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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묵 혜자스님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안심법문-(도안사 회주 선묵 혜자 스님) - 53선지식 시즌2, 열여덟 번째 법회봉행
삼보에 귀의 하옵고 _()_
■.법회주제 : 선묵 혜자스님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안심법문
일 시 : 불기 2566년 9 월 23일 (금) 저녁7시~9시
장 소 : 조계사 대웅전
법 문 : 도안사 회주 선묵 혜자 스님
사 회 : 총무부장 보현행 안영주
참석자 : 총동문회 제9대 회장 혜월 권순석 외 250 명 참석
집 전 : 신행부장 일심행 전지유
반 주 : 정진경 삼조
■. 법회식순 : 화엄경 약찬게(다함께) - 공지사항(사회자) - 개회사 - 삼귀의 - 우리말반야심경 -음성공양 ( 상구보리 하화중생
/ 청산은 나를 보고 ) - 인사말씀( 제9대 회장 혜월 권순석님 ) -청법가 - 입 정 - 법문( 선묵 혜자 스님) - 사홍서원 -폐회사 - 기
념사진 촬영
(조계사 불교대학총동문회 53선지수 합창단 )
□. 노래 : 상구보리 하화중생
□. 지휘 : 경희대학교 박경태 교수
□. 반주 : 삼조 정진경
□. 포교부장 보명신 오달금 외 단원 30명 일동
□.촬영 : 기획부 수석차장 관음수
■. 53선지식 법회 이모저모
가을로 넘어가는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보이는 9월입니다. 선선해서 좋은 하루 조계사 도량에는 국화축제를 준비하고 있는데
요. 총동문회는 1964년 도선사에서 청담스님을 은사로 출가, 계사로 사미계를 수지, 통도사 강원 역임, 총무원 문화부장 역임,
도선사 주지, 대한불교조계종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호계원 초심호계위원, 제16대 원로위원, 제4대 군종특별교구 교구장을
역임, (현) (사) 108산사순례기도회 회주, 도안사 회주 선묵 혜자 큰 스님을 초청 주제 인 “선묵 혜자스님의 마음을 평화롭게 하
는 안심법문에서” “ 번뇌나 무명을 떠나서 별도로 번뇌나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 속에 무명 속에 열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번뇌가 바로 보리인 것이다. ” 하는 귀한 법문을 청해들었습니다.
법석에는 성해 장경태(교육본부 부회장)상임고문, 호연 김경숙(신도회 부회장)장학회이사장, 대덕심 김영숙 자문위원장, 삼조
정진경, 자문위원(영윤 김용규, 경담 이원굉, 수연심 남미화, 정진행 양순덕, 현진화 김정미, 도안심 이순화, 환희지 권종순, 평전
하용수, 월광지 임연선, 법연 이동엽) 외 총동문회 운영위원 및 불자 250여명이 함께했습니다.
[ 공지사항 ]
■.천수다라니기도법회 안내
1. 일 시 : 매월 첫째 주 금요일 저녁 7시
2. 장 소 : 조계사 극락전
■.교육법회 - 10 월
-. 주 제 : 인왕호국경
-. 법 사 : 문광스님 (동국대 불교학술원 연구교수)
-. 일 시 ; 2022년 10월14일 (금) 저녁 7시
-. 장 소 : 극락전
■.찾아가는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 열아홉 번째
-. 일 시 : 2022년 10월29일 (토)~30(일) 1박2일
-. 순례지 : 제주도 (관음사, 법화사, 약천사,존자암)
-.금 액 : 40만원 (상황에 따라 변동)
-.모집인원 :200명 (비행기표 선약으로 8월15일부터 선착순 접수 중)
-문의 및 접수 : 문화부장 명광월 권정숙 010-3483-9116
■.총동문회 합창단 연습
-. 일 시 : 매월 1,2,3째 주 (토) 12시 30분 ~2시
4째 주 (금) 오후 5~6시30분
-. 장 소 : 안심당 지하 합창단실
-. 문 의 : 포교부장 보명신 오달금 010-9955-7070
■. 53선지식 구법여행 시즌2 법사비 보시
(2022년 7월 53선지식 시즌2-열여덟 번째 법사비: (57학번 야간반 동문 (18명) 보시
■.목탁습의
-. 일 시 : 매주 토요일 오후3시30분~5시
-. 장 소 : 관음전 지하어린이법당
-. 문 의 : 신행부장 일심행 전지유 010-3240-2694
■.동문회비 및 53선지식 구법여행 법회 보시구좌 안내
-.동문회비 : 연회비-5만원, 평생회비-50만원
-.하나은행 111-054579-03005. 예금주 대한불교조계종조계사
-.문의 재무부장 정진행 윤점애 010-2929-3788
■. 장학기금 후원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장학회)
-.조계사불교대학 동문이면 누구나 월1천 원 이상의 장학기금 후원가능
-.장학회 정회원 조건: 출자금10만원 월 1천 원 이상 후원하시는 분
-.후원계좌 : 신한은행 100-030-532200 (조계종조계사 불대총동문회)
-.문의: 장학회 총무 보현행 안영주 ,010-6272-2895
재무 신명덕 오혜식 ,010-9068-9049
■.불교신문 구독신청
-. 53선지식 구법여행을 함께 진행하고 있는 불교신문 구독 신청바랍니다.
-. 문 의 : 부회장 공덕화 이종례 010-6847-6863
■.조계사수행정진대중공양(가사) 1구좌 동참
-.동참금 : 1) 100만원 2) 50만원 3) 30만원 4) 자유로이
-.동참계좌 : 하나은행 111-054579-03005 대한불교조계종 조계사
-.문의 : 총무 보현행 안영주 010-6272-2895
■.조계사 불교대학 총동문회 제3회 문화대축전
▶. 제1차 법석 : 삼사 성지순례 5월22일 회향.
▶. 제2차 법석 : 자비도량참법 기도
6월18일 20:00~6월19일 03:30분 대웅전에서 철야정진 회향
▶. 제3차 법석: 총동문회 제16회 창립기념 법회
7월22일 19:00대웅전 (53선지식 구법여행 병행) 회향
▶. 제4차 법석 템플스테이 8월26일 조계사 도량과 청계천에서 촛불명상 물명상 회향
▶. 제5차 법석 : 제3회 문화대축전 10월8일 14:00~ 전체 동문 축제의 장
■.인사말 - 제9대 회장 혜월 권순석
반갑습니다.
제9대 총동문회장 혜월 권순석 입니다.
오늘 53선지식구법여행 시즌2 열여덟번째로 도안사회주 선묵혜자 큰스님을 모시고 마음을 평화롭게 하는 “안심법문의 법
석”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법문을 위해 걸음을 주신 선묵혜자 큰스님께 감사의 예를 올립니다.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는 올 임인년초 5대 핵심사업을 수립, 단계별로 법석을 마련 제1차법석인 5월 강화 삼사순례를 시작으
로 6월 철야자비도량참법기도, 7월 창립 16주년행사, 8월 철야 템플스테이등 네번의 법석에 동문님들의 참여과 성원속에 원만
하게 회향하였습니다. 이제 보름후인 다음달 10월8일 토요일 오후2시, 조계사불교대학과 대학원등 총동문이 결집하는 대망의
제3회 문화대축전행사가 바로 눈 앞에 남아있습니다.
향기로운 가을 국화꽃 향기속에 총동문회의 별인 53선지수합창단의 찬불공양을 시작으로,
사중승보가사 대중공양, 총무원장 진우 큰스님법문, 학번별 경전트롯경연, 불자양성을 위한 총동문장학금수여등 “나눔으로 빛
나는 별”! 의 다채로운 행사로 펼쳐질 예정입니다.
축제의 장에 한분 한분이 주인공이 되시는 법석인만큼 도반님과 가족등 모두 손잡고 나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면 감사하겠습
니다.
오늘 선묵혜자 큰스님의 고귀한 가르침이신 “안심법문”을 마음속 깊이 수지하시어 앞으로 신행활동에 늘 자유롭고 충만한 행
복을 누리시길 기원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불기 2566년(2022년)9월 23일(금)
조계사불교대학총동문회 회장 혜월 권 순석합장
■.법 문 ( 도안사 회주 선묵 혜자 스님)
반갑습니다.
오늘 조계사 법회에 오신 것은 다 여러분들이 인연법으로 이렇게 오신 것입니다.
먼저 옆에 이렇게 다 계신 분들하고 서로 함께 서로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 앉은 자리에서 자세를 바로 하시고 우리 스님의 법문을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안심 법문은 이런
자리가 아니면 들을 수 없는 법문입니다.
여러 가지 번잡했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이렇게 조계사 법회에 왔으니 잡다한 생각들을 모두 잠시 좀 내려놓고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합니다.
이 스님이 하는 이 안심 법문은 눈을 뜨고 들으면 산만해서 제대로 귀에 안 들어옵니다.
이 법문은 눈을 감고 들어야 됩니다. 눈을 잠시 감고 정신을 한 곳에 모으기 위해서 이 스님의 목소리에만 집중을 해주시기 바
랍니다. 지금 눈을 뜨고 있는 분은 눈을 감으시고 손은 자연스럽게 단전에 모으시고 허리를 꼿꼿하게 쫙 펴십시오. 일상에서 찌
들었던 머리를 좀 오늘 같은 날은 쫙 펴보세요. 그리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시고 내쉽니다. 다시 한 번 더 숨을 크게 들이시고
내쉽니다. 지나간 여름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련의 계절이었습니다.
폭염은 폭염대로 폭우는 또 폭우대로 태풍에다가 물가에다가 코로나에다 하나같이 쉽게 넘어가는 게 없었습니다. 한반도 평화
는 여러 이리저리 엉키고 설 켜서 난마와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시련입니다. 인간 사회에 시련 없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개인은 개인대로 국가는 국가대로 많은 시련
을 당하고 또 극복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다행이라면 다행이고 행복하다면 행복합니다. 작고 분단된 콩만한 나
라지만 옹골차고 또 힘이 있고 기가 죽지 않는 나라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이 스님은 지난번 군종 교구장 소임을 맡고 있을 때 중동의 레바논에 있는 동명부대 또 아프리카 남수단에 있는 한빛부대 또
아랍에미리트에 있는 야크 부대 해외 파병 부대 장병들을 위문하기도 하고 그곳에 불자 장병들에게 격려의 안심 법문을 하고
왔는데 중동에 여러 나라들을 볼 때 전쟁으로 또 분쟁으로 살아가는 것이 고욕임을 보았습니다.
새삼스럽게 평화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보고 왔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통일이 최고의 가치로 보이지만 아닙니다.
지금이나 통일 후나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는 바로 평화입니다. 통일만 되면 모든 것이 다 풀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더 많은
갈등으로 인해 괴로울 것입니다.
인류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에게는 아예 통일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평화뿐입니다. 정치적으로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하
지만 진정으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평화 사람 간의 평화, 이웃 간의 평화, 조직 정당 단체의 평화, 이 사회의 평화, 국가 간
의 평화가 이루어질 때 진정 우리의 삶이 평화로워지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여 별로 관계
가 없어 보이는 나라들도 불안 속에 있습니다. 지구촌이 평화롭지 못합니다. 남의 일이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평화이
고 그 평화는 내 마음에 평화로부터 시작되어집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신과 악의 대립 정의와 뿌리의 대립, 미움과 자비의 대
립 등 등에도 평화가 요구됩니다. 불교에서는 열반을 최고의 가치로 치지만 그것은 개별적인 가치입니다. 사회, 조직, 국가 전체
가 열반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열반은 개별적 도달 가치지만 나만 열반을 이루었다고 내가 평화로워지지 않습니다. 왜냐면 우리는 언제나 함께 살기 때문입니
다. 선악을 항상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열반을 이루어 깊은 산속에 고요히 살며 그렇게 산다고 평화로워집니까
잠시 잠깐은 고요하고 평화롭겠지만 온 중생이 괴로워하는데 혼자만 열라 게 빠져 있을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보드가야
우르벨라 마을 보리수 아래서 깨침을 얻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전법하려 하지 않고 혼자만 열라 게 젖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오묘한 깨침을 사람들은 알 수도 없고 알아듣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전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녹야원에서 다섯 제자들부터 전법을 했습니다만 혼자만 열반을 이루었다고 내가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열반을 이뤘다면 몰라도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평화입니다. 너와 나의 관계
가 평화로워야 하고 나라와 나라 간의 관계도 평화, 이웃 간에도 평화, 사회도 평화입니다. 그래서 이 스님은 평화를 주창하고
부처님의 탄생 성지를 밝히고 있는 평화의 물을 한국으로 모셔와 그 불을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명산대찰에 밝혔고 각 군 부대
에 밝힌 바가 있으며 지금도 밝히고 있습니다.
지금 조계사 이 법당에도 있습니다. 다 같이 한번 따라서 하세요. 해와 달이 다 하고 중생업이 다. 해도 우리는 둘이 아닌 불이
의 진리 이 도량 밝게 비춘 평화의 불 남과 북이 하나 되기를 소원하오며 무명 번뇌 모두 태운 모든 중생들 평화 열반 이루기를
발언 하나이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안온하고 평화롭지 못하면 그 어떤 가치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오늘의 이 법문은 우리 불교도들이 궁극에 도달하고자 하는 열반을 이룰 수가 있는가에 대한 안심 법
문입니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찾아가는 53 선지식 중에 대천신 선지식을 능사난사라고 하여 능히 버리기 어려운 것을 버
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 중생의 습은 얼마나 고치기 어려운 것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까. 내가 낸 데 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 번 든 습관은 좀처럼
버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열반에 이르기 위해 공부도 하고 또 수행도 하지만 좀처럼 자기의 습을 버리지 못하기에 괴로운 세상
즐거운 세상, 울고 싶은 세상, 안타까운 세상, 더러운 세상 등등의 별이 될 모습에 세상살이를 우리는 직접 겪으면서 보면서 사
랑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아픔이 오면 오는 대로, 그리움이 오면 오는 대로, 손도 없고 악도 없는 경계에 들어 집착이 없으면 그
것이 열반이라 하였습니다.
다 같이 따라서 하세요. 생사 번뇌는 무상하며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아 생사가 그대로 열반임을 명심하겠나이다. 생사가 법
뇌는 무상하며 환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라 생사가 그대로 열반임을 명심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어떠한 경전
이나 스님도 열반을 가르치지 않는 경전이 없고 또 열반을 말하지 않는 스님이 없습니다.
도대체 열반이 어떤 것입니까 나선 비구경에는 열반이란 더 이상 아무것도 없는 것이라 하고 열반이라는 것은 마치 마른 나무
땅을 많이 넣고 매우 뜨겁게 달군 큰 가마에서 불타고 있던 사람이 천신만고 끝에 거기에서 벗어나 시원한 장소로 도망쳐 나갔
을 때 그가 느끼는 최상의 안락과 같은 것이 열반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열반은 연꽃이 진흙물에 젖지 않는 것처럼 모든 번뇌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또 열반은 청량해서 마치 신선한
물이 열을 진정시키는 것처럼 모든 법뇌를 가라앉힌다고 했습니다. 이런 열반이 생사와 같다는 것은 바로 삶과 죽음과 같다는
말인데 이것은 또 무슨 말이겠습니까 삶이나 죽음 자체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맞으면 열반에 들었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이 번뇌와 괴로움이 가득한 삶이 열반이라니 도저히 믿을 수가 없죠.
생사 번뇌는 무상하여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애탕계탕 살아가는 삶이나 살아가면서 매일같이 이런저런 고민과
괴로움 헤아릴 수 없이 생기는 번뇌를 참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면서 살아가지만 그러한 것들은 모두 무상하다는 것입니다.
무상이 뭡니까 변한다는 것입니다. 늘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삶에 이런저런 번뇌와 죽고 사는 문제는 환상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금강경에 일체유의법이 여몽함포령이요. 여로역여전하면 응작여시관이라는 사구계를(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으며 이슬과 같으며 물거품과 같으며 또한 번개와 같아 응당 이와 같이 관할지다.) 다 아실 것입니다. 하고자 하는 것이나 존
재하고 있는 것은 꿈과 같고 또 환상과 같고 물거품 같고 또 그림자 같고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
리의 삶이나 의지는 물론 번뇌나 괴로움도 모두 무상하고 허망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것이나 죽는 것이 모두 이런 허
망한 것임을 알면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생사번뇌가 무상하고 늘 변하는 것이고 또 환상과 같은 것임을
알면 열반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 그 자체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어디 다른 곳에서 열반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반이라는 것이 저 허공이나 죽음을 넘어선 어디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승불교에서 보살도를 실행하려면 우선적으로 분별심을 버려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너다 나다 하는 분별심을 버리고 상구보리 하와중생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분별심이라는 것은 괴로움이다. 열반이다 하는 것과 죽는다. 산다 하는 것과 같아 생사를 떠나서 열반이 어떤 형태로 따로
있다고 하는 것도 분별심이기에 그것을 버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이 쉽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삶과 죽음 즉 태어
나고 죽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수행을 하고자 한다면 대승의 보살은 생사와 열반이 다르지 않음을 자각하고 생사
와 열반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사의 반대편에 열반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사를 벗어나면 열반이 되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생사는 열반과 한 몸
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지고 있는 삶의 번뇌와 무명이 그대로 열반에 씨가 되고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삶
의 괴로움이라는 것도 열반으로 가는 차표가 되는 것입니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어둠을 두고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둠이라는 것이 따로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 배처럼 어떤 모양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대
낮에도 영화가 나는 어둡고 또 빚을 모두 가렸기 때문에 어둡지요. 밝음이 없어지면 어두워지고 불을 켜는 순간 어둠은 사라집
니다. 창문을 열면 빛이 들어와 환이 밝아집니다. 마찬가지로 열반이라는 것도 따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
입니다. 내 삶에 분별심이 없어지면 바로 열반입니다.
분별심이 들어오면 생사 번뇌가 되는 것입니다. 번뇌나 무명을 벗어나 따로 열 번이나 깨달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
니다. 그래서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사를 떠나서는 열반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생사가 있으니 열반도 있는 것입니다.
의상대사가 지금 법성계에도 초발심시변정각 생사열반 상공화와 이사명연 무분별이라 하였는데 생사열반 상공화 라고 하여
생사와 열반이 한 바탕이고 한 몸이라 하였습니다. 생사 윤회와 열반의 경계가 보이 되 둘이 아니며 서로 어울려 있다고 했습
니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깨달음을 이룬 열반이라는 것이 따로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겪
는 괴로움 또 번뇌는 열반으로 가는 차표와 같은 것입니다.
차표가 있어야 열반행 기차를 탈 것 아니겠습니까?
윤회와 해탈이나 번뇌와 열반이 서로 따로 존재하면서 대립하고 있다면 해탈이나 열반은 우리가 이루어야 할 세상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를 버리고 또 다른 하나를 찾아간다고 그러나 번뇌도 공한 것이고 열반도 공한 것이
라 할 때 번뇌를 버리고 열반을 찾아간다는 것이 허망한 것이 되고 맙니다. 좀 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공부 안 하고 말 안 듣는
내 아이 하나가 바로 번뇌라고 생각하고 공부 잘하고 말 잘 듣는 내 아이가 열반이라고 생각하면 그 말 안 듣는 아이가 한 생각
돌이켜서 열심히 공부하고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면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따로 어떤 아이가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
기입니다. 맨 그 아이가 바로 내 아이입니다. 그래서 생사 번뇌와 열반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 번
뇌는 공이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생사가 그대로 열반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은 생사의 한가운데
있는 것이지 따로 뚝 떨어져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좀 이해하시겠습니까. 이제 좀 눈을 뜨세요.
눈을 감으시라고 하니까 조는 분이 있는 것 같아 예 이 법문은 눈을 감고 자꾸 잘 새기면서 들으셔야 돼요. 눈을 뜨게 되면 사
량 분별심이 생겨서 다 잊어버리고 무슨 말인지 다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법문이 바로 열반 번뇌 생사 공 등등 복잡하게 나오
니까 헷갈릴 수 있으나 눈을 감고 차분히 들으시면 다소 간에 이해가 되실 겁니다. 이런 부문은 듣고 듣고 몇 번을 들어야 조금
이해가 갑니다마는 그래도 오늘 여러분들이 인연이 있어서 이 안심 법문이니까 잘 새겨 들어보세요. 네 야 그러면 이제 다시
눈을 감고 이제 따라서 하세요. 열반은 생사의 한가운데 있고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명심하겠나이다.
열반은 생사의 한가운데 있고 따로 존재하지 않음을 명심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열반은 누구나가 이것을 이루기 위해서 수행을 하고 또 보시하고 기도를 하고 착한 일을
하고 선업을 지으며 부처님과 스님들의 말씀을 따르고 있습니다. 열반만 달성되면 절에 안 가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보시
안 해도 되는 것 아닌가요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세요. 다시 한 번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시고 내쉽니다.
다시 한 번 숨을 크게 들이시고 내쉽니다. 눈을 감고 계세요. 들으세요. 다시 한 번 따라서 하세요. 윤회와 열반에는 어떤 차이
도 없으며 열반과 윤회에도 어떠한 차이가 없음을 명심하겠나이다. 윤회와 열반에는 어떤 차이도 없으며 열반과 윤회에도 어떠
한 차이가 없음을 명심 하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중생은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깁니다.
나라는 것이 있다고 여기기에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업에 의해 다시 태어나서 육도를 윤회합니다. 윤회가 멈추는 거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이며 열반입니다.
윤회와 열반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으며 열반과 윤회에도 어떠한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인도 이름으로 나가르나주나(龍樹)
한문으로는 용수 보살이 한 말입니다. 용수보살은 대승불교의 핵심인 공사상 반야 사상을 완성시킨 분으로 화엄경 약찬게를 지
으신 분입니다. 대방광불화엄경 용수보살 약찬게 나무화장세계해 비로자나진법신 현재설법노사나 석가모니제여래 과거현재미
래세 시방일체제대성 근본화엄전법륜 해인삼매세력고 하는 것 들어보셨죠. 이 약찬게를 지으신 용수 보살은 윤회와 열반이 종
이 한 장의 차이도 없이 같다고 하신 것입니다. 열반과 윤회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하는 것은 윤회가 끝나고 열반에 이
른다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열반을 찾지 말며 윤회 밖에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는 어떠한 미세한 간격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열반은 어떤 상태를 지녀야만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도를 이루는 것 대 자유를 얻는 거 번뇌를 벗어나는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벗어나는 것 걸림 없이 사는 것 등등 여러 가지로 이
야기하지만 한마디로 그것은 바로 열반입니다.
그렇습니다. 열반이죠. 죽어서 얻는 열반이 아니라 살아서 얻는 열반입니다.
그래서 살아서 이루는 열반을 유여열반이라 합니다. 부처님도 수많은 상처와 병으로 괴로움을 겪으셨습니다. 육신을 가진 이상
그런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 육신을 완전히 버렸을 때의 열반을 무여 열반이라 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것은 살아있을 때인데 그때
는 앞에서 이야기한 번뇌를 가진 채 이루는 열반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과 윤회가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은 지금 나는 인간의
몸을 받았지만 윤회의 한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돌고 도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윤회와 열반은
우리가 배우기로는 전혀 다른 것으로 배웠습니다.
윤회는 고통의 연속을 이야기하고 그것은 바로 속박이고 이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앞에서는 생사와 열반은
다르지 않다고 하였고 열반은 생사의 한 가운데 있고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죠. 생사가 바로 윤회라는 이야기입니다. 살
다가 죽다가 하는 것이 바로 윤회입니다. 그러니 열반이나 생사는 같은 것이고 열반이나 윤회가 같은 것이란 이야기입니다. 열
반 생사윤회 번뇌 해탈 등등 이야기가 복잡한 것 같아도 간단합니다.
부처님도 열반을 이루어 더 이상 태어나지 말 라고 하셨습니다.
윤회를 끊으라고 하였습니다. 생로병사가 바로 인생의 괴로움이니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바로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 것
즉 윤회하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명히 부처님은 다시는 태어나지 말 라고 하신 것입니다. 열반을 인도 말로는 니르바
나라고 합니다.
무슨 뜻 인고 하니 바로 멈춘다는 뜻입니다. 니르바나라는 것은 움직이고 있던 것 가고 있는 것을 멈춘다는 뜻입니다. 바로 돌
고 도는 윤회가 멈추는 것이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열반을 이루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편 하냐 그것도 아닙니다. 부처님께
서는 정명경에 머무는 곳마다 다 안락하다고 하셨지만 육체의 괴로움은 벗어날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열반을 이루었다고 하는 것은 모든 번뇌를 벗어나 모든 진리에 통달해야 될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유마경 얘기라는 경전에는
보살은 이미 공의 위치 즉 무아의 이치를 터득했으므로 번뇌가 오더라도 그것이 환상이오 물거품임을 알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번뇌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마대사는 악마의 세계를 떠나지 않고도 부처의
세계에 들어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바로 번뇌를 지닌 채 열반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달마의 달마대사의 제자 육조 혜능
대사도 부처가 깨달음 법은 세속에 있다. 그러므로 세속을 떠나서 깨달음을 구한다면 마치 토끼의 뿔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이
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생과 사 삶과 죽음 속에서 열반이 있는 것이지 산속이나 절이나 허공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
기입니다. 그러므로 생사와 열반은 둘이 아니라 한 몸이며 동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바로 열반에 나날
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누가 복음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오.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이요. 신이요 하고 신을 밖에서 찾지 말고 신은 네 안에 있으니 안에서 찾으라는 말입니다. 불교에서의 법신 상주라는 것은
불성이 언제나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바로 불성으로 이루어진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이나 사나 모두 불성에 기초한
삶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라 해서 싫어할 무엇도 없고 또 열반이라고 해서 동경할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이것은 생사가 바로 열반이라고 깨닫고 생사 밖에서 열반을 구하는 우를 범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그냥, 그냥 살
면 열반이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냥은 안 됩니다. 바로 삼법인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를 사무치게 알아야 합니다.
그냥 그렇구나 하는 것이 아니고 가슴이 사무치게 완전히 내 것이 되도록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삼법인은 온몸으로 아는 것
이고 행동하는 것은 팔정도라고 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행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삼법인에서 제법무아라고 배웠습니다.
나라는 것은 없다고 배웠는데 무엇이 있습니까. 윤회를 하는 주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 김 아무개 보살, 최 아무개 보살이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뭔가 변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김 보살, 최 보살이
라는 것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김 보살, 최 보살은 다 변합니다. 죽습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것은 잠시 인연 따라 존재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중생
이라는 존재는 원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이 아주 중요한 대목입니다. 정신 바짝 차리고 한번 들으세요. 앞에서 이야기한 것을 한꺼번에 이제 뒤집는 법문입니다.
제행은 무상이요 제법을 무아라고 하였기에 중생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존재하는 그 무엇도 없습니다. 존재하는 것
이 없는데 무엇이 멈추고 무엇이 과거 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공사상이라는 겁니다. 모든 것이 비었다는 것입니다. 윤회도
공이고 번뇌도 공이며 열반까지도 공인데 열반을 이룬다고 하는 자체가 허망한 것이 됩니다. 반야의 공사상이 왜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 것이 지금 이 법문입니다. 앞에서 한 모든 설법을 뒤집는 것입니다.
밝음과 어둠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밝음이 사라지면은 어둠이 되듯이 어둠이 사라지면 밝음이 되는 것입니다. 열반과 윤회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번뇌를 지은 채 부처가 된다고 하였죠. 번뇌가 완전히 끊어진 상태가 되어야만 부처의 지위에 오
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번뇌가 보리이고 생사가 열반이라고 하였습니다.
부처라고 하는 것은 중생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이고 자신의 근기에 따를 뿐이지 다른 물건이 아니다. 라는 것은 바로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성불이 우리의 최종 목표라고 할 때 그 목표를 향하는 사람은 바로 나이지 누구도 아닙니다. 나라는 것은 번뇌와 무명에 쌓여
있으며 윤회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존재입니다. 바로 이 번뇌와 무명 윤회를 겪으며 사는 내가 바로 부처가 될 사
람입니다. 저 하늘에 저 산 속에 있는 누가 되는 것이 아니고 눈물을 흘리고 가슴 아파하고 사랑하고 이별하며 사는 내가 그대
로 부처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어둠 그것이 바로 밝음이며 밝음 그 자체가 어둠이라는 사실입
니다. 괴로움에 허덕이는 내가 바로 부처라면 나는 번뇌의 번뇌와 윤회를 지닌 부처인 것입니다.
번뇌나 무명을 떠나서 별도로 번뇌나 열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번뇌 속에 무명 속에 열반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가
바로 보리인 것입니다. 윤회가 바로 열반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은 윤회라는 것도 없고 열반이라는 것도 없으며 그 바탕에는 변
하지 않는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열반에 이루고자 하는 것도 열반에 대한 집착이며 열반에 대한 집착이 있다는 것은
열반과 열반이 아닌 것이 있다는 분별심이기에 열반도 그것에 집착하면 이기적인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중
생과 부처도 마찬가지이고 생과 사도 마찬가지이며 윤회와 열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구별하는 것은 바로
분별심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는 현실이 어렵고 힘이 들지만 그것이 바로 열반의 삶 이오 극락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
다. 지금의 어려운 삶을 벗어나면 뭔가 반짝 하는 것이 있을 것 같지만 그곳에는 또 그만큼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천석
군은 천 가지 걱정 이오 만석 군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윤회하는 지금의 삶이 바로 열반이라고 생각하면서
욕망을 추리고 느긋하게 사시라는 이야기입니다. 다 같이 합장을 하시고 따라서 하세요. 내 인생에 가장 행복한 날은 언제인가
요 바로 오늘입니다. 내 삶에서 가장 결정적인 날은 언제인가요 바로 오늘입니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나의 삶의 전부로 알고 나 열심히 살겠나이다.
그렇습니다. 벽암록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제 눈을 뜨시고 합장을 내리세요. 우리의 삶의 가장 소중한 날은 언제입니까 오늘
이죠.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어떤 시간입니까 지금이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시간입니다.
그렇죠, 또 우리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만나고 있는 그 사람들이죠. 또 우리의 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시간 속에서 만나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기쁨과 희망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가는 일입니다.
오늘 조계사 이 도랑에서 함께한 이 시간 내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지금 이 시간을 불 꽃 같은 열정으로 사는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잠시 잊어버린 자기 부처를 조만간에 찾아갈 분들입니다. 이 시간, 제일 소중한 분들과 함께 오늘 이 법문을 들었습니
다. 그래도 뭔가 조금 그래도 안 들은 것보다 낫 죠 우리는 이렇게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인연으로 만났습니다. 다 같이 합장을
하시고 따라서 하세요.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다 같이 바쁜 시간 쪼개여, 조계사 대법당 이 자리에 같이 있어주셔서 소중한
당신입니다. 오늘의 이 인연 오래오래 간직하여 열반의 길로 들어갑시다.
성불의 길로 들어갑시다. 해탈 경계로 나아갑시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일심광명 지극정성 좋아요. 오늘 참 늦은 시간에 이렇게 스님이 이제 법문을 마치면서 그
래도 이렇게 여러분들과 인연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가 없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제가 선물을 하나 드리고 갑
니다 한 번씩 나와서 받아가세요. 스님 앞에서 제가 직접 드릴게요.
도안사 회주 선묵 혜자 큰 스님 귀한 법문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에게 깨달은 경계를 말해 주기 어려우니 이는 눈먼
사람에게 환한 날씨를 말해 주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과 같다.
[ 조계사불교대학 총동문회 자문위원 법연 이동엽 합장 ]
첫댓글 번뇌와 무명 보리 열반을 쉽게 법문해 주셔서 확실히 알았습니다.
선묵 혜자스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옥체건강하세요._()_
법연자문님 법공양에 무량공덕지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혜월 회장님의 선행에 늘 감사드립니다._()_
법연 자문님 팔재계 행사 등 바쁜 시간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정리해서 올려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삼조 정진경선배님의 항상 후배사랑 감사드립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