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놀토를 맞이하여 온 가족이 서울 시립 미술관에 갔었다.
20세기 프랑스의 최대 작가인 앙리 마티스전이 열리기 때문이다.
미술관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아들을 달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림을 본 뒤에 가까운 교보문고를 데려가겠다고 한 것이다.
아들이 거길 좋아하는 이유는 책을 사랑해서인데, 다름아닌 만화책^^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교보문고의 키즈가든에 앉아 신간만화를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기에 미술관람 코스를 수락
한 셈이다.
앙리 마티스에 대해 나도 그다지 아는 바는 없었다.
단지 색채를 대담히 쓴 화가라는 정도.
어제 전시회의 정식명인 '마티스와 불멸의 색채 화가전'이 말해주듯이 색채를 자유롭게 표현한
화가들의 전시회가 그걸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3층 복도로 난 기다란 창으로 덕수궁의 석조전이 고스란히 보이는 서울 시립 미술관은
벌써 봄의 생기가 가득한 듯 했다.
일상의 색 관념을 뛰어넘은 야수파 화가들의 그림들이 그림틀을 뛰쳐나와 넘실대고 있었다.
아이들과 편안히 볼 수 있는 아름답고도 순진한 누드속에는 푸른빛, 녹빛 살색도 있었고,
항구의 하늘에는 핑크빛 구름이 포근하기만 했다.
그 구름을 본 아들이 노을이 지는 풍경이라고 말해 주었다.
똑같은 항구이건만 어떤 그림은 지극히 적막하고 쓸쓸한 항구를 말해주는 반면,
다른 그림은 일하고 싶은 의욕을 자극할만큼 생기있고 분주한 항구를 표현하고 있었다.
색채 화가들의 으뜸 소재는 역시 여인과 꽃,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하늘인지 바다인지, 아니면 햇빛이 반사되는 도로인지 모를만큼 자유로운 빛을 내뿜는
각종 색채의 향연을 맛보노라니 나도 모르게 삶의 생기가 솟구치는 듯했다.
맘속에서 충동적으로 뛰고 싶은 느낌을 느꼈다고나 할까?
아님 미술관의 많은 계단을 화라락 뛰어 내려가면 갑자기 밖이 여름으로 변해있을 것만 같은
환상을 보았다고나 할까?
밖은 분명 쌀쌀한 꽃샘바람이 불건만 미술관의 내부는 계절을 혼동하게 만들어 주었다.
소담스런 꽃들이 햇살속에서 웃고 있으리라는 어지러운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었다.
그래서일까?
덕수궁의 석조전이 그리도 따스하게 보인 것도.
덕수궁은 내가 청년의 시기에 자주 찾았던 곳이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이 열리고 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미술이 좋아서.
혼자서 보는 것이 좋아서.
때때로 석조전을 찾았었는데....
이젠 삶의 일상이라는 바퀴에 갇혀 가본지도 오래 되었었는데, 어제 뜻밖에도 미술관에서
석조전도 감상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갑자기 아들이 제안을 했다.
자기와 함께 그림을 그리자고.
얼떨결에 거실 가득 신문지를 깔아놓고 캔바스를 펴고 아크릴 물감과 붓이 가득 든 가방을 열었다.
파레트로 쓰던 무늬없는 하얀 접시위로 물감을 짜고 오랫만에 그림을 그렸다.
마침 신문에 소개된 어느 신문사의 미술대전 그림을 보고 아이 모습을 스케치하고는 성급히
색을 입혔다.
오늘 본 색깔들이 머리속에서 어디로 도망이라도 갈까봐 아주 급하게 붓을 놀렸던 것이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얼굴에 노랑빛과 살색빛, 주황과 녹빛 그리고 어두운 청색까지 덧입혀 주면서
나도 은근 색채의 경계를 넘는 자유를 맛보았다.
아들도 그런 듯 했다.
과감한 보라를 바탕에 칠하는 것을 보니.
아들이 말했다.
이렇게 미술이 재미있기는 처음이라고.
정말 그랬다.
미술 분야에선 아빠를 쏙 빼닮다보니(^^) 그림 실력이 바닥이었고 미술을 싫어했었다.
그런데 어젠 스스로 그림을 그리자고 의외의 제안을 한 것이다.
마음껏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린 아들이 내일도 또 그리겠다고 했다.
"넌 정말 미술이 좋아졌구나! 그러면 잘하게 될거야. 원래 좋아하면 잘하게 되는 것이거든"
어젠 교육의 효과가 기대이상으로 나타난 날이다.
러시아의 아이들이 초등학교때 정규과정으로 미술관과 박물관, 음악회등을 수없이 다녀서
남다른 심미안을 갖게 만든다는 사실을 익히 알기에 나도 그걸 종종 실천하는 것인데,
생각보다 빠르게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아들을 보면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래,,, 뭐든지 좋아하면 잘 하게 되는 것이지.
좋아하지 않아서 힘든 것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