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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태왕에게 항복하고도 계속 도발한 아신왕 (7부) |
비문징실의 내용과 같은 고구리사초략의 기록 |
6년(396) 병신년 3월에 광개토호태왕에게 영위노객(永爲奴客)이 되겠다는 맹서와 함께 항복했던 백제 아신왕은 이후에도 계속 도발을 해왔다. 왜국과 화친을 맺고는 이듬해 태자 전지를 볼모로 보냈으며, 왜왕은 자신의 딸을 전지와 혼인시켰다. 7월에는 한수의 남쪽에서 열병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참고로 <삼국사기>에는 396년 5월에 전지태자를 왜로 보냈고, 397년에 고구리를 침공했다고 1년 빠르게 기록되어 있다.
항복하고도 계속 도발한 백제 아신왕
398년 3월 아신왕은 진무를 병관좌평으로 사두를 좌장군으로 삼아 쌍현(雙峴)성을 쌓았고, 8월에는 군사를 보내 고구리를 공격해 노략질을 했다. 백제군이 한산(漢山)의 북책에 이르렀을 때 밤하늘에 있던 별이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백제군영 안으로 떨어졌다. 보고를 받은 호태왕은 “네가 조상의 나라를 치니 반드시 망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이에 크게 두려움을 느낀 아신왕은 백제로 돌아가 서대(西臺)에서 활쏘기를 연습하며 “함부로 공격하는 것이 아니구나. 스스로 지키기나 해야겠다.”라고 말했다. 호태왕은 그런 아신왕을 비웃으며 “안으로는 악행을 쌓으면서, 밖으로는 정의를 내세우는 놈은 그렇게 되는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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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9년(399) 기해 5월, 왜가 신라의 변방을 침범하니 다급해진 신라가 하모(霞帽)를 통해 호태왕에게 군대를 보내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하모는 신라 내물왕의 딸로 392년에 언니 운모와 함께 호태왕에게 바쳐져 소비(후궁)이 된 여인이다. 이에 호태왕은 서구에게 명해 5천 기병을 보내려고 했더니, 신라 내물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와 왜가 이미 물러갔다고 고하면서, 역시 호태왕에게 소비로 바친 자신의 딸 운모(雲帽)의 태자 생산을 축하했다.
이에 호태왕은 기뻐하며 “본시 같은 뿌리에서 태어났으며, 또다시 원앙의 인연을 맺은 이래로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았으니 함께 남북의 땅을 다스리자.”라고 말하니, 사신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하고는 신라로 돌아갔다. 호태왕은 신라에서 보내온 두 소비를 거둔 이래 은총을 더해주었고, 내물왕을 한 집안으로 여겨 상을 내린 것이 매우 많았다. 훗날 사람들이 호태왕이 남긴 말씀을 글로 쓰고 아름답게 꾸며서 악부사(楽府詞)를 지었다고 한다.
동년 7월, 호태왕은 신라에 황충(메뚜기떼)이 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백제 아신왕에게 신라로 곡식을 보내라고 명했다. 아신왕은 겉으로는 따르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명을 어기면서 사돈을 맺은 왜왕과 뭔가를 도모하자고 제안했으나, 왜왕 또한 하늘에 대해 잘 아는지라 감히 지존을 범하지 못하고 고구리에게 성심으로 조공을 바쳤다.
아울러 호태왕이 속민인 신라백성들을 구휼하고자 국경으로 곡식을 운반하게 했더니, 신라 내물왕이 호태왕에게 고하기를 “성상께서 지극히 걱정해주신 덕분에 하루 밤에 뇌우(雷雨)가 내려 황충이 씻겨나갔고 곡식들도 다시 살아났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호태왕은 크게 기뻐하며 “그대의 나라도 마땅히 동명(東明=주몽)신을 섬겨야 할 것이오.”라고 말했다.
왜를 끌어들이려 했던 아신왕은 스스로 고구리를 침략하기 위해 백성들을 괴롭히고 병마를 대거 징발하려고 했더니, 전쟁에 지친 많은 백제 백성들이 식량을 가지고 신라로 옮겨갔기에 호구가 줄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삼국사기>에 398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가 <고구리사초략>보다 1년 빠른 이유는 <고구리사초략>이 호태왕 즉위원년을 391(신묘)년으로 본 반면에 <삼국사기>는 392년으로 보았기 때문인데, 호태왕 비문에 기록된 간지에 의해 <고구리사초략>의 년도기록이 맞다는 게 밝혀졌다.
이후 백제 아신왕은 더 이상 호태왕에게 어떠한 도발도 하지 못했고, 403년에 아신왕이 신라를 침략하자 호태왕이 아신왕에게 군병을 파하라고 명했더니 감히 교전도 하지 못하고 중지했다고 한다. 여러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신라는 고구리의 완전 속국이었고, 백제 아신왕은 호태왕의 라이벌이 아니라 그야말로 상대가 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아신왕은 405년 9월 호태왕보다 먼저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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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신라를 침략하는 왜
이어 <고구리사초략>에는 “10년(400) 경자, 왜가 신라에 침입했다는 소식에 서구와 해성 등으로 하여금 5만 병력을 이끌고 가서 신라를 구원해 왜를 물러나게 했다. 임나(任那)·안라(安羅)·가락(加洛) 등 모두가 사신을 보내 입조했다.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것이 호태왕 비문에는 어떻게 새겨져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비문 원문)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下平穰而新羅遣使百王云 倭人滿其國境大破城池 以奴客爲民歸王請命 太王恩復稱其忠誠 特傳使還告以兵許
十年更子 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至新羅城倭滿其中 官軍方至倭賊退
이후 비문은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쓸어버리는 내용으로 보이는데 깨져버린 글자가 집중되어 있어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었으나, 환단고기를 엮은 운초 계연수 선생이 비석을 직접 보고 적었다는 ‘비문징실(碑文徵實)’이 이유립 선생의 저서인 <대배달민족사>에 전해져 그 실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비문징실’에 대해서는 이후에 알아보기로 하고, 일단 여기까지의 문구로만 번역을 해보기로 하겠다.
(번역) 9년(399) 기해, 백잔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서로 내통했다. 신라가 하평양에 있던 태왕에게 사신을 보내 “왜인들이 국경에 가득 차있고, 성과 못(해자)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노객(종=신라왕)은 백성이 되기로 태왕께로 귀의했사오니 명을 청하나이다.”라고 전했다. 태왕은 그 충성을 거듭 칭송하며 은혜를 베풀어 사신에게 돌아가서 병력출동을 윤허했음을 특별히 전하라고 했다.
10년(400) 경자, 교지를 내려 보‧기병 5만을 보내 신라를 구원하라고 했다. 남거성에서부터 신라성까지 왜인이 그 가운데에 가득했는데 관군(고구리군)이 도착하자마자 왜적들이 모두 퇴각했다. (이하는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박살내는 내용이 ‘비문징실’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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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거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비문의 9년과 10년 기록이 연결되는 내용으로 이해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9년에 왜가 신라에 쳐들어와 아주 다급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호태왕은 이듬해에 5만의 군사를 보냈다는 점은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위 <고구리사초략>의 기록에 의해 비문의 9년 기록과 10년 기록은 전혀 별개의 사건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신라는 399년에 왜가 쳐들어오자 호태왕에게 급히 구해달라고 간청했다. 이에 호태왕이 5천 기병을 즉각 보내려고 했는데, 신라 내물왕이 왜가 이미 물러갔음을 알려와 출병을 중지시켰다. 이후 백제 아신왕은 왜에게 고구리를 함께 치자고 제의했으나, 왜왕은 그 제안을 거부하고 고구리에게 조공을 성심껏 바쳤다. 이듬해(400) 왜가 신라를 재침했다는 보고를 받은 호태왕은 보‧기병 5만을 보내 왜군을 싹 쓸어버려 신라를 구해주었고, 임나, 안라, 가락 등 남방이 모두 평정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고구리사초략>은 <삼국사기>의 잘못된 내용뿐만 아니라, 호태왕 비문의 내용도 거의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도록 그 사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단지 위 9~10년 기사뿐만이 아니라, 임나일본부설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던 세칭 호태왕 비문의 신묘년 기사로 알려져 있는 5년 기사의 2개 결자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찾아주기도 한 아주 중요한 역사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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