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으면 잠이 없어진다더니am 7시 반에 일어났어요. 뭘 먼저 해야 할지 몰라
벅벅 거리다가 일단 은행부스를 찾아갔는데 비가 하루 종일 오게 생겼네요.
등산이나 in 서울은 글렀고, 영화나 한 편 보려고 롯데 시네마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창조의 아침'이 눈에 띄었고 7층에서 내렸어요. 인테리어가 돈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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썼나 봅니다. 이 시간에 불이 환이 켜 있었고 인포메이션이 생각보다 폼이
났어요. 명성은 하루아침에 행운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에예공! 수랩이 컴퍼니로 크려면 좀 더 조직적이고 체계적이 되어야 할 것
같구나. 강아지! 밥은 먹고 다니 나? 다 먹자고 하는 일이니 우리 끼니는
거르지 말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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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박4'가 언제 개봉을 했을까요? 시간이 맞지 않아 티케팅을 보류했고 10
층에서 우리상가 4층을 내려다보니 만만해보입니다. 내가 요즘 사물을 너무
근시안 적으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직도 재미를 찾아 산다는 건 욕먹을
짓이겠죠. 달달한 커피 향을 맡았으니 컴백 홈을 해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 없을 것 같습니다. “~돈 없으면 집에 가서 빈대떡이나 붙여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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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사건'과 '여순 사건'을 한 날로 다루기엔 너무 분량이 많아 부득불
나눠 정리를 한 것이니 중복이나 지루한 연대, 지명 표기를 양해해주시라.
'4.3민주 항쟁'은 침략국이 아닌 해방국의 대우를 받아야할 조선이 일본놈
들이 받아야할 점령국의 처우를 받자, 제주의 지식인들이 이에 항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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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면서(이승만정부의 통치에 반대), 핍박을 받게 되었고, 1948-1954년
까지(7년)제주도민 3만 명이 국가 권력에 의해 희생된 가슴 아픈 역사입니다.
결국 4.3사건의 가해자는 이 승만-하지(미국)-조 병욱(경찰청장)이 거의
확실해 보입니다. 1948년 1월 남 한 단독 선거 안이 명백해지자 남한 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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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정당과 단체에서 잇따라 반대성명을 발표하면서 격렬하게 반발했어요.
한반도 영구 분단에 대한 우려로 단선 반대 대열에는 좌파 진영만이 아니라
우파 일부와 중도파까지도 가세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단독선거 찬반 문제를
놓고 우파 진영도 두 갈래로 나누어져 있던 상황이구요. 이런 정치 흐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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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은 단독선거를 저지하기 위한 강력한 투쟁계획을
세웠고 48년 2월 7일의 전국적인 총파업 ‘2.7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제주도
내 좌익진영은 47년 3월 10일 총파업 이후 이미 핵심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고
궤멸 상태에 있었는데, 미군정은 ‘2.7사건’을 구실로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연행
과 취조를 실시합니다. '남노당'이나 '빨치산'이란 단어는 없어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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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3월 학생 박 용철이 경찰 고문에 의해 사망, 대정리 출신 양 은하 씨가
경찰 구타로 사망, 청년 박행구가 서북청년단에 끌려가 구타 후 총살당하는
등 한 달 새 3건의 사망사건이 발생하고, 이는 제주4.3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고 맙니다. 1949년 2월 4일 제주 읍 동부8리 대토벌을 계기로 많은 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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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희생당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
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더욱 산속 깊숙이 들어갔으며 이곳 ‘시안모루’,‘북받
친밭’까지 와서 은신생활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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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2월 4일 제주 읍 동부8리 대토벌을 계기로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
하고 봉개리에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주민들은 당장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더욱 깊은 산중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주민들은 은신하기 좋은 곳을
찾아 헤매다 더욱 산속 깊숙이 들어갔으며 이곳 ‘시안모루’,‘북받친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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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은신생활을 합니다.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한라산 중허리 오름마다
봉화가 붉게 타오르면서 남로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가 일어났습니다.
350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고,
경찰과 서북청년회 숙소, 독립촉성 국민회 , 대동청년단 등 우익단체 요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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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지목해 습격했습니다. 4월 3일 하루 동안에 △경찰=사망 4명, 부상 6명,
행방불명 2명 △우익인사 등 민간인=사망 8명, 부상 19명 △무장대=사망 2명,
생포 1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으니 이 날의 참사는 잊지 말아야 할 비극이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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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주4.3은 이 날의 무장봉기를 지칭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는 제주4·3에 대해“1947년 3월 1일 경찰
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북청년회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남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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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제주4・3은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우리나라 건국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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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사건입니다. 1947년 3・1절
발포사건과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된 제주4.3은 무장대와 토벌대 간의
무력 충돌과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3만여 명의 인명 피해를 가져왔고, 이는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인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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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5월 10일, 통일정부의 건설을 바라는 여러 정치세력들의 반대 속에 남한
만의 단독정부를 세우기 위한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총선거에는 김 구와 김
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 참가 세력과 많은 중도 계 인사들이 참여를 거부함
으로써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 그리고 일부 중도세력만 출마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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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국회는 3권 분립과 대통령중심제, 국회의 간접 선거에 의한 대통령 선출
등을 요지로 하는 제헌 헌법을 만들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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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정부는 10월 11일 ‘제주도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본토의 군 병력을
제주에 증파시켰습니다. 그런데 10월 19일 제주4.3 진압을 위해 파견하려던
여수의 국방경비대 제14연대가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써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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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 당시 진실·화해를 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여수순천사건으로
민간인 439명이 경찰과 국군에 의해 집단 희생되었고, 희생자가 2천 여 명에
달할 것으로 조사 보고하였으니 제주4.3과 함께 반드시 기억해야하는 역사
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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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년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이때부터 제주도 중 산간
마을을 초토화시킨 대대적인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의
계엄령. 토벌대는 1948년 11월 중순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4개월 동안 중
산간마을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 가림 없이 무차별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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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초토화 작전’을 자행합니다. 학살극은 제9연대장 송 요찬이 1948년 10
월 17일 ‘정부의 최고 지령’에 따라 ‘해안선에서 5km이외에 있는 사람은 이유
여하를 불구하고 총살하겠다는 포고령을 발표하면서 예고됐고, 11월 17일
계엄령이 선포됨에 따라 본격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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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한 미군 정보보고서는 “9연대는 중 산간지대에 위치한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명백히 게릴라부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program of mass slaughter)’을 채택했다”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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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48년 10월 당시 9연대 군수참모를 지냈던 김 정무는 중 산간 마을에
불을 지른 작전을 군 내부에서 ‘초토화 작전’이라고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제주4・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생각한
이승만 대통령은 제주도에 대한 가혹한 탄압을 군에 지시했고 이른바 ‘초토화
작전’은 미국과의 교감 속에 진행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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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토화 작전’에 의해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참혹한 집단 양민 학살이 행해졌으며 4・3사건 전 기간 동안의
희생자 수는 3만여 명으로 추정됩니다. 토벌대는 무장대와 민중의 연계를
막기 위해 중 산간 마을 주민들을 해안 마을로 강제 소개시키고 1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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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의 중 산간 마을을 불 태웠습니다. 소개 령이 내려졌지만 병자・노인・어린이
등을 포함한 일부 주민들은 마을을 떠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이승만 정부는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들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으며 소개 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채 방화와 학살이 이뤄진 마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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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았습니다. 1949년 4월 1일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1948년 한 해 동안 1만
5,00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습니다. 그 중 80%가 토벌군에 의해 사살됐다”
고 기록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부터 1949년 봄까지
겨우 몇 달 사이에 군・경 토벌대의 진압작전과 무장대의 보복 살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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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만 명의 희생되었고 130여 마을이 소개 령 등으로 초토화됨으로써 제주
공동체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여순 사건'은 제주 4.3사건의 연장선
으로 봐야합니다. 제주 토벌대의 부당성 때문에 항명을 한 것이고 친일vs
군인의 첨예한 대립이 희생을 불러일으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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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연대장 '김익렬'이 경찰의 무분별한 진압에 회의를 느껴 '김달삼'과 직접
담판을 지어 동족상잔 상황을 멈추고 귀순 상황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지만,
학살에 적극 가담한 일부 경찰들과 서북청년단, 대동청년단 같은 우익 단체
들의 귀순 방해 공작(오라리 방화사건)으로 인해 최종 실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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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선생의 말에 따르면 제주4.3의 리더였던 '김익렬'이 좌천되어 여수로
갔고 김익렬이 있던 부대에게 정부가 제주투입 몰살 명령을 내린 바, '여순
반란사건'의 도화선이 되었다고 합디다. 당시 조국은 아직 군대가 조직 되기
전이라 경찰 청(조병욱) 예하 별똥부대로 군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경찰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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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 위에 있었고 벌건 대낮에 군인이 경찰에게 자주 봉변을 당한 것도
군대가 경찰서를 공격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서북청년단'
대장인 김 두환이 조병욱과 이승만의 지지를 받아 서울을 장악했고 노조 탄압,
심지어 6.25참전까지 종횡무진 활약한 사실을 '야인시대'에서 확인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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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이정재는 동대문 사단의 오야봉이 되기 직전까지 시경 소속 경찰
근무를 하였고 김영주 경무관과의 악연으로 다시 정치 테러를 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됩니다. 한때 시라소니와 명동 이화룡이 '서북청년단'
소속으로 있었고 시라소니는 조병욱의 개인경호를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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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김 두환이 야당이 되긴 하지만 수많은 인명을 사살하고도 '독립군
후예(김좌진의 아들)'라는 명분을 앞세워 면죄부를 받은 것은 왜곡된 역사
이니 늦었지만 바로 세워야 할 것입니다. 김 두환은 그냥 깡패오야붕입니다.
조센진 야쿠자 오야붕이노 김또깡.
2023.4.15.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