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어린이 여러분 신부님 보고 싶었지요?
신부님은 우리 친구들 정말로 많이 보고 싶었어요.
오늘은 강론전에 옆에 친구들하고 게임하나 할께요.
먼저 옆에 친구들하고 두명이서 가위바위보해요.
이긴 사람이 거북이, 진 사람은 토끼예요.
자 그러면 서로 손을 잡아요.
신부님이 지금부터 토끼와 거북이 이야기하면 서로 손등을 때리는 거예요.
이긴사람은 거북이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방의 손을 때리고,
진 사람은 토끼라는 말을 들으면 상대방의 손을 때리면 됩니다.
옛날 아주 오랜 옛날에 토끼와 거북이가 살았습니다.
하루는 이 토끼와 거북이가 경주를 하기로 했습니다.
토끼와 거북이는 출발선에 섰습니다.
그런데 토끼가 출발신호가 나기전에 먼저 뛰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출발해야했습니다. 토끼는 껑충껑충 뛰었어요.
그리고 토끼가 뛰는 모습을 보고, 토끼 친구와 친척들이 응원하기 시작했어요.
토끼 친구와 친척들은 참 많았어요.
토끼 삼촌, 토끼 부모님, 토끼 이모, 그리고 토끼 학교 친구들까지 와서 응원을 했어요. 토끼 이겨라! 토끼 이겨라! 토끼 이겨라!
이런 모습을 보고 거북이 친구들도 응원하기 시작했어요.
거북이 친구는 참 많았어요.
먼저 사촌인 자라가 왔어요.
그리고 이어서 이모인 남생이가 왔어요.
이 거북이 친구들도 거북이를 응원했어요.
토끼 져라! 토끼 져라! 토끼 져라!
그럼 게임은 여기서 그만할께요. 재미있었어요?
다음에 다른 게임해요. 알았지요?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아저씨가 나와요.
그런데 이 아저씨는 정말 불쌍해요.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너무 많이 맞아서,
죽어가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피해가요.
왜냐하면 이 아저씨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너무 더럽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예수님이 강도를 만나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님이 강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슬프게 울고 있으면 어떻게 하겠어요?
예수님 불쌍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우리 친구들이 만나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예수님이라고 생각하고 도와주세요.
그리고 그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요.
우리 친구들 신부님과 오늘 약속하나 해요
신부님이 물어보는 말에 항상 예라고 대답하는 겁니다.
알았지요?
오늘 하루만이라도 신부님과 대화하면서 네라고 대답하세요.
오늘 날씨가 많이 흐리지요?
오늘 미사 하지 말고 신부님과 함께 수영장가서 놀고 싶지요?
지금 미사 안하고 놀러 가고 싶지요?
오늘 집에 돌아가서 부모님과 함께 저녁기도 할꺼지요?
학생
찬미예수님
한주간 잘 지내셨습니까?
얼마전에 방학했지요?
방학을 하면 무얼할거지요?
놀러갈건가요?
아니면 그동안 밀린 공부 할건가요?
아니면 오랜만에 친구들이랑 영화보고 피시방 갈건가요?
저는 이맘때쯤이면 혼자 여행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가끔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기차를 타려고 하는데, 어떤 사람이 다가 왔습니다.
이유는 밥을 못 먹어서 배가 고파서 그러니까,
밥 먹도록 돈을 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무슨 밥을 못먹어서 그럴까봐!
술 먹어려고 그러는거 아니야!
왜냐하면 그 사람은 옷이 꾀죄죄했고,
씻지도 못해서 몸에서 냄새도 나는 것 같았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때 나도 돈이 없어서 못준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그리고는 아무런 생각 없이 기차를 타려고 플랫폼으로 들어갔어요.
그곳에서 가게에 들어가서 우동 한그릇을 시켜서 맛있게 먹고 있는데,
그런데 바로 그때 그 옷이 꾀죄죄한 그 사람도 기차를 타려고 플랫폼으로
들어온 거였어요.
그리고는 그곳에서도 똑같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어떤 아저씨가 그 사람이 불쌍해 보였는지 돈을 주었어요.
그런데 정말로 그 사람은
그 돈으로 기차플랫폼에 있는 가게에
바로 제가 우동을 먹고 있는
바로 그곳에 들어와서 김밥과 우동을 먹고 있었어요.
그리고는 바로 그곳에서 저를 봤어요.
그 사람은 아무말도 하지 않고, 그냥 웃었지만,
그때 저는 정말 부끄러웠어요.
그리고 얼마 뒤에야 알게 되었어요.
수도원에 있는 수사님들이 일주일동안 무전여행을 간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저는 수도원 수사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라고 말하면 어쩌면 도와주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꾀죄죄한 그 사람의 외적의 모습을 보고
제 마음대로 판단하고, 그리고 양심을 속이는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기억에 남는 거는 마음이 많이 아팠기 때문이겠지요!
우리 주변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가 판단을 하고,
그런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맞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제가 만난 그 수사님이었다면,
아니 만약에 우리에게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이
예수님이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오늘 복음에 보면 불쌍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지나쳐간 사람도 있지만,
도움을 준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저처럼 다른 사람이 도움을 달라는데 도와주지 않고,
그로 인해 자신을 속이겠습니까?
아니면 오늘 복음에 나온 사람과 같은 사람이 되겠습니까?
청년
찬미예수님
한주간 잘 지내셨어요?
태풍 온다카던데,
혹시 집 수리 해야하는지, 비는 안 새는지 자세히 살펴보세요.
태풍이 오면 저는 조카가 생각납니다.
왜냐하면요! 조카는 태풍이 오면 웁니다.
왜 우냐고요? 슬퍼서 웁니다.
TV에 태풍이 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이 다치는 모습,
그리고 슬퍼서 우는 모습,
집을 잃어서 괴로워 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슬픔을 같이 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카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나도 어릴때 그렇게 했을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도 저도 어릴때 TV를 보면서 울었던 기억이 있을까?
암만 생각해봐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TV보면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참 많이 납니다.
어릴때 저녁 9:50분이 되면 하던 전설의 고향,
무서워서 이불을 폭 뒤집어 쓰고, 눈만 빼곰히 내놓고
전설의 고향 무섭다고 하면서 끝까지 봤던 기억이 납니다.
한번은 얼마나 무서웠던지
밤에 쉬하러 화장실에 가야하는데,
못 나갔습니다.
왜냐하면 무서워서요.
그래서 자고 있는 어머니를 깨워서 갔습니다.
어쩔때는 화장실은 가고 싶은데,
귀신이 나올것만 같아서 무서워서 그냥 이불에 지도를 그린 적도 있습니다.
매번 그럴때마다 어머니는 전설의 고향 보지 말라고,
그거 보면 매번 화장실도 못가면서 왜 보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전설의 고향 할 때마다 봤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웠던 전설의 고향이 얼마 전에 재방송을 해서 봤는데,
왜 그리 시시한지, 왜 그리 재미없던지,
에이 내가 왜 이런 것을 봤을까? 라고 생각했던 기억인 납니다.
우리는 커 가면서 어릴 때의 순수함을 잃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게 되고,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알게 되면서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특히나 커가면서 무뎌진다는 것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의 아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디어집니다.
나의 고통은 잃어버리지 않지만,
타인에 대한 슬픔의 감정은 서서히 사라져갑니다.
때로는 눈물도 잃어버리고 기쁨도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고통, 아픔, 기쁨, 즐거움에 익숙한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것이라고 치부하고,
나는 어린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잃어버립니다.
그러한 잃어버리는 것 중에 가장 큰 것은 바로 친구입니다.
어린이 되어가면서 우리에게는 친한 친구가 점점 사라집니다.
내가 편한 사람은 나에게 친구가 되고,
나를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하는 사람은 원수가 됩니다.
어릴때는 싸우더라도 금방 화해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면 화해를 잘 하지도 않을뿐더러
오히려 원수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친구들과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야 돼요!”
“친구하고 싸우면 나쁜 사람이예요!”
어린이들은 싸우더라도 금방화해하고 다시 친하게 지내는데도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어떤 이가 예수님께 물어봅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가 한번 더 물어봅니다.
누가 내 이웃입니까?
그 사람이 원한 대답은 아마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너의 옆에 있는 바로 그 사람이다.”
“너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다.”
아니면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
마치 어른들이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이웃입니다라는 대답을 원하듯이
바로 그러한 대답을 바리사이는 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이웃이 누구인지 말씀해주시지 않습니다.
먼저 그에게 이웃이 되어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의 말씀은 동문 서답같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해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말로 대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말씀은
어린이와 같은 마음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만약에 어른들이었다면 누가 너의 이웃인지가 중요했을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사람은 이웃이고, 친구이고,
내가 원하지 않는 사람은 나의 원수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너의 이웃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먼저 네가 그런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잊고 지내던 어린이의 순수함을 다시 회복한다면 말입니다.
다가오는 한주간 동안 우리 함께 생각해봅시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누구라고 정하고 있는거는 아닌지,
어린이와 같은 순수함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지
아니면 다른 것을 요구하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