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33장 - 35장
복의 근원이란
자신이 얻은 많은 재산을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소 경험한 뒤 알게 된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임을
야곱이 복의 사람이 되고 난 뒤에 얻게된
놀라운 소득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결코 자기 힘으로 복을 생산하고자 했던
야곱시절의 생각에서 벗어난 생각이었고
이제는 이스라엘로서의 생각이었다.
장자로서 필수적으로 지녀야 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취한 마음가짐과 동일해야 한다
그것은 [섬김을 위한 존재]의 출현이다.
많은 소유물과 이제는 무관했다.
문제는 타인과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에 있다.
창세기 25:23에 보면
에서와 야곱이 출생할 때
하나님이 남기신 이야기가 있다.
(창25: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하나님은 두 형제가
각기 독립된 나라로 이루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두 나라 조성에는
필연적으로 그 전에 치열한 투쟁이 있음을 말해준다.
서로가 서로를 용납할 수 없는 속성이기에
두 나라로 존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투쟁의 결과는
한 나라가 다른 한 나라에 지배를 받게됨으로 종식된다.
보다 강한 나라가 있겠고
다른 나라는 상대적으로 약해진다는 것이다.
누구쪽이 강한 나라를 이루겠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일반 통념을 넘어
장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형식을 취한다.
하나님은 왜 그들은 동시에 태어난 쌍둥이로 만드시고
또 그들 가운데 싸우는 관계로 이끄시는가?
그것은 그들을 통해
장자의 진정한 역할이 무엇인가를
보이기 위함이다.
즉 장자란 어린 자를 섬기는 모습으로
이 땅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장자만이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볼때
에돔은 이스라엘 족속에 복속되어
이스라엘의 지배를 받음으로,
큰자(에서)는 어린 자(야곱)을
주인으로 섬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 뒤에는
야곱에게 남긴 장자의 참 실체가
단순한 혈통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을 전달하는 쪽이다.
야곱이 에서로부터 물리적으로 장자권을 빼앗았지만
그럴 때도 그는 장자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어린자를 섬기는 것이 큰자]가 되는 법칙을
야곱은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난뒤에 이해하게 된다.
날때부터 에서를 목표로 싸운 야곱은
결과적으로 하나님과 싸운 것이 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이미 [싸우는 형제상]에서 비친 그대로
자신이 바로, 에서의 자리에서
에서와 같은 사고 방식을 가진 자임이 드러났다.
형 에서를 오래 간만에 만난 야곱은
형을 더이상 원수로 여기지 않고,
자기가 섬겨야 할 주인으로 모시게 된다.
일곱번 절하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어 줄 때에
야곱은 이미 장자의 자리에서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아들들은
이러한 아버지의 언약 정신을 알지 못한 채,
오직 힘에는 힘으로 처리한다는 야곱식의 발상으로
누이 동생의 강간사건을 처리한다.
아버지를 이들의 과격한 행위를 꾸짖고 세겜 땅을 떠난다.
야곱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축복했던 벧엘에 도착했을 때
비로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의 진정한 뜻을 재 확인 받게 된다.
거기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어
약속을 진행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함으로써,
그 때 얍복강가에 나타난 그 분이
곧 벧엘의 하나님 것이 확연해 진다.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하겠다는 그 의지는
야곱같은 인간을
이스라엘 같은 인간으로 바꾸는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그 진정한 복의 민족의 본질을 이룬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창35: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난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나의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단을 쌓으려 하노라하매
(창35: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과 자기 귀에 있는 고리를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창35:7) 그가 거기서 단을 쌓고 그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거기서 나타나셨음이더라
(창35:9)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매 하나님이 다시 야곱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복을 주시고
(창35:10) 그에게 이르시되 네 이름이 야곱이다마는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겠고
이스라엘이 네 이름이 되리라 하시고 그가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부르시고
(창35:11)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니라 생육하며 번성하라
국민과 많은 국민이 네게서 나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창35:12)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을 네게 주고
내가 네 후손에게도 그 땅을 주리라 하시고.
창세기 28장의 벧엘에서는 야곱이었다.
그러나 숱한 세월뒤에 야곱은
이제 이스라엘로
벧엘에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다 이루기까지
여기에는 창세기 32장의 하나님의 희생이 있었다.
그 흔적으로 야곱은 지팡이를 가진다.
부서진 허리에서 국민과 많은 국민이 나오고
왕들이 네 허리에서 나오리라
다시 벧엘에 돌아온 야곱은
자기가 전에 그곳에서 하던 식대로
돌기둥을 세워놓고 기름을 부어
자기가 진정한 아브라함 언약의 후계자임을 인정한다.
이제는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서 말이다.
(창35:14) 야곱이 하나님의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에 기둥 곧 돌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전제물을 붓고 또 그 위에 기름을 붓고
(창35:15) 하나님이 자기와 말씀하시던 곳의 이름을 벧엘이라 불렀더라
이 정신은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서 이어지고
오늘날 교회까지 전달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바로 이런 정신 안에서만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다.
장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선택된 자이다.
인간은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소유당 할 존재이다.
소유해서 뭔가를 하려고 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인간은 날마다 죽고
날마다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것을 섬김이라고 한다.
주님의 약속에 의해서 섬기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개념,
구약에서의 이웃 사랑과
신약에서의 이웃 사랑의 개념이 다르다.
누가10:25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사랑하는 주체는 인간,
이웃은
사랑 받는 대상이다.
이웃이 누구인가?
사마리아 비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자비를 베푼 자가 이웃이다.
우리는 자비를 베푼 자를 위해서만 사랑해야 한다.
이웃은 예수님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이웃은 예수님이다.
엡5장에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이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자비를 베푼 자에게
먼저 마음과 몸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몸에 대한 사랑으로 퍼지면서
서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은 마귀 새끼이기에 싸워야 한다.
그러나 몸은 서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비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그 베풀고 있음의 절정이 십자가이다.
십자가를 바라 보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원수이다.
예수님은 율법의 일점일획도 다 이룬다고 하셨다.
하나님이 다 이룬다. 강도든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이것이 큰 자비이다.
십자가 이후에 십자가를 보면서도
믿지 않는 것은 원수이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으로
율법을 다 이루었다고 한다.
요한13:34
너희가 서로 사랑하므로서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전도는
너는 죄인이야 구원받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예수 안 믿는 사람과 싸우는 것이 사랑이고 전도이다.
거기서 노획되는 사람이 택한 자이다.
모든 것이 전도이다.
설교 심방이 모두 전도이다.
류광수류의 이단은
교회사에 여러 번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 또 나타나던 이단이다.
그가 한국교회를 비판하는 것은 다 맞다.
그러나 자기가 전도하지 않으면 안되는 줄로 알고 있다.
그 사람의 성경 해석 수준은
논할 가치조차도 없는 수준이다.
그는 조직을 만든다.
조직은 인간의 우상이다.
섬긴다는 것은
소유의 의미가 아니라
자기가 남을 위해서 존재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야곱이다.
야곱은 장자가 되면
아버지의 유산을 다 물려 받고,
배로 축복되는 이것이
야곱의 장자의 개념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만나고 보니
장자는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의 장자의 개념과
하나님이 없는 데서 새로 창조한 장자의 개념이 차이점이다.
창세기 35장에서
야곱이 벧엘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함께 하심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비참한 모습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아들을 잃어버렸다.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요셉을 잃어버렸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잃어버렸다.
이것은 장차 오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자기 아들을 내어버려 주심을
미리 보여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버리는 아픔을 우리가 이해를 해야 한다.
이 아픔을 안다면
우리는 원망하거나 불평을 할 수가 없다.
그 아픔을 재현하는 장소가 바로 교회이다.
교회는 특정인을 칭찬하거나 우대할 수가 없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