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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월령봉(月迎峰 820m)능선은 노고단(1507m)을 모산으로 해서 도상거리 11.5km에 걸쳐 남쪽으로 내리뻗은 능선으로 구례군 토지면과 마산면을 구분짓는
면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국립공원이지만 토지면에서 삼밭재까지는 등로가 열려있고, 산길도 양탄자를 깔은 듯 푹신한 솔밭길이다.
그러나 삼밭재를 지나면서 산길은 서서히 거칠어지고, 비탐지역임을 실감하는 건 각 봉우리마다 이렇다할 표식이 없음이다.
형제봉(908m)을 지나 노고단을 향하다 고도가 떨어지며 산죽숲이 끝나는 지점인 밤재가 터닝 포인터.
계속 고도를 높혀가면 매막등(1202m)을 지나 노고단에 닿게되고, 오른쪽(동쪽)은 문수골과 왕시루봉능선, 왼쪽(서쪽)은 화엄사골과 차일봉능선으로 모두가
노고단을 정점으로 하는 지능선과 지계곡이다.
그러니까 산행 내내 두 능선인 좌청룡 우백호의 호위를 받으며 조망을 누릴 수 있는 산길이다.
출발할 때 찌뿌드드한 날씨가 산행중에 첫눈을 만나면서 잠깐 즐거워하였으나 이내 눈바람으로 긴장도를 높혔다.
흐린 중에서도 전망바위에 서면 서서히 드러나는 왕시리봉 능선과 아래 문소골의 자태가 우리의 위치를 일깨워주고 있었다.
너희는 지금 지리의 품에 안겨 있노라고...
산행 전에 들른 '구례 운조루 고택'은 조선 영조 52년 (1776년)에 당시 삼수 부사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세운 것으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이다.
운조루(雲鳥樓)라는 택호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집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따온 글로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운조루를 탐방하는 사이에 성미급한 선두팀들이 문수저수지로 올라 갔단다.
오미저수지 뚝방길로 들어서라고 하였는데, 그만 착각을 한 모양이다.
B팀은 지리산둘레길 제17구간을 타고 화엄사에서 다같이 산행을 마친다.
산행궤적
버스에서 내린 직후 부터의 거리와 시간이다. 운조루는 하차지점에서 불과 300여m의 거리.
고도표
운조루를 산행기점으로 삼은 자세한 들머리를 살펴본다.<운조루-오미저수지뚝길-둘레길갈림길 이정표-베틀재-월령봉능선>
버스는 남해고속도로 하동IC에서 빠져나와 섬진강을 따라 화개장터를 지나 '곡전재'와 '구례 운조루 고택' 입구에서 멈춘다.
곡전재(穀田齋) 안내판의 금환락지(金環落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최고의 명당터라 부른다.
이는 ‘금가락지가 떨어진 터’를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경우 지리산과 섬진강자락이 만나는 전남 구례군이 위치한 오미마을 일대가 여기에 해당된다.
곡전재(穀田齋 구례향토문화유산 제9호)는 1929년에 건립하였고, 1940년에 이교신(호:곡전)이 인수하여 현재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한옥고택이다.
높은 돌담벼락의 솟을 대문 위에 다락방이 만들어져 있어 이채롭고, 입장료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1,000원을 넣는 함이 놓여져 있다.
우리는 능선 끝자락(토지주유소)을 들머리로 삼으려 하였다가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운조루'를 들머리로 삼기로 했다.
멀리 길 끄트머리에 보이는 한옥이 운조루이고, 좌측으로 보이는 한옥이 곡전재.
A,B팀이 함께 내렸으므로 곡전재 답사는 개인여행으로 미루고 운조루로 향한다.
운조루로 향하는 300m의 포장도로에서 좌측 월령봉능선의 낮은 산자락이 내려와 있는 게 보인다.
산자락 왼쪽 끄트머리에 토지주유소가 있고, 그 산자락 옆으로 나즈막한 뚝이 보인다.
이 뚝이 오미저수지의 뚝방이다. 이 뚝방길이 지리산둘레길과 월령봉 능선의 베틀재로 비스듬히 올라 붙는 실질적인 들머리다.
그래서 흰색으로 대강의 동선을 그어 보았다.
운조루 앞에서 10분 후에 함께 출발하겠다고 하였다.
집 앞의 연당(蓮塘)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한다.
운조루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앞 도랑)와 외수구(섬진강)가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이 집터에서 거북이의 형상을 한 돌이 출토되었기에 금귀몰니의 명당으로서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다.
집안일을 하고 계시는 할머니 대신에 미옥 씨가 입장료(1,000원)를 거둬드리고 있다. 할머니는 자식들이 다 도회지로 떠난 운조루를 홀로 지키며 살고 계신다.
대문 위에 매달아 놓은 이 두 개의 뼈는 호랑이 뼈로 알려져 있다. 무관이였던 주인(유이주)의 용맹을 강조하며 직접 잡은 호랑이의 뼈라고 한다.
오랜 세월이 흘렀으니 진위 여부는 DNA검사라도 해보아야 가릴 수 있을 것이지만 아마도 잡귀의 출입을 막는 민간신앙으로 보인다.
산길이 바쁜 산꾼들의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수박 겉 핥기'란 딱 이런 행태를 말할 것.
부엌에 들어가 유명한 뒤주를 살펴본다. 쌀 한 가마니 반이 들어간다는 이 뒤주에 쌀을 가득 넣어두어 흉년이 들면 가난한 사람이 가져갈 수 있게 하였단다.
그렇다면 경주 최부자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라 귀감이 될 것이다.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귀가 그러할진대 글자를 모르는 우리네 민초들이 그 뜻을 제대로 해독하고 가져갔을까?
사흘 굶어 남의 집 담 뛰어넘지 않는 사람 없듯 도적질하는 기분은 들지 않았을까?
너른 구례들판은 아무래도 가진자들인 지주들의 땅이였을 테고, 소작인들이사 뼈빠지게 일을 해도 입에 풀칠하기 힘들었을 시절이니...
雲無心以出岫 /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鳥倦飛而知還 /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어오네.
사랑채 누마루 아래의 오래된 수레바퀴 두 개. 바퀴는 이동하기 위한 문명의 시작이었다.
건축물의 받침돌과 원목 디딤판이 오랜 연륜을 말해주고 있다.
한덤님이 들어가는 부엌에 목독(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고, 이제 견본용 자료로 변해가고 있는 지게와 탈곡기가 보인다.
마당쪽 축담에 낮게 난 구멍은 굴뚝으로 보인다. 굴뚝은 높게 나있어야 연기가 잘 빠지지만 이렇게 낮게 낸 것은 배고픈 이웃사람들에 대한 배려라고 한다.
안내판.
딱 5분 만에 운조루를 나왔더니 일행들은 벌써 저만치 가고있다. 좌측 운조루유물전시관은 패스하고...
빠른 걸음으로 뒤따르며 좌측 낮은 산자락으로 오미저수지제방이 보인다.
오미저수지 제방으로 올라...
뚝방길을 걸어...
제방으로 연결된 산길로 바로 붙는다. 이 길은 '지리산둘레길'이기도 하다. 아스팔트 도로를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일 것.
저수지 뚝방길로 따라오는 일행들.
데크계단을 만나면...
지리산둘레길 말뚝이 이정표는 빨간색 화살표를 따라 도로방면, 저수지방면으로 가야만 하고, A팀의 월령봉 능선은 산림욕로 방면으로 가야한다.
산사면을 조금 비켜돌자 금세 배틀재에 닿는다. 배틀재 비탈에 나뒹구는 원목 벤치. 둘레길이 처음엔 이리로 났나?
잡목숲을 지나자...
훤히 트이는 전망지점. 섬진강과 너른 구례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이제부터 산길은 양탄자를 깔아 놓은 듯한 솔숲 비단길. 지리산에 어느곳에 이런 길이 있었남?
흐릿한 가운데서도 조망이 열리기 시작한다.
우측 발아래 문수골과 희미한 왕시리봉 능선.
나아갈 방향으로 지리산은 속살을 감추고...
그 골짜기 골골을 샅샅이 핥고 내린 지리의 물줄기를 임시 가두고 있는 문수저수지.
룰루랄라 솔밭길을 걷자니...
어느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처음이자 마지막 이정표가 있는 삼배재(삼밭재). 이정표는 마산리 골프장으로 유도하고 있다.
우리가 올라온 지점은 3.55km 주유소(토지주유소)방향이고, 노고단 방향은 이제 공원관리구역으로 '등산로아님'이라 적혀있다.
솔가리 낙엽더미에 살포시 내려앉은 첫 눈.
이제 산길은 서서히 거칠어지더니...
전망이 열리는 도드라진 암봉 바람막이 지점에서 식사 중인 일행들을 만났다.
고스락에 올라섰더니 삼각점이 있는 750.4m봉.
750m봉은 우리들에게 오붓한 식사터를 제공해 주었다.
행동이 굼뜬 필자는 일행들이 다 떠나간 뒤에도 느긋하게 지리의 속살을 탐하다...
전망바위에서 아직도 식사 중인 연리지와 우슴님을 본다. 필자와는 그 굼뜬 의미의 디테일(?)이 다르지만...
다시 시계는 흐려지지만...
곳곳의 전망대에서 펼쳐지는 웅장한 지리의 모습까지 감추진 못한다.
지형도상의 월령봉은 사람들이 스쳐간 흔적마저도 없어. 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인가, 월령봉(月嶺峰)!
다만 월령봉을 호위하는 주위 암군들과...
북풍한설(北風寒雪)에도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만이 운치를 더한다.
등로 정면으로 솟아있는 전망바위에 올라 나아갈 형제봉을 올려다 보니 형제봉은 정점으로 보인다.
고개를 우측으로 돌리니 시야를 막아서는 봉우리. 구름모자를 덮어쓴 노고단(老姑壇)이다. 천왕봉 반야봉과 함께 지리산의 삼대 봉우리 노고단.
그 우측으로 흘러내리는 왕시리봉 능선.
문수골로 잘못 들어간 선두 일행들과 합류하여 무덤이 있는 863봉에 올랐다.
어린 소나무에 소복이 쌓인 눈발.
형제봉을 올려다보며 가파른 내리막을 조심 내려서면 만나는 안부는 형제봉치.
무덤이 있는 863m봉.
그리고 조금 내려서면 만나는 형제봉재.
이제 마지막 피치를 올리며 형제봉을 향하는 길에 등로옆으로 쳐진 노끈.
상곤씨에게 형제봉 우측으로 내려서는 능선의 잘록한 고개가 터닝 포인터인 밤재라고 일렀다.
형제봉이다. 봉우리가 두 개 있으니 형제봉일 것이고, 이 봉우리가 907.6m 큰 형제봉이다.
아무런 표식이 없으니 이것으로 인증을 하는 수밖에...
형제봉 산길에서 내내 줄쳐진 이 지역은 사유지. 이 가파르고 쓸모 없어뵈는 국립공원 내의 임야 20만평을 개인사유지로 둔 사람은 누구일까?
산죽지대를 만나...
산죽지대가 끝나는 지점인 이곳이 밤재. 직진 오르막을 계속 치고 올라가면 노고단이고...
우리는 좌로 꺾어 내려가야 한다.
처음엔 수더분한 평지같은 계곡이더니...
어느새 낙엽과 너덜이 버무러진 조심스러운 길로 변하고...
오랫동안 뻔질나게 다니며 났던 길이지만 잘 분간할 수 없어...
낙엽 쌓인 산길을 '장님 코끼리코 만지듯'더듬으며 내려올 수밖에.
이윽고 반듯한 산길이다 싶었지만 문제는 낙엽밑에 숨은 암초(?)가 문제.
조심조심 휘어지는 포장 임도에 내려서서...
뒤돌아보니 그새 영표씨와 신고문님이 뒤를 물었다.
포장임도 위쪽으로 연기암(1.3km) 가는 길.
곡각지점인 이 포장임도는 삼거리로 이 길은 보적암 가는 길.
화엄사 방향은 무조건 내려가는 길로...
질러가는 길로 접어들어 내원암을 지나 구층암으로 내려가야 했는데, 무심코 내려서다...
여기까지 오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화엄사 불이문을 통해 화엄사를 탐방할 수밖에...
'화엄사자연관찰로'를 만들어 탐방객수를 조사하고 있다.
화엄사자연관찰로의 안내판은...
화엄사-지장암-금정암-내원암-청계암-연기암-미타암-구층암 등 8개 암자를 모두 답사하는 코스로 꾸며져 있다.
화엄사 불이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가기 전...
안내판을 담았지만 빛의 반사로 식별이 불가하다.
불이문의 지리산화엄사 편액.
관지에는 '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 라고 적혀있다.
의창군 이광이 인조 14년(1636년)에 썼음을 알 수 있다.
영화 [왕이 된 남자, 광해]는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조선의 광해군 8년(1616년) 시대를 역사적인 배경으로 광해,
도승지 허균과 가짜 광해를 주축으로 삼아 그럴 듯하게 꾸며낸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홍길동전]의 저자이기도 한 허균은 결국 1618년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허균이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할 때 이 사건에 연좌 되어 훈작을 삭탈 당하고 유배되었던 왕자가 있었으니 바로 선조의 8번째 서자였던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이다.
의창군의 부인이 허균의 형인 허성의 딸이라 연좌된 것인데, 근본적인 이유는 글씨에 능한 의창군이 선조의 사랑을 많이 받아 힘겹게 왕권을 잡은 광해군이
의창군을 견제하고 싫어한 탓이다.
의창군은 인조반정(1623년)으로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 풀려나 종친의 어른으로서 인조의 총애를 받게 되며, 당대 명필이었던 의창군이 1636년 화엄사에
두점의 글씨를 남기게 되는데, 화엄사 불이문의 [智異山華嚴寺]와 [大雄殿] 편액이다.
벽암국일도대선사비(碧巖國一都大禪師碑)
조선중기 승려인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이다.
비석은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전통적인 탑비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머리받침돌이나 머릿돌의 조각수법 등은 양호한 편이나 돌의 재질이 좋지 못해 마모가 심한편이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를 지낸 오준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인조 2년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받은 벽암대사(1575~1660)는 3년간 승군을 이끌며 남한산성을 완성시켰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에는 허물어진 성벽을 보수하는데 스님들이 동원됐다.
인조는 스님의 공을 인정해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직함과 함께 의발(衣鉢)을 선물했다.
벽암스님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 버린 화엄사를 중수하기도 했다.<불교신문>
벽암국일도대선사비 안내판
천왕문을 지나...
서오층석탑 너머로 석등과 각황전의 2층 전각이 장엄하다.
편액에 ‘癸未孟夏 刑曺參判李震休書(계미맹하 형조참판이진휴서)’라고 씌여져 있어, 숙종 36년 성재 이진휴(省齋 李震休 1657∼1710)가 썼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성재 이진휴는 여러곳에서 글씨를 남겼다.
보물 제133호인 각황전 앞의 서오층석탑. 2중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이 놓여 있는데 기단과 탑신부 표면에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지대석은 여러 매의 돌로 구성되었으며 하층기단의 하대석과 중석은 같은 돌로 되어 있다.
하대석의 각 면에는 우주와 2개의 탱주를 새긴 다음 각기 방위에 따라 십이지상을 안상 안에 3구씩 조각했으며,1층 옥신 4면에는 사천왕상이 조각되어 있다.
서오층석탑의 안내판.
보물 제132호 동오층석탑은 화엄사 경내 대웅전 앞마당 동쪽에 있으며, 화강암 단층기단에 오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지닌 신라의 석탑이다.
탑은 대웅전 하단 마당에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과 나란히 서 있으나 세부 형태나 배치 위치로 볼 때 다른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석탑의 건립시기도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동오층석탑의 안내판.
각황전 계단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 본다. 계단 중앙으로 석등이 있고, 다시 중앙으로 각황전 전각이 버티고 섰다.
정식 명칭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은 국보 제12호로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중대석을 장구 형태로 만든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전체적 규모에 있어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나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또한 기단부, 화사석 및 지붕과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어 완성미를 더하고 있다.<자료인용>
'구례 화엄사 각황전(求禮 華嚴寺 覺皇殿, 국보 제67호)'은 화엄사에 있는 조선 중기의 불전으로 정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계 중층팔작지붕 건물이다.
670년 의상법사가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을 봉안했으며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되었다.
석조 기단 위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과 평방이 놓여 있다.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2출목으로 되어 있다.
1층 앞면에는 살문을 달고 옆면·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고, 2층은 사방에 작은 창을 달았으며,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다.
대불단 위에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문수보살·관음보살·지적보살이 있다,<자료>
내부는 단층이지만 외양은 2층 구조로 되어있다. 비켜서 바라보는 목조건축물의 디테일.
석등의 장고 모양 간석은 가장자리에서 중앙부분으로 살짝 가늘어졌다가 볼록해지나 전체적으로 8각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같은 장고 모양의 간석은 전라도 지방의 석등 간석에서 볼 수 있는 고유한 형태이다.
상륜부는 노반, 앙화, 보륜, 보개, 보주로 이루어져 있다.
노반은 8각으로 상면에 낮은 1단의 받침을 두어 앙화를 받고 있는데, 앙화는 8각으로 8엽의 화문으로 장식되었다.
보륜은 원형이며 보개는 8각으로 상면 우동이 두툼하게 표현되고 끝이 귀꽃으로 장식되었다.
보개의 위로는 3단의 원통형 받침을 두고 최상부에 연봉형의 보주를 놓았다.
'각황전 앞 석등'의 안내판.
보물 제300호인 '화엄사 사자탑'은 높이 3m로 ‘노주(露柱)’라고도 불리는 석탑 모양의 석조물이다.
윗받침돌의 덮개돌을 4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어서 ‘사자탑’으로 부른다.
이러한 모습은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求禮華嚴寺四獅子三層石塔, 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건립시기는 대략 9세기 경으로 추정한다.
사자탑의 안내판.
화엄사의 주전(主殿)자리를 각황전에 내어준 대웅전(보물 제299호).
〈사적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 벽암대사가 중건했다고 한다.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졌다.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다.
관지엔 불이문과 같이 '皇明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 義昌君 珖書(황명숭정구년세사병자중추 의창군 광서)'라고 적혀있다.
이 대웅전의 편액도 같은 해인 인조 14년(1636년)에 의창군(義昌君)이 쓴 글씨이다.
국보 제35호인 '사사자 삼층석탑'을 찾아 보지만 사사자 삼층석탑은 경내에서 조금 올라야만 되고, 또 지금은 보수중이라 답사불가다.
하산완료 시간에 쫓겨 부도군을 지나 대형버스 주차장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다...
중소(中沼)는 가난하여 장육전 불사에 시주를 할 수 없음을 비관한 노파가 몸을 던진 곳으로, 그후 이 노파는 숙종의 공주로 환생하였다.
임금을 깨우쳤다고 각황전(覺皇殿)이라는 현판을 내렸다고 한다.
스토리텔링화한 중소.
일주문을 벗어나...
'해동선종대가람(海東禪宗大伽藍)' 현판을 올려다 보니 관지엔 '몽유금강산인 석전구일옹황욱(夢遊金剛山人 石田九一翁黃旭)'이라 적혀있다.
서예가 석전 황욱(石田 黃旭) 옹이 아흔하나의 나이에 쓴 작품이다.
고창 사람인 석전은 말년에는 수전증(手顫症)이 찾아와 붓을 손 전체로 잡는 그만의 독특한 악필법을 구사함으로써 웅장한 기개와 예스러운 멋이 우러나는
빼어난 필치를 보여주었다.
일주문을 나서자 매표소가 있고...
입장료는 어른 3,500원(단체 할인없음).
일주문을 돌아보니 '지리산대화엄사' 편액이 있고, 편액 좌측 낙관엔 '석전구십일옹황욱(石田 九十一翁 黃旭)'으로 석전이 91세에 쓴 글씨다.
일찍 귀환한 일행들의 전화 채근속에 부랴부랴 20여분 만에 대형주차장에 닿아...
돌아보니 지리산은 해그름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지즉위진애 (知則爲眞愛)
애즉위진간 (愛則爲眞看)
간즉축지이비도축야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며,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이는 정조 때의 문장가인 유한준(兪漢雋, 1732-1811)이 지인에게 준 화첩(畵帖)의 발문(跋文)이다.
이를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인용하면서
‘지즉위진간(知則爲眞看), 알면 보이게 된다’는 표현으로 고쳐 사용했다.
이말은 되새길수록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첫댓글 대단한 우리 대장님 수고만앗네유~~^^
험란한 산행 수고 많아 서요~~
예, 비탐 하산길 조심하지 않으면 안됐죠. 드날머리의 운조루와 화엄사 탐방은 보너스로 충분했고요.
이렇게 꾸며진 산길도 한 번은 걸어야할 길임은 틀림없을 거외다. 설사 실망안고 돌아오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