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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행문 >
몽골불교탐방기 (2) |
초원의 황제,
칭기즈칸
글 |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칭기즈칸에 눈뜬 몽골족
지금 세계는 다시 칭기즈칸을 주목하고 있다. 칭기즈칸의 부상은 소련이 무너지고 외몽골이 자유 시장 경제체제에 의한 민주공화국이 되면서 부터라고 본다. 역사상의 인물로서 칭기즈칸은 사라진 적이 없지만, 20세기 초부터 말경에 이르기까지 칭기즈칸의 존재는 아득한 먼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몽골제국의 황제(대칸 大汗) 정도의 인식이었다. 그 이유는 1920년대 전후, 중국 청조(淸朝)의 패망과 러시아 제국의 볼셰비키 공산 혁명의 성공으로 공산주의는 몽골까지 수출되고 그 영향을 받아 1924년 몽골은 공산혁명국가로 독립하게 된다.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을 일으켜 청을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다. 이에 영향 받아서 몽골은 외(外)몽골을 중심으로 1911년 12월 29일 일명 복드 칸국(Bogd Khaanate)인 대몽골국(몽골어:Олноо Өргөгдсөн Монгол улс)을 건국하여 1924년까지 존속한다.
복드 칸(Богд хаан,1869~1924)은 젭춘담바 쿠툭 투(몽골어: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를 말하는데, 티베트 불교에서 유래한 몽골불교의 겔룩빠 최고 수장이었던 지도자로서 활불(活佛)로서 칸의 지위를 부여한 티베트-몽골불교의 서열 3위의 위계를 말한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신정(神政)의 왕과 같은 존재였다. 달라이 라마가 독신 빅슈(비구)라면 제8대 젭춘담바 복드 칸은 대처 라마였다. 복드 칸의 이야기는 나중에 소개드리기로 하고,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마무리하자.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많은 소개서나 자료들이 이미 나와 있기에, 대체적인 역사상의 소개는 피하고자 한다. 칭기즈칸에 대해서는《몽골비사(蒙古秘史》란 책이 있는데,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도 한다. 몽골인들에게는《몽고원류(蒙古源流)》,《황금사(黃金史)》와 함께 3대 역사서로 애지중지한다.《몽골비사》는 칭기즈칸이 1227년에 죽은 다음 몽골 왕실 가족들이 저작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처음에는 위구르 문자로 쓰여 졌다가 나중에 몽골어 문자로 쓰여 졌고, 원대에는 한자로 번역된 것이다. 원대에 몽골어로 쓰여 졌으나 원본은 상실되고, 이 몽골어 본에서 한문으로, 번역된 한문본에서 다시 몽골어로 복원한 판본이 널리 퍼져있고, 영어로 번역되어있다.
《몽골비사》의 내용은 칭기즈칸의 22대 조상 부르테 치노와 코아이마랄로부터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를 기록한 것이지만, 칭기즈칸에 관한 기록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2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테무진의 근원(조상)과 어린 시절에서부터 테무진의 죽음과 오고타이(칭기즈칸 3남)의 통치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몽골족의 3대역사서의 하나인《몽고원류(蒙古源流)》는 17세기 중기에 저작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몽골 민족의 연대기 중의 하나이다.《蒙古黄金史》는 명대의 몽고족의 역사문학 저작이다.《蒙古秘史》《蒙古黄金史》와《蒙古源流》는 몽고족의 3대 역사서로서 몽고연구의 기본 텍스트이다. 특히《蒙古源流》는 몽골불교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몽골불교역사서이기도 하다.
칭기즈칸에 대해서는 독립국가인 외몽골보다 중국의 자치구가 된 내몽골에서 연구가 더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다. 사료가 거의 한문으로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지난 70년간 공산 치하 위성국가였던 외몽골보다는 칭기즈칸 연구에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던 것 같다. 이제 외몽골은 칭기즈칸을 받드는 숭모 사업을 내몽골보다 더 자유롭게 진행하고 있는 듯 하기는 하다. 이제 자기 조상의 위대함에 눈을 떴다고 봐야할 것이다. 90년대 초, 필자가 체감했던 분위기하고는 너무나 다른 분위기다. 내몽골은 외몽골보다는 몽골의 전통을 어떤 면에서는 더 잘 지키고 있다는 느낌이기도 하나, 광활한 내몽골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너무 적고, 도시에는 중국의 한족이 압도적이다. 하지만 초원 지역은 아직도 몽골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유목은 아무 민족이나 하는 것이 아닌듯했다. 그러나 어딘지 몽골족은 위축된 듯 한 느낌을 받았다. 이에 반해서 외몽골은 독립 자유국가이기 때문에 몽골족으로서의 긍지가 크고, 이제 자신들의 정체성을 알아가는 듯했고, 몽골고문자를 습득하고 고전을 번역하는 등, 민족의식이 더욱더 강해지는 것을 체감했다. 70년간 세뇌된 공산사상도 이제 퇴색되어가는 듯했고, 내몽골 자치구의 몽골족과 민족동질성 회복에 눈을 뜬 듯해서 지난 30년간 옆에서 지켜본 증인으로서는 감회가 새로웠다.
한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북이 갈라져, 반세기 이상 대륙과의 접촉이 차단된 상황에서, 중국 만주 내몽골과 외몽골 그리고 더 나아가서 시베리아에 대한 인식이 점점 멀어져 이제는 먼 곳의 이야기가 되어 있는 느낌이다. 이렇다 보니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 종교가 우리 역사와 맞물려있음에도 먼 나라의 전설처럼 여기는 듯 한 한국 지성계의 몰인식은 참으로 안타깝다. 특히 몽골불교 하면 티베트와 가까운 종교로서 우리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듯 한 불교계 식자들의 인식도 답답하다. 한국불교연구는 중국교학과 선불교에 그리고 신라에 너무 편중되어 있고, 철학적 관념론이 너무 우세해서 담론만 무성하다는 느낌이다. 불교연구도 ‘요금원청’은 비중국계 민족이라고 하여 도외시하고 ‘한수당송명’의 중국계 불교나 성리학에 관심을 집중하는 듯 한 분위기다. 요금원청은 북방계 한민족(韓民族)과는 종족이나 언어 면에서 사촌지간이 아니던가.
복드 칸, 티베트-몽골불교 정신적 지도자 서열 3위
복드 칸은 달라이 라마나 판첸 라마와 같은 티베트-몽골 불교의 최고 지도자로서 서열 3위에 해당되는 신정(神政)의 지위이다. 티베트와 몽골은 역사적으로 오랜 교류사를 갖고 있다. 종교적으로 하나가된 것은 몽골제국과 원(元)제국이 패망하여, 고비사막으로 쫓기어 북원(北元)을 세운 후 부터이다. 물론 원(元) 제국시대에도 티베트 불교를 수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오늘날 티베트 전통에 의한 몽골 불교가 착근된 것은 북원(北元)시대부터이다. 몽골족은 한 때 유라시아 영토의 거의 대부분을 정복하여 몽골 제국을 세웠지만, 칭기즈칸의 직계의 황금가족간의 내분과 명(明)의 등장으로 몰락하는 과정을 밟는데, 14세기 원(元)제국은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다. 몽골제국이 무너지자 몽골족들은 다시 자기들의 고대 신앙체계인 샤머니즘으로 돌아갔다. 그 후 1578년 군사지도자인 알탄 칸(Altan Khan)은 칭기즈칸의 후계를 자처하며 신 몽골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갖고, 흩어진 몽골제후국들의 연합운동을 주도했다. 동시에 티베트 불교의 겔룩빠(Gelug 일명 황모파)의 수장을 초청하여 스스로 불교의 보호와 후원자인 의식을 치루고 티베트 불교를 국교로 공식화 했다. 그리고 수장에게 달라이 라마라는 칭호를 부여하고, 자신은 대칸(황제)의 지위를 담보 받은 역사적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티베트-몽골 불교의 서열 3위인 복드 칸(몽골불교최고지도자)의 탄생을 추적해보자. 제1대 복드 칸은 활불(活佛)인 젭춘담바로 추앙하는 자나바자르(Zanabazar1635〜1723)이다. 자나바자르는 티베트 불교의 조낭파(Jonang school)의 대 학승이었던 타라나타(Taranatha 1575〜1634)의 화신(化身)으로 여긴, 할하 몽골의 통치자였던 투친 칸 곰보도르지의 아들이다. 12세기에 티베트에서 성립한 조낭파는 유가파였는데 나중에는 티베트 불교의 다른 파들에 의해서 견제를 받은 바 있다. 제 2대 활불(젭춘담바)로서의 복드 칸은 칭기즈칸 후손에서 출현했다. 청나라 건륭황제의 1758년 칙령 발표 이후에는 티베트인 가운데서 젭춘담바의 화신(化身)이 발견되었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갖고 있는 복드 칸은 1911년 청조의 멸망과 몽골국의 독립과 맞물려서 제8대 복드 칸으로 불리는 젭춘담바(1869〜1924)가 티베트처럼 신정(神政)의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제8대 젭춘담바는 실제는 티베트 정부 고위층 아들로 태어난 티베트출신이다. 그는 소년시기에 티베트에서 제 7대 젭춘 담바의 화신으로 발견되어, 라싸의 포탈라 궁에서 13세 달라이 라마와 판첸라마가 입회한 자리에서 제 8대 젭춘담바로서 복드 칸으로 의식을 치루고 공인되었다. 그는 1874년 우르가(Urga)라고 불렀던 외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로 옮겨와서 살게 되었다. 제8대 젭춘담바인 복드 칸은 바로 몽골의 근대역사 그 자체로서 국외자에게는 흥미진진한 소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가본 분들은 시내 남쪽에 위치한 자이산 가는 길 옆 우측에 복드 칸의 궁(宮)과 사원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명소로 알려진 곳이다. 1911년부터 1924년까지 몽골의 왕으로 재위했던 역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복드 칸(복드 게겐으로도 호칭)은 라마였기에 세속적 의미의 황제로서 권력을 휘두르지는 않았고, 섭정은 총리가 했다. 그가 울란바타르로 옮겨와서 복드 칸에 즉위하자 지역의 왕 족들 가운데서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도 있었으나, 신정의 왕으로서 역할을 수행해 냈다. 이런 가운데 뜻하지 않게 1921년 러시아 군인 지도자인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1885년〜1921년)은 몽골을 침입하여 1년간 몽골을 통치했다. 그는 오스트리아 태생의 러시아 제국의 군인으로, 1921년 몽골을 정복하여 독재정치를 한 인물이다. 티베트 불교에 심취한 그는, 그러나 제멋대로 티베트 불교의 교리를 왜곡하여, 자신을 '살아있는 부처'로 여길 정도의 기행을 하고, 1년간의 몽골 통치기간 동안, 엄청난 수의 몽골인을 학살하여, 몽골의 미친 남작으로 통하는 불명예를 안았다. 몽골 역사상 유일하게 몽골을 직접 통치한 유럽계의 사람이다. 이런 상황아래서 복드 칸은 신정의 왕으로서 당분간 왕권이 중단되었다.
이런 정국의 혼미로 몽골은 혼란에 빠졌다. 이 때 담딘 수흐바타르(1893〜1923) 장군이 나타나서 혁명을 일으켜 인민정부를 세우고 스스로 국방장관에 취임하고 복드 칸의 왕정을 잠정 복구 시켰다. 복드 칸은 1924년 그가 열반할 때까지 제한된 왕권을 누렸다. 하지만, 그를 구원해 준 수흐바타르도 같은 해 결핵으로 죽고 말았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 가면 시내 중앙에 수흐바타르 광장에 동상이 서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수흐바타르 장군이다. 그는 유목민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1년, 몽골 독립 후 건군된 자치 몽골군의 소집을 받고 입대, 하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기관총소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다. 1918년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이 되었는데, 그 동안 중국과 무능한 몽골 지배층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다. 러시아 혁명에 자극을 받은 그는 1920년 6월 허를러깅 처이발상 등과 몽골인민당(인민혁명당)을 결성, 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에 들어갔다. 전후 두 차례에 걸친 레닌과의 회담을 통하여, 몽골혁명의 성공과 그 후의 국가건설을 위한 전술지도를 받고, 1921년 인민의용군을 결성, 그 총사령관이 되어 적군(赤軍)과 함께 마이마친에서 군사를 일으켜, 7월 10일 니슬렐 후레(울란바타르)에 인민정부를 수립하고 스스로 국방장관이 되었다.
몽골국의 마지막 복드 칸, 역사에서 사라지다
이렇게 해서 몽골국의 마지막 칸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몽골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몽골혁명정부가 들어서고, 소련의 위성국가로 전락하게 되었다. 1990년 몽골이 소련의 위성 국가에서 독립할 때 까지 70여 년간, 꼭두각시 노릇을 하게 되고, 불교를 탄압하고 몽골 고유문자를 없애고 키릴문자로 전환하는 문화말살 정책을 쓰게 된다. 90년대 초, 필자가 만난 몽골의 지식인들은 사상적으로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불교를 중흥시키는 지혜를 발휘했다. 70년의 공백이 있었지만, 불교가 워낙 뿌리가 깊게 스며있어서 곧 회복하는 찬스를 잡은 것이다.
복드 칸의 사후, 몽골 혁명정부는 더 이상의 환생은 없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열반에 든 같은 해에 복드 칸(젭춘담바)이 몽골 북쪽 지역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1925년 복드 칸이 또다시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1926년 11월 몽골정부 제3차 대회에서 복드 칸의 환생을 찾는 의식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마지막 금지령이 1928년 몽골인민혁명당 7차 회의와 5차 인민대회에서 결정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드 칸의 환생인 한 소년이 1932년 티베트 라싸에서 발견되었다. 이 사실은 1990년 소련이 무너질 때까지 비밀에 부쳐졌다가 1990년 인도에서 제14세 달라이 라마의 공식 인정 하에 제9대 젭춘담바 쿠툭 투로 즉위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999년에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달라이 라마가 임석한 가운데 거행됐고, 그 때 필자도 참석한 바 있다.
복드 칸, 인도에서 환생, 울란바타르에서 즉위식 거행
그는 1932년 11월 티베트의 라싸의 조캉 사원 근체에서 환생했는데, 그는 생후 6개 월 후에 부모 곁을 떠나서 13세 달라이 라마의 경호원이었던 삼촌 슬하에서 보호받았다. 1933년 13세 달라이 라마가 열반에 들고, 레팅 린포체가 14세 달라이 라마의 환생이 발견되어 즉위할 때 까지 티베트를 섭정했다. 1936년 그 당시 4세였던 잠팔 남돌 쵸기 걀첸(Jampal Namdol Chökyi Gyaltsen)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아이는 3단계의 시험을 거쳐 제8대 젭춘담바의 화신으로 인정되었는데, 정치적 이유로 그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는 7세 때, 티베트 겔룩빠의 3대 사원가운데 하나인 드레펑 사원에 들어가서 공부했다. 그는 일반 라마들처럼 보통 승려의 길을 걷다가 25세 때, 환속하여 결혼해서 자녀를 두기도 했는데, 1959년 달라이 라마와 함께 인도로 망명하였는데,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선전용으로 이용되거나 희생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인도로 망명해서는 티베트어 방송국에서 일하기도 하는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고, 첫 부인과 사별하고 재혼하여 자녀들을 두는 등, 세속적인 삶을 살았으며, 1984년에는 라싸를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 달라이 라마에 의해서 마디야 프라데시 주에서, 1992년에는 다람살라에서 제9대 젭춘담바 쿠툭 투로 공인되고, 1999년 7월 관광비자로 몽골에 입국하여 간덴 사원에서 즉위식을 갖고, 계속해서 인도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2011년 11월 몽골로 와서 수장으로 즉위했으나 2012년 3월 1일 열반에 들었다. 필자도 1999년 그가 칭기즈칸 호텔에 체류했을 때 친견했으며, 2011년에는 그의 사저에서 친견한 바 있다. 당시 분위기로는 몽골불교지도자 급에서는 조용히 관망하는 입장이었고, 재가 지도자들과 일반 국민들에게는 큰 인기가 있었다.
필자는 지난 30년간 꾸준하게 몽골불교와 교류를 지속해 오고 있다. 비단 몽골 불교만이 아닌 세계 각국의 불교와 교류를 하고 있는데, 이 또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외국 불교와의 교류는 바로 한국불교를 해외에 알리는 길이며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세계불교 정보를 얻고 어떻게 하면 종파를 초월해서 불교인으로서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서로 협력하고 연대하여 불교의 위상과 권위를 높이는 일이 때문이다.
국제 불교 교류를 하다보면, 지속적으로 어떤 사명감을 갖고 해야 하며 같은 일불제자로서의 끈끈한 형제애가 아니면 지탱해 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어떤 분들은 보면 금방 뭘 할 것처럼 약속을 해놓고선 귀국해서는 무책임하게 잊어버리는 분들이 비일비재한 것 또한 현실이다. 그동안 몽골-러시아(브랏트 공화국, 바이칼) 불교와의 교류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많은 변화를 보면서 몽골-러시아 불교의 발전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필자로서는 감회가 새로울 뿐이다.
이치란 박사 (원 응 보검)
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아시아불교평화회의(ABCP 본부 몽골) 한국회장
국제불교연맹 이사(IBC 본부 인도)
동방불교대학 전 총장
한국불교신문 전 주필
현: 해동불교대학장
강원불교대학장
WFB 세계불교대학 집행이사
일붕신문 상임논설위원
다나TV 영어금강경 강의
(www.haedongacademy.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