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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군 서산군 당진군등 3개군에 걸쳐 우뚝솟은 덕산도립공원내 가야산 덕산 도립공원내 가야산(678m) 2018년11월4일(첫째 일요일) 정기산행 출발고도120m-가야봉678m 8.7km 4시간30분 대원군이 가야사를 불지르고 부친의 무덤을 만든 명당터 남연군 묘 ♠ 등 산 개 요 ♠ 가야산은 예산군과 서산군,당진군 등 3개 군에 걸쳐 들판에 우뚝 솟아 산세가 당당하고 곳곳에 사찰이 자리하고 있어 은은한 풍경을 자아낸다. 주봉인 가야봉(677.6m)을 중심으로 원효봉(677m), 옥양봉(621.4m), 일락산(521.4m), 수정봉(453m), 상왕산(307.2m)등의 봉우리가 연결되는 다양하면서도 어렵지 않은 등산로가 개설되어 쉽게 산에 오를수 있다. 또한 정상에서는 서해바다가 아련하게 보이고 봄철에는 철쭉과 진달래 등 각종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등 사시사철 경치가 수려하다. 덕산도립공원에 속한다. 주변에 백제시대 마애석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국보제84호 서산마애삼존불상을 비롯한 보원사지, 개심사, 일락사, 보덕사, 원효암등 백제초기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사찰들과 해미읍의 명소로 이름난 해미읍성, 홍성 면천읍성이 있다.
남연군묘 흥선대원군에게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와 말하기를 충청도 광천 오서산에 "만대에 걸쳐 영화를 누리는 자리(萬代榮華之地)"가 있고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가 있으니 둘 중 한곳에 선친의 묘를 쓰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물론 후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 황제가 나올 자리란 평범한 산비탈이 아니라 가야산의 유서깊은 거찰 가야사의 보웅전 앞에 있는 금탑-석탑인데 상륜부가 반짝거려 이런 별명이 붙은 탑-자리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은 내쫒고 불을 질러 폐사시킨후 탑을 깨뜨리고 경기도 연천 남송정에 있는 남연군 이구의 묘를 여기에 이장하게 된다. 매장을 마치고 난 후 흥선군은 나중에 누가 손댈까걱정되어철 수만근을 녹여 부었고 그 위에 강회300포를 비벼서 다졌다고 한다.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1866년 2월에 영국 상선 로나호에 승선하여 충청도 해미 부근에 나타나 조선과의 통상을 시도하고, 6월에 다시 엠페러호로 조선에 입국하여 통상을 요구하였다. 두 차례 모두 통상 요구가 거절되자, 그는 병인박해 때 중국으로 탈출한 프랑스 신부 페롱과 중국인, 말레이인 선원 140여 명을 도이나호에 승선시키고, 1868년 4월에 충청도 덕산군 구만포에 상륙하였다. 이들은 거산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빼앗고 건물을 파괴하여 도굴에 필요한 장비를 챙긴 다음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무덤으로 직행하여 밤중에 도굴하다가 단단한 묘를 뚫지 못해 달아났다 이사건을 계기로 흥선군은 쇄국과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계기가된다. 흥선군은 남연군 묘을 이장한 후 7년만에 차남 명복을 낳았으며 명복은 12세 되던 해에 조선 26대 임금인 고종황제(제위44년)로 등극하게 되고 손자까지 순종황제(제위3년)가 되어 2대에 걸쳐 천자가 탄생하게 된다.
당시 연천 남송정에서 덕산까지는 5백리길이었다한다. 연천에서 덕산까지 상여가 지나는 동네 사람들이 릴레이 식으로 상여를 운구하였고 마지막 주자인 덕산면 광천리 사람들이 선소리 구성지고 요령소리 애처롭게 발맞취 혹여 고인이 불편할세라 정성스럽게 운구하였다 하는데 이를 흡족히 여긴 흥선군이 광천리 사람들에게 남연군을 운구한 상여를 기증하였다 한다. 그후 광천리 사람들이 죽으면 왕족이 처음탓던 상여를 타고 마지막 이승길을 떠나는 대접을 받았다 한다. ♠ 등 산 코 스 ♠ 상가리마을-옥양폭포-석문봉-가야봉-남양군 묘-주차장 최저고도120m--최고고도(가야봉)678m 8.7km 4시간 30분 (소요 예상) ♠ 등 산 지 도 ♠
◈ 자 료 사 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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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많이 아파서 이번산행은 취소 하고 태안해변길에서 뵙겠읍니다.
환절기에 조심해야 합니다
얼린 나아서 좋은산행 으로 상쾌하게 기분전환하세요
감기 조심 하셔야지요~^^
빨모대장님 두분 함께하십니다~
권도반 정안심 둘이신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