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북평관 [北平館]지표석 : 여진족(女眞族)의 흔적(痕迹)
興仁之門(동대문) 안(內) 충신동 길에 표지석이 근래 안 보입니다.
요즈음 잘 알려지지 않는 야인들의 사신이 머물었던 곳이라 관심을 가지고 보았던 유물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외국 사신을 맞아 접대하던 곳으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태평관·모화관(慕華館)·동평관(東平館)·북평관(北平館) 등이 있었다.
태평관은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기 위해 숭례문 안 황화방(皇華坊)에 두었으며, 모화관 역시 중국 사신을 맞이하기 위해 돈의문 서북쪽에 지었다.
그리고 동평관은 일본 사신을, 북평관은 야인(여진)을 접대하던 곳이었다.
북평관 [北平館] 조선 전기 여진족(女眞族) 사신을 접대하던 곳. 태종대에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성 흥성방(興盛坊 : 오늘날 서울 동대문 근처)에 있었다. 영접도감(迎接都監)의 예에 따라 관원을 두고 관인(官印)을 항시 비치하였으며, 3품 이하 6품관 이상으로 감호관(監護官) 3인, (문화콘텐츠 용어사전)
여진 은 중국의 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과 한반도의 함경도, 러시아의 연해주,
하바롭스크 지방, 아무르 주에서 거주했던 퉁구스 계통 민족이다.
12세기에 들어 여진족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를 무너뜨리고 금나라를 건국했다.
17세기에 중국에 거주하던 여진족은 청 황제의 명에 따라 만주족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반도 함경도 북부에 거주하던 조선 귀화 여진족은 20세기 초까지 재가승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한민족(韓民族)에 흡수되었다
수나라 이후에는 말갈족이라 불리었다.
당나라 초기에는 7개 부족으로 나뉘어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는데,
고구려가 망하자 대체로 발해에 예속되었으며, 일부는 신라에 편입되기도 했다.
여진은 문화적으로 선진 국가였던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기며 그를 통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만족시켰다.
1115년에 후이닝을 수도로 하여 금을 건국했다.
1127년 송의 수도 카이펑을 함락시키고 송을 화이허 강 이남으로 축출하여 만주 전역과 내몽골·화북 지역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했다. 1234년 몽골·남송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본인이 근래 촬영
2016년 02월 25일 본래의 모습 (좌하 모퉁이가 거의 완전함)
여진족 사신들이 동대문 안으로 오기까지
첫댓글 왜 철거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중국의 작란인가, 우리네 친중국파의 작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