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어린이날
이 효 선
일요일인데도, 아빠는 회사 일이 바쁘다면서 일찍 나가고, 엄마는 밀린 빨래
를 하느라고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아이들이 손꼽아 기다린 어린이날이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아빠나 엄마가 무료 개방하는 덕수궁이나 창경원에쯤 데리고 가줄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빠는 회사에 가고, 엄마는 빨래를 하고·…· 놀러가기는 싹 틀렸다.
어젯밤에 아빠가 어린이날 선물이라고 사다준 과자랑, 사탕도 먹고 싶지 않았다. 먹는댔자 맛이 없을 것만 같았다.
시무룩히 앉아서 유리창 밖을 내다보니, 개나리의 연두빛 새 잎이 눈부신 햇살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인다.
“우리끼리만 갈까?”
순이가 좋은 꾀를 낸 듯이 조그만 입을 오무리며 말했다.
“우리끼리 어떻게 가?”
눈이 큰 용아가 겁 먹은 눈으로 말했다.
“응, 우리끼리 가. 과자랑 사탕이랑 가지고 가, 응?”
막내동이 숙이가 조르듯이 말했다.
“여기서 창경원이 어다라고. ”
“버스타고 가면 되지. 난 부산이라도 가겠다.”
순이가 용아를 톡 쏘았다.
“차비가 있어야지.”
“엄마더러 달래지.”
“우리끼리 간다는데 줄 게 뭐야.”
이번에는 용아가 순이 누나를 비웃듯이 말했다.
“나, 돈 있어. 저번 때 아저씨가 준 십원 있어.”
“넌 좀 가만있어. 버스값이 얼만지도 모르면서 하하하·….”
숙이의 대중없는 말에 용아는 어이가 없어서 깔깔 웃었다.
엄마는 아이들에게 돈을 준 일이 없다. 공책도 꼭 사다주고, 과자도 꼭 사다주고, 학교에 낼 돈도 직 접 갖다내는 그런 엄마였다.
아이들은 멍청히 앉아서 유리창을 내다보다가, 옆에 있는 라디오에 스위치를 넣었다.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
달려라 냇물아 푸른 벌판을…·
어린이날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이들은 할 수 없다는 듯이 벌렁 드러누워, 어린이날 노래를 따라 불렀다.
건넌방에서는 할머니가 쌍창에 바른 조그만 유리구멍으로 내다보고 앉아 있다. 할머니도 오늘이 어린이날이라는 것쯤 알고 있다.
수도가에서 빨래하는 것을 보니 어렸을 적에, 엄마 곁에서 물장난하던 일이 생각났다.
물을 찰싹찰싹 두드리면, 튀어오른 물방울이 얼굴에 닿는 것이 간질간질 재미있고, 조그만 물방울에서 일곱 가지 무지개빛을 내는 것이 퍽 아름다왔다.
이런 장난을 한참 하느라면, 진분홍 치맛차락이 홈씬 젖고, 노랑 저고리는 온통 얼룩이 졌다.
엄마한테 야단을 맞고, 젖은 치마를 마루끝에 널어 말리는 동안 바지 바람으로 엉엉 울고 있었다.'
이미, 칠십 년 전 일이었다.
할머니는 눈을 돌렸다.
방바닥에 숙이의 장난감이 굴러 있다. 헝겊 인형이 네 활개를 짝 펴고 윗목에 누워 있다.
“얘 그만 일어나거라. 해가 높다란데 여태 자는 애가 어디 있니?”
할머니는 인형을 일으켜 헝클어진 머리를 매만지고 걷어올려진 치맛자락을 내려준 다음, 앞에다 앉힌다.
“에그머니나 계집애가 다리를 쭉 뻗고 앉다니, 다리를 모아 오그리고, 치맛자락으로 가려야지, 쯧쯧쯧.”
인형은 할머니의 말을 들은 등 만 둥 눈을 말똥말똥 말끄러미 쳐다본다.
할머니는 혼자서 깔깔깔 웃는다. 인형하고 이야기한 게 우스운가 보다.
ㅡ 엣날엔 저런 게 없었지.
인형을 바라보니 가시를 만들던 생각이 났다. 풀을 한줌 뜯어다가, 빨래돌에 쓱쓱 비벼 풀을 죽이면 흡사 사람의 머리채같이 된다. 이걸 조그만 막대기 끝에 대고 실을 챙챙 감는다. 그러고는 뒤로 들어 넘긴 다음, 세 가닥으로 갈라서 딱는다. 그 끝에는 빨강 헝겊 오라기를 넣고 땋는다. 댕기를 드리는 것이다.
거기다가 헝겊 오라기로 지은 조그만 치마저고리를 입힌다. 할머니가 어렸을 적에는 이렇게 인형을 만들어 가지고 놀았었다.
할머니는 각시를 만들어 가지고 놀던 그때가 그리웠다. 꼭 숙이만한 때였다.
할머니는 인형을 안아주고 싶었다.
둥게둥게 어르고 싶었다.
둥게둥게 둥게야, 얼뚱 아기 우리 아기, 둥게둥게 둥게야.
할머니는 신이 났다.
이번에는 젖을 먹이며 또닥또닥 재우고 싶었다.
아기 아기 우리 아기, 잘도 잔다 우리 아기.
이번에는 업어주고 싶었다. 뱃대끈을 풀어서 띠를 돌려 업고 일어섰다. 아랫목에서 웃목으로, 웃목에서 아랫목으로 아기를 업고 왔다갔다 거닐었다.
할머니는 자기가 할머니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칠십 년 전 여섯 짜리 소녀 였다.
할머니는 잠든 인형 아기를 곱게 내려 팔베개하여 같이 누웠다.
마루청이 우르르 콩콩 울렸다. 미닫이를 홱 열어젖히고 아이들이 뛰어들어왔다.
할머니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입에다 손을 대었다 떼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했다. 할머니 팔에 숙이의 인형이 누워 있지 않은가?
“떠들지 말아라. 우리 아기 잠 깰라.”
할머니는 천연스레 말하고 도로 누웠다.
아이들은 일제히 까르르 웃었다.
“할머니가 망령이 났네.”
“할머니는 어린앤가봐. 인형을 가지고 논대요.”
“할머니가 애야.”
건넌방에서 왁자지껄하니까, 빨래하던 엄마가 달려왔다. 물 묻은 손으로 쌍창을 열었다.
아이들은 우죽우죽 서 있고 할머니는 인형과 함께 누워 있다.
“어이구, 어머니가 아이가 되셨어요, 인제 망령이 나셨나봐.”
엄마는 우습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웃지를 못한다. 할머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섰다.
할머니는 그제서야 일어나 앉으며,
“망령날 때도 됐지, 내 나이 일흔 여섯이니까! 하지만 난 망령난 게 아냐. 오
늘이 어린이날이 돼서 그런지, 다시 어린애가 되고 싶어서 그래. 어렸을 때 일
을 생각하다가 그만 옹호호호, 옹호호호.”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빙그레 웃었다.
“저도 빨래를 하면서, 어렸을 때 물장난하던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젊은 사람도 그런데요·….”
할머니 귀에다 대고 큰소리로 말했다.
“할머니, 어린애가 되고 싶어서 그래? 그게 정말야?”
용아가 다가앉으며 물었다.
“그래 그래, 나도 너희들 같은 어린애가 되고 싶어.”
“좋아, 좋아. 그럼 우리 같이 놀아, 오늘이 어린이날이야.”
용아는 안방으로 달려갔다. 다락에 둔 과자랑 사탕 봉지를 가지고 돌아왔다.
방바닥에 와르르 쏟아놓았다.
“자 할머니, 이거 우리 같이 먹고 놀아, 응?”
“할머니가 아니래두, 난 너희들 같은 어린애라니까 웅호호호·….”
순이 가 물었다.
“할머니가 아니면 뭐라고 그래?”
“응, 내 이름 말이냐? 내 이름은 옥이란다. 옥이야.”
“그럼, 옥이라고 부를까?”
“그래라, 그래 옥이라고 불러라. 나는 할머니보다 옥이가 좋아.”
“그럼, 옥아, 이거 먹어.”
용아의 말에 아이들도 엄마도 까르르 웃었다.
여느때 같으면, 내가 애냐면서 과자도 사탕도 싫다던 할머니가, 과자랑 사탕
이랑 넓죽넓죽 집어 잡수셨다.
“엄마 이름은 정이지? 난 다 알아. 정이야. 너도 들어와서 먹어, 응.”
용아가 너스레를 떨었다.
“그래, 나도 오늘은 어린애가 돼야지, 호흐호·….”
엄마는 과자를 먹으면서 말했다.
“어머니, 오늘은 어린이날어고, 어머니께서도 어린애가 되고 싶다시니 아이들 데리고 창경원에나 놀러 가셔요. 저도 갈 테예요.”
“그래, 빨래하던 건 어떡하고?”
“갔다와서 하든지, 낼 하죠, 뭐.”
엄마의 말에 아이들은 발을 구르며 좋아했다. 할머니도 어린에처럼 기뻐했다.
일어설 때마다 끙 소리를 지르던 할머니가, 사뿐 일어나 옷장으로 갔다.
큰길에는 아이들이 꽃밭처럼 널려 있었다.
푸른 하늘에는 어린이날을 축하하는 애드벌룬이 구름처럼 떠 있고, 색색으로 고무풍선이 자꾸만 떠올랐다.
“아버지!”
회사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아버지를 순이가 발견했다.
“아니, 어디들 가는 게요?”
“어디를 가다니요, 오늘이 어린이날 아녜요. 그래서 창경원에·… 당신도 같이 가요.”
“나도 오늘만은 어린이가 되고 싶은데, 잘됐군.”
삐익.
“창경원으로 갑시다.”
오월의 밝고 싱그러운 바람을 뚫고 넓은 아스팔트 길을 미끄러지듯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