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언니와 나는 11살 차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윈 가정에 맏딸이란 아들이나 남편같기도 하리라
어머니가 일을 하러 나가시는 가정을 거의 큰언니가 도맡아 살아 왔으며 막내인 나를 돌보는 것도 큰언니의 몫이었다.
혼자 집에 남겨진 나를 언니는 어디던 데리고 다녔다.
언니 친구들이 노는 곳에 나는 어디나 따라 다니며 언니 친구들이 주는 작은 용돈들과 과자등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어릴 때 나를 공부 가르친 것도 언니였고 다리가 아픈 나를 업고 키우고 학교에 데리고 다닌 것도 언니였다
언니는 엄마의 대리인이기도 했다.
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한참 어른이 되기까지도 언니가 힘든 삶을 살았다는 것을 몰랐다.
언니는 참 예뻣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다.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독일에 유학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자기가 떠나면 두여동생과 남동생 공부는 누가 시키느냐고 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언니는 그때 내가 떠났다면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되뇌이기도 했다.
언니가 선택한 것은 형제들이 많이 없는 형부, 홀어머니와 시누이 한명밖에 없다는 것에
동생들을 돌볼수 있지 않을까 선택을 했단다.
그러나 홀시어머니의 중풍으로 오랜 시간 돌보아야 했고 한명 뿐인 시누이와 시누이남편
조카들은 수시로 언니집에 와서 살았다.
참으로 많은 재능을 가진 언니였지만 여성의 삶에 대한 한계로
친정동생과 자신의 아이를 키우느라 그렇게 살았다.
그래도 오빠를 대학교까지 보낸 것은 언니의 애씀이었다
너무 힘들게 마음 고생을 하다보니 50대에 뇌졸증이 와서 지금가지 반신을 잘 쓰지 못하고
아들과 며느리와 함께 살고 있다.
20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 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과거로 시간을 돌려보니 사진속에 환하게 웃는 언니...가슴이 울컥해 지며 눈물이 눈가를 적신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난다
노란 숲 속에 두개의 길이 갈라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덜 다닌 한개의 길을 택했고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달라지게 했노라고...
삶에서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마다 그 선택은 자신이 한 것이리라...
4월 봄꽃이 눈처럼 내리는 날 돌아가신 어머니도 떠 올리고
80노인이 되어 돌봄을 받고 있는 언니를 보며...그래도 잘 살았노라고, 같이 살아 있어 좋았다고
언니와 함께 였던 삶이 정말 좋았다고 말한다~~~
7월이 되자 자주 산책을 하던 공원에 갖가지 색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수국이 피어있다. 문득 유난히 꽃을 좋아하던 큰언니가 생각났다. 큰언니와 나는 11살 차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윈 가정에 맏딸이란 어머니에게 아들이나 남편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되었을 것이다. 힘든 어머니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의 짐을 지고 언니는 자랐을 것이다.
어머니가 일을 하러 나가시고 나면 가정이나 동생들의 보살핌은 거의 큰언니가 도맡아 해왔었다. 특히 막내인 나를 돌보는 것이 가장 큰 일이었다. 어릴 적부터 관절이 붓는 병이 걸려 많이 걷지도 못하고 다리가 아파 집에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언니가 갈 수 있을 만한 곳에는 업고 다니기도 하면서 가끔씩 데리고 다녔다. 언니 친구들이 노는 곳에 데리고 가주어 언니 친구들이 주는 용돈들과 과자 등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어릴 때 나를 공부 가르친 것도 언니였고 나를 업고 학교에 데리고 다닌 것도 언니였다. 학교에서 가는 소풍을 못가게 되었을때 속상해서 울고 있는 나를 언니는 위로하느라 애를 썼다. 언니는 엄마의 대리인이었다. 오래된 흑백사진속에 5살의 나와 언니가 환하게 웃으면 찍은 사진이 있다. 언니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나는 막내이다 보니 어머니와 언니가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 몰랐다. 어른이 될 때까지도 늘 받기만 하고 줄줄 모르는 막내였고 세상의 이치를 모르는 철부지였다. 나와 다르게 언니는 삶의 모두를 동생들을 돌볼 생각으로 살았다.
언니는 참 예뻣다. 동네에서도 소문난 미인이었다. 공부도 잘해 학교에서 독일에 유학을 보내준다고 했는데 자기가 떠나면 세명의 동생들 공부는 누가 시키느냐고 고민하다가 결국 가지 않았다. 아주 가끔 언니는 ‘그때 내가 떠났다면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되뇌이기도 했다. 언니가 선택한 것은 형제들이 많이 없는 형부, 홀어머니와 시누이 한명밖에 없다는 것에 친정동생들을 돌볼 수 있지 않을까 선택을 했단다. 물론 처음 본 형부의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것도 있었지만...그러나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오랜 시간 돌보아야 했고 한명 뿐인 시누이와 시누이남편 조카들은 수시로 언니집에 와서 살았다.
많은 재능을 가진 언니였지만 그 시절의 여성의 삶에 대한 한계로 친정동생과 자신의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하는지도 모른 체 살아 왔다. 그래도 오빠를 대학교까지 보낸 것에 언니는 자신의 애씀을 보상받는 것처럼 말을 했었다. 우리 모두 인정하는 일이었다.
가부장적인 시대의 형부는 언니가 바깥 활동을 하는 것을 싫어 했다. 조카 3명을 낳아서 기르는 것이 언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려운 가정에 힘든 시간들이 쌓여 50대 후반에 뇌졸증이 와서 쓰러졌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언니옆으로 와서 살아가던 나로써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놀람과 절망감속에서 언니가 내 곁을 떠나면 어떻하나라는 두려움의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오랜 시간 재활을 통해 잘 버텨 내었다. 오른쪽 몸을 잘 쓰지 못하고 돌봄을 받는 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내 곁에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사하다고 기도를 한다. 착한 조카는 아내와 함께 언니를 모시고 살고 있다. 조카는 어머니의 살아오신 삶을 아니까 모시려고 하지만 며느리 입장은 그렇지 않다. 자신의 아이들도 있고 자신만의 가정을 가지고 싶을 것이다. 간혹 내 딸이었으면 어떠했을까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짠하기도 하고 진심으로 고맙기도 하다. 20대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대신 언니를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살았다. 과거로 시간을 돌려보니 낡은 흑백 사진속에 환하게 웃는 언니...그 옆에 천진하게 웃고 있는 내가 있다. 가슴이 울컥해 지며 눈물이 눈가를 적신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꺽여 내려간 데까지 멀리 바라다 보았습니다.(중략)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살아오는 삶의 순간에 두 개의 길이 있어 망설인 적이 많았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작은 선택으로 이어졌다. 그때마다 고민을 하면서 한쪽 길을 선택 했을 것이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힘든 일의 순간에서도 결국은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이리라...두개의 갈라진 길에서 망설이며 고민하며 한쪽 길을 선택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뒤 가지 않았던 길을 갔으면 나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라고 되돌려 생각하는 사람도 많으리라.
각자의 선택이 결국 각자의 삶인 것이다.
언니는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자신이 주어진 길을 최선을 다해 살았고 다른 길을 갔더라면 이 아이들을 어떻게 만났을까 라며 세아이의 엄마로써 살아온 삶이 좋았다고 한다. 언니의 삶에 대한 선택을 존중한다. 노인이 되어 돌봄을 받고 있는 언니지만 그래도 잘 살았노라고, 같이 살아서 좋았다고 언니와 함께였던 삶이 내 인생에 멋진 날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첫댓글 그런 언니가 계셨군요.
사람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모습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을 합니다.
언니....
문득 친정 엄마 생각이 납니다.
이북에서 내려올 때 여동생하고 둘만 왔다고 합니다.
엄마는 이모를, 이모 가족이 생겨도 평생을 돌봐주었어요.
이 글이 마치 이모의 목소리, 마음인 양 들립니다.
언니분께서 건강히 잘 계시길 기도합니다.
많은 재능과 미모를 타고 났음에도 맏딸이라는 자리 때문에 자신을 희생시키다시피 한 언니의 고마움이 크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