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망의 파도를 넘어서 (민 11:1-9)
지난 2년 반 동안 비소설계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라있던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 박사가 쓴 'The Seven Habits of Highly Affective People' 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서 코비 박사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책 제목 그대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조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환경도 아니라는 겁니다. 나아가서는 지식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성공은 성품이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성공한 사람들을 보니까 그들에게는 그들만이 가진 독특한 성품이 있더라는 겁니다.
우리는 여건이 좋아야 되고, 환경이 좋아야 되고, 누구 말마따나 처가 집을 잘 만나야 되고, 선배를 잘 만나야 되고, 무슨 정치가 줄을 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코비 박사가 사회학적으로 열심히 연구한 결론은 성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 그는 일곱 가지 성품을 말합니다. 이러 이러한 성품의 사람이 성공했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공한 다'가 아닙니다. '성공했다'는 말입니다. 이미 된 사람을 연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일곱 가지 성품이 무엇이냐 했을 때, 한마디로 통틀어서 주도적 체질의 사람이요, 주도적 습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주도적이다'라는 말은 "내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자기가 책임지는 만큼의 왕국을 살아갑니다. 내 책임을 내가 지면 내 왕국에 사는 것이요, 남의 책임도 내가 지면 그 사람도 내가 다스리는 것입니다. 내 책임과 많은 사람들의 책임까지 다 내가 느끼고 살면 그 사람은 그 만큼 넓은 영역의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잘못된 책임, 내 잘못까지 남에게 돌리면 나의 왕국은 반으로 줄어드는 것입니다. 내 책임은 전혀 없고 완전히 남의 책임이라고 하는 순간, 내 존재는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어떤 남편이 하도 성격이 못되고 불같아 가지고 자꾸만 벌컥벌컥 화를 내니까 그 아내가 참다 참다가 도저히 안되어서 한 마디 충고를 했다고 합니다. "여보, 당신은 왜 점점 더 이렇게 성격이 못 되어지느냐?" 그랬더니 그 남편이 하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 "나는 본래 안 그랬는데 너하고 살면서 이렇게 나빠졌다." 성격 나빠진 것이 마누라 때문입니까? 이런 사람은 구제불능이라는 겁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코비 박사가 쓴 그 책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공이 없다는 겁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내가 잘못해서 네가 그렇구나." 이런 사람이 성공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다른 이성의 사람에게는 결코 남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환경을 탓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망이라는 것은 가장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 가운데 원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원망할 때 악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특별히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이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건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장소는 '다베라'라는 곳에서 였습니다. 다베라는 '다 버렸다'는 뜻이 아니고, '불사름을 당했다'는 뜻입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한 직후에 벼락이나 번개같은 것이 내리쳐서 그들 가운데 불이 붙은 사고가 일어났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쩌다가 이런 범죄를 저지르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상황을 미루어 판단하건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길의 고단함이 그들로 하여금 '생각의 혼란'을 초래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혼란해 질 때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우리가 잊어버릴 것은 기억하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판단 착오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우리의 생각 속에는 두 개의 주머니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기억의 주머니요, 또 하나는 망각의 주머니입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기억하고 싶은 것은 기억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잊어버리고 싶은 것은 망각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이따금씩 우리의 생각 속에 혼란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은 망각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잊어버려야 할 것은 기억의 주머니 속에 집어넣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정서균형이 깨지면서 우리는 모든 일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이 되어지고 만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확하게 이런 삶의 정황에 처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지금 그들은 그들이 기억해야 할 정말로 중요한 몇 가지를 잊어버린 채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과 저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이런 악한 원망이 생길 때, 혹은 삶에 대한 악한 원망이 자리잡고 있다면 내 안에도 동일한 이유들이 있지 않은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광야 길에서 주님의 백성들이 왜 하나님을 이렇게 원망하고 있었을까요?
첫째는, 그들이 과거의 은혜를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광야 길을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은혜는 무엇이었습니까?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났다는 그 자체가 은혜일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노예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왕 바로의 압제로부터 지유함을 얻고 해방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풀어지는 사랑입니다. 그 백성들이 전심으로 부르짖고 신음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내려 주신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광야 길에 나서자마자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리고 광야 길을 나선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들은 홍해 바다를 직면하게 됩니다. 도저히 그들의 힘으로는 건너갈 수 없었던 홍해바다, 그 앞에서 그들은 역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했을 때 바다가 갈라지면서 이 바다를 육지같이 건너갈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들은 은혜를 체험하면서 지금 광야 길을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곳 다베라라는 지점에 오기까지 그들의 발걸음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하심이 함께 하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11장 1절을 보면, "백성이 여호와의 들으시기에 악한 말로 원망하매…" 그렇게 오늘 본문은 시작하고 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벌써 그들은 그들의 삶에 하나님께서 내려주셨던 그 은혜들을 망각해 버린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께 치유함을 입었던 아홉 명의 문둥병자들처럼 말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열 명의 문둥병자가 다 주님께 치유함을 입었지만 그 중에 오직 한 사람만이 돌아와 주님 앞에 감사를 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던지셨던 유명한 말씀이 어떤 말씀입니까?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다른 아홉 명은 도대체 어디에 있더란 말이냐? 동일하게 나의 치유함을 입고, 나의 사랑을 입고, 나의 만짐을 힘입어 불치병 가운데서 구원함을 얻고 새로운 삶을 찾았던 은혜를 입었던 그 아홉은 도대체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렇게 묻고 계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영혼을 부르면서 어느 날 이렇게 다짐을 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부르면서 스스로에게 그 은혜는 잊혀져서는 안 된다 라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망각하는 그 순간 찬양의 마음 자리가 원망의 마음 자리로 돌변하는 것입니다. 찬양의 샘은 고갈되고 그 속에 독한 원망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인생의 길에서 많은 것을 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또 잊어버리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이 한가지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만은 결코 잊지 마셔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만은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건져주신 그 은혜만은 절대로 잊지 마셔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그분의 은혜 속에서 인생의 길을 새롭게 시작했을 때 지금까지 나의 발걸음 걸음걸음마다 인도하셨던 그 은혜만은 결코 잊지 마셔야 합니다. 내 삶이 홍해 바다 위기 앞에 직면해서 부르짖어 주의 도움을 구했을 때에 응답하셨던 그 은혜만은 결코 잊지 마십시오. 주의 은혜의 감격이 여러분 안에, 내 속에 회복될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서 원망은 사라질 것입니다.
청교도들의 기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가 남겨져 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은혜들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송구스럽지만 한가지만 더 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저에게 은혜를 잊어버리지 않는 은혜를 주옵소서." 왜냐하면 은혜를 망각하는 그 순간 우리의 마음속에는 독한 원망이 우리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망에서 자유하는 인생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인생 길에서 베풀어 주셨던 그분의 은혜를 다시 기억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원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원망하고 있습니까?
둘째로, 그들은 현재의 축복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의 은혜를 망각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축복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물론 나름대로 원망할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불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부족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그들에게는 불편함과 부족함만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정말 그들에게서 모든 축복을 지금 다 거두어 가신 것일까요? 그래서 원망할 수밖에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오늘의 본문을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의 삶의 길에 아직도 지속되고 있었던 하나님의 축복을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축복의 현저한 현상 가운데 하나가 만나였습니다. 만나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광야 길에서 달리 먹을 것을 구할 수가 없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경험할 수 있었던 축복,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만나를 내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만나는 아직도 계속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축복이 계속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이 만나를 인해서 감사하기보다는 고기가 없다고 원망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본문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가로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할꼬"
그들이 처음부터 만나에 대해서 불평했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처음 만나가 내려졌을 때에 이 만나는 하얀 색깔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광야에서 만나가 내려지는 모습은 마치 눈덩이처럼 쏟아지는 하늘의 축복이었습니다. 굉장한 장관이었을 것입니다. 광야에 이 만나가 내려올 때 너무 신기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서 내리신 축복의 선물이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한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에게 선물로 주셨던 만나를 처음 맛보았을 때에 그들은 이 만나가 꿀송이 같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이 만나를 인한 감사보다는 없는 것을 생각하면서 왜 고기가 없느냐고 광야 길에서 불평하고 있습니다. 본문 4절 앞부분을 보면 성경에는 이 불평의 원인을 두 가지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것이 탐욕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나로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만나로 광야 길을 행진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구하고 있었던 것은 만나만으로 삶을 지탱할 수 없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그것은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그것은 탐욕 때문이었다 라고 성경은 지적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이 탐욕의 삶의 스타일을 갖게 된 것은 "섞어 사는 무리들" 때문이었다 라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4절에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여기에서 섞어 사는 무리가 누구입니까? 출애굽기 12장 38절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날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만 떠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속에서 출발하는 모습을 보고, 저 이스라엘 편에 붙는 것이 인생을 사는데 유리한 길이라고 판단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들 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을 '중다한 잡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에서는 '다른 여러 민족'이라고 말합니다. 이들 중다한 잡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진 속에 끼어 든 것입니다. 그 중다한 잡족을 오늘 본문에서는 '섞어 사는 무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중에 섞어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시작된 불평이 아닙니다. 섞어 사는 무리들, 하나님을 몰랐던 백성들이 탐욕을 품자. 뉘앙스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쉽게 말해서, 신자가 불신자에게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께서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을 때, 저와 여러분을 택하셨을 때에 우리는 이 세상을 변화시킬 자로 기대하시며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기 보다 거꾸로 세상 사람들의 잘못된 삶의 스타일에 의해서 영향을 거꾸로 받고 있는 이 부끄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한 두 사람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불평하고 원망할 때 우리는 그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동일하게 그들의 은혜롭지 못한 삶의 스타일을 닮아 가는 우리의 은혜롭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을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광야 길에서 원망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이 만나를 선물 받았을 때 그것은 감격이었고 감사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만나는 감격의 대상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왜입니까? 그 만나가 없어졌기 때문은 아닙니다. 만나는 아직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만나를 축복으로 바라보는 눈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 만나를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가슴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없는 고기를 달라고 지금 소리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필요없는 고기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광야의 행진에 별로 도움이 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 땅에서 먹던 고기의 향수를 가지고 고기를 요구하고 악에 찬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축복에 익숙해지면 그 축복을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반복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고 있는 축복에 익숙해 지다보면 그 축복을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과거에 축복이었던 것들을 우리는 더 이상 축복으로 바라보지를 못합니다. 축복이었던 남편, 축복이었던 아내가 더 이상 축복의 대상이 아니라 불평의 대상일 수가 있습니다. 축복의 대상이었던 자녀가 더 이상 축복의 대상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축복으로 생각했던 직장이 더 이상 축복으로 생각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축복이었던 환경이 더 이상 축복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때 축복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착각하지 마십시오. 축복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없어졌습니다. 그 축복을 축복으로 느낄 수 있는 가슴이 내게서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우리들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삶의 현장 속에서도 이런 부족하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미 주신 그 축복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다면 우리는 고난을 넘어서는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 갈 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여러분은 그 유명한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아주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 가서 빨래하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 때에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여서 매일밤 술에 만취해서 돌아와 자녀와 아내에게 행패를 하고 때리기도 했습니다. 안델센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운 동화가 그의 손길을 거쳐서 탄생될 수가 있었을까요? 누군가가 먼 훗날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당신의 이런 견디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그토록 아름다운 작품들을 만들 수가 있었던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때 그는 이런 대답을 남겼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 속에서도 나에게 베풀어진 축복만을 생각하고 축복만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비록 내 아버지가 무서운 때도 많았지만 아버지는 저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즐겨하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서 상상하기를 즐거워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으신 분이라고 나 자신을 설득했고, 그리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나는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래서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습니다. 내가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 수가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광야 길에서도 여전하신 하나님의 축복을 기억할 수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주변에 깔려있는 원망의 이야기들을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 수 있다고 믿습니다. 만약 이 광야 길에서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의 축복을 축복으로 다시 발견할 수가 있다면 말입니다. 그 축복을 다시 발견할 수 있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광야 길에서 원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셋째로, 그들은 미래의 약속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적지 않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들은 어디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좀 힘들어도 조금만 견디면 가나안에 도달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부족함과 그들의 불편함을 느끼면서 이 가나안이 빨리 도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희망을 저버리고 있는 모습으로 보여집니다. 아마도 그들은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서 가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가나안을 거꾸로 읽으면 '안나가' 왜 이렇게 안 나가느냐고 말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이 길을 불평스럽게 행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의 전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가나안의 약속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백성들이 광야 길에서 조금 어려움이 있었지만 아직도 그들이 믿음의 눈으로, 그리고 마음의 눈으로 가나안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원망에 빠져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원망 속에 빠져 들어갑니다.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의 도상에서 우리들이 경험하는 대부분의 좌절과 절망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대부분 우리가 인생의 목표를 상실할 때, 혹은 인생의 진정한 희망을 망각할 때 그때부터 우리는 절망의 수렁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것입니다.
플로렌스 채드윅이란 수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영국해협을 수영으로 왕복한 최초의 여성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1952년 7월 4일에 34세의 나이로 미국 캘리포니아 카타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 해안까지 수영으로 도달하기 위한 도전에 나섰습니다. 백만명이 넘는 수많은 시청자들의 텔레비젼으로 시청을 하는 가운데 그녀는 카타리나 섬을 떠났습니다. 그 날 따라 바다는 아주 추웠고 안개는 자욱했습니다. 호위하기 위해 따르던 보트조차도 헤매고 있었습니다. 무려 16시간의 사투에 가까운 수영 끝에 아쉽게도 그녀는 이 도전을 포기하고 배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이 도전에 실패한 후에 실패의 이유를 말하는 인터뷰에서 플로렌스는 의미심장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변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만은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피곤했기 때문에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절대로 추위 때문에 포기한 것도 아닙니다. 굳이 이유가 있다면 안개 때문이었습니다. 짙은 안개가 시야를 가리웠기 때문에 저는 목표를 바라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저에게 이 포기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두 달 후, 그녀는 또 한번 도전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남자가 세웠던 기록을 두 시간이나 단축하면서 이 도전에 성공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도전했던 그날도 아주 추웠고 역시나 안개가 자욱한 그런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성공했습니다. 첫 번째 실패했을 때와 못지 않은 동일한 추위의 조건, 동일한 안개의 조건 속에서 도전하면서 두 번째는 시간을 앞당기며 기록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 원인을 물었을 때 플로렌스는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내 마음속에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 목표를 보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때때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에서 우리는 목표에 대한 시야를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들의 방황의 때입니다. 그때가 바로 우리가 원망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때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에라도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약속의 땅을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인생의 행진을 성공적으로 계속할 수가 있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광야의 기온이 차가우십니까? 안개가 시야를 가리우고 있습니까? 모래바람이 아프게 나를 때리고 있는 것을 느끼십니까? 그렇다면 약속의 말씀을 다시 붙잡으십시오. 말씀 안에서 주께서 그려주신 자신의 미래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십시오. 지금까지의 나의 발걸음을 인도해 주셨던 그분의 은혜를 감사해 보십시오. 아직도 나와 함께 하고 있는 그 축복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번에는 멀리 시선을 던지십시오. 내 인생의 미래, 성경을 통해서 주께서 약속하신 그 빛나는 약속들을 바라보시고 그 약속들을 주장하며 일어나 당당하게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눈앞에 일고 있는 모래 폭풍들을 바라보고 주저앉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모래의 폭풍 저 멀리 건너편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이 보여주시는 그 목표를 향해 시선을 던지십시오. 그리고 담대하게 새롭게 출발하십시오. 그렇다면 저와 여러분의 광야 길의 행진은 원망의 길이 아닌 찬양의 길로 바뀔 것을 믿습니다.
플로렌스 채드윅은 마지막 1시간의 힘든 수영기간을 앞두고 안개가 목표지점을 가리우고 있었을 때에 자기 자신한테 스스로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하면서 수영을 계속했다고 합니다. "저 안개가 보이지만 저 안개는 목표지점에 가까웠다는 싸인이야. 저 안개 뒤에는 내가 도달해야 할 목표가 있어. 안개 뒤에는 승리야. 저 안개는 나를 환영하고 있는 것이야. 안개 뒤에는 승리야" 그는 이번에는 안개를 장애물로 보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도전에서 그 안개는 그를 좌절시키고 무너지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도전에서 그는 안개 뒤에 기다리고 있는 승리를 바라보았습니다. 안개 자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안개 건너편에 있는 승리를 바라보면서 스스로에게 도전하기를 "저 안개 뒤에는 승리야" 이렇게 외쳤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인생의 광야 길에서 안개를 장애물로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광야 길에도 한치 앞도 바라볼 수 없는 짙은 안개를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개를 안개로 보지 마십시오. 안개를 승리의 싸인으로 보십시오. 축복의 싸인으로 보십시오. 그리고 안개 뒤에 기다리고 있는 승리의 선명한 목표를 다시 한번 바라보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사랑하는 여러분, 찬양이 터져 나오지 않겠습니까? 감사가 터져 나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제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는 모든 원망들과 결별하십시오. 그리고 파도 속에 그 모든 원망들을 묻어 버리십시오. 그리고 다시 일어나고 있는 파도의 물결 앞에 내 인생을 싣고 약속의 땅을 향해서 새롭게 출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