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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 가해 12월8일 (자)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청주]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이사 11, 1 - 10
† 제2독서 : 로마 15, 4 - 9
† 복음 : 마태 3, 1 - 12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인간 존중과 인권의 신장은 복음의 요구이다. 그럼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되고 짓밟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1982년부터 해마다 대림 제2주일을 ‘인권 주일’로 지내기로 하였다. 교회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된 존엄한 인간이 그에 맞갖게 살아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인권 주일로 시작하는 대림 제2주간을 2011년부터 ‘사회 교리 주간’
으로 지내 오고 있다. 현 시대의 여러 가지 도전에 대응하며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의 ‘새 복음화’ 노력이 바로 사회 교리의 실천이라는
사실을 신자들에게 깨우치려는 것이다.
오늘 전례
▦ 오늘은 대림 제2주일이며, 인간의 존엄성을 되새기는 인권 주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 세례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합니다. 다가오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며 참된 회개를 하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의 시작은 무엇보다도 이 시대에 얼마나
인간의 가치가 존중되고 있는지에 대한 성찰이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으로서의 품위를 잃어 가는 수많은 사람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예고한다. 그는 이사이의
그루터기 곧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태어날 것이며, 주님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아 참평화의 시대를 열 것이다(제1독서).
★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스라엘의 자손으로 태어나신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시고 다른 민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임을 상기시킨다(제2독서).
★ 요한 세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가오는 메시아를 잘 맞이할 수 있도록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말과 행동으로 회개의 삶을 권고하며 메시아께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예언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오늘 복음에 인용된 이사야 예언자의 말입니다. 고대에는
임금이 여행을 떠날 때 길이 잘 나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리하여 곧고 평탄한
길을 닦고자 땅을 고르고 다듬어서 임금이 안전하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은 바로 이러한 맥락입니다. 곧 이스라엘
백성이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를 제대로 맞이하려면 길을 잘 닦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야말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길을 닦는 사람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배 속에 있는 아기는 스스로 영양분과 산소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소중한 생명을 유지하며 탄생의 순간까지 수개월 기다릴 수 있는 것은 탯줄이
있기 때문입니다. 탯줄을 통하여 어머니에게서 영양분과 산소를 얻을 수가
있으니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곧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는 탯줄이 있으며, 그 탯줄을 통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얻고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탯줄이 꼬여 있거나 막혀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아무리 우리에게 은총을 주시려고
애를 쓰셔도 그 은총이 우리에게까지 제대로 전달되기 힘들 것입니다.
이러한 면에서, 오늘 복음의 주제인 ‘회개’는 그동안 꼬여 있거나 막혀 있는
탯줄을 곧게 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은총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은총의 중개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도록 길을 곧게
마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 교리 주간)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태오 3,1-12
본능대로 살지 아니하고
찬미 예수님 , 사랑합니다.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태초부터
영원한 사랑입니다. 그분에 대한 우리의 마음이 흔들렸지 그분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시간 영원한 하느님의 사랑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의 숨, 영을 불어 넣어주신
은혜에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을 보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쩌 가고, 어린 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이사11,6-7).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믿기지 않는 일입니다. 사자나 늑대는
사나운 이빨을 가지고 있고 난폭합니다. 양과 염소, 송아지는 그들의
먹이가 됩니다. 더군다나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
이 말씀은 사자나 늑대가 사나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지만 제
본능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난폭한 습성을 버리고 오히려
양순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에제36,26).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언제
이루어졌느냐 하면 이사야 예언자가 예언한 다음 수 백 년이 지나서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는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리며 먹고
마신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삶이
변했습니다. 몸을 파는 창녀가 제 습성대로 살지 않고 깨끗하고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을 때 “죄 없는 사람이 먼저 돌을 던져라.”하셨습니다. 그러자
나이 많은 사람부터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짓지 마라.”
그는 더러운 습성을 버리고 주님의 자비를 입었습니다.
사납게 굴던 마귀들린 사람이 예수님의 한마디로 온순하게 되었고,
남을 등쳐먹던 세리 자캐오가 자기습성이나 본능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에게 자기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손해를 끼친 사람에게 네 곱절로
갚았습니다. 서로 미워서 등진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죽었던
나자로가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통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기적을 행하시며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이
계신 곳에는 은총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힌
일부를 제외하고는 본능이나 습성대로 살지 아니하고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어부가 그물을 버리고 가족을 놔두고 그야말로 삶의
터전을 떠나 기꺼이 주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리하여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본능적으로 살았을 때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을
박해하고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았습니다. 그가 “나는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며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매달린 강도도 자기 마음대로 살았던 큰
죄인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 예수님께서 왕이 되어 오실 때 저를
꼭 기억하여 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낙원에 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세례자 요한은 유다 광야에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3,20).하고 선포하였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바로
자기 본능대로 살지 않고 악습대로 살지 아니하며 잘못된 것을 버리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저도 하나의 못된 습성이 생겼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컴퓨터 앞에 앉는 시간이 늘어났습니다. 눈을 뜨고 양치질을 하면서
컴퓨터를 켜는 겁니다. 그리고는 뉴스를 확인하고 이메일을 체크하고
있더라고요. 아침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기도하고 준비해야 하는데
성경을 읽으면서도 한눈으로는 컴퓨터에 눈이 가있어요.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미사 봉헌, 아침기도를 끝내기 전에는 컴퓨터를 켜지
않는다.
잠자기 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에는 강론 테이프를 듣다가 자든지
묵주기도를 하다가 자든지 했는데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는 겁니다.
자다가 깨보면 텔레비전이 켜있어요.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도 자기도 모르게 좋은 것을 잃어버리고 나쁜
습성에 젖어 들 수 있습니다. 사실 드라마나 코미디프로를 볼 시간은
있어도 성경을 읽을 시간은 없습니다. 더더욱 좋은 시간을 마련하여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전에는 밤에 자다가 깨면 ‘조금 더 자야 하는데….’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주님께서 기도하라고 깨워주셨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아주 편합니다. 새벽 3시가 되었든
4시가 되었든 성당에 갈 때도 있고, 성모자상 앞으로 갈 때도 있고..
그리고 또 졸리면 잡니다. 어찌 되었든 좋지 않은 습성을 바꾸어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얘기를
하면 그래도 봐 줄 수 있는데 남 얘기를 얼마나 잘하는지 몰라요.
남이야 상처를 받건 말건, 상대방을 위하는 척 하면서 뒤로는 온갖
것을 다 떠벌립니다. 그것이 사실이건, 거짓이건 진실성은 사라지고
자기 본능대로 있는 말 없는 말 다 해요. 평상시에는 ‘저는 말 주변이
없어서…하고 꽁무니를 빼던 사람도 남 을 흉볼 때는 어찌나 그리
말을 잘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주님을 영접하려면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사자와 늑대, 표범이 사나운 입을 다물고
새끼염소나 송아지와 함께 지내듯 사나운 입을 다물고 절제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저 신부님께서
누구에게 무슨 얘기를 들으셨기에 저런 말씀을 하실까? 누굴 두고
하는 말씀일까? 하고 생각합니다. 누굴 두고 하는 얘기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지요. 자기영혼의 상태를 비추어 보고 고칠
것을 고치면 되는데 남에게 먼저 관심을 두고 있으니 그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싶은 대로 다 먹고, 쓰고 싶은
대로 다 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폭음과 폭식을 하고는 탈이 나서
고생하는 사람도 있고요, 사촌이 땅을 사서 배아파하는 사람도 있고
시기와 질투로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더 열심히 노력해서 그보다
더 넓은 땅을 사면됩니다. 그런데 노력은 하지 않고 절망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을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혹시라도 이런 마음이 있다면 오늘 그 본능적인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주님의 길을 마련하고
그분의 길을 곧게 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자리에서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회개한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
(사도 26,20)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니 나의 좋지 않은 습관, 삶의 태도를
한 가지라도 바꿀 수 있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3장 10절에는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 진다.”고 적혀
있습니다. 도끼가 뿌리에 닿아있다는 것은 결국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은총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내일로 미룰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서 마음을 바꿔야 합니다.
작심삼일이 되더라도 지금 좋은 일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좋은 열매를 맺어 주실 것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속에 태워버리실 것이다”(마태3,12). 하셨으니
여러분은 부디 알곡이 되어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벌써 두 번째 대림초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만큼
밝아 졌기를 희망하고 준비된 마음 안에 아기 예수님을 낳아드리시기를
기도합니다. 콜로새서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생활을 함으로써 언제나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온갖 좋은
일을 행하여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더욱 잘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진정한 회개
2013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2주일
언젠가 필요한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 대형 마트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워낙 큰 매장이다보니 그 물건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더군요. 한참을 물건을 찾다가 결국 찾지 못해서 제
근처에서 바쁘게 물건을 정리하고 있는 마트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죄송한데요. 혹시 이 물건이 어디에 있을까요?”
바쁘게 일하고 있었던 이 직원은 얼른 자신의 일을 멈추고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더군요.
“뭐가 죄송한데요? 저희는 원래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라면서 저를
끌고 물건이 있는 곳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생각해 보니 정말로
죄송하다고 말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죄송한 마음을
간직하고 말했던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단지 습관적으로만
‘죄송한데요.’라고 말했던 것뿐이었지요.
아무튼 마트 직원은 제게 장난삼아 그렇게 말했지만,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만 또 입으로만 사과를 외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가
라는 반성을 하게 됩니다.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회개에 대해서도 이처럼 형식적이고
습관적인 것은 아닐까요? 즉, 말로만 뉘우친다고 말하고 실제로는
전혀 뉘우치지 않는 위선자의 모습은 아닐까요?
대림시기에 우리들은 다가올 성탄을 준비하면서 고해성사를 봅니다.
그런데 이 고해성사를 들으면서 아쉬운 분들은 그냥 형식적으로만 죄
고백을 하시는 분입니다. 스스로의 깊은 성찰 없이 몇 가지 죄만을 쭉
나열한 뒤에 스스로 할 일을 다 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앞서
마트에서 그냥 형식적으로 말하는 ‘죄송한데요.’라는 말과 다를 바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이러한 형식적인 뉘우침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을
꾸짖으셨던 것입니다. 이는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바리사이와 사두가이를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말하고 있지요.
여기서 독사의 습성을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독사는 사람을 문 뒤에
곧바로 물로 가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물을 찾지
못하면 죽게 된다고 하네요. 그래서 이 점을 비유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라고 꾸짖었던 것입니다. 즉, 물의 힘으로 죽음의 위험을 벗어나려는
독사처럼 죄를 짓고서는 부리나케 세례 받으러 왔다는 것이지요.
우리의 모습 역시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회개 없이 고해성사만
보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처럼 생각한다면, 우리도 ‘독사의 자식들아!’
라는 꾸짖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뉘우침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이번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러한
회개만이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에서 눈을 떼면 그 밖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삶도
마찬가지다(빅터 프랭클).
마지막까지도 '시신기증'이라는 사랑을 보여주신 아버지의 장례미사가
있었던 주안1동성당.
후회 없는 삶이란?
어제 친구 아버님의 장례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오랫동안 병중에
계시면서 많이 힘드셨는데, 그 모든 힘든 수고를 뒤로 하고 주님 곁으로
가셨지요.
사실 아버님은 정말로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푸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장례 미사 전날에 조문을 하러 갔었는데 장례식장에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오신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
특별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많은 재산을 가지고 계신
것도 아니지요. 단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봉사활동을 하셨던 고인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찾아오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자신의
시신까지도 기증하면서 마지막 돌아가는 순간까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당신 몸으로 직접 보여주셨지요.
아버님의 죽음 앞에서 과연 무엇이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봤던 구절이 생각납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울었다. 내가 세상을 떠날
때 나는 웃고, 사람들은 울어주기를.”
웃으면서 이 세상을 떠나기를, 그리고 이렇게 후회 없는 삶을 살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합니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 명연 마태오 신부 -
◈ [서울] 대림 제2주일
2013년 가해 12월8일 (인권 주일, 사회 교리 주간)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인권을 지켜 주시고, 생명을
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지내면서
소외된 이웃들, 가난한 이웃들, 굶주린 이웃들, 장애인들, 버려지는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해야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남자들과 여자들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조금 다른 것을 봅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가방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 가방 안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잘 모릅니다. 남자들은 보통은 지갑, 열쇠, 손수건 같은 것들을
지니고 다닙니다.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저는 그것은 ‘핸드폰’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새로 나온 ‘스마트폰’은 단순히 전화를 걸고 받는데 익숙한
분들에게는 그 기능이 하도 복잡해서 이해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예전에 핸드폰은 전화를 걸고 받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추가된
기능은 음악을 듣고, 사진을 찍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스마트폰은 손 안에 있는 컴퓨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이메일은 기본이고, 각종 기능들을 다운 받을 수 있어서 원하는 것은
거의 다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희망과 꿈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스마트폰의 다양한 기능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꿈과 희망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나올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솔로몬 왕이 죽은
다음 이스라엘은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분열되었고, 그 두 나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모두 멸망당하였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마치 거대한 나무가 쓰러져서 그루터기만
남은 것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암울하고 어두운 시대에 이사야
예언자는 놀라운 꿈을 이야기 합니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 새싹이
돋을 것이고 그 싹이 자라나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라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아브라함에게 강한 믿음을 주셔서 새로운 민족이 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모세에게 놀라운 지도력을 주셔서 파라오의
압제를 벗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다윗에게 용기를 주셔서 거인 골리앗을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셔서
이스라엘 왕국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하느님의 영은 ‘지혜와 슬기의
영이며 경륜과 용맹의 영’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함께 하면 늑대가
어린양과 함께 놀고, 어린아이가 사자와 함께 놀 수 있게 만든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놀라운 꿈이고, 이것은 어떠한 과학과 기술로도
이룩할 수 없는 새로운 질서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거짓된
영들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나는 할 수 없다는
열등감을 버려야 합니다. 열등감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갈 수 없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입니다. 우리의 상처를 곪게 만드는 미움과 분노를 버려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는 우리의 육체까지도 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러한 행위를 ‘회개’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거짓된 영들을 버릴
수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영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기능의 제품을 만들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은 낡은 영혼을 새롭게 변화시켜 줍니다.
하느님의 영은 이웃의 아픔을 보듬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이사야 예언자가 보았던
꿈이었습니다.
그 꿈은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혜와 슬기, 경륜과 용맹의
영’으로 현실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대림시기를 지내는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이 요청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하느님의 영만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하게 됩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빕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기타] 참된 회개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참된 회개는 사랑에서 나옵니다.'
2013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 2주일 복음묵상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마태오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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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개(悔改)라는 말을 글자로 풀이한다면 ‘뉘우치고 고친다’
는 뜻이다. 이 말에 대해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회개란 그리 간단히 이해되거나 체험되는 말이 아니다.
좀 더 영성신학적(靈性神學的)인 의미로 이해해보자.
참된 회개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되는 조건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아닌 사랑에서만 참되고 건강한 뉘우침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죄로 인한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용서를 청하는 마음은
진정한 의미의 회개가 될 수 없다. 잊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의미의 회개는 하느님 사랑의 체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우러나오는 참된 뉘우침은 받고 있는 사랑에 대해 고맙고 죄송할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할 때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우리의 반응은
죄송함과 뉘우침이다. 그 크신 사랑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못한
삶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결국, 회개란 자신을
하느님께서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 주어지는
자연스러운 반응이자 은총이다.
2.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는 말씀일까? 현실적인 답변을 찾아보자.
이 세상의 삶에는 반드시 끝이 있고, 그 길이도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의식하는 것이다. 우리가 삶과 죽음이라는 시간의
이어짐을 한 눈으로 볼 수 있고 의식할 수 있는 지혜가 허락된다면,
그래서 그 끝을 예상할 수 있다면,
분명 우리의 삶은 보다 건강한 시간을 만들게 될 것이다.
헛된 욕심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힘이 생길 것이다.
최선을 다해 관계의 의미를 이해하고자, 그리고 충실하고자 힘을
쏟을 것이다. 거짓보다는 진실로 모든 것을 대하려고 할 것이다.
무엇이 소중하고 무엇이 덧없는 것인지를 식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길게 남았다고 한들 그 길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해보라.
우리 역시 누군가의 기억으로만 남게 될 그런 시간을 멀지 않은
시간에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열심히 살아야 한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한다.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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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회개의 열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2013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2주일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3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사회교리주간),
이사11,1-10 로마15,4-9 마태3,1-12
회개의 열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림 제2주일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대림 제2주일은 인권주일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인권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도 회개에서 시작됨을 깨닫습니다.
언젠가의 회개가 아니라 하늘나라가 임박한 바로 지금 여기서의
회개입니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 회개의 길뿐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물론 예수님의 평생 복음 선포의 내용을 요악 하는
말씀입니다. 가까이 다가온 하늘나라에 대한 준비의 응답이 바로
회개입니다. 우리 믿는 이들의 우선적 화두가 회개입니다.
회개해야 하늘나라의 삶입니다. 평생 회개의 여정 중인 우리들이요,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만나고 참 나를 만납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말을 바꿔 ‘회개하여라. 주님 성탄이 가까이 왔다.’로 말해도 그대로
통합니다. 대림 제2주일, 주님 오실 날이 한 주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그러니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첫째, 겸손히 주님의 길을 마련하십시오.
바로 회개에 합당한 첫 열매가 겸손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 세례자 요한이 우리 모두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광야가 상징하는바 우리 인생입니다. 광야인생입니다.
바로 이 광야인생에 주님의 길을 마련하는 것이,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욕심내지 말고 겸손히 하루하루 회개를 통해 새롭게 길을 내는
것입니다. 절대로 한 번에 내는 광야인생길이 아니라 하루하루 길을
내어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바로 이 회개의 길을 통해 우리는 주님께
나아가며 마침내 주님과 상봉의 기쁨을 나눕니다.
요한의 풍모가 이채롭습니다. ‘요한은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둘렀다.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이었다.’
바로 단순 소박한 삶을 상징합니다.
부단한 회개를 통한 단순 소박한 삶으로 주님의 길을 마련하라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말씀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바로 이런 자각이 진정한 겸손이요 바로 회개의 열매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일체의 기득권도, 그 무슨 특권도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런 자각에 이르렀던 세례자 요한, 겸손한 사람입니다.
다음 말씀이 이를 확증합니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누구보다 주님을 통해 자신을 잘 안 겸손한 사람, 세례자 요한입니다.
바로 회개에 합당한 둘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서로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입니다.
함께 하느님을 찬양할 때 이런 사랑의 열매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 역시 대림시기 우리 모두에게 주는 말씀입니다.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께서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의 뜻에 따라
서로 뜻을 같이하게 하시어, 한마음 한목소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서로 뜻을 같이 하는 사랑이요, 한마음 한목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 역시 인간적 사랑을 초월하는 하느님 은총의
선물입니다. 우리 수도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찬양에서 오는
사랑의 선물 덕분임을 깨닫습니다. 다음 바오로 말씀도 참 심오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
할례 받은 이들뿐 세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신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 사랑의 근거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일 것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게 회개의 열매인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처럼 서로 사랑의 종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어느 사막교부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네가 진정 어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면,
모든 인간관계에서 죽어지내라(Be dead in relations to every man).
그러면 너는 평화를 누릴 것이다.”
사랑의 종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죽어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어느 형제의 고백도 잊혀 지지 않습니다.
평생 화목하게 산 부부생활의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습니다.
“아내는 평생 나에게 죽어 살았습니다. 지금에서야 그걸 깨닫고 저는
아내에게 극진히 정성을 다해 잘 해 줍니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깨닫습니다. 아내의 죽어 산 사랑을 알기에
아내가 너무 고맙고 사랑스러워 지금은 싸우면 제가 늘 집니다.”
남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평생 사랑의 종이 되어 산 자매입니다.
참 아름다운 부부사랑입니다.
바로 이런 회개의 열매인 사랑을 주님은 미사 중 우리에게 선사하십니다.
셋째, 서로 평화롭게 사십시오.
바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평화입니다. 우리는 방금 ‘이 시대에 정의와
평화가 꽃피게 하소서.’힘차게 화답송을 노래했습니다.
정의와 평화는 한 실재의 양면이자 한 세트입니다.
정의 없는 평화는 공허하고 평화 없는 정의는 맹목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함께 할 때 온전한 정의요 온전한 평화입니다.
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정의평화위원회입니다.
오늘 1독서 이사야를 통해 펼쳐지는 평화의 비전이 참 경이롭습니다.
소주제는 ‘메시아와 평화의 왕국’입니다.
바로 이게 메시아인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이 꿈꾸시는 세상입니다.
사람은 물론 모든 피조물과의 평화가 실현된 낙원입니다.
바로 정의와 평화가 완전히 실현 된 유토피아 이게 하느님의 꿈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평화의 꿈, 평화의 시라 그대로 인용합니다.
평화 운동가들에 샘솟는 영감의 원천이 됐던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늑대가 새끼 양과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도,
사람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니, 바다를 덮는 물처럼
땅이 주님을 앎으로 가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완전히 사람과 온갖 피조물이 완전 평화 상태를 이룬 유토피아의
꿈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답게 평화에 대해 묘사한 글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런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했던 위인을 소개합니다.
지난 12.5일 95세로 타계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만델라입니다.
12.7일자 모든 일간 신문 1면에 사진과 더불어 톱기사는 만델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만델라, 간디와 킹 목사에 비견될 위대한 지도자”라는 평입니다.
그에 대한 어록 중 둘을 나눕니다.
-끔찍한 고통을 겪은 뒤에도 어떻게 증오심을 통제할 수 있느냐?-
“증오는 마음을 짓누른다. 생각을 방해한다. 지도자는 증오를 담아둘
여력이 없다.”
다음은 1963년 중범죄로 기소된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가
피고인석에서의 진술입니다.
“나는 민주적이고 자유로운 사회를 꿈꿔왔다.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동등한 기회를 누리며 사는 사회를 소망해 왔다.
이것이 내 삶의 목적이며, 필생의 목표로 삼은 이상이다.
필요하다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이상이다.”
성경의 예언자들에 버금가는, 예수님의 제자 되기에 손색이 없는
진정 정의와 평화의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살았던 만델라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대림 제2주일, 주님은 세례자 요한을 통해 광야여정 중인 우리 모두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권고합니다.
1. 겸손히 주님의 길을 마련하십시오.
2.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
3. 서로 평화롭게 사십시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회개한 우리 모두에게
겸손의 열매, 사랑의 열매, 평화의 열매를 선사하시어
남은 대림기간 주님의 길을 잘 닦도록 도와주십니다.
“예루살렘아, 일어나 높은 곳에 서서, 하느님에게서 너에게 오는 기쁨을
바라보아라.”(바룩5,5;4,36).
아멘.
- 이 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서울] 예수님의 크심과 우리의 미소함
2013년 가해 12월8일 대림 제2주일
예수님의 크심과 우리의 미소함
저마다 잘났다고들 하지만 등산하여 높은 곳에 오르면 느낌은 달라집니다.
산 아래 있는 사람들은 개미보다 작게, 집도 작은 상자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대자연 앞에서 사람은 겸손해야 된다는 걸 깊이 느끼게 됩니다.
넓고 광활하게 펼쳐진 계곡과 산 봉오리들을 보면서 미소한 자신을 봅니다.
이런 대자연의 힘을 따르고 순응해야 제대로 산다는 것도 터득해야 되지요.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크심과 자신의 미소함을 이처럼 생각했을 겁니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오 3,11)”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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