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저와 동예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한 옥저와 동예는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으며, 일찍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다. 각 읍락에는읍군이나 삼로라는 군장이 있어서 자기 부족을 다스렸으나, 이들은 큰 정치 세력을 형성하지 못하였다.
옥저와 동예의 고고학적 특성
동예(東濊)는 한반도 동북지역의 무문토기문화를 기반으로 하여 동해안지역의 예족(濊族)이 성장하여 세운 국가이다. 이 지역에서는 공열토기(孔列土器)가 반출된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공열토기문화는 기원전 3세기 이후에 세형동검(細形銅劍) 문화와 활발한 접촉을 하였다. 즉 동해안 북부지역에서 출토된 청동유물은 대동강유역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청동기문화를 토대로 하여 독립된 정치형태로 발전한 것이 바로 동예이다. 동예는 한군현(漢郡縣)과도 빈번하게 접촉하였으며 특히 고구려와 언어·법속이 같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도 긴밀한 관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동예는 호신(虎神)을 숭배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단군신화의 곰숭배와 대비되는 것으로서 동예에 독특한 문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옥저(沃沮)는 동옥저(東沃沮)로도 불렸는데 남과 북으로 중심권이 나뉘어져 있어서 대개 남·북옥저로 이해되고 있다. 이들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되었는데 대개 동해안의 북쪽에서 싱카이호(興凱湖, 만.러 접경 우수리강 배수 호수)지역까지 걸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옥저의 명칭은 현도군(玄菟郡)이 옥저성에 설치되었다는 기록에서 처음 볼 수 있는데, 이는 요동에서 동해안으로 연결되는 교통로상에 옥저가 자리잡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지역은 고고학적 유물의 면에서는 동예와 같이 공열토기로 대표되는 동북지역 무문토기문화의 분포지역이다. 또한 이 지역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유물은 중국계 철기문화와 연결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평양 정백동에서 출토된 ‘夫租薉君’ 등의 인장은 옥저가 한군현에 의해 통제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옥저는 이후 고구려에 신속(臣屬)되어 정치적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각종 생산물을 수취당하는 집단예속민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고, 토지가 비옥하여 농사가 잘 되었다. 옥저는 고구려에 소금, 어물 등을 공납으로 바쳤다. 옥저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족의 한 갈래였으나, 풍속이 달랐고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그리고 가족이 죽으면 시체를 가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치하였다. 또, 목곽 입구에는 죽은 자의 양식으로 쌀을 담은 항아리를 매달아 놓기도 하였다.
민며느리제: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하는, 일종의 매매혼이다.
동예 역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농경, 어로 등 경제 생활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특산물로는 단궁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이 유명하였다. 동예에서는 매년 10월에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 그리고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각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다른 부족의 생활권을 침범하면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과하마(果下馬): 말을 타고 과일 나무 아래를 지날 수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으로, 키가 작은 말을뜻한다.
반어피(斑魚皮): 바다표범의 가죽

춘천 율문리에서 발굴된 부엌, 난방 시설이 그대로 나타난 철자형 집터


(사진 위)철자형과 (사진 아래)여자형 집터
최근 강원도 동해시와 강릉시를 중심으로 철(凸)자 모양과 여(呂)자 모양의 집터가 계속 발굴되어 동예의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밝혀지고 있다.
<출처: 백준기 해설 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