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주역 33인 중 유일한 전남 사람이었던 해남 옥천면출신 芝江 양한묵선생(1862~1919)이 수감 중 갑작스레 생을 마감한 날이다. 그의 나이 56세, 원숙의 경지에 이르러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스코필드박사를 따라 감옥소에 들어간 영국인 의사가 검시를 마치고 난 뒤 "양한묵의 사인에 대해 발표할 시기가 아니다"고 말한 것으로 보아 필시 곡절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밝힐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인을 밝히라는 아들 재림의 항의에 저들은 몽둥이찜질만 가해왔다.
독립선언 낭독 후 비굴한 모습을 보인 민족주의자도 있었고 체포된 후 친일주의자로 변절하거나 독립운동을 포기한 지도자도 있었으나 일본경찰에 체포될 때도, 감옥생활도 당당하기만 했던 지강은 그렇게 허망하게 옥사를 하고 그의 삶과 죽음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현재 지강 선생의 생가 터가 있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마을에는 선생이 어린 시절 공부했던 서당 '소심제'와 선조를 모신 '덕촌사' '지강 양한묵 순국비'가 세워져 애국정신을 기리고 있고 해남군은 앞으로 이곳 생가를 중심으로 우리나라 대표적인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마땅한 일이다.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정신의 스케일에 비추어 이는 군 차원이 아닌 도나 국가적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해남군은 지강선생 생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 사적지를 조성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정신의 스케일에 비추어 군 차원이 아닌 도나 국가적 차원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지강 양한묵의 삶과 사상
문헌에 의하면 선생의 10대조 되신 분이 화순 능주에서 해남으로 이거해 생활하다가 선생 나이 19세 때 다시 화순 능주로 이거했다고 한다. 집안은 문과 급제자를 다수 배출한 명문가였고, 그의 조부 되신 제하(濟河)도 영암 양사재의 분관을 운영할 정도로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특히 그의 모친 낭주 최씨는 19세 때인 1857년 집안 노비를 해방시켜주었는데, 이 인연으로 농민항쟁이 일어났던 당시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처럼 사려 깊은 모친의 보살핌 속에서 5세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 8세 때 양사재에 들어가 한학을 익혀 15~16세 때는 이미 유학에 대한 중요한 서적을 모두 섭렵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즐겨 읽었던 책은 '상서(尙書)'와 '춘추(春秋)'로 그가 성장하면서 명분과 의리를 강조한 것도 이런데서 연유했다고 할 수 있다. 17세를 전후해서는 불교와 도교, 선서(仙書)뿐만 아니라 기독교 서적, 음양술에도 관심을 가져 이들 관계서적을 통해 다양한 사고와 폭넓은 식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을 축적하기도 하였다.
41세 때 義庵과의 만남계기로 동학귀의
19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해 나주군 산포면 송촌으로 이주했다가 후에 능주목 오도면 율치(현재의 화순군 북면 율치리)로 이거해 학생들을 모아 가르쳤다. 이때 우주의 근본과 인간의 본질에 관심이 깊어졌고 당시 사회에 만연된 부패 원인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갖게 됐다. 그 후 좀 더 넓은 세계와 인심의 동향을 알기 위해 전국 유랑의 길을 떠났다가 모친상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3년 상을 치른 후 또 다시 무등산 증심사, 계룡산에서 30살이 되도록 유람생활을 했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1894년에는 능주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당시 능주에는 김개남 휘하의 동학농민군이 진출해 활동하고 있었고 전투의 막바지에는 장흥, 보성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 다수가 체포돼 능주목으로 압송돼 왔다. 이때도 지강은 사형을 당하게 된 많은 동학농민군을 구했다고 한다.
한편 1895년 11월부터는 약 8개월간 능주에서 세무관으로 활동했으나 곧 회의를 느껴 그만두고 1898년 일본으로 건너가 개화파 인사인 조희연, 권동진, 오세창 등과 사귀었다. 이들의 주선으로 1902년 일본에 망명 중인 동학 3세 교주인 義庵 손병희(당시가명 이상헌 또는 이소소)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로부터 오랜 사상적 고민과 갈등을 풀고 동학에 귀의함으로써 종교운동가이자 민족운동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의암과 지강이 사상을 같이하자는 동심결맹(同心結盟), '이소소는 터를 잡고 양지강은 집을 짓는다'는 천도교 발전의 단초를 연 셈이다.
지강은 1904년 일본에서 귀국한 후에는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에 반대하여 보안회를 설립하고 일진회를 타도하기 위해 설립된 공진회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1905년에는 헌정연구회를 창립하고, 호남의 교육발달을 목표로 1908년에 창립된 호남학회에서는 임시회장 및 평의원으로 선임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쏟았다.
또 1909년 12월 22일 이재명 등이 이완용을 암살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한 사건에 연루되어 약 4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그의 활동은 문명개화론의 입장에서 사회진화를 수용하던 계몽운동의 방향에서 이뤄졌으며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침략을 경계하고 그것을 저지하고자 하는 노력이었다.
道經 등 동학 교리서 저술, 천도교 핵심지도자로
이 무렵 동학은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 '후천개벽(後天開闢)'사상을 근본으로 하여 소박한 종교의식과 치병·장생의 대중성으로 신도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었다. 1905년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의암이 귀국하면서 천도교의 헌법이라 할 수 있는 천도교대헌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의암의 지시로 권동진·오세창·양한묵 3인이 제정했다고 하나 실은 지강이 기초한 것이었다.
그는 또 '도경(道經)'·'무체법경(武體法經)'을 비롯한 다수의 교리서를 저술하는 한편 초기 천도교의 핵심간부로 교단을 운영하며 동학을 근대화하는데 매진하였다. 또한 교리강습을 통해 교인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등 영향을 주었고 이 같은 노력이 3·1운동 당시 많은 천도교인들이 앞장서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는 토대를 이루었다.
그가 맡았던 직책이 1906년 집강, 진리과장 겸 우봉소, 1908년 현기사장, 1909년 법도사, 1910년 진리관장, 1911~1919년 직무도사인 것을 보아 천도교 안에서 지강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교단조직을 대폭 정비하는 등 의암의 측근인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그의 심오한 학문적 깊이와 다양한 사상을 섭렵한 것이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 당당히 밝혀
3.1운동의 계획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이 손병희의 동의를 얻어 처음에는 천도교계의 이름으로 추진하다가 전 민족의 힘을 집결하기 위해 기독교 불교계와 합동하기로 하였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사람은 33인으로 결정되었으며, 이 가운데 양한묵은 천도교계 대표 15인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자신만 가담한 게 아니라 진성법률상업학교 교장 윤익선을 참여시키기도 하였다.
지강 양한묵선생의 복원예정인 생가터 조감도.
마침내 독립선언서는 발표되었고 일경은 민족대표 33인을 고스란히 체포해서 감옥소에 투옥시킨다. 지강은 독립선언식 직후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심문하는 담당검사에게 '독립을 계획하는 것은 조선인의 의무'라고 당당히 밝히며 항일독립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민족대표 33인 중 옥중순국은 선생이 유일할 만큼 가혹한 고문이 집중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오등(吾等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앞장서고 많은 민중들이 참여했던 3·1 독립선언식은 일본제국주의의 총칼 앞에 비록 독립의 꿈은 좌절되었지만 이 날의 거사가 가져온 결과는 항일 독립운동사상, 나아가 한국근대사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민족지도자33인이 만세시위를 통하여 민주민족국가를 선포하고, 평화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와 세계열강에 호소하고자 한 민족자주운동, 그 역사의 흐름을 주도한 민족대표 조선8도를 망라한 33인 중 유일한 전남출신, 해남사람 양한묵! 그는 한국 독립운동사의 증인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지금 탯자리가 있는 해남은 물론 묘소와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 화순(화순읍 남산공원)에서도 양한묵 선생을 기리기 위한 여러 후속사업들이 추진되고 있다.
양 지자체가 중복 사업을 펴는 것보다 유기적인 협조와 연계활동을 통해 자라나는 차세대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 그의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가치 있는 문화인프라와 콘텐츠가 만들어졌으면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