 가지 악기는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이겁니다. 예를 들면 피아노나 뭐 …"라고 차갑게 대꾸했고, 토마스 크바스토프의 아버지는 "이미 말씀 드렸듯이 제 아이는 장애아라고요. 손가락이 열 개가 안 된다고요"라며 매달렸다.(본문 134쪽)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졸업 후 취직 기회가 많아 보였던 하노버대 법대로 진로를 변경해야 했다. 그 역시 여느 젊은이들과 꼭 같은 방황에 빠져 재즈에 심취하기도 했으나 성악 개인교습에 다시 정진한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혹독하기만 했다. 정식 음대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1등에 버금가는 상, 제일 우수했다고 평가를 받고도 1등 없는 2등상'(본문 141~142쪽)의 수모를 당했다.
콩쿠르에 입상하긴 했지만 은행홍보실 직원, 방송진행자, 성우 등으로 현실적 생계를 해결해야 했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마침내 1988년 ARD국제 음악콩쿠르에서 1등을 차지하며 본격적인 프로성악가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평론가들도 그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어떤 이는 내 노래를 듣고 '숨이 멎을 정도의 파워를 가지고 있다. 한 성악가에게 이토록 강렬한 매력을 발견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뮌헨 아벤트자이퉁>에서는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인 미구엘 레린빌라르델의 표현을 빌려 '이 친구는 천재다. 그는 음악적으로 매우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카리스마를!'이라고 보도했다."(본문 149쪽)
지금은 세계 각국을 다니며 연간 80여 회 공연을 하고 있으며, 2010년까지 공연 일정이 꽉 차 있을 정도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국제바흐아카데미 설립자인 헬무트 릴링, 베를린 필하모닉 음악 감독인 클라우디오 아바도, 사이먼 래틀을 만나며 음악적 발전과 성취를 이뤘다. 이들 이외에도 한국의 세계적 지휘자 정명훈을 비롯해 콜린 데이비스, 오자와 세이지, 주빈 메타 등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지휘자들과 함께 공연하며 녹음을 하고 있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사이먼 래틀의 제의를 받아들여 2003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오페라에도 데뷔하게 된다.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리오’에 돈 페르난도역이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나중엔 해결됐지만 처음엔 의상도 문제였다.
"눈처럼 흰 연미복은 내게 적어도 두 사이즈는 컸다. 그 때문에 연미복 뒷자락이 커다란 곤충의 날개처럼 질질 끌렸다. 오전에는 카프카 소설에 나오는 곤충인간 그레고르 잠자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오후에는 무대를 깨끗하게 쓸고 다녀 TV에 나오는 청소대행광고의 주인공 같았다." (본문 201쪽)
래틀이 권유하기 전에도 토마스 크바스토프에게 오페라 출연 제의는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거절했다. 혹시 자신의 장애가 흥행에 이용되기만 하는 게 아닐까라는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음악 세계가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르는 걸 몹시 걱정하며 상대가 누가 됐든 서슴없이 비판하고 있다.
"음악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요인으로는 냉정하게 돈벌이에만 치중하는 비즈니스정책을 들 수 있다. '3대 테너'로 불리는 플라시도 도밍고, 호세 카레라스 그리고 루치아노 파파로티가 거기에 휘둘리고 있다."(본문 238쪽)
그에게 여러 가지 문제를 상의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먼 래틀은 '음악은 기억, 후회 존경이다. 음악은 치유하기 위한 것이다'라는 신조의 소유자이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음악은 영적 치유제라는 말을 누구보다 가슴에 담고 있다. "음악이야말로 내 삶의 수많은 곤혹스러운 순간들에서 나를 구해주었기 때문이다."(본문 298쪽)
음악으로 정신적 상처를 이겨낸 그는 "신문 라디오 TV에 천편일률적인 장애인 이야기가 나오면, 나는 화가 난다. 그때마다 나는 내 신조를 중얼거렸다. '나는 8000만 독일 국민 중 한 사람일 뿐이야. 내 눈엔 모두가 똑같이 보인다고!'"(본문 314쪽)고 말한다. 또 그는 "'인간은 모두가 행성 같은 존재'라고 생각한다. 우리 인간은 모두 태어나는 순간부터 보잘것없는 육체로 떠돌다가 암흑 속 무(無)로 돌아가지 않는가?"(본문 334 쪽)라고 반문한다.
토마스 크바스토프는 이 같은 얘기들을 그의 실제 목소리만큼이나 부드럽고 깊이 있게, 또 담담하고 진솔하게 들려준다. 곳곳에 유머와 위트까지 곁들여 놓아 읽는 이의 부담을 한결 덜어주기도 한다
크바스토프의 자서전 중의 일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