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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 의성살이 12년차, 준회원이 가진 어설픈 생각을 '감히' 올려봅니다.
의성은 내가 옮겨 살고 있는 4번째의 땅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영천에 살다가 고등학교를 마치고는 대구로 옮겼고, 영주에서도 7년을 살았고, 의성은 벌써 12년째다. 아직도 대구에는 90을 넘긴 부모님이 구존해 계신다. 내 마지막 머물 곳은 어디일까? 노마드 방랑은 아니겠지만, 정말 정들 곳, 누울 곳을 찾아야겠지.
의성에 살고 있지만 아직도 정이 깊이 들지 않는다. 쪼매밖에 없다. 지역 이름에 무슨 ‘의리’니 하는 게 영 마뜩찮다. 조폭 검사들도 아니고, 시정잡배가 지킨다는 그 의리, 개한테나 줘버리지 라는 고약한 심보가 나한테 있는지는 모르지만 마음에 통 안 든다.
그래도 여기 금성면은 좀 낫다. 의성보다 지역이름으로 먼저 들은 데가 ‘탑리’다. 봉양면인 ‘도리원’이다. 탑리가 조문국의 발현지라는 걸 안 것은 제법 나이들어서였다. 조문국 사적지 그 잡풀 우거진 곳을 쏘다니면서 전 경덕왕릉 지를 찾아보고 할 때는 그래도 선망이나 미지의 세계였다. 어쩌다 보니 나는 사적지가 보이는 옆 동네에 정착했다. 그러면서 별 쫓기는 일 없이 살면서 조금씩 늙어가고 있다. 그래서 더 낡아가는 금성땅을 살펴보려고 한다.
의성군 인구가 1읍 17개면, 20만을 훌쩍 넘긴 때도 있었다고 한다. 떠나고, 죽고, 들어오지 않아서 지금은 5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중앙선 열차를 통해선 서울로 가고, 또 동해쪽도 열차로 오갔다. 대구로는 버스가 비포장 먼짓길을 가득가득 승객을 태워 달렸다. 한때 18,000을 넘겼다고 하는 금성면 인구도 4000명선을 겨우 유지하고 있다. 앞으로 10년 뒤 의성군과 금성면은 어찌 될까? 노령화가 온 나라에서 가장 빠른 지역인 만큼, 변화는 불 보듯 뻔하다. 주민수가 2000명 아래가 되면 병원들이 사라진다고 한다. 탑리에는 한사랑과 제일외과의원, 요양중심 성심의원 등이 겨우 병원 진료의 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10년 뒤도 그럴 수 있을까? 그 10년이면 나도 80을 바라본다.
한때 탑리역 주변에는 식당도, 여관도, 다방도 버글거렸다고 한다. 서울로 꿈을 쫓아가는 사람들, 강원도로 막장인생을 찾는 사람들로 역주변은 늘 붐볐고, 기적소리도 힘차게 울렸다고 해암 선생은 자랑스레 말씀하신다. 나는 지역 알기 차원에서 먼저 다방부터 찾아본다.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엔 당연히 잘 곳과 먹고 마시고 놀 곳이 생겨난다. 여관도 많이 있다가 지금은 여인숙으로 달방으로 바뀌고 있고, 수많은 식당들이 폐업개업 하면서 겨우 자리를 지키고, 열차손님과 장꾼들 대상으로 번성했던 다방은 이제 대상을 바꾸어 유지하고는 있다. 지금은 마늘이 대세인 곳이지만, 한때는 포도도 많았고, 여전히 복숭농사와 마늘농사는 금성의 주업이다. 일철이 되면 여기저기 밭에는 일꾼이 부족하니 외지에서도 품을 팔러 오고 가는 이가 득시글거렸다.
경북 성주에서 잠깐 지낸 적이 있다. 참외나 수박철이 되면 동네 개도 만 원짜리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돈은 흥청망청 했다. 높은 고개에서 성주 땅 내려보면 온통 허연 물결로 가득해서 바닷가에 온 걸로 착각할 정도로 비닐 하우스가 대세였다. 억대 농부도 즐비했고, 대다수가 대구에 집을 사두고 출퇴근하면서 농사짓는다고 했다. 하우스 농사의 고약한 고단함은 돈맛에 그냥 흘려보내고, 늘그막에는 호흡기병이나 관절환자가 되어서 병원으로 돈을 갖다 바치는 신세가 되곤 했다.
그래도 성주든 금성이든 일철에는 사람이 몰렸다. 먹고 마시고 살아야하니 식당과 다방은 명맥을 지키고 있다. 주인 마담이 있고, 레지라고 하는 종업원 아가씨도 있었다. 오토바이나 경차를 타고 밭에까지 배달도 갔다. 티켓도 끊어 놀러가기도 했다하고, 코맹맹이 오빠소리나 사장님 소리에 혹해서 돈 천 이상 홀라당 빼앗기고, 속앓이 하는 늙수그레한 남정네도 많았다고 한다. 탑리에도 방석집이 여러 군데 있었다고 해암 선생은 신명 내서 자세하게도 회고를 들려주셨다. 한복 치마 곱게 차려입은 아가씨가 제법 많았다하니 그 시절은 돌아가고 싶은 황금기인가?
탑리 와서 동네 형님네 밭에 모판일 거들러갔다가 배달 온 커피도 몇 번 얻어마셔보았다. 느티나무 천씨 집에서 모여서 논다기에 갔다가 역시나 배달 온 아가씨가 타주는 커피 마셔본 적도 있다. 익숙하고도 스스럼없이 주고받는 대화를 보면 서로 많이 땡겨 본 사이라는 걸 금세 알 수 있었다. 한번은 이발소에서도 배달 온 커피를 얻어 마셔본 적 있다. 옛날 성황기의 추억을 앉아서 기다리기보다 찾아가는 영업으로 바꾼 셈이다.
해암선생 말씀으론 한때는 수십 개가 있었다는데, 이번에 직접 확인한 바로 간판이름 붙은 곳은 다방이 6개, 휴게실이 14개, 카페가 5개였다. 총 25곳 중 다방 4곳, 휴게실 10곳, 카페 5곳 총 19개 업소가 현재 영업중이다. 이발소도 10군데가 넘었다가 이제는 4군데이다. 세탁소는 하나도 없다. 사진관도 없다. 레스토랑도 없다. 중국집이나 식육식당이 몇 곳 있고, 국밥집이나 들밥을 전문으로 하는 정식집이나 국숫집이 탑리시장 주변에 몇 군데 있다. 통닭집도 아직은 5군데 정도 영업중이다. 목욕탕도 한 곳 있지만, 가음에 공용목욕탕이 들어오면서 끝. 여관도 한두 군데 겨우 영업중이다.
10년 넘게 금성 살면서 한번도 다방에 가보지 못 했다. 내 기억으로 40대쯤 경북 영주의 순흥이나 단산, 부석에서 행정실 주사들과 몇 번 가본 기억이 아스라하다. 눅진하고 흥겨운 트로트가 흐르고, 의자는 푹 가라앉으며 온 몸을 다 감당해서 파묻히게 만들었다. 오래 묵은 장롱에서 나는 것 같은 쾌쾌한 내음 속에 연지분 난하게 바른 마담이 반겨주었다. 탁자 가운데는 재미 삼아서 동전 넣고 운세 보는 둥근 박스가 자리 잡았고, 할배가 그려진 영화인촌 성냥과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같이 간 양반들과 커피를 마셨지만, 가끔은 쌍화차를 시켜먹었다. 붉은 빛 도는 고동색 사기잔에 호두나 잣이 그득하고, 따끈한 달걀 노른자가 가운데 앉았다. 오래 달인 한약같은 느낌으로 맛보고 있노라면 아가씨도 요구르트를 들고서 곁에 앉고는 했다. 오빠가 되기도 하고, 졸지에 사장도 되는 신기한 경험의 맛이 이젠 아득하다. 그러다 의성 탑리에서도 다방을 가게 되었다. 얼마전 해암선생과 저녁 식사를 한 뒤, 금성 터미널 옆 왕궁다방에 갔다. 물론 추억의 기대는 깨졌다. 화장기 진한 마담도 없고, 푹 가라앉는 의자도 없고, 반겨주는 아가씨도 없고, 쌍화차마저 없었다.
금성면 탑리마저 다방이나 찻집보다 ‘휴게실’ 이름이 더 멋져 보이다가 마침내는 ‘카페’가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지난 해까지 카페는 개일휴게소 자리 브런치 카페 ‘옛날 그집’밖에 없었다. 지인 집이기도 해서 자주 간 편이지만 금성면내 중심하고는 떨어진 편인데다가 코로나 중이어서 영업을 걱정했는데도, 잘 버텨왔단다. 산운공원의 피자카페도 있다지만 조금 떨어진 곳이어서 별 영향은 없었다. 그런데 탑리 동아약국앞 2층 건물에 젊은 친구가 직접 커피 볶는 카페가 새로 들어섰다. 게다가 지난 해는 탑리 입구 로터리에 디저트 카페가 새로 들어섰고, 올해는 건너편에 금성하나로 마트가 신축되면서 베이커리 카페가 또 들어섰다. 이젠 조금은 우습게도 다방 커피 한잔이 아니라, 쭈구리하게 늙은 영감님도 일바지 입은 채로 아메리카노 한 잔은 테이크아웃, 들고 댕겨야 알아주는 세태가 되고 만 것이다.
커피는 언제 들어왔을까? 우린 어찌 그리 커피를 좋아할까? 유럽과 이슬람인의 음료로 각광받고 있던 커피가 우리 땅에 들어온 것은 대략 1860년대 프랑스 선교사가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독일 여성 손탁 덕분에 1890년대쯤엔 고종황제도 커피 애호가, 마니아가 되었다고 한다. 양식을 즐기고 커피를 즐겨하던 고종은 예민한 미감덕분에 아편커피 독살위험도 넘겼다고 한다.
1900년대 초엔 서울에 끽다점이 생겼고, 안증근 의사가 이또 격살을 위해 기다리면서 끽다점에서 차 한 잔 했다고 하는데 커피가 아닐까한다. 1910년대 들면서 카페가 생겼다고 하는데, 그때의 카페는 불온한 사교장이었다고 하니 요새 카페와는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일인당 커피 소비량은 세계적 수준이고, 커피음료점도 그만큼 우후죽순처럼 열리고 있더니 이곳 탑리까지 마침내 카페끼리 경쟁해서 다방과 휴게실을 밀쳐내고 있다. 인구 4천명 남짓한 금성면에서 이젠 다방커피 말고 카페 커피가 더 양지로 나와서 주인노릇하는 것처럼 보인다.
금성면 4000 인구를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까? 젊은 사람도 적지만, 출산도 적으니 당연 아이소리는 들리지 않고, 노인들은 해마다 돌아가시니 점점 줄 수밖에 없다. 귀농인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겨우 유지한다고 하지만, 귀농자 역시 젊은 축은 적다. 귀촌한 지 10년 우리 동네만 하더라도 아는 처지여서 부의금 낸 곳만 해도 10번이 넘는다. 노인은 돌아가셨고, 외지 갔던 자식들 몇이 돌아왔지만 그들도 역시 노인들이다. 탑리까지 다방 나들이 즐기던 노인분들이 기동을 힘들어하거나, 농삿일도 접어서 동네 차배달까지 못 하게 되면 영업 접어야 한다. 한 두 곳씩 다방문 닫으면 더 썰렁한 도심에 카페만 영롱한 불빛 채워서 명맥 유지한다지만, 이 역시 수지타산이 맞아야 한다. 올해 지나면 군위는 광역시로 업그레이드 된다고 들뜨니 군위시에 들어선 대형 카페로 금성면의 그나마 커피애호가들마저 발길 슬슬 돌리면 경쟁은 될까?
금성면 탑리의 다방은 마늘과 복숭농업이 근근 버틸 때까지는 살아남을 것이다. 힘들게 몸으로 때우는 농업의 주축인 노인들이 가고 나면 마늘농사와 과수농사는 누가 할까? 금성 탑리에서 무엇을 보고 즐기려고 외지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오고, 또 다방을 찾아서 한잔씩 즐기고 갈까?
낮에 돌아본 가게나 음식점에서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는 곳은 딱 한 군데 논산칼국수 식당뿐이었다. 워낙 이름이 났고, 방송까지 탄 데다가 가성비도 좋으니 주인이 바뀌어도 외지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 무언가 한 가지는 두드러지게 이름 내야만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이다. 맛이냐, 친절이냐, 분위기냐, 풍광이냐, 두루 다 채우면 좋겠지만 하나라도 남들 당겨올 수 있을 만큼 뛰어나야 살아남는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엔 아직 한 곳도 없다. 특히나 친절은 더더욱 없다. 그러면 당연 잘 안 된다. 그 다음은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 의성살이 10년 넘기면서 조촐하지만 연금 생활자인 내가 늘 안타깝고 걱정스러운 것은 장사하는 경상도 사람, 의성사람들이 그냥 불친절하고, 불결하거나 무심하게 장사하며 명품 만들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의성군은 숭의문을 세우면서 의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걸 보여줬다. 그 빛나는 의리도 다른 방향으로 뒤집어보면 신라에 대한 배신이나 신생 후백제 견훤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나는 이제 이런 의리같은 관념적 자랑거리에서 벗어나서 의성만의 문화를 만들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얼마전 문화원장이 새로 취임했다고 한다. 경력란을 살펴보았다. 문화원 이사와 사무국장이 주된 경력이었다. 다른 문화 경력은 없다. 짧은 식견이지만 참 씁쓸했다. 병원 사무장 오래하면 병원 원장도 되고, 행정실장 오래 하면 교장도 되는 세상이란 느낌 확 온다. 새로 원장 된 분께 의성 문화의 앞날을 묻고 싶다. 의리 말고, 조문국의 발상지라니 조문군이 되거나 금성면만이라도 조문면으로 네이밍, 이름 바꾸기할 생각도 한번 해보시길.
지방자치단체로서 금성면이란 이름은 전국적으로 몇 군데나 있다. 국보 탑리 오층석탑은 의성에서도 전국에서도 유일하다. 이젠 번호를 붙이지 않는다 했지만, 며칠전 탑앞에서 만난 면사무소 호적계 근무했다고 자랑하는 90세 할매는 국보 77호 똑똑하게 말하고, 일본사람이 목련꽃 기증한 것도 전해주었다.
탑리탑은 백제계의 목탑에서 신라계의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모전석탑이다. 그야말로 백제문화의 한 특성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를 보여주는 신라 탑이다. ‘탑리’라는 아름다운 이름의 원조 5층석탑을 형상화한 무엇을 만들어내었으면 한다. 5개 짜리로 짜맞추는 베이커리 빵이나 과자, 아이들 블록 만들기나 다양한 조립물 등 아이디어를 살려서 상품이 나왔으면 한다. 이젠 그런 문화의 시대가 아닌가? 탑리탑만 하더라도 적절한 조명을 비추어 탑리의 중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든가. 탑리 탑이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을 리모델링 해보든가. 오늘 낮 탑리동네를 한 바퀴 돌다보니 오층탑 들어가는 골목에 ‘국제다방’은 리모델링했는지 축하 화환 놓여있다. 다방은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새로운 문화 인식 전환만이 시들어가는 탑리와 의성군을 되살릴 씨앗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금성면 다방의 성쇠를 한 10년은 더 지켜 볼 것이다. 나도 그때쯤이면 지금 하고 있는 소박한 복숭농사도 접고 더더욱 자유스러울 수도 있고, 더욱 부자유스러워서 집에서만 천하를 호령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제 제 4의 고향 의성이 더불어 사람살기 좋은 땅이 되었으면 해서 봄밤 개꿈을 꾸듯 한단지몽(邯鄲之夢)을 꾸는 것이다.
첫댓글 반갑습니다
세밀화를 보는것 같습니다
너무 정겹기도 하고요
이 글을 보니
울산친구가 탑리에 오면 꼭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지도 어림프시 그려집니다
현재 금성면은
네개 면을 일제강점기때 금성산 이름을 따서 금성면으로 통합했다지요
금성면 대신 조문면이나 탑리면으로 바꾸는데 한 포 보탭니다
더러는 '소멸'이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느낌도 듭니다
농민들은
개방농정 30년 동안 투쟁하며 고민을 했고
그 대안으로 농민수당과 농민기본법의 입법화를 하려고 합니다
농민기본법이 입법되면
농민 500만명으로 사람 사는 농촌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의성에서도 다 함께 살맛이 나겠지요
세한도님^♡^홧팅요
다음글도 기다립니데이~
세한도가 누구지 하고 글을 읽다가 '아하 그 분이~'하고 금새 떠올랐습니다.
글을 읽다보니 그야말로 탑리의 옛날씩 다방에서
도라지 위스키는 아니더라도 추억 어린 커피 한 잔 하고 싶어지네요.
탑리의 다방과 관련된 소박한 모습들, 그 곳에서 일어났을 만한 수많은 사연들
한 사람 두 사람 떠나가는 시골 마을의 안타까움들이 잔뜩 묻어납니다.
좋은 글 종종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적어도 글을 읽는 동안, 그리고 그 여운이 가라앉을 때 까지 한 동안만 이라도
쫓기듯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잠시라도 뒤도 앞도 돌아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 하자면 아름다운 '글보시'라~
문화라는 게 '고급스럽게' 서울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지역마다, 향토마다 원주민이 오랜 세월 지켜오거나 만들어온 그들만의 문화가 있겠지요. 그런데 노령인구만 많아지면서 주민수가 점점 줄어드니 지금이라도 채록이나 기록,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향토문화의 '증거'마저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연세 드신 분들의 생각과 말씀이 시대와 불합하더라도 일단 자료로서 남겨두는 노력이 필요하다 여깁니다. 그런 길에 연구회가 중책을 맡으시길.
향토사적으로도 의미 깊은 글 잘 봤습니다. 사라져 가는 향토문화를 지키는 글이라 더욱 정감이 갑니다. 가끔 선생님의 글을 대했르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관심 있게 허심탄회하게 지역 문제를 거론하셨네요. 추억과 함께 지역에 대한 고언 감사하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