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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서머나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위드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
이번 캠프 주제는 ‘성령 하나님’입니다.
왜 ‘성령’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 하나님’이라고 하는가 하면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가 그만큼 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성령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입니다. 수많은 이단들이 난무하는 것도 그릇된 성령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긴 지금은 이단이나 정통이나 구분이 없어졌지만요. 대부분 이단들의 공통점이 성령을 초자연적인 능력이나 신비한 현상 정도로 알고 있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심에 대해서는 알려고 생각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상 교회에서는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방언하는 것, 예언하는 것, 병 고치는 것,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는 것, 교회가 부흥하는 것 등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위 말하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컨 브레싱이라고 하죠.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순복음 교파의 삼중 축복 그런 것 등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도 이제는 세상 모든 교회에 보편화 되었습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처럼 나쁜 것, 거짓된 것들이 이 땅의 교회를 다 휩쓸어버렸단 말이에요.
우리는 이렇게 복음이 종교 기술자들의 손에 의해 가공되고 있는 악한 세대를 살고 있습니다. 구원이 교회 이름으로 상품화 되고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어버린 세상입니다.
그럼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고 주의 이름으로 모이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 이름을 사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일을 하신 분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이번 캠프에서 나누려고 합니다. ‘성령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신 하나님의 영’
(고린도전서 12장)(개역개정)
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2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복음 14장)(개역개정)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누구 이름으로 오신다고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요한복음 15장)(개역개정)
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여기서 ‘아버지께로부터’를 직역하면 ‘아버지와 함께’입니다.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 곧 우리에게 나타내신 하나님인 것처럼 성령이 아니면 누구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는 것이지요.
고린도서에서 성령이 없는 자들에게 예수는 무엇이라고 합니까? ‘저주 받은 자’라고 하죠? 그러니까 보편적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는 그냥 십자가에 처형된 저주받은 자입니다. 성령을 받지 않으면 일평생을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를 다니는 종교인들 역시 입으로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있고 모일 때마다 ‘주여’ 삼창을 할 수는 있지만 그분을 아는 것과 그분과의 사귐의 관계는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어떤 관계입니까? 성경은 전부 그 이야기뿐인데요 주가 되신 한 분과의 관계를 성경은 여러 단어로 표현을 합니다. 용서의 관계, 은혜의 관계, 사랑의 관계, 긍휼의 관계, 믿음의 관계, 또 한편으론 저주와 심판.. . 그래서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냥 내가 공부하고 학습하고 본 받아야 할 이야기가 아니고 그 말씀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성령으로만 가능하고 성경이 그냥 믿음이 큰 위인들 이야기나 성인 중에 한분이신 예수 이야기 역사 이야기가 되면 큰일 나는 겁니다. 성경은 전부 우리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의 이름이 녹명되어 있다는 그 생명책이 바로 이 성경입니다. 성경이 내 이야기가 아니고 생명책이 아니면 일평생 예수를 믿고도 주님과 상관없는 사람이 됩니다.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모든 인간은 모태로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자기 사랑, 자기 영광, 자기 숭배라는 우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기 운명, 자기 길을 자기가 선택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조금 전에 읽은 고린도전서 12장 1절 말씀인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갔느니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끌고 가는 주인이 누구인지와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에 따라서 영원이 결정됩니다.
성도, 즉 예수 신랑의 피로 사신 신부들은 이미 창세 전에 확정되어 있고, 성령도 그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 인생이 달라지지도 않습니다. 그냥 남들 사는 것만큼 그렇게 생노병사를 겪으면서 똑같이 살아가고 있단 말이죠. 남들이 힘든 것처럼 힘들고 고생하는 것만큼 고생을 합니다. 성령을 받는다고 해서 슈퍼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성경은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또 성령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할까요?
먼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질문을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몇 분이십니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니까 세 분이 맞습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세 분이라고 하면 바로 이단이 됩니다. 이것이 삼신론이에요.
그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이 하나님이 기능에 따라서 세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하면 옳습니까? 가령 물이 얼면 얼음이 되고 기화하면 수증기가 되지요 이게 양태론인데 이것도 이단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본질이 한 분이신데 위격이 셋이다.. 이것을 삼위일체론이라 하는데,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있습니까? 성경에는 삼위일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럼 왜 이런 혼동과 오해가 생겼을까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성경의 하나님을 인간들의 이성에 포착되고 해석되는 하나님으로 정의를 해보려는 시도, 인간의 지식 안에 가두어두려는 시도 때문에 이런 단어들이 생겨났습니다. 이것을 신학의 부작용이라고 합니다. 신학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작업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올바른 신학이 되려면 성경 말씀 앞에 부정이 되는 신학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신학이 진리가 되어버렸습니다. 만약 장로교에서 캘빈의 신학을 부정하게 되면 바로 잘리게 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백 개의 교단이 있다고 하는데, 수많은 교파와 교단이 생겨난 것이 그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경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성부도 성자도 성령도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각자 자기가 속한 교파에서 가르친 하나님이 진짜인 줄 알아요, 종교전쟁이 그래서 벌어진 거란 말입니다. 성경은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지 세상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참 만만하게 보는데, 성경은 아주 위험한 책입니다.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없이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책이 성경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몸과 눈과 귀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기 때문입니다. 우리 몸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몸이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고 살죠. 하루 24시간 종일토록 나는 정상이 아니구나를 생각하고 사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런 우리를 육신대로 살도록 내어버려 두시면 그게 심판입니다.
이번 캠프의 주제가 성령 하나님인데, 성령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평생 교회 다니고도 성경에 없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참 무서운 말이에요. 제 말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이 있고 세상의 영이 있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개역개정)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십니다. 이것을 일단 마음에 새겨놓으세요.
안타깝게도 이 땅의 대부분의 교회가 성령 하나님과 상관없이 종교 집단화 되다 보니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 십자가 지신 하나님은 알지 못하고 교회가 교회용으로 가르쳐준 우상을 하나님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확실하게 대못을 박아둡니다.
(고린도전서 2장)(개역개정)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이 편지 서두부터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세상은 세상신이 활동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는 스스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능력과 지식이 없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을 떠난 아담은 그냥 육체가 되어버렸습니다. 너희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잖아요. 그런 티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죽은 흙들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냥 세상신의 세간으로 있을 뿐입니다. 이게 보편적 아담의 현실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인간과 세상을 한 번 심판하신 적이 있죠? 창세기 6장의 노아홍수입니다. 그런데 그 심판의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육체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죽은 흙이고 생명이 없다는 말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들은 모두가 부정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수가 없습니다. 구약에 보면 죽은 것들을 만지지 못하게 하잖아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거반 죽게 된 자를 내버려 두고 가버린 게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옥이 왜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전에도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지옥은 사람이 가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그 형상이 완성된 사람들은 지옥을 가고 싶어도 못 갑니다. 그럼 지옥은 누가 갑니까? 지옥은 죽은 육체, 다시 말하면 사단 마귀와 연합된 생명없는 육체들이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지옥은 사단을 위해 예비해두신 곳인데 사단과 연합된 죽은 자들이 가는 거에요.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지옥이 없다고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가 지으신 사람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불에서 태우실 리가 없다고 생각해요. 아닙니다, 지옥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보여주기 위해 있어야 하는 지옥이에요.
그런데 노아의 홍수 때처럼 심판 받아 멸망되어야 할 이 세상에서 건짐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 노아와 가족들이 구원을 받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다른 이유는 없다니까요. 노아가 120년간 산에서 방주를 열심히 지어서 구원 받은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해서도 똑똑해서도 아닙니다.
홍수 심판은 오실 그리스도에 의한 심판과 구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실 새 피조물, 즉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새 피조물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사건입니다. 한 마디로 하면 은혜의 필연성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 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정결한 제물로 번제를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저주가 물러가게 된다는 것이 노아언약입니다.
창세기 8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번제물의 향기를 받으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영단번의 제사를 앞당겨서 보여준 것이지요. 하나님은 십자가의 아들을 화목제물로 받으시고 하나님 자기 사람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아들에게 퍼부으셨습니다. 이것은 온 세상이 물로 덮이고 또 쏟아지는 하나님의 저주를 온 몸으로 받아내는 노아의 방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아들에게 심판을 퍼부으시는 이것, 그리고 아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입게 되는 사람들의 구원을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개역개정)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믿어지세요? 이 사실이 믿어진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은 사람입니다. 돌 김용옥의 말대로 저 중동 어딘가에 살았던 예수라는 청년이 로마에 반역하여 십자가형을 받은 것이 동방예의지국에 사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하는데 맞아요 그게 보편적인 아담입니다. 이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 정상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에 포착될 수 없는 하나님,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에요. 인간들이 그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예수를 이땅을 다녀가신 그 하나님을 어떻게 주와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습니까? 성령의 감동 감화하심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심으로, 성령께서 우리의 눈과 귀를 열어주심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주심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성경에는 ‘마음’과 ‘심장’이라는 단어가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을 받은 자들만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의 심장을 가진 겁니다. 그들을 새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은 다 죽은 자입니다. 그냥 숨만 쉴 뿐이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죽은 자입니다.
오직 은혜와 오직 성령으로 그분의 주되심과 하나님 되심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이 아니에요. 노아로 하여금 오실 그리스도를 믿게 하셨던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에게도 동일한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을 은혜의 성령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들이 구약에 기록이 되어있죠? 그 대표적인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창세기 15장)(개역개정)
5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무엇을 의롭다 하셨습니까? 믿음이죠.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의 대표로 불려나온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가 믿음이 특별히 좋아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모델로 불려나왔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믿음에 의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신약의 갈라디아서에서는 하나라고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노아도 아브라함도 오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생육하고 번성하는 하나님의 복은 노아와 아브라함처럼 믿음의 사람들 이 그리스도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 자신을 주신 거에요. 성경이 말하는 복은 하나님을 주신 그 복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셨잖아요. 나는 너의 영원한 기업이요 방패라고... 그러니까 하나님 자신을 내어주신 것이 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 하나님을 우리에게 주셔서 그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복, 그 예수를 받아서 우리가 다시 예수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되는 복, 다른 말로 하면 아들들, 그들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복은 기본이니까 그것 말고 다른 것도 주시라고 하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입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복을 모른다는 말이에요. 그 복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자꾸 헛소리를 하는 겁니다. 구약에도 그런 말이 있어요. 육축이 많고 자손도 많고 은금이 풍부하고... 그런데 그런 것은 진짜 복을 모형하는 구약의 언어로 설명한 것이지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짜 복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 것들은 다 없어질 것들이잖아요 세상도 그 정도는 아는데...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한 그 자손,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 그래서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습니다.
베드로사도는 그 구원을 이렇게 증언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개역개정)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신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선지자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계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도 다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 있죠? 세종대왕과 이순신 같은 훌륭한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 갔느냐고... 어딜 가긴 뭘 어딜 가요? 예수를 안 믿으면,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복을 안 주시면, 씨를 안 주시면 누구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왜 그러시는데요 라고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왜?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을 하면서도 뭔가 우리 마음속에 조금 불만이 있는 것은 우리가 그만큼 비정상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자기밖에 모르는 죄인이에요.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인간교 신자라고 하잖아요.
그렇게 구약의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영이 임하여 그 영에 의해서 오실 그분이 받으실 고난과 영광을 앞당겨 보고 또 그것을 살아내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앞의 8절을 보면...
(베드로전서 1장)(개역개정)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예수님이 다녀가신 후에 예수님을 못 본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들을 위해서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한 거예요.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그분을 보고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한다.. 어떻게?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 안에서, 교회인 여러분에게 오신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
그렇게 성령이 선물로 주신 믿음이 끌고 가는 결과로서 구원이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도 노아와 아브라함과 다윗과 같은 성령을 받고 같은 성령 안에서 그들처럼 오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이 말씀을 드리려고 지금까지 이렇게 길게 설명을 드렸습니다. 믿습니까?
이번 캠프에서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 중심의 조직 신학적 성령론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 하나님과 그분이 하시는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조직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신론, 성령론, 그리스도론, 인간론, 교회론, 구원론 등... 요즘 큰 교회에 가면 평신도 조직신학 같은 것도 가르친다는데, 그거 배우면 하나님을 압니까? 그야말로 복음을 들을 기회마저 빼앗아버리는 게 그놈들이 한 짓이란 말이에요. 그런 것을 머릿속에 채워놓으면 누가 뭐라고 해도 복음이 귀에 들리지를 않습니다. 뭘 그따위 초신자 때나 하는 유치한 소리나 하냐는 거에요...
그래서 이번 캠프에서는 여러분이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에 대한 이해를 다 털어내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성령 하나님 바로 알기입니다. 세상 교회에서 양복 입은 무당들이 하는 굿판에 오래도록 익숙해져 있다 보니 성령을 받는 것을 마치 접신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가 있어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성령을 마치 신인 합일의 과정 정도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보니 성령을 종 부리듯 막 불러내는 사람도 있어요. 기도원이나 성령 집회에 가면 성령이여.. 불길 같은 성령이여.. 하면서 박수치고 펄쩍펄쩍 뛰고 그래요. 그러면 성령이 오십니까? 성령이 무슨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그런 거에요?
성령을 무슨 방언하고 예언하고 병 고치고 만병통치, 만사형통의 무당 잡신으로 가르쳐놓았기 때문에 그런 것부터 털어내고 성경에 나타내신 성령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이번 캠프에서 제대로 알고 가자는 겁니다. 그래서 이 시간부터는 그동안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성령에 대한 개념들을 모두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성령 하나님을 여러 가지 면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설명을 해주십니다. 성경에서 성령을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의 신, 거룩한 영, 창조의 영, 지혜와 계시의 영, 아들의 영, 그리스도의 영, 은혜의 성령, 십자가의 영, 진리의 영, 심판하시는 영 등 아주 다양한 이름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강론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일신, 삼신, 삼위일체 등의 신학적 담론 안에 가두어둘 수 없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소위 말하는 안디옥신학 로마 신학, 알렉산드리아 신학 등 교회사에 정의된 신론을 공부한다고 해서 성경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단들도 오직 성경이라고 하거든요 어쩌면 그들이 여러분보다 성경 공부를 더 많이 할 수도 있습니다. 성경에 관한 지식은 더 많단 말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그들에게 심판의 책이에요.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으면 성경은 심판의 책이 되어버립니다. 성경이 예수로 보지 못하고 그 성경이 나의 이야기가 아니고, 성경을 진리로 마음으로 가지지 못하면 성경은 아주 위험한 책이 된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위한 책이 되어버린 거에요.
그렇게 성경을 분석하고 연구하여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인간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정하면서 오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분이 진짜 성령이에요. 바꾸어 말하면 성령이 임하시면 그분이 늘 우리를 깨우시는데, 성령이 우리를 깨우시게 되면 내가 지금까지 나를 위해 쌓아놓은 하나님에 대한 많은 지식들이 부정되면서 내가 또 하나님을 조작하고 있었구나.. 내가 믿고 싶은 예수를 믿고 있었구나.. 그렇게 자기부정으로 우리를 흔들어 깨우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그 성령께서 열어 보여 주시는 새로운 세계, 영의 세계에서 만나는 그 하나님, 그 언약의 하나님을 나누는 것이 진짜 성령 집회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한 성령 안에서 한 세례를 받았고 한 성령을 마신 분들이 맞죠?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된 교회이기 때문에, 그 머리로부터 흘러내리는 기름 부음을 받은 분들이기 때문에 누가 가르칠 필요가 없는 분들이에요. 성경이 그렇게 이야기 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 보면 성경 공부를 하는 것도 굉장히 위험한 일일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은 세상교회에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워낙 많습니다. 심지어는 원어를 알아야 성경을 바로 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노무 원어 땜에 부작용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
(요한1서 2장)(개역개정)
27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교회는 목사나 장로가 어떤 특정인이 가르치고 배우고 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를 다른 말로 성령공동체, 말씀 공동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한몸 된 교회는 오직 성령의 은사로 주어진 직분이 있어서 그들에 의해 서로 연결해서 지어져 가는 하나님의 집으로 교회인 거지 어던 특출한 선생에게 연수를 받아서 훌륭한 교인이 되는 게 아닌 거에요. 그건 사람을 좇는 거지 예수 믿는 게 아닙니다. 이렇게 성령께서 다스리시지 않고 성령께서 가르치시지 않는 교회는 교회가 아닌 겁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 많은 신학, 긴 역사를 쌓아놓았어도 십자가 지신 주님과 상관없는 교회들이 너무 많습니다. 당회장실에 역대 당회장들 사진 쭉 걸어놓고 그게 교회역사라고 자랑하는 데는 교회가 뭔지도 모르는 종교인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자기 역사를 가질 수 없는 교회란 말입니다.
교회는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으므로 우리에게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즉 교회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고 교회만이 볼 수 있는 세계가 따로 있습니다. 세상만물은 그들에 의해서 해석되고 판단받는 세상인 거에요 그래서 교회를 다른 말로 해석공동체라고도 합니다. 이 세상은 성도들의 해석이 필요한 세상이며 역사인 거에요. 그래서 여러분은 세상 사람들과는 달리 세상역사를 보는 다른 안목이 다른 세계관 역사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층의 현실을 살고 있는 거에요 그런 교회가 무슨 백주년 기념이니 그런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있으면 그게 우린 교회 아닙니다 라고 자랑하는 거지요
자 이제 성경에서 말씀하신 우리에게 주신 신령한 것들에 대해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어떻게요? 사도의 말씀처럼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우리 모두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이 충만하게 하심으로 신령한 것은 신령한 자들에게만 보이는 거니까.
신령이란 말 자체도 방언하고 예언하고 환상보고 거품 물고 넘어지고 하는 그런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성령은 그런 것을 신령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에베소서 1장)(개역개정)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6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5장)(개역개정)
11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12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13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14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19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뭐라고 그럽니까? 교회야, 성도야, 너희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죽은 세상과의 분리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거룩이에요. 이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인 성령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히시고 그리하여 죽은 자들, 사람의 신학으로 조립한 우상을 섬기는 그곳으로부터 데리고 나오신다는 말입니다. 너희들은 그들 죽은 자들과 함께 할 수 없는 산자들이니까...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을 아는 것과 부르심의 소망과 하나님의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넘쳐나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성령 안에서 그것들을 누리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박삼일 짧은 시간이지만 성령께서 여러분들에게 필요 충분한 만큼 신령한 것들, 하늘의 선물들을 주실 겁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시고 또 그것들을 마음으로 가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성경에 나타난 성령 하나님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성령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곳은 창세기 1장 2절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함께하시는 성령입니다. 창조의 영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상태였다고 했습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부터 새로운 질서, 새로운 빛, 새로운 충만을 목표로 한 첫 창조를 하나님의 신이 운행하는 것으로 미리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를 하시는데 왜 거기에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나타날까요? 그런 게 있으면 안 되잖아요. 이 창세기 1장에서부터 복음이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를 운행하신다는 말은 하나님의 신, 성령께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품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상당히 의미심장한 말이지요. 그렇게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으로 앞으로 성령께서 하실 일을 예표하고 힌트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라는 단어들이 하나님의 창조 기사에 등장하는 것이 모순이라 여길 수도 있는데, 그것들을 통해 창세기 1장의 창조는 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다른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는 새 창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완성되는 아들들, 즉 하나님 나라를 첫 창조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첫 창조 안에 새 창조가 내포되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창세기 1장 1절 안에 성경 전체가 다 들어있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겨냥한 창조였다는 것이 에베소서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개역개정)
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을 원어 그대로 하면 다시 통일(재통일) 되게 하려 하심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첫 창조와 재창조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데 이것을 구속의 역사라고 합니다. 일반 역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역사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다시 통일되는 것입니다. 이 일 안에 우리의 구원도 들어있습니다.
흑암과 혼돈과 공허에 말씀이 떨어지고 빛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 모두가 앞으로 전개되는 하나님의 경륜, 곧 새언약의 사건, 새 창조의 역사에 대한 암시이고 그림자입니다. 흑암이 물러가고 혼돈이 제자리를 찾고 공허가 채워지는 그 일에 하나님의 성령이 함께 하실 것을 성경 첫 장에서부터 힌트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은 온 세상과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주관하시는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취를 우리에게 적용시키고 살아내게 하시는 일을 지금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의 말씀과 같은 단어들, 창조의 기사에 나오는 같은 단어들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에 점진적으로 그리고 선명하게 보이게 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선지자들의 증언으로 나타납니다. 모세오경과 모든 선지서들이에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세오경이라고 합니다. 모세오경은 성신을 받은 모세에 의해서 쓰인 책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단어들이 출애굽기와 신명기에도 그대로 나옵니다.
(출애굽기 14장)(개역개정)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매 여호와께서 큰 동풍이 밤새도록 바닷물을 물러가게 하시니 물이 갈라져 바다가 땅이 된지라
하나님이 바람을 불게 해서 바다를 갈랐다고 할 때의 ‘바람’이 창세기 1장 2절의 ‘하나님의 신’과 같은 단어입니다. 르와흐... 하나님의 백성 앞에 가로막힌 죄악의 바다를 갈라내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신명기 32장)(개역개정)
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짐승의 울음소리만 들리는 그 황야에서 자기 백성을 건지셨다고 합니다. ‘황야’는 창세기 1장의 ‘땅이 혼돈하고’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리고 너풀거린다는 것은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의 ‘운행’과 같은 단어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창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같은 언어로 표현된다는 말은 창세기 1장의 창조 기사 안에 이미 하나님의 백성들이 들어있었다는 말이고, 구원의 역사와 새 창조의 역사가 들어있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의한 하나님 백성들의 구원의 역사, 그리스도 안에서의 첫 창조의 완성을 성경 첫 장에서부터 보여주고 계신다는 말입니다. 빛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는 참 빛...
이렇게 성령은 창세전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오시는 영입니다. 그 약속을 위해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세상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실행하시는 새 창조의 영입니다. 그렇게 성령은 하나님의 약속에만 전능하신 성령입니다. 금이빨이나 만들어주는 성령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그들 가운데에 계시면서 그들의 역사를 통해서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계셨습니다. 앞서 베드로전서에서 이야기한 선지자들에게 임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이 임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창세기 1장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4장)(개역개정)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같은 말이죠? 오늘날도 다르지를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한 하나님의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은 혼돈과 공허와 흑암입니다. 아까 말했지요. 하나님의 성도들이 보는 세상은 다른 세상이라고...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아니라 합심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살해한 어둠의 세상, 오직 심판을 기다리는 종말의 세상입니다.
그 악한 세대를 향해서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심판을 외칠 수 있는 자들이 교회입니다. 지붕에 십자가를 걸어놓았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과 다르게 보는 것, 듣는 것, 말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란 말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말한 피 뿌림을 입은 나그네라는 것이 그냥 수식어가 아닌 거에요. 그 피 때문에 세상과 섞이고 싶어도 섞일 수가 없는 사람들이 여러분들입니다. 다른 말로 거룩한 교회입니다.
이렇게 불사르기 위해서 간수되어 있는 세상, 아니 이미 불타고 있는 세상을 향해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고 하시는 성령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 땅에 남아있는 성도입니다. 세상 속 교회의 존재이유는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교회란 말입니다. 예언은 앞날을 내다보는 점쟁이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의미에서 예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다 말씀을 맡은 예언자입니다.
세상은 그런 여러분에 의해서만 그 실체가 벗겨지는 세상입니다. 성령 받은 여러분이 할 일은 그것입니다. 사도가 말했어요. “천사도 너희가 판단하겠거늘”... 보이지 않는 천사들까지도 여러분에게 판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판단을 한다니까 다른 걸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복음의 진리를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전하게 되면 그것들로 인해서 반드시 반응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발작하는 반응입니다. 여러분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던 교회 사람들에게 복음을 이야기하면 어떤 반응이 나타납니까?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같이 교회를 다녔던 사람들인데 복음 이야기만 나오면 왜 그렇게 발작을 일으키는지.. 좋던 인간관계가 다 끊어지잖아요...
성령은 그렇게 하나 되게 하는 성령이 아니라 갈라내심의 성령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빛이 있으매 빛과 어둠으로 갈라지고 뭍과 바다가 갈라지는 것처럼 갈라내는 일을 하십니다. 그 일을 여러분에게 맡기셨다니까요. 하나님의 관심은 불살라질 세상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세상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절대 좋은 소리 못 듣습니다. 세상에게 존경받는 사람되려고 하지 마세요. 그게 성도의 팔자예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먼저 나를 미워한 줄 알라고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잖아요.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너희를 사랑할 것이나 너희가 나에게 속했기 때문에 세상의 사랑을 못 받는다고 하신 겁니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복이에요.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산상수훈의 모든 복들 있죠? 그런데 그런 복들은 구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상사는 일 때문에 쫄지 마세요. 뭘 그리 걱정들을 많이 하세요? 죽으면 영생인데요. 사후 대비가 되어있는 분들이 왜 그렇게 노후 걱정을 하세요? 그깟 보험 하나 안 들어도 상관없어요. 저는 돈도 없지만 보험 한 번 넣고 나면 꼭 보험을 깰 일이 생깁디다. 그래서 보험이 하나도 없어요. 하나님이 보험인데 무슨 보험을 ....
그러니까 성령 받은 성도들이 할 일은 그거예요. 큰 성 길가에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멸망 당할 소돔과 애굽을 향해서 예수를 담대하게 증거 하는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직 살아있는 것은 그것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세상에게 맞아 죽으라는 것입니다. 두 증인이 큰 성 길가에서 맞아 죽잖아요. 그들은 다 큰 성에서 쫓겨났다는 말이에요. 왜 두 증인인지 아세요? 사람이 둘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해서 두 증인입니다.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우리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큰 성에서 길가로 쫒겨난 두 증인입니다. 그 두 증인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는 큰 성을 향해서 부득불 증언하단 말이에요. 그렇게 증언을 하다가 맞아죽는데, 맞아죽고 나면 세상은 자기들끼리 박수를 치고 선물을 보내고 난리 납니다. 저 놈 드디어 죽었다고 하면서... 자기들을 괴롭히던 자가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저와 여러분들의 팔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성령과 함께 하는 두 증인, 그 증언으로 인해서 큰 성 길가에서 죽음을 맞게 되는 그 일까지 성령께서는 빈틈없이 성실하게 여러분들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어느 성도도 그 길위에 세워지지 않는 성도는 없어요, 그렇게 땅에 사는 자들을 괴롭게 하는 그 은혜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하시는 십자가의 영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잖아요. 오순절 날이 이르매 불의 혀처럼 임하는 성령을 받아서 충만해진 자들이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전한 것이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받을 수 없는 이 말씀을, 이 예수를 주로 받은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금도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인도하고 계십니다. 하늘의 선물을 받은 질그릇들이 날마다 죽어나가는 그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그 자리가 여러분의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여러분이 완성되는 자리라니까요. 그런 해체의 과정을 겪으면서 비로서 생명에 대해 눈을 뜨는 거에요 두이레 강아지만큼.
그런 성도들의 죽음과 생명에 대해 사도바울이 반복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11)...
이것이 성령이 일으키시는 사건입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아서 삼중 축복 오중 축복 받고 행복하게 살다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니라 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안 되는지를, 십자가의 그 진리의 죽음을 현실로 살아내는 그 자리, 아무도 갈 수 없는 그 길을 성령께서 데리고 가신단 말입니다. 세상에서 태어난 세상밖에 모르고 살아온 세상 그 자체인 우리는 정말 그길 가기 싫지만 울며불며 끌려갑니다. 그 길 만이 생명길이고 그렇게 강권하시는 사랑이 바로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개역개정)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잇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이 자리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교회 그들만 자기를 위해 살지 않는 온전한 사람이에요 (엡4:13) 그런데 이 십자가만 속 빼고 다른 것을 이야기하면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십자가는 눈에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고 예수의 죽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의 생명만 챙기려는 것입니다. 탐심입니다. 성경은 그 탐심을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우상이라고 하는 거에요. 김성수목사의 책 제목 같이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오늘 세상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이것이에요. 예수의 죽음이 나누어지지 않은 자들에겐 예수의 생명도 없습니다. 10분 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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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서머나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위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