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골의 반은 남한에 묻어달라'... 월북한 동생의 상상도 못할 유언
▲ 왕산의 묘 ⓒ 윤태옥
1945년 가을 어느 날 경북 구미시 임은동, 열일곱의 앳된 청년이 할아버지 무덤 앞에서 절을 올렸다. 아들과 큰 손자보다 작은 손자가 먼저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의병장 왕산 허위(1855~1908), 손자는 허웅배(1928~1997). 허위의 묘는 훗날 지금의 왕산기념관 옆으로 이장했다.
나는 2018년 여름 허위 기념관을 처음 찾아갔었다. 그때는 목적지 허위 기념관을 한번에 알아듣지 못하는 택시 기사에게, 그것도 택시를 운전하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알 만한 구미 사람이 그곳도 모르냐고 타박했었다. 지금은 택시기사는 알 정도로 방문객이 조금이나마 늘었을까.
허웅배는 중국 하얼빈시 외곽의 상즈현 마자뎬이란 시골에서 일본의 패망을 맞았다. 강압적인 일본군 지원을 피하기 위해 소학교의 임시교사로 일하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 허준과 형 허광배는 바쁘게 움직였다. 할아버지는 의병운동 세대였으나 아버지는 시대변화에 따라 무장투쟁에 힘을 보탠 민족주의자였다. 조소앙, 이완구, 이시영, 이청천, 이범석, 오광선 등 가까운 동지들만 봐도 알 수 있다. 김좌진과는 절친이었다. 광배·웅배라는 두 아들의 이름은 배달의 빛, 배달의 영웅이란 뜻으로 김좌진이 지어줄 정도였다.
박정희 동기 허웅배의 미래를 바꾼 한 마디
허광배·허웅배 두 아들도 자신의 시대에 맞춰갔으나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달랐던 것처럼 자신들도 아버지와는 결이 달랐다. 허광배(1921~?)는 사회주의자였다. 이상조(훗날 모스크바 주재 북한 대사, 김일성과의 갈등으로 소련으로 망명함)가 이끄는 조선독립동맹 북만주특위의 지하 공작원이었다.
어린 허웅배는 소학교에서 일하면서 형인 허광배를 따랐다. 조선독립동맹(김두봉)의 강령과 규약, 이상조가 쓴 '쏘독전쟁과 국제정세' '정의의 전쟁과 부정의의 전쟁'과 같은 문건을 등사기로 찍어 배포하는 일을 도왔다.
구미로 돌아온 허웅배는 그 시대 어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나라 세우기에 나섰다. 1946년 9월 24일 서울 태릉에서 육군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했다. 2기라면 박정희와 김재규가 동기였다.
그런데 채병덕, 정일권, 최경록, 백선엽 등 육사 교관이 전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란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다. 허웅배는 첫 휴일에 외출을 나와서는 아버지의 친구 오광선과 함께 장도빈(1888~1963, 건국훈장 독립장)을 만나러 갔다. 오광선은 일제패망 후에 만주에서 광복군의 확군에 애썼던 인물이고 장도빈은 훗날 단국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역사학자. 장도빈은 허웅배에게 말했다. "거기는 자네가 있을 곳이 못 되네."
▲ 왕산기념관 ⓒ 윤태옥
▲ 왕산기념관의 허위 ⓒ 윤태옥
허웅배는 육사로 돌아가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구미를 떠나 아버지와 형이 있는 평양으로 월북했다. 삼부자가 평양에 모인 1946년, 북조선 인민위원회 선거가 11월 3일 시작됐다. 중앙주권기구로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정식 인민위원회로 업그레이드를 하는 절차였다.
일제 패망 당시 북한의 정국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대략 반분하는 정도였다. 서부인 황해도 평안도는 농업지대로 지주와 소작인이 다수였고, 기독교인와 천도교도가 많았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상대적으로 강했다. 함경도 지역은 공업지대로서 노동조합이 강세였고 사회주의가 우세했다.
해방이 되자 각 지역별로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 등의 자치기구가 빠르게 만들어졌지만 이곳에서도 가장 큰 변수는 점령국 소련이었다. 1945년 8월 9일 0시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했고, 9월 초에는 미국보다 앞서서 38선 이북 점령을 마쳤다.
일제 패망 후 항일그룹의 움직임
일제가 패망하자 많은 조선인들이 귀국했다. 일제의 식민통치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항일 그룹들이 전면에 나섰다. 북한에서 주요한 세력의 하나는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공작단. 이들은 일제의 강력한 토벌에 밀려 1940년 여름부터 만주에서 소련의 연해주로 피신했던 동북항일연군 출신들이었다.
피신한 조선인 중국인 전사들은 소련 군복을 입고 소련의 88여단(동북항일연군 교도려라고도 한다)으로 개편됐다. 이 가운데 조선인들을 모아 조직한 것이 조선공작단이다. 이들은 9월 19일 소련군과 함께 원산으로 귀국했고 곧바로 소련군의 시·도 경무사령부의 부사령관이나 고문, 지역방위 담당 등으로 배치됐다. 처음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진 운동장에 입장한 셈이었다.
또 한 갈래는 소련 국적의 한인들이었다. 이들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했던 사람들 가운데 우수인력으로 차출돼 소련군의 점령정책 기구에 투입됐다. 허가이가 대표적인 인물로 꼽힌다. 이른바 소련파라고 하지만, 이들은 조직화된 정치세력은 아니었다.
세 번째는 김두봉을 수장으로 하는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이른바 연안파였다. 이들은 1940년 국민당과의 제휴를 벗어던지고 황하를 건너 타이항산(太行山)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합작했다. 그들은 해방 직전에 만주까지 진출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지하공작을 벌여왔다. 북한에서는 머릿수가 가장 많았다.
소련은 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한반도 정책이라야 추상적인 기본방침 정도만 있었다. 한반도에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한다는 아주 일반적인 것이었다. 소련군은 일본의 총독부 행정기구를 일체 부정하고 각지의 건국준비위원회나 인민위원회와 같은 조선인들의 자치기구에 주목했다. 소련은 이들을 끌어당기면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반씩 차지하게 유도했다. 함경도에서는 우세한 사회주의 진영을 다소 눌렀고, 평안도에서는 아직 약세인 사회주의 계열에게 성장할 기회를 열어주었다.
소련군은 북한에 친소국가 건설을 준비해나갔다. 각 지역의 인민위원회를 정비하고 통합하면서 10월에는 북조선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열었다. 11월에는 각지의 인민위원회 활동을 총괄하는 중앙행정기구로 북조선 행정국(11.19)을 설치했다.
그 다음은 중앙주권기관으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1946.2.8)를 세웠다. 대표단을 137명으로 구성해 인민위원회 위원(장관) 23명을 선거로 뽑고 위원장에는 김일성을 선출했다. 임시라고 하지만 행정은 물론 입법과 사법까지 망라하는 명실상부한 북한의 국가최고기관이 설립된 것이었다. 그리고 임시가 아닌 정식 인민위원회를 세우기 위해 1946년 11월 선거를 시작했다.
미군정은 일본 총독부의 행정기구와 경찰을 부활시킴으로써, 소련군은 각지의 인민위원회를 통합해 남북 각각의 행정기구를 세웠다. 한반도에 하나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차 회의(1946.3.20)가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만들어진 이후였으니 미소는 물론 국내사정 역시 합의가 도출되기 어려운 상태로 흘러가고 있었다.
▲ 조선독립동맹 ⓒ 봉주영
▲ 왕산의 생가 터 ⓒ 윤태옥
가속화하는 남북 분할점령
북한이 급진적인 토지개혁은 남북의 분할점령을 분단으로 가속화했다.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의 주요정책인 20개조 정강(1946.3.23)을 발표하기도 전인 3월 6일 전격적으로 토지개혁을 실행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상당히 큰 충격이었다.
북한의 토지개혁은 소련의 구상보다 급진적이었다. 중소지주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5정보 이상 경지를 소유한 지주에 대해서는 토지는 물론 가축과 주택까지 몰수하고 아예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경지면적 183만 정보 가운데 55.4%인 103만 정보가 몰수돼 96만 정보가 빈농과 소작농들에게 분배됐다.
현장에서 실제 개혁조치를 집행한 것은 동·리별로 조직된 농민위원회였다. 이들은 종종 임시인민위원회가 당황할 정도로 거칠었다. 극좌를 넘어선 맹동이라고 비판을 받는, 사적인 보복 사례도 발생했다. 그러나 소농과 빈농의 지지가 깊고 넓게 퍼져갔고, 일제의 식민통치에 협조적이었던 중상계층은 일거에 몰락했다. 이로써 북한의 사회경제적 기반은 사회주의로 튕긴 먹줄에 맞춰 정렬돼 갔다. 미국도 남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 토지개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있었지만 북한에 선수를 빼앗기고 말았다.
정치권 역시 같은 방향으로 전개됐다. 조선공산당(북조선 분국)과 조만식의 조선민주당, 연안파의 조선신민당, 천도교의 청우당 등이 결성돼 활발하게 움직였다. 이들은 아래로는 대중의 지지를 확대하며 단계적으로 구축돼 가는 권력기구에 촉각을 세우며 경쟁했다.
그러나 1945년 12월 신탁통치 논쟁은 남에서도 북에서도 판세를 뒤흔들었다. 미국은 자신들이 제시한 신탁통치가 조선인들의 격렬한 반발을 야기했지만, 정작 한반도에서는 소련의 주장인 것으로 오인되자 이를 묵인하면서 시국을 움직여갔다. 소련은 애초 반탁에 가까운 입장이었으나, 연합국 합의인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것을 반소련 행위로 규정해 강하게 억눌렀다.
반탁으로 입장을 정리한 조만식은 연금을 당했다. 조선민주당은 찬탁반탁 논쟁에 당권투쟁까지 벌어지며 민족주의 계열은 급속히 위축됐다. 이들에게 토지개혁은 결정타였다. 북한의 우익계열은 북한에서 투쟁하기보다는 재산도 포기한 채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들이 빠져나가자 북한은 좌측으로 더 기울었고, 남한은 원한을 품고 월남한 이들로 인해 우측으로 거칠게 쏠려갔다. 서북청년단이 대표적이다. 분할점령 일 년여 만에 북한은 소련이란 철제 담장 안에 자기들의 집을 공고하게 지어가고, 남한은 미국이란 기둥에 사방으로 끈을 걸어 텐트를 쳐나갔다.
삼부자는 각자의 앞날을 짐작이나 했을까
▲ 허웅배 ⓒ 자료사진
1946년 가을, 평양에서 다시 모인 허준과 광배·웅배 삼부자는 각자의 앞날을 어느 정도 짐작했을까. 허준은 장남의 뜻을 존중해서 평양으로 갔으나, 자신의 동지였던 민족주의 그룹이 남한으로 귀국하거나 월남했으나 미군정에 밀착한 친일파들에게 밀리는 것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젊은 사회주의 활동가 허광배는 김일성의 리더십이 동족상잔으로까지 몰아갈 수 있다는 것을 낌새라도 챘을까. 하나의 조국을 위해 투쟁했으나 연안파와 갑산파 사이에 권력의 칼부림이 터질 것이라고 잠직이라도 했을까.
허웅배도 그렇다. 그는 월북해서는 북한 내무성 선전과에서 일을 했다. 우연이기는 했지만, 그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옹진반도 북쪽의 38선에 전개한 인민군 포병부대에게 남쪽의 국군 17연대를 향해 전면전 개전포격을 개시하라는 신호총의 방아쇠를 손수 당겼다. 1946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죽어서는 유골의 반은 모스크바에, 반은 북한이 아닌 남한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리라고는 더욱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김일성도 1952년 전쟁 중이라는 힘든 상황에서도 모스크바에 유학까지 보내준 허웅배의 훗날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전협정 몇 년 후에 유학생 신분의 허웅배가 유학을 보내준 자신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 소련으로 망명했고, 사회주의 종주국이자 자신의 가장 큰 후원자인 소련이 청년 허웅배의 망명을 받아 주리라고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허웅배의 묘. 가평에 있다. ⓒ 윤태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