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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333100011
발해 유민이 고향을 버린 이유 백두산 화산 폭발 때문?
1000년의 수수께끼, 발해 멸망 이후 북방영토에서 한민족이 사라진 이유
강정민 변호사·(‘간도반환청구소송’ 저자)
▲ 중국이 지난 2004~2005년 발굴한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촌에 있는 발해 고분군 유적.
1. 지난호에 동북공정과 간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 마디로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 역사라는 것으로 한민족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926년 발해 멸망 이후 1870년 한민족의 간도 개척 전까지 근 1000년간 한민족의 활동무대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발해가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면 발해 멸망 이후에도 한민족이 계속 거주하며 생활했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전혀 그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사람은 땅에 붙어사는 법,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발해가 한민족의 나라라면 발해 멸망 이후에도 한민족이 토착세력으로서 이 지역에 계속 거주하며 명맥을 이어나가야 맞다. 그런데 역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2. 5경15부62주의 대제국으로서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가 멸망한 역사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 말부터 다음해 1월 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 유민들은 12세기 초까지 200여년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출처 브리태니커)
해동성국이었던 발해는 거란이 침입하자 불과 보름 만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698년 대조영이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운 지 230여년 만의 일이었다. 아무리 내부 분열이 심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단기간이다. 또 거란이 발해의 수도에 세웠다는 동단국은 2년 만에 요양으로 천도해 버린다. 어렵게 정복한 지역을 2년 만에 버리고 후퇴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부흥운동이 심해서였다고 하는데 내부 분열이 심해 보름도 안 돼 무너진 나라가 부흥운동이라니?
3.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라고 하기 위해서는 발해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에 한민족이 거주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후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홀한국이 요양으로 천도할 때 발해의 유민들을 깡그리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일까. 부흥운동이 강력했기 때문에 쫓기듯이 요양으로 가버린 홀한국이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브리태니커는 발해 유민들이 12세기 초까지 200여년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의문이다. 홀한국 천도로 외부 세력이 사라졌다면 토착세력에는 기회다. 다시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향을 버리고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고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붙어 사는 것이 정상적이다. 발해 유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고려로 망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4. 발해가 멸망하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이 지역은 여진족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1115년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고,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맹위를 떨쳤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 부분을 파고들어 발해 또한 여진족, 즉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대조영도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말갈족의 수장이었다고 한다. 발해 멸망 이후 이 지역이 한민족이 아닌 여진족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아골타가 신라의 후예이기 때문에 금나라도 결국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반론이 있다. 누르하치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로서 김(金)씨와 같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여진족과 한민족을 같은 민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집단’으로 정의된다. 여진족과 한민족은 언어가 다르며 생활양식도 다르다. 동족이라는 공동체의식도 없다. 설사 뿌리가 같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완전히 다른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인과 중동인, 아프리카인이 노아의 세 아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같은 뿌리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후금과 조선 사이의 끔찍했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생각해 보라.
5.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임을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고구려 또한 중국 역사로 치부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북공정은 고구려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상(商)인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발해가 여진족의 역사였던 것처럼 같은 지역에서 번성했던 고구려 역시 토착세력인 여진족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은 동북공정이 종국적으로 ‘고구려-발해-금-후금-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여진족의 역사라는 결론을 예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만약 만주족(여진족)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의 주인이 여진족이라면서 고구려-발해-금-후금-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한족(漢族)도 한민족(韓民族)도 아닌 바로 여진족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만주어를 쓰며 금과 후금을 세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독자세력화하여 고구려와 발해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온다는 것이다. 여진족이 요동과 만주, 간도, 연해주의 토착세력이라고 한다면 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6. 이에 우리는 1000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한다. 발해 멸망 이후 1870년 한민족의 간도 개척 이전까지 한민족이 북방 영토를 내버려둔 이유를 규명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백두산 화산폭발설이 각광받고 있다.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 원인을 규명하는 다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제작 방영되면서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고 1000년 동안 한민족이 북방 영토를 방치한 이유가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한·중·일 삼국 역사서 어디에도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심지어 10세기 초반 백두산이 폭발했다는 기록조차 전무하다. 그러면 백두산 화산폭발설은 허무맹랑한 것일까. 이에 대해 백두산 화산폭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록 인간의 기록은 없을지라도 명확한 자연의 기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백두산이 폭발하였다면 자연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AD 79년 이탈리아 폼페이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일대 도시들이 화산재에 매몰되어 버렸다. 로마가 번성하던 시절이었지만 로마의 역사서에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연은 베수비오 화산이 덮어버린 도시들을 온전히 품고 있었고 1700여년 뒤 그 사실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7. 화산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폭발은 930~946년에 발생했으며 화산폭발지수 7.4로 지난 2000년간 지상 최대의 화산폭발로 추정되고 있다. 화산폭발지수(火山爆發指数·Volcanic Explosivity Index·VEI)는 1982년 미국지질연구소의 크리스토퍼 뉴홀(Christopher G. Newhall)과 하와이대학의 스티븐 셀프(Stephen Self)가 제안한 지수로 화산의 폭발력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이것은 화산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폭발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로서 구분의 기준은 화산 분출물의 양이다. 0부터 8까지 등급이 매겨지는데, 지수가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화산 분출물의 양은 10배가 된다.
1980년 5월 18일 미국 오리건주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은 화산폭발지수 5에 해당한다. 화산 폭발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세인트헬렌스 주변 지역은 34년이 지난 현재 겨우 잡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백두산 화산폭발지수가 7.4라는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이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보다 400배 더 많은 화산 분출물을 뿜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폼페이시를 6m 두께의 화산재로 덮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도 화산폭발지수 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010년 4월 유럽의 항공대란을 초래했던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야틀라이외쿠틀 화산 폭발은 화산폭발지수 4의 소규모 화산 폭발이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밝혀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화산 폭발은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로 알려져 있었다. 이 폭발도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산재가 지구 전체를 떠돌아 유럽에 미니 빙하기와 대기근을 초래했다고 하는데 화산폭발지수 7.1의 규모였다.
8. 백두산 화산이 10세기경 거대 폭발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처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1992년의 일로 불과 20여년 전이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백두산 화산재가 발단이 되어 밝혀졌다. 1981년 일본 도쿄도립대학의 마치다 히로시(町田洋) 교수에 의하여 백두산 화산재가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그는 홋카이도 남쪽 항구도시인 도마코마이에서 일본의 다른 화산재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백두산 화산재를 발견하였다. 백두산에서 홋카이도까지는 1000㎞가 넘는다. 백두산 화산재가 겨울철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멀리멀리 일본까지 날아간 것이다. 1000㎞ 떨어진 일본에 화산재가 2㎝ 이상 피복되었다는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화산재는 화산마다 구성 성분이 다르다고 한다. 일본은 1970년경부터 동해 해저를 시추해 왔기 때문에 해양학 연구자들은 해저주상시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화산재와 동일한 성분의 화산재가 주상 시료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본에서 한반도 북부 쪽으로 갈수록 점점 그 두께와 입자 크기가 증가했다. 추적 결과 그 발원지는 바로 백두산이었다.
9.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를 규명하기 위해 과학적인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본 나고야대학의 나카무라 교수팀이 백두산에서 6개의 탄화목을 채집하여 측정한 결과 폭발 연대가 934±6년, 936+8/-6년이었다. 특히 이 탄화목들은 겨울철에 매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발견되었다. 국분사 화산재 퇴적물 하층에서 국분사 지진 재해 수리에 사용된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문서에 의하면 기와층의 연대가 870년경이었다. 또 화산재 퇴적물 상부에서 불 탄 기둥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국분사의 칠층탑이 소실된 934년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재는 870년부터 934년 사이에 퇴적된 것이 된다.
10. 화산이 폭발하게 되면 1차적으로 용암류, 화산재의 낙하 등 화성쇄설 활동, 화쇄류, 측방 폭발 그리고 화산가스의 분출 등 재해가 발생하고, 2차적으로 암설류, 이류, 산사태나 암설 아발란체, 홍수, 화재, 쓰나미, 대기권의 전 세계적인 냉각현상을 유발하게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다.
1983년 이후 하와이제도의 킬라웨어 화산은 현무암질 용암류를 분출하였는데 2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해안 고속도로가 거의 단절되었다. 2002년 1월 콩고 니라공고 화산에서 괴상용암류가 분화하였는데 고마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용암이 시를 관통해 30만명이 대피했다. 198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갈룽궁 화산은 68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최근에는 2014년 9월 27일 일본 온타케산(御嶽山) 화산 분화로 수십 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바 있다.
화산 폭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화산쇄설류라고 한다. 이것은 화산재 폭풍 같은 것으로 시속 160∼240㎞의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주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온도가 800도에 달하기 때문에 이것에 닿는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1902년 5월 8일 아침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에서 뜨겁고 끓어 오르는 듯한 화산재와 증기, 가스들이 굉음을 내며 프레산 아래의 성 피에르 마을을 덮쳤고 3만여명의 인명 피해를 남겼다. 두 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은 감옥에 갇힌 죄수였고 다른 한 명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간 구두수선공이었는데 모두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32분 세인트헬렌스 화산은 대략 직경 2.3㎞의 거대한 산사태와 암설류를 유발하는 규모 5.1의 지진을 기록했고 직경 2m의 나무들이 화산으로부터 24㎞ 거리까지 베어져 날아갔다. 폭발의 영향은 근원지로부터 거의 30㎞까지 느껴졌고 폭발은 반경 600㎢를 황폐화시켰다. 화산폭발지수 5의 규모였다. 2014년 상반기에 개봉 상영된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면 흑갈색 화산재 폭풍이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영상이 등장한다. 또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지에 가보면 이 화쇄류에 의해 순식간에 희생되어 버린 희생자들의 화석을 볼 수 있다.
11. 특히 백두산 화산 폭발은 겨울철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1000㎞나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간 것은 편서풍이 부는 겨울에나 가능한 일이다. 탄화목들의 상태 또한 백두산 화산 폭발이 겨울에 일어났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백두산이 겨울에 폭발했다는 것은 재앙의 정도가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성쇄설류에 의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1985년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이 분화하는 동안 만년설이 녹을 때 발생한 거대한 이류가 발생하였다. 물이 경사면 위에서 화산재와 결합하여 젖은 슬러리를 형성하였고 중력에 의하여 아래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화산이류는 강 주변 마을을 묻어 버렸고 2만3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1990년 초 알래스카 리다우트 화산에서의 화성쇄설류가 드리프트 빙하를 가로질러 이동하였는데 눈과 얼음을 녹여 엄청난 양의 혼합물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백두산 화산 폭발 또한 겨울에 일어났기 때문에 눈과 얼음을 녹여 엄청난 양의 라하르를 만들어 냈고 이것이 인근 지역에 큰 재앙을 초래했을 것이다. 뜨거운 화쇄류가 산 정상에 있는 수억톤의 눈을 녹여 화산 이류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이것이 마치 해일처럼 산사면을 돌진해 내려갔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 쪽으로 쏟아진 화산 이류는 수계를 따라 형성된 촌락을 차례차례 매몰시키며 하류에 대홍수를 일으켰을 것이다.
12. 조선은 목극등의 명에 따라 백두산정계비터에서 목극등이 지정한 물줄기를 따라 석퇴와 토퇴, 목퇴를 설치하였다. 이 경계선은 대각봉 쪽으로 이어지는데 대각봉계선 해발 2100m 지점에 조면암으로 된 자연갱도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길이가 72m 정도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토문이라고 한다. 조면암은 화산 분출 시에 형성되는 화성암의 하나로서 주로 알칼리성 용암이 분출될 때 형성되는 비현정질의 화산암이다.
간도파출소장 사이토 스에지로는 1907년 10월 18일 이토 히로부미에게 ‘토문강 답사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간도영유권 발췌문서’에 수록되어 있다.
석퇴의 끝 지점에 양쪽 높이 약 100m의 단애가 있는데 소위 토문이라 칭하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하천의 형상을 따라 울창한 대삼림 속으로 달려 약 4리를 더 가니 방향을 북으로 돌린다.
토문에서 약 3리 정도는 큰 돌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조약돌천이며 거기서부터는 모래천이 된다.…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나서는 약 18리를 지나 낭낭고 부근에 이르러 다시 방향을 서로 돌려 소사하를 거쳐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토문은 병풍처럼 드리워진 검은 절벽 지형이다. 석벽이 아니라 토벽이기 때문에 토문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토문강을 지나 오도백하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토문강을 흑석하라고 부른다.
13.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 폭발은 한 차례의 폭발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9세기에도 폭발이 있었고 10세기 대폭발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기가 조금씩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9세기부터 소규모 폭발 등 대폭발의 조짐이 있었다면 발해 국민들의 민심 이반이 초래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다음호에는 10세기 백두산 화산 폭발이 간도의 영유권과 관련하여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출처 : 주간조선 http://week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C02&nNewsNumb=002335100015
대폭발 이어 소규모 폭발 “신의 분노” 발해 민심 급속 이반
백두산 화산 폭발이 동북아시아 역사에 미친 영향
강정민 변호사(‘간도반환청구소송’ 저자)
1. 926년 발해 멸망 이후 북방영토는 더 이상 한민족의 터전이 아니었다. 고려의 북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는 천리장성은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를 잇는 선이었고 조선의 북방한계선은 최대 압록강에서 두만강을 잇는 선에 불과했다. 한민족이 건국한 고조선, 고구려, 발해는 요하 주변과 요동·만주·연해주를 아우르는 광활한 영토를 가진 국가였다. 그런데 왜 고려와 조선은 이처럼 광활한 영토를 버리고 한반도에 칩거한 것일까.
한민족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방영토를 다시 밟은 것은 1870년경이었다.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 기근이 발생하자 먹고살 길을 찾아 비옥한 북방영토를 찾아 나선 것이었다. 926년부터 1870년까지 무려 950여년 동안 한민족은 왜 북방영토를 버려둔 것일까.
지난호에 우리는 930년을 전후하여 폭발한 것으로 밝혀진 백두산 화산 폭발에서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화산폭발지수 7.4에 이르는, 근 2000년간 지상 최대의 화산 폭발로 알려진 백두산 화산 폭발은 동북아시아의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930년경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해서는 인간의 기록은 없고 오직 자연의 기록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기록으로부터 백두산 화산 폭발이 동북아시아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지 추론해내야 한다. 추론은 끊임없는 합리적 의심과 해소 과정을 거쳐야 하며 무엇보다 객관적 사실에 기초해야 한다.
2. 우선 범위를 최대한 좁혀 930년경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생각해 보자.
거란은 925년 12월 말 발해를 침입했다. 거란이 이때 발해를 침입한 것으로 보아 아직 백두산 화산 폭발이 있기 전일 것이다. 보름 만에 발해를 정복한 거란은 홀한성에 동단국(東丹國)을 건국했지만 2년 만인 928년 발해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동평(지금의 요양)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때 거란이 동단국의 수도를 천도한 것으로 보아 백두산 화산 폭발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아직은 폭발 전일 것이다. 만일 이미 백두산 화산이 폭발했다면 모두 몰살당하여 이주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거란의 우려대로 백두산은 이후 대폭발을 일으켰을 것이다. 화산폭발지수 7.4에 달하는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반경 200여㎞까지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백두산을 둘러싸고 포진해 있던 발해 5경은 거의 궤멸되고 말았을 것이다. 백두산으로부터 북쪽으로 250㎞ 떨어진 상경 용천부는 어느 정도 무사했겠지만 이를 제외한 동경 용원부, 서경 압록부, 남경 남해부, 중경 현덕부는 심각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백두산 화산 폭발은 겨울철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바, 백두산 정상에서 눈과 얼음이 마그마와 섞여 엄청난 양의 걸쭉한 라하르를 형성하였을 것이고 이것이 압록강·두만강·송화강 물줄기를 타고 내려와 엄청난 홍수를 일으켰을 것이다. 강줄기를 따라 형성된 발해의 촌락들은 이 홍수로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또 백두산에서 쏟아져 내린 화산재 등이 인근 지역을 수미터 두께로 덮어 버렸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시속 160㎞ 이상의 속도로 질주하는 화산폭풍이 주변의 모든 생명체를 말살해 버렸을 것이 분명하다.
백두산 천지는 화산 폭발로 형성된 칼데라호수이다. 화산 폭발 전 백두산은 해발 3500m의 뾰족한 산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산 폭발로 산정 부분이 날아가 버리고 함몰되어 지금의 천지가 형성된 것이다. 천지 한쪽이 무너져 장백폭포를 형성하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마그마가 흘러내린 가장 큰 골짜기 부분이다. 거대한 마그마 줄기가 협곡을 만들며 흘러내려 갔을 것이다. 이를 달문이라 부르는데 송화강의 원류가 된다. 당시 백두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마그마 또는 라하르가 여러 골짜기를 만들어 냈다. 토문 또한 이러한 골짜기 중의 하나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은 단 한 번의 폭발이 아니었다. 대폭발 이전부터 소규모 폭발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으며 대폭발 이후에도 크고 작은 폭발이 계속 이어졌다.
당시에는 화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다. 발해 사람들은 백두산 화산 활동이 신의 노여움 때문이며 발해 왕조의 운이 다하였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민심은 급속도로 이반되고 거란은 손쉽게 발해를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9세기에 시작된 백두산의 화산 전조활동은 발해의 민심을 이반시켰고 발해의 쇠퇴를 가져왔다. 거란이 보름 만에 발해 국왕의 항복을 받아낸 비결이다. 그리고 백두산 화산 폭발로 발해의 근간이 파괴되고 말았으며 발해는 역사 저편으로 사라진 것이다.
3. 발해 멸망 이후 발해에서 고려로 망명한 사람들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를 고려에서는 내투(來投)라고 하였는데 많을 때는 한 번에 수만 명의 사람이 넘어오기도 하였다. 우리는 흔히 화산이 폭발하고 나면 일대가 비옥해져 농사짓기에 좋고 더 좋은 환경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화산재에 피복된 땅이 회복되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1991년 필리핀 피나투보 화산이 폭발했을 때 미국은 화산재 때문에 클러크 공군 기지를 포기하고 떠나야만 했다. 2000년 일본의 홋카이도 우수산이 폭발했을 때 산록에 부석과 화산재가 피복해 일대가 마치 사막과 같이 되고 말았다. 강하 화산재는 나무를 탄화시키지는 않지만 고사시키기에 충분한 열을 가지고 있다.
풍화되지 않은 화산재는 산성도가 강해 농경지나 목초지로 이용할 수 없고 부석은 식물의 뿌리가 통과하기 어렵다. 화산재가 비옥한 토양이 되는 것은 하나의 화산 분화가 종식된 뒤 적어도 수백 년이 지나 화산 유리가 풍화되고 흡수되어 완전한 토양이 된 이후의 일이다. 화산재가 피복한 땅은 파종할 수 없고 따라서 수확할 수도 없다. 화산재가 피복된 지역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사막이고 불모지일 뿐이다.
1707년 후지산 분화가 있었다. 겨우 두께 1㎝ 정도의 화산재에 불과했지만 넓은 지역의 논과 밭, 가옥이 매몰되고 파괴되어 새까만 화산재의 사막이 되고 말았다. 오랜 기간 논과 밭이 복구되지 못했고 피해를 입은 주변 마을의 인구가 급감하였다고 한다.
발해 주민들의 고려로의 내투 현황에 대해 살펴보자. 거란의 침공 이전인 925년 가을부터 겨울에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 권1 태조세가, 태조 을유 8년의 내용이다.
‘8년 가을 9월 병신일 발해 장군 신덕 등 500명 내투하다.
(八年秋九月丙申渤海將軍申德等五白人來校)
경자일에 발해 예부경 대화균, 균노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 1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庚子渤海禮部卿大和鈞均老司政大元鈞工部卿大福謨左右衛將軍大審理等率民一白戶來附)
12월 무자일에 발해 좌수위소장 모두간, 검교개, 국남, 박어 등이 1000호의 백성을 이끌고 내부하다.
(十二月戊子渤海左首衛小將冒豆干檢校開國男朴漁等率民一千戶來附)’
발해가 망한 926년 이후에도 고려 태조 10년(927년), 11년, 12년, 17년, 21년, 경종 4년(979년)까지 발해 유민들이 많게는 수만 명씩 이주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와 동국통감을 종합해 보면 50년 동안 내투한 발해 유민이 10여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기록된 것만 이 정도니 실제로는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발해에서 고려로 내투한 발해인의 약 75%가 고려 태조연간(921~938)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시기에 백두산 화산 활동이 가장 왕성했을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하여 인근 지역이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불모지로 변하고 말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발해의 유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한반도로 남하한 이유이다. 이로 인하여 발해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만 것이다.
4. 이제 범위를 넓혀 백두산 대폭발 이후의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백두산 화산 폭발이 이 지역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로 인하여 백두산 인근 지역은 불모지로 변하였으며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버렸다. 게다가 백두산은 살아 있는 화산이었다. 대폭발 이후에도 꾸준히 소규모 폭발을 되풀이했다. 백두산은 거의 100년에 한 번꼴로 그 존재감을 과시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3년 1403년 1월 27일 - 갑산의 영괴, 이라 등지에 반쯤 타고 마른 재가 비처럼 내렸다. 땅에 쌓인 두께는 한 촌가량 되었고 오 일이 지나서 그쳤다.
태종 3년 1403년 3월 22일 - 동북면에 재가 비처럼 내렸다.
태종 5년 1405년 2월 23일 - 잿빛의 비가 내렸다.
선조 30년 1597년 10월 2일 - 함경도 관찰사 송언신이 서장을 올렸다. <지난 8월 26일 진시에 삼수군 지방에 지진이 일어나 잠시 후에 그쳤고, 27일 미시에 또 지진이 일어나 성의 두 군데가 무너지고 고을 건너편에 있는 시루바위의 반쪽이 무너졌으며, 그 바위 아래 삼수동 중천의 물빛이 흰색으로 변했다가 28일에는 다시 황색으로 변했고, 인차외보 동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붉은빛의 흙탕물이 솟아오르다가 며칠 만에 그쳤으며, 8월 26일 진시에 소농보 건너편 북쪽에 있는 덕덕자이천절벽의 사람이 발을 붙일 수 없는 곳에서 두 차례나 포를 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고 크기가 몇 아름씩 되는 바위가 연기를 따라 터져나와 종적도 없이 큰 산을 넘어갔다. 27일 유시에는 지진이 일어나 그 절벽이 다시 무너졌고, 해시와 자시에도 지진이 있었다.>
현종 9년 1668년 6월 2일 - 함경도 경성부에 잿비가 내렸다. 같은 날 부령에도 잿비가 내렸다.
현종 14년 1673년 5월 20일 - 함경도 명천 지역에 재가 비처럼 내렸다.
숙종 28년 1702년 6월 3일 - 함경도 부령부에 이달 14일 오시에 하늘과 땅이 갑자기 캄캄해졌는데, 때로 혹 누른빛이 돌기도 하면서 연기와 불꽃 같은 것이 일어나는 듯하였고, 비릿한 냄새가 방에 꽉찬 것 같기도 하였다. 큰 화로에 들어앉아 있는 듯하여 몹시 무더운 기운에 사람들이 견딜 수가 없었다. 4경이 지나서야 사라졌다. 아침에 가 보니 온 들판에 재가 내려 쌓여 있는데, 마치 조개껍데기를 태워놓은 것 같았다. 경성부에서는 같은 날 좀 늦은 때에 연기와 안개 같은 기운이 서북쪽에서 갑자기 밀려오면서 하늘과 땅이 캄캄해지고 비릿한 노린내가 사람들의 옷에 스며들었으며 몹시 무더운 기운은 큰 화로 속에 앉아 있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 모두 옷을 벗어던졌는데 땀이 흘러 끈적끈적하였다. 흩날리던 재는 마치 눈과도 같이 산지사방에 떨어졌는데 그 높이가 한 치가량 되었다. 걷어보니 마치 나무껍질이 타다 남은 것과 같았다. 강변의 여러 고을도 모두 그러하였는데 간혹 더 심한 곳이 있었다.
경종 4년 1724년 5월 23일 - 경기도 용인 등 5개 고을과 충청도 청안, 평안도 의주에 우박이 쏟아졌다. 함경도 홍원현에서는 땅불이 여기저기에서 나왔는데 10여일 동안 꺼지지 않았으며 흙이 꺼멓게 되고 풀이 말라들었으며 연기가 하늘에 자욱하였다.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誌略) 1900년 봄 - 광서(光緖) 26년 봄 사하연에서 말을 타고 대저권령을 지나 돈화현사무소로 돌아오던 중 1경이 지나서 달빛이 어두워지고 갑자기 고개의 서쪽 절벽을 따라 일어난 폭풍에 산이 울리고 골짜기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파도처럼 울렸다. 그 여세가 만 마리의 말이 질주하는 것과 같았다. 놀라 두려워하는 사이 순식간에 하늘이 피와 같이 붉게 되고 수많은 불덩어리가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마치 별이 움직이는 것과 같았다. 말이 놀라 소름이 돋고 흘린 땀이 물을 부어 놓은 것과 같았다. 약 반 시간이 지나서 바람이 약간 안정되었다. 말을 몰아 고개 아래에 도착하니 마치 불덩어리들이 고개를 따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남쪽으로 달려왔는데 그 소리가 백 리 밖에서도 들렸다. 4경이 지나서야 현사무소에 도착하였다.
장백산강강지략(長白山江崗誌略) 1903년 - 길 안내인 서영순이 말하기를 광서 29년 5월 동생 복순, 옥량, 유복 등과 같이 저석파 아래 두파구에서… 여섯 사람이 호수 주위에 눕거나 앉아 있는데, 깊은 밤이 되자 찬바람이 뼈를 에고 배가 고파 잠을 이룰 수 없어 잡곡을 몽땅 먹어버렸다. 시간이 조금 지나 하늘이 약간 밝아지고 안개는 여전하였다.… 별안간 안개가 치고 비가 내리자 사람들이 겁이 나서 함께 울고 있었다. 밤이 더 깊어졌을 때 호수 한가운데 서너 개의 별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이 보였다. 별안간 폭발하는 소리가 나고 공중에서 차바퀴만큼 큰 불덩어리가 떨어지고 수면 위에서 수많은 불꽃이 낮처럼 환하게 밝게 보였다. 포성이 벼락처럼 울리고 파도가 하늘 높이로 크게 일어났다. 여섯 사람이 떨며 움직이지 못하였다.… 복순이 머리를 맞아 피가 나왔고 젖은 옷으로 머리를 동여매었다. 그리고 2시간쯤 지나 동쪽에 햇빛이 생겼다. 구름이 걷히고 바람도 잔잔해지고 안개는 산봉우리에만 걸려 있었다.… 서영순의 말이 진실이고, 그래서 여기에 적는다.’
장백산강강지략은 천지조수(天池釣叟) 유건봉이 기록한 것이다. 천지조수란 천지에서 낚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기록에 의하면 백두산의 가장 최근 화산 활동은 20세기 초에 있었던 것이 된다. 이처럼 백두산은 거의 백 년에 한 번꼴로 화산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백두산 일대가 사람들에게 신성하고 무서운 지역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람들은 신의 노여움을 간직한 백두산을 기피했을 것이다.(당시 사람들은 화산에 대한 과학적 지식이 전무했다는 점, 우리가 백두산 대폭발 사실을 인식한 것 또한 1980년 이후의 일에 불과하다는 점을 상기하라.)
5. 10세기 초 백두산 화산 대폭발 이후 백두산 반경 200㎞ 이내 지역은 황무지가 되고 말았고 이 지역이 다시 비옥해지는 데에는 수백 년이 필요했다. 1980년에 화산폭발지수 5의 규모로 폭발한 미국의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 지역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불모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화산폭발지수 7.4의 규모였던 백두산 화산 폭발 지역이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 수백 년의 세월이 필요하였으리라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이러한 사실에 주목해보면 백두산 대폭발 이후 이 지역의 역사가 어떠했을지 충분히 상상해 볼 수 있다.
수백 번의 봄·여름·가을·겨울이 지나면서 백두산 일대가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잡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하고, 또다시 수많은 세월이 지나 어린 나무들이 자라나고, 또 많은 세월이 흘러 농사짓기에 적합한 땅이 된다. 드넓은 만주평야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존재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 와중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 지역을 버리고 주변으로 흩어졌을 것이다. 일부는 북쪽으로 일부는 서쪽으로 일부는 남쪽으로…. 편서풍이 강하게 부는 겨울이었기 때문에 백두산 동쪽으로는 화산재가 두껍게 쌓여 갈 만한 곳이 없었을 것이다. 자연스럽게 백두산 일대는 무인공광지역이 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잡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하면서 유목민들이 가장 먼저 유입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바로 여진족이다. 아직 농사를 짓기에는 부적합한 상황이다. 고려와 조선 초기 백두산 일대에 여진족이 활동한 이유이다. 여진족의 아골타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였고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이 기간 동안 한민족은 고려와 조선왕조를 거치고 있었는데 북방영토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익의 성호사설 제2권의 내용이다.
‘함경도(咸鏡道)는 모두 말갈(靺鞨)의 땅이었다. 지금에 와서 경계를 정한 지가 오래되었고 우리 영토 안에 있는 폐사군(廢四郡)도 가끔 외적의 침범이 있어서 모두 이민을 시키고 비워두었는데 하필이면 다시 쓸데없는 땅을 가지고 외국과 분쟁을 일으킬 것이 무엇이냐. 지금의 국토는 금구(金甌)와 같이 완전하게 되었으니 손상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1712년 백두산정계비 건립과 관련된 논평이다. 성호 이익 선생이 왜 이런 글을 썼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지만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정약용의 다산시문집 제15권 강계고서(疆界考序)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다.
‘조선조가 일어나서는 함경의 남쪽과 마천령의 북쪽을 차츰 우리의 판도로 끌어들였고, 세종 때에는 두만강 남쪽을 모두 개척하여 육진을 설치하였으며, 선조 때에는 다시 삼봉평에 무산부를 설치하여 두만강을 경계로 국경을 삼았다. 두만강 북쪽은 곧 옛 숙신(肅愼)의 땅으로서 삼한 이래로 우리의 소유가 아니었다.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장백산에서 발원하고 장백산의 남맥이 뻗쳐 우리나라가 되었는데 봉우리가 연하고 산마루가 겹겹이 솟아 경계가 분명치 않으므로 강희 만년에 오라총관 목극등이 명을 받들어 정계비를 세우니 드디어 두 강의 경계가 분명해졌다. 지금 저들의 땅과 우리 땅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곳을 상고해 보면, 연하 지방에 군·현·보·위가 있지는 않으나 두만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영고탑부내 혼춘 와이객이고 압록강 북쪽은 바로 저들의 길림부내 책외 번지로서 흥경과 서로 마주보고 있다.’
정약용은 두만강 북쪽을 숙신의 땅으로 정의하고 삼한 이래로 한민족의 땅이 아니었다고 선언하고 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생각해 볼 때 정말 납득하기 어려운 내용이다. 성호 이익 선생이나 다산 정약용 선생 모두 조선의 실학자였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을 가진 선비들인 것이다. 백두산 화산 폭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이들이 위와 같은 글을 쓴 것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6. 필자가 간도반환청구소송을 구상할 당시 두 가지 큰 난관이 있었다. 하나는 백두산정계비의 토문이 두만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는 점이었고, 다른 하나는 발해 멸망 이후 한민족이 북방영토를 더 이상 경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조선과 청 모두 백두산 일대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양국 모두 토문과 두만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경이라는 중차대한 문제에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해답을 찾아 헤매던 중 우연히 백두산 화산 폭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 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부산대 윤성효 교수의 ‘백두산 대폭발의 날’과 소원주 박사의 ‘백두산 대폭발의 비밀’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이분들 또한 필자와 같은 생각이었다. 자연과학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펼쳐지는 주장들은 명쾌했고 천군만마를 얻은 듯했다. 10세기 초 백두산 화산 폭발은 역사적 사실이다. 비록 인간의 기록은 없지만 위대한 자연의 기록은 명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