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죽었다고 한다.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왜 죽었을까, 였다. 카톡으로 아는 이에게 물었다. 어디가 아팠어요? 대답이 왔다. 마음이 아팠나 봐요. 자살했다는 말의 우회적 표현이었다. 아직은 젊은 사람이 왜 자살했을까? 왜 자신을 죽였을까? 자신을 죽였다는, 또는 자신을 살해했다는 표현은 논리상으로 옳을 지는 모르지만 아무래도 설득력이 없다. 누군가가 원인이었고 무언가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었을 것이다. 결국 같은 질문이다. 그는 왜 죽었을까?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고, 아마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성당에서 그의 장례미사가 치러졌다. 신부 또한 그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성경을 인용해서 사람의 육신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느님 품으로 돌아간다고만 말했다. 그의 관이 재단 앞에 놓여 있었다. 관 주위에는 여섯 개의 촛불이 타고 있었다. 장례위원들인지 관 옆에는 성당에 오래 다닌 토박이 노인들이 서 있았다. 그들은 죽음을 세세한 일까지 격식에 맞추려고 애를 썼다. 관은 제대 앞 중앙 통로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그것은 산 자들이 죽은 자에 대하여 베푸는 최대의 예우처럼 보였다. 혹은 신에게 죽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당장 관에 누워 있어도 아쉬울 게 없을 듯한 늙은 여자 하나가 손짓으로 유족들과 신도들에게 이것 저것 지시를 내렸다. 뭔가 자신은 아직 살아 있다는데 신이 나 있는 것 같았다. 관은 성당 중앙을 차지하고서 왜 신앙도 나를 구원할 수 없었는가를 계속 묻고 있었다.
내가 그를 기억하는 건 그의 성실한 모습 때문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제례복을 입고 우측 해설대 뒤에 서 있는 모습이었다. 해설자는 눈에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 목소리가 너무 커서도 안 되고 불필요한 말을 해서도 안 된다. 요는 미사의 주재자인 신부님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그 취지에 딱 걸맞는 존재였다. 단정하고 성실하지만 말수는 적었다. 누구하고 웃고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 인사조차 나누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독서자 명단을 매달 작성했고 누군가 사정이 생겨 독서를 못하게 되면 대리할 사람을 구했고 그마저 불가능하면 자신이 말없이 그 자리를 메웠다. 그는 천주교 전례의 화신처럼 보였다.
그는 여자 없이 혼자 사는 이혼남이었다. 그와 꼭 닮은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그가 해설을 할 때면 아들은 복사 일을 하였다. 무슨 이유인지 그들은 내 눈에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처럼 보였다. 이제 상주가 된 아들은 부쩍 키가 자라 거의 생전의 제 아버지 키만 하였다. 그러나 얼굴은 창백했고 눈동자에는 촛점이 없었다. 문득 죽음 이후에도 자라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톱, 발톱, 머리카락 말고도.
죽은 이는 자신의 아버지 무덤을 찾아가 그 옆에 차를 세워 놓고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웠다고 한다. 아마 아버지는 생시에 그를 가장 사랑해주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망인만이 그의 손을 이끌어준 것이다. 아무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껍데기 뿐인 종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실은 나도 죽고 싶지만 나는 죽지 않겠다. 나는 내 주위에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온전히 내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새삼 시비를 가릴 필요도 없이 세상은 니 탓, 내 탓으로 얽혀있을 뿐이다. 그것이 삶이다. 나는 죽은 그에게 말한다. 또는 살아 남은 나에게 말한다. 종교에 답이 없으면 차라리 너 자신을 믿어라. 부득이한 경우엔 남을 죽이든지 남에게 죽임을 당해라. 그런 정신으로 살아라. 절대 자신을 죽이지 말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