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우지 [팜므 파탈의 변명] 2012-08-24>
잉그리드 버그만, 세상의 뭇매에도
로망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
이동연 작가
오노 요코의 전시. 천장을 보는데 글씨가 깨알처럼 써 있었다. 잘 보이지 않아 내용이 궁금해진 존 레논은 그 아래 있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보았는데, 적힌 글은 “Yes”. 이때 레논은 근원적 자기 존재가 용납되는 기분을 경험한다. “서로가 누군 인지 알지 못하는 우리는 눈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멈췄다. 그리고 함께 느꼈다. 이건 진짜 만남이구나. 세상에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사는 사람도 있구나! 사랑을 사회제도와 고정관념의 잣대로만 재단할 수 있을까?
‘연애 읽어주는 남자’를 자청한 이동연 작가는 저서 <연애낭독 살롱>에서 당대 통념을 깨고 때론 어리석어보이기까지 한 거장들의 사랑이 인류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실패한 연애이든 아니든, 합법적인 사랑이든 그렇지 않든,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 위대하며 모든 사랑은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남들이 손가락질하는 불륜조차도!”(편집자 주)
순수한 사랑을 연기한 세기의 연인
영화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에서 순결하고 청순한 마리아 역을 맡아 세계적 스타가 된 잉그리드 버그만(Ingrid Bergman, 1915~1982) 역시 사랑에 눈이 멀었던 사람입니다.
이 영화에서 잉그리드 버그만은 짧은 머리에 화장기 없는 민 낯으로 게리 쿠퍼(로버트 조던 역)와 애틋한 사랑을 나눕니다. 마리아가 로버트와 처음 키스할 때의 대사는 극중 인물이 얼마나 순수한 처녀인지를 말해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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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유명한 키스장면 |
“저 키스할 때 코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은 키스가 필요한 여자야. 그것도 나처럼 잘하는 사람이.”
영화에서 키스 한 번도 안 해본 처녀, 키스를 할 때 고개를 오른쪽으로 해야 하는지 왼쪽으로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는 순진한 여자. 팬들은 그의 순수한 눈망울과 연기에 환호합니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잉그리드 버그만의 출세작인 1942년도 작품 <카사블랑카>에 나오는 명대사입니다. 험프리 보가트(릭 블레인 역)가 한 손에 포도주 잔을 들고 다른 손으로 버그만(일사 런드 역)의 뺨을 세우며 눈동자를 보고 던진 말인데요.
버그만은 “지금이 마지막인 것처럼 키스해주세요”라고 응답하며 두 사람은 감미롭게 입을 맞춥니다.험프리 보가트는 넓은 유리잔에 담긴 고급 포도주 ‘코르동 루즈 브뤼(Cordon Rouge Brut)’의 맛과 어울리는 버그만의 고혹적인 눈빛에 빠져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들 가운데 항상 최고의 로맨틱한 장면으로 뽑힙니다.
모로코의 항구 카사블랑카는 제2차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돌아가려는 피난민들이 몰려든 곳이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미국인 릭 브레인이 이곳에서 술집을 열어 큰돈을 벌고 있는데, 어느 날 밤 레지스탕스 지도자 라즐로와 그의 아내 일사가 여권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옵니다. 그녀를 본 순간 릭은 깜짝 놀랍니다. 그녀는 그가 파리에서 꿈같은 시간을 보낼 때 만나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여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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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사블랑카'의 한 장면 |
파리가 나치에게 정복되던 날 두 사람은 함께 도망치기로 합니다. 그런데 약속한 장소에 일사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일사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버지가 숨어 지내며 중태에 빠진 사실을 알고 혼자 도망칠 수가 없었습니다.
두 사람이 이 기막힌 만남 덕에 서로 말 못할 상념에 잠겨 있을 때 어디선가 두 사람의 추억이 짙게 밴 ‘세월이 가도(As time goes by)’라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이들의 사연을 잘 알고 있던 연주가 샘이 두 사람을 위해 연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건배하고 싶을 만큼 아름답던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잊지 못하던 릭과 그와의 달콤한 키스와 순정을 새록새록 기억해내는 일사, 그 두 사람 다 큰 번민에 빠져들었습니다. 릭은 무조건 그녀를 붙들고 싶었고 일사도 차라리 이곳에 주저앉고 싶었습니다. 남편과 자신이 나치에게 처형을 당한다 하더라도.
그러나 릭은 두 사람을 보내주는 것이 서로를 위한 길임을 알고 경찰서장을 매수해 여권을 마련합니다. 결국 일사는 그 여권을 받고 안개 자욱한 공항으로 갑니다. 비행기에 차마 탑승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일사를 보고는 릭이 부드럽게 달랩니다.
“저 비행기가 이륙하기 전까지 타지 않는다면 당신은 곧 후회할 거요. 오늘, 내일, 아니 평생을 후회하게 될 거요.”
일사는 결국 릭을 바라보며 비행기에 오르고 그런 일사를 릭도 못내 아쉬운 눈길로 응시하며 작별을 맞이합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연인을 독점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한없는 부끄러움을 안겨줄 것 같군요. 사랑이 진정성을 띨수록 희생과 관용과 배려란 결코 억지가 아니라 본능처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현실에선 혼인 상태에서 유부남의 아이를 임신한 팜프 파탈
이렇게 연달아 두 편의 대표작까지 거머쥐었으니 버그만의 인기는 상승가도였지요. 1945년 가을, 그녀는 뉴욕에서 영화 한 편을 봅니다. 이탈리아 감독 로베르토 로셀리니Roberto Rossellini, 1906~1977의 <무방비 도시>입니다. 그녀는 이때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1948년 봄 그가 만든 <전화의 저쪽>이란 영화를 보고는 드디어 감독에게 편지를 씁니다.
당신의 영화 두 편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배우가 필요하면 당장 달려가 함께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이탈리아 말은 Tiamo(사랑해요)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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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두 사람의 열정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남편과 딸이 있던 유부녀였고 로셀리니 감독은 별거 중인 부인을 놓아두고 애인과 바람을 피우던 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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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리드 버그만과 로베르토 로셀리니 |
버그만이 로셀리니의 아이를 임신하고 결혼까지 하자, 미국 교회는 물론 의회까지 나서서 일제히 그녀를 비난했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얻는 대신 가족, 명성, 재산 모든 것을 잃어야 했죠. 두 사람은 ‘불륜’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하면서도 꾸준히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요. 엄청난 빚더미에 허덕이며 출산 비용조차 마련하지 못하던 버그만은 1956년 빈털터리로 뉴욕에 돌아옵니다. 그리고 <아나스타샤>에 출연해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버그만은 바람둥이 기질을 버리지 못한 로셀리니와 1958년 이혼하고 맙니다. 그 후 <오리엔트 특급 열차 살인 사건>으로 세 번째 아카데미상을 받았고, 작품 활동을 계속 하다 1979년 <가을 소나타>를 끝으로 은퇴하지요.
로망으로 모든 걸 잃었지만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 걷겠다”
그녀는 그 시절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했을까요? 아닙니다. 되레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이 나더러 불륜을 저질렀다고 비난하죠. 그러나 난 정말 멋진 삶을 살았어요. 다시 태어나도 같은 길을 걷겠습니다.”
순수한 여성 역으로 많은 사랑을 받던 그녀가 현실에서는 유부남에게 먼저 작업을 걸었으니 세간의 평가가 좋을 리 없었습니다. 한동안 그녀는 팜므 파탈로 낙인 찍혔지요. 그러나 후일 미국인들도 차츰 보수 교회의 시각에서 벗어나 버그만에 대해 재조명하고 전설적인 여배우로 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버그만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았습니다. 이런 삶은 판타지처럼 보입니다. 그 판타지를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맛대로 평가하려 들겠죠. 보통 사람 같았으면 이미지와 사회적 지위, 여러 골치 아픈 문제들을 떠올리며 찾아온 사랑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 앞에서 자유를 버리는 것도 가슴이 시키는 대로 해서 생기는 일. 이는 객관적으로 볼 때 비상식으로 보일지 몰라도 그 개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정당한 일이 되지요. 여기엔 상식을 뛰어넘는 역설, 어울리지 않는 용어들의 조합이 춤을 춥니다. 자유와 복종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이 두 단어가 융합합니다. 아니, 자유가 내준 자리에 사랑이 채워지면 자유가 주는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희가 다가옵니다.
‘연애 읽어주는 남자’를 자청한 이동연 작가
사실 <연애낭독 살롱> 이전까지 연애와는 무관한 글을 써왔다. 왜 갑자기 연애에 대한 인문학 서적을 펴냈는지,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미래사회의 변동과 그에 따른 대응에 관심을 가지고 의사소통과 마케팅, 리더십에 대해 연구했다. YTN, MBN, CBS, BBS, WBS, CTS, FEBC 등 여러 방송매체와 회계사 모임, KIRD(연구개발인력교육원), EMC 등 다양한 단체에서 강의해 왔다. 삼성 SDS, 우리은행 등 주요 기업의 사보와 여러 일간지, 인터넷신문에 활발히 기고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베스트셀러인 《대화의 연금술》을 비롯해 《통하는 대화법》, 《소비 트렌드》, 《리더십 불변의 법칙》, 《최고 마케팅 경영자 예수》, 《CEO형 인재》, 《해체냐 해탈이냐》, 《나를 찾아가는 마음의 법칙》, 《두 개의 길 하나의 생각》, 《바루나-포용의 신화를 찾아서》, 《강화도 미래신화의 원형》과 중국에 수출된 《행복한 수면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