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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집단순교지(19) - 한 곳에서 19인이 찬송하며 화형당한 영암 구림교회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는 월출산 자락에 펼쳐진 유서 깊은 마을이다. 약 2,200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는데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문물을 전해준 ‘왕인 유적지’가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뒤로는 남한의 금강산이라 하는 월출산이 뽐내고 있고, 마을 앞으로 넓은 논밭이 펼쳐져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이다. 조선 명종 20년(1565)에 조직되어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대동계’가 대변하듯 마을주민들끼리 서로 돕는 전통이 이어져 온다.
구림리에 교회가 세워진 것은 1922년 구림 공립 보통학교 교장 부인 김숙자 씨가 김학동, 이신흥 등과 함께 예배 처소를 마련하면서 부터이다. 교회는 일제강점기에 갖은 수탈과 핍박 속에서도 민족을 위해 기도하며 이웃에게 복음을 전했다. 구림교회는 지역 교회들과 연합하여 영암지역 복음화의 든든한 초석이 되었다.
영암 구림교회
1950년 한국전쟁은 평화롭던 마을을 비껴가지 않았다. 험준한 산세의 월출산으로 인해, 영암지역은 지리산과 더불어 빨치산들의 주요 근거지로 인민군 사단 본부가 있었다.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인민군이 유엔군의 상륙작전 성공으로 패주하면서 해남, 강진, 장흥 등지의 빨치산과 인민군 패잔병들이 월출산으로 모여들었다. 영암지역은 이들로부터 많은 피해를 받았는데 특히 우익성향이 강하고, 교인들이 많았던 구림리는 공산당들의 직접적인 표적이 되었다.
1950년 10월 3일, 인민군 패잔병과 빨치산들이 마을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구림교회 성도 19명과 면내의 우익인사 6명을 체포하여 마을 입구에 있던 주막집에 가두었다. 공산당들은 감금된 채 떨고 있던 구림교회 성도들에게는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한마디만 하면 살려 주겠다.” 회유했지만, 성도들은 한 명도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으로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성도들의 꿋꿋한 신앙심에 공산당들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튿날인 4일 아침, 공산당들은 주막집에 짚과 장작더미를 쌓아놓은 후 불을 붙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왔다.
순교비
그러나 주막집에서 비명은 곧 찬송으로 바뀌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갇혀 있던 성도들이 한목소리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불길은 점점 맹렬해지고 찬송 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불길에 주막집은 형체도 알아보지 못하게 완전히 불에 타버렸다. 잿더미 속에서 엉켜진 뼈만 남은 시신들을 다 수습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묘를 만들어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 순교한 구림교회 성도들은 집사 3명(김정님, 노형식, 장성례), 성도 12명(노병철, 노병현, 최경애, 최기우, 이이순, 김덕경, 김창은, 김흥호, 김치빈, 김상락, 김봉규, 천양님)과 이름을 알 수 없는 성도 4명 등 19명이었다.
영암군 88명 순교자 명단
6. 25전쟁 중 공산당들은 영암을 점령했던 3개월 남짓 동안에 우익인사들과 기독교인들을 눈에 띄는 대로 학살했다. 전쟁 이전에 13만이었던 영암군의 인구는 5만4천으로 줄어들고, 영암군에서 88명의 기독교 순교자가 발생하는 거룩한 지역이 되었다. 구림교회는 복음 전파를 위해 매주 토요일마다 지역사회에 헌신한다. 홀로 사는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세탁 봉사, 인근 마을을 찾아가 여는 마을 잔치 등 활발한 봉사로 칭송을 받는 교회다. 김경원 담임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교회’라는 표어를 정해놓고, 선배 순교자들의 뒤를 따라가는 교인들이 되기를 기도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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