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국수 이야기/靑石 전성훈
꽁꽁 언 대동강이 풀리는 우수가 지나 개구리가 기지개 켜는 경칩도 가고 춘분을 맞이하니, 예쁜 꽃 같은 새색시 치맛자락이 땅바닥을 사악사악 스치듯이 동구 밖 저만치에서 따스한 봄소식이 아이들 밝은 미소처럼 다가온다. 계절이 이렇게 바뀌면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사람들 입맛도 계절을 따라서 변하기 마련이다. 사람마다 음식에 대한 선호도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동장군이 쫓겨나고 생명이 약동하는 봄날을 맞이하는 환절기에, 입맛을 사로잡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향긋한 냉이 된장찌개와 쌉싸름한 냄새의 제철 쑥국이 제격일 것 같다.
냉이와 쑥 향기가 가득한 밥상을 떠올리는 데 갑자기 생각나는 게 누구나 좋아하는 국수다. 일 년 열두 달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게 국수이지만 그중에서도 칼국수는 별미로 그만이다. 뜨듯한 잔치국수와 시큼한 열무 비빔국수 더하여 차가운 얼음을 갈아서 띄어 놓은 김치말이 국수도 좋아한다. 하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칼국수이다. 어린 시절처럼 외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밀가루 반죽을 하여 홍두깨로 밀은 호박 칼국수를 집에서 해 먹는 게 요즈음은 쉽지 않다. 그래서 칼국수를 맛있게 하는 음식점을 유심히 찾아본다. 칼국수도 국물을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서 그 맛이 조금씩 다르고 사람들 호불호도 갈리는 것 같다. 평소 읽는 신문 주말판에 음식코너가 있는데 그곳에서도 칼국수 이야기를 볼 수 있다. 이런저런 알록달록한 고명을 올려놓은 칼국수 사진을 보면 군침이 돈다. 칼국수 육수는 대개 멸치, 사골, 닭, 고추장을 사용하고 더하여 바지락 칼국수도 있다. 나는 바지락 칼국수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지락 칼국수를 먹을 때 바지락을 골라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귀찮고 짜증이 나서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다. 누군가 먹고 싶다고 하면 따라는 가지만 맛있다고 느끼지 못한다. 상대방이 음식 맛이 어떠냐고 물으면 참으로 난감한 기분이 든다. 솔직하게 말하면 상대에게 결례하거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그런대로 먹을 만하다고 말한다. 사골 칼국수, 닭 칼국수, 장(고추장) 칼국수는 국물 특유의 조금 느끼한 맛 때문에 멸치 칼국수보다는 덜 좋아한다. 칼국수를 먹으면서 국물을 한 줌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다 마시는 것은 개운한 멸칫국물 칼국수뿐이다. 칼국수를 잘하는 음식점이야 우리나라 방방곡곡 여기저기 많다. 그렇기에 어디가 가장 맛있다고 이야기하는 게 과연 올바른 표현인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모름지기 음식의 맛이라는 게, 그 음식을 먹을 때의 분위기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때 어떤 기분으로 누구와 음식을 먹는가에 따라서, 같은 음식점의 같은 음식이라도 그 맛이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 또는 가족이나 친구와 먹을 때와, 꼭 성사시켜야 할 숙제를 안고서 거래처 사람과 식사할 때의 음식 맛은 너무나 다르다.
직장생활 할 때 사무실이 남대문 시장 근처에 있어서 시장 골목 칼국수 집을 자주 이용했던 기억이 생각난다. 전날 저녁에 술을 과하게 마시면 다음 날 아침에는 식사하지 못하고 그냥 출근하기도 한다. 그럴 때 시장 칼국수 집을 찾는다. 멸칫국물로 맛을 낸 뜨거운 칼국수에 김 부스러기를 듬뿍 넣어주는 아주머니의 손맛이 그야말로 끝내준다. 국물까지 다 들어 마시고 나면 뱃속이 따뜻해지며 기분도 좋아지고 술도 깨는 듯했던 추억의 칼국수 집이다. 아직도 그 골목에서 장사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가끔 그 집이 그리울 때가 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남대문 시장까지 갈 수 없기에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신창동 시장 칼국수 집을 한 달에 한 번꼴로 찾는다. 멸칫국물 칼국수에 얼큰한 김치 수제비와 수제 돈가스도 있다. 게다가 가격이 다른 곳에 비하여 다소 저렴하여 소위 가성비가 높은 음식점이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내 입맛에는 그만이다. 누구 말처럼 토종 입맛이라서 그런가 보다. (2024년 3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