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구즉 마을의 송강동 별곡
35. 내 살림집 장만
내가 지금의 직장이 있는 대전으로 오게 된 것은 1984년도 늦가을이니까, 햇수로 33년이 넘는다. 태어난 안양보다 더 오래 산 셈이니 타향도 정이 들면 고향이라는데 이제는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맞지 싶다. 여전히 초등학교 동창들은 안양 만안구에 몰려 살고는 있지만 이제는 안양 본가만 올라가도 낯설고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돌아설 때 미안함에 ‘ 안양은 어제의 그 안양이 아니야.’ 라고 혼잣말을 하곤 하는데 이는 마음이 이미 떠났음을 뜻한다. 그런 나는 신탄진 철교쯤에 이르면 다 왔다 싶고 비로소 마음이 놓인다.
1984년, 그 무렵 나는 무일푼의 대학원생으로 결혼도 한 상태라 독립이 무엇보다도 절실했다. 광복절 날, 시험을 봤는데 운 좋게 합격을 했으니 그날은 나도 잊지 못할 광복을 맞은 날이기도 하다. 그때만 해도 근무처는 도로포장이 제대로 안된 동네로 도로를 하나로 대전과 대덕 군으로 나뉜 대전의 가장자리로 그야말로 촌 동네였다. 취직은 못하고 살림을 꾸리는 처지, 엄마는 우리 부부에게 5만원을 윌급 주듯 했는데 그 돈의 1/3이 단번에 날아갔으니 아니 놀래겠는가. 지금도 이를 또렷이 기억하는 것은 그만큼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지만 내 처갓집은 대전이다. 그해 6월 나와 같이 대학원을 다니던 친구 (지금 에너지연구원에 있는 친구 강박사)가 혼자 함을 지고 나를 쫓아 찾아간 괴정동이라는 동네, 그곳은 당시 주변이 모두 논으로 처갓집에 접어들 무렵 개구리가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 있으니 누가 그 시절을 믿을 텐가. 아무튼 나는 취직해서도 아내는 안양 본가에 여전히 남고 나만 처갓집에서 한동안 기거해야 했다. 몇 개월 후 8백 만 원으로 처음 신혼집을 꾸린 곳은 가장동이란 동네였다.
17평 가장 주공아파트는 연탄을 때는 아파트였는데 가스가 새어 나와 늘 창문을 열어놓아야만 했다. 그런데 거기서 5개월쯤 살 때였다. 하루는 주택공사로부터 매달 넣는 납입에 대한 독촉장이 날아들었는데 분명 집주인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그 무렵은 전세등기란 것이 없었던 때로 사기 당해 거리로 나앉게 됐다는 말이 많았던 시절이다. 바뀐 이름이 누군지 어떻게 연락하는지도 몰라 전 주인이 되어버린 계약자를 찾아 나섰다. 주인은 시내에서 술집을 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기 동생으로 이름을 바꿔 놓은 것으로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그게 말이 되는가.
아마 두 번을 더 찾아갔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동생이란 작자는 끝내 볼 수가 없었고 그녀가 동생도장을 갖고서 새 계약서에 꾹꾹 눌러 주었다. 복덕방 말로는 그녀가 본처가 아닌데 본가에서 이를 알아서 집을 뺏길 처지가 돼서 부랴부랴 동생 앞으로 해 놓은 것이란 설명이었다. 어느 집인지는 몰라도 만약 본가에서 내가 모르는 소송에서 이기기라도 한다면 아무 내용도 모르는 나는 그만 당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아찔하고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시내 선화동(당시는 지금 대전의 번화가 둔산이란 동네는 존재하지도 않았다.)을 찾아갔을 때 술집은 문은 굳게 잠겨있었고 비는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맞은 편 처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문 열리기만 기다리던 그 처량한 상황, 나는 그때 저러다 ‘저 술집 문이 영원히 안 열리면 어떻게 되는 거지.’ 하며 공포를 마저 느끼고 있었다.
아버지가 한 번 다녀가시더니 곧 태어날 손주 생각에 마음이 안 좋았던 모양이다. 안양으로부터 돈 3백 만 원이 더 왔다. 나도 불안하던 차에 탄방동 주공아파트 16평으로 이사를 했다. 평수는 1평수 줄었지만 대신에 연탄보일러 아파트였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당시 대전은 엄청 낙후된 도시였다. 기름보일러 아파트가 용전동에 유일하게 한 곳 존재 할 뿐 거의 대부분 연탄이었고 연탄보일러도 그 중 신식에 속했다. 아이가 태어났다. 그쯤 내 꿈은 내 집 장만이었다. 그간 주공에 청약부금도 열심히 부었었다.
집에 목매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집에 대해서는 늘 구구절절하며 사연들도 많다. 나 역시도 그렇다. 주택 백 만호 건설을 말하던 노대통령시절, 주공 건물 앞에 장장 2킬로 끝 줄에 서서 이번만은 이번만을 주문 외우듯 외웠다. 부동산 붐이 일 때라 당첨만 되면 그 자리에서 프리미엄이 5백만 원이 붙는다고 했다. 그런데 역시 나는 아니었다. 대전 갈마동에 동산아파트. 용전동에 신동아 아파트, 오류동에 삼성아파트 무려 경쟁률이 15대1. 역시 결과는 꽝!꽝!꽝!. 깊은 속까지 얼얼했다. 옆 자리 동료가 되는 통에 더 약이 올랐다.
23평 2천 8백 만 원짜리 아파트에 프리미엄이 5백 만원. 동료는 5백을 벌었고 나는 3백을 더 들여서 입주를 했다. 당시 내 봉급이 50만원이 안 되던 때니 1년 거의 번 돈은 되는 폭이다. 삶이 장난이 아니다. 또 나는 열심히 욕을 해댔다. 그래도 시원치 않았다. 무심한 하늘이란 말이 바로 이런 때 쓰는 말 아닌가. 그런 나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었을까. 연구단지가 주택조합을 결성하여 충남대 옆 어은동이란 곳에 보금자리를 꾸렸다.
동 호수를 정하자고 표준연구소에 모였다. 당시 나는 아파트 건설비를 내느라고 프리미엄 주고 산 동산 아파트를 팔고 변두리 전세로 이사를 했는데 전세 만기가 돌아와 입주시기가 무척 급했고 중요했다. 알다시피 주택조합과 건설사는 늘 추가 비용 발생으로 실랑이를 하기 마련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입주 시기만 철석같이 믿고 전세 계약을 해서 낭패 일보 직전에 직면해 있었다. 급한 마음에 휴일이면 아내와 한창 마감공사중인 아파트를 살펴보러 갔었다.
사람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는데도 나와 아내는 해당평형 1층에 몰래 들어가 가구를 어찌 배치 할지 무엇을 더 챙겨야 하는지 세심히 살피며 시간의 촉박속에서도 고소함을 느끼곤 했다. 그런 중에 내가 과연 몇 층에 살지가 결정되는 날이 찾아온 것이다. 알다시피 아파트는 로얄 층이란 게 있다. 저층일수록 로얄 층에서는 멀어진다. 같은 가격주고 입주했는데도 나중 팔 때도 값 차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한마디로 복불복인 상황, 아내는 기도까지 드리며 3층 아래로만 뽑지 말라고 당부에 당부를 했다. 18층에 3층이면 확률이 1/6 , 아무리 운이 없는 놈이라고 해도 설마 그 안에 들까. 나의 운명의 여신은 과연 어느 선택을 했을까. 상자에서 추첨표를 집어 들었다. 접힌 종이에 1자가 겹쳐 보여 11층이 된 것이 아니냐는 순간적인 기대가 일었다. 그런데 아뿔싸! 펼쳐보는 순간 101호가 나왔다. 몰래 본 집이 바로 우리 집이 된 것이다. 그것도 제일 마뜩치 않는 1층이라니. 나는 그곳에서 22년을 살다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했다.
무던한 아내인데 그때만은 구박을 했다. 그렇게 행운을 피해가며 살기도 힘들다. 나만 왜 그런가. 그런데 따져보면 내가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동전의 앞면이 나올 확률은 언제나 반이다. 그런데 몇 번 뒷면이 나왔다고 하여 다음에는 앞면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 신조, 그것은 심한 착각이다. 다음에도 확률은 여전히 반이다. 더욱이 행운이나 운수대통의 여신은 확률적으로 극히 한정된 예외의 특별한 케이스이기 때문 웬만하면 걸리지 않는 게 정상적인 것이다. 그게 바로 보통이라는 사람들의 자취가 아닐까.
보통의 사람들이 다 운수대통이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하지만 이 세상은 더럽게 재수 나쁜 사람들도 많고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도 많다. 이런 불평등의 심화는 거의 대부분 부동산에서 기인한다. 대박이냐 쪽박이냐 , 財數大通(재수대통)이냐 財數不通(재수불통)이냐 , 橫財(횡재)와 橫災(횡재). 나는 이를 전적으로 운수에 달렸다고 보는 것이다. 무슨 그런 억지가 있느냐 할지 모르겠지만 잘 보면 시중이 그렇다. 내가 제일 기뻤다 싶었던 때가 언제인 줄 아는가. 맨 처음 등기부등본에 내 이름을 올린 갈마동 동산아파트 23평을 장만 하던 때, 내 집 장만이 꿈이니 당연 그쯤이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 집이 마구 치솟아 산 금액의 두 배로 팔고 그 돈을 밑천삼아 주택조합에 돈 한 푼 더 보태지 않고 큰 평수를 장만할 때, 나는 그때처럼 기쁜 적이 없다. 아주 적기에 팔고 돈을 번 것이다. 대전에서는 웬만해서 집 팔아 돈 남기기가 어렵다. 수요공금의 원칙 때문이다. 그런 때 붐을 빌미로 팔고 이문을 남긴 것이다. 미처 팔지 못한 동료는 땅을 치고 하늘을 원망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렇다고 할 것은 또 아니다. 나의 財數大通(재수대통)은 누군가의 財數不通(재수불통)을 말한다. 나는 지금도 그곳을 지나칠라치면 괜스레 겸연쩍어지고 미안한 생각도 갖게 된다.
어찌 생각해보면 나의 이런 이중적 행각은 내 스스로 만든 것은 아닌 것도 같다. 삶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집. 산다하는 말엔 집이 꼭 들어간다. 집은 자산으로서 큰 역할을 한다. 자산하면 대개 소유를 의미하지만 마음의 안식도 중요한 자산이다. 나도 그렇지만 하지만 누구든 소유 자산에 치우쳐 말한다. 난 계단 밟듯 차곡차곡 집을 늘려왔다. 연탄 17평에서 시작하여 연탄 보일러 16평 그리고 조금 넓혀 탄방 주공 19평으로, 그러다 마침내 내 집이라 하여 23평을 처음으로 소유하였다. 그리고도 계속 늘려왔다. 늘릴 때마다 하는 행위는 똑같았다. 처음 몇 달은 이 방 저 방 몇 번이고 재고 따져보며 흐뭇해한다.
그러는 마음은 어느 새 무감해지고 당연하듯 잊어버린다. 소유란 지속적이지도 않고 상실감을 쉽게 낳는 것이 아닐까. 정작 고소한 흡족함은 월세에서 전세로 갈 때라 던지 그 방 쓰임을 마음속에 그려볼 때의 기다림이었다. 소망이 현실이 된다는 기대는 따스한 봄볕처럼 달고 기다림을 앞세운다. 포근함이 다가서는 집은 꿈과 기다림이 숨 쉬는 안식이다. 정작 얻어내고서는 그런 느낌을 오래 간직하지는 못했다. 집착하여 얻을 때는 잠시이고 잃을 땐 상실감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의 평정을 찾기도 어렵다. 돈 몇 푼 잃어버린 것으로 잠을 못 이룬 적이 있다.
필시 소유는 끊이지 않은 욕구를 만든다. 이를 당해낼 재간이 없으니 힘들다. 욕구 충족이 곧 행복은 아닐 진대 이를 쫓는다. 집을 옮기며 따스한 추억으로 깊게 간직한 곳은 뜻밖에도 연탄아궁이로 살던 가장 주공아파트 시절이다. 행복은 가까이 있다하더니 이웃하여 산 사람들이 친척보다 가깝게 지내기가 훨씬 쉽다. 이웃은 더불어 산다는 동질을 갖는다. 잊지 못할 것이 1층에 산 아저씨이다. 그는 엿을 팔고 남으면 매번 통로에 날라다 주었는데 우린 신문이고 병을 모아 주었었다.
어느 때는 일손을 돕겠다고 병을 담고 폐지를 모으러 다니기도 하였는데 전혀 부끄럽지가 않았다. 첫아이를 맡기고 놀러 갔던 것도 그 이웃덕분이다. 우리가 떠날 때 아쉬움에 눈물 바람을 한 이웃은 그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집을 넓혀서는 괜한 자존만 늘고 정은 시들해졌다. 요즘 집 이야기하면 정담어린 이야기는 없고 가스 값에 전기 값 이야기가 고작이고 집값 오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 집값이 얼마 하느니 하는 이야기도 수준차가 크다.
동산 아파트를 팔고 난 차액을 기쁨으로 만끽한 나의 경제관념 폭은 수 천 만원으로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는 데 서울 사는 친구들은 거의 열배가 넘는 데 표정은 담담하다 싶다. 개발을 시작 할 때 2억이던 것이 개발이 끝날 쯤에 이르러 9억이 되었고 요즈음은 15억을 상회한다. 그 가치라면 팔고 공기 맑은 곳에서 사는 편이 훨씬 나은 것이 아닌가 싶은데 기다리면 20억이 된다는 소유의 욕망이 더 큰 것 같다. 비좁은 곳에 몰려 살면서 그들은 그래서 행복하고 그로 또 불행하다 싶다. 내가 갈마동을 지나치며 느끼는 어느 헛헛함은 견줄 것도 아니고 아예 그런 동질의 예속은 없는 것 같아 자꾸 친구의 얼굴을 쳐다보고 만다. 그 시절과 달리 왠지 너무 되바라진 것 같아서다. 질박함이라든지 그런대로 순박함이 남아 있다 싶은 대전을 그래서 나는 떠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이는 소외감이라고 달리 칭해야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