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가정주부이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채식을 단행한다. 냉장고의 모든 고기를 내다버린다. 남편이 이유를 묻자, 꿈을 꾸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피가 뚝뚝 흐르는 고깃덩어리들 한가운데를 헤매는 꿈이었다. 피 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눈을 보았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이었다. 다른 한쪽에서는 고기 굽는 냄새가 났고 노랫소리, 즐거운 음악소리도 들려왔다. 약육강식, 선혈 낭자한 우리 현대사를 압축한 꿈이었다. 영혜의 채식 결단은 악몽의 현실에서 깨어나는 견성(見性)의 순간이었다. 다른 이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래지어도 하지 않는 여자, 영혜는 점점 말라간다.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은 영혜를 이해하지 못한다.특히 아버지는 영혜의 입을 강제로 벌려 고기를 밀어 넣는 폭력마저 행사한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훈장도 받고, 베트콩도 여럿 죽였다고 자랑하는 그런 사람이다.
약육강식…폭력…통제… 독점자본·권력의 변형 이에 저항하는 방식이 채식
온몸에 잎과 뿌리가 돋아 아예 나무가 되려는 꿈은 타인 향한 절절한 그리움
독점 자본과 독재 권력이 통제하는 '규율' 사회 내에서의 명령과 복종에 순치된 좀비인간인 아버지. 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순간, 그 딸은 아버지에게 또 다른 베트콩으로 보였을 것이다. 자신이 폭력의 도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절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대로 내버려둘 줄 아는 것, 즉 판단 중지는 타자를 인간으로 대접하는 최소한의 예의다. 영혜는 자해로써 저항하고 정신병원에 갇힌다.
영혜는 자신의 몸 중에서 젖가슴만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손도, 발도, 이빨과 세치 혀도, 시선마저도 폭력의 도구로 쓰일 수 있지만 젖가슴으로는 아무도 죽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약육강식의 이 세상이 정신병동인가, 아니면 그 세상을 향해 비폭력 저항을 선언한 영혜가 정신병자인가. 비디오 아티스트인 형부는 영혜를 어느 정도 이해한다. 형부는 영혜의 몸에 아직 남아 있는 연둣빛 몽고반점에서 인간 존재의 식물성, 태고의 것, 광합성의 흔적 같은 평화의 의미를 읽어낸다. 영혜를 화포로 삼아, 온몸에 꽃을 그려 넣는다. 등 쪽에는 밤의 꽃, 가슴 쪽에는 낮의 꽃을 가득 그려 넣는다. 영혜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폭력이 아니라, 어둠과 빛의 조화, 즉 자연의 순리이다. 정신병원으로 다시 실려 가는 영혜의 초연한 눈은 모든 것을 다 담은,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비워진 그런 눈길이다.
언니인 인혜도 동생의 입장을 차츰 이해하게 된다. 집을 나간 남편의 고독도 헤아려본다. 남편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욕조에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면서 남편의 시선으로 세상을 돌아보려 애쓴다. 생각해보니 어릴 적,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했을 때도 자기는 순응했지만, 고지식한 영혜는 곧이곧대로 대응했다.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실은 생존을 위한 비겁함이었다. 기쁨과 자연스러움이 제거된 세월이었다.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느낌마저 든다. 늦게나마 제대로 알려고 노력하는 인생은 아름답다.
정신병원 야외 마당에서 웃옷을 벗어버리고 앙상한 가슴을 드러낸 채 햇살 아래 말없이 앉아 있는 영혜. 작가는 이로써 물신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향해 평화의 메시지를 던지는 불멸의 여인상을 빚어 놓았다. 폭력과 아름다움의 공존을 처연하게 투시한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 극한의 고행 후 피골이 상접해진 수도승, 또는 등신불(等身佛)처럼 강렬한 기운을 내뿜는 영혜는 세계문학이 낳은 또 하나의 인간상으로 남을 것이다. 정신병원을 찾은 언니에게 영혜가, 세상의 나무들은 다 형제 같아, 라고 말하는 구절은 전율의 순간이다. 정신병원에서 영혜는 물구나무를 선 자세를 하고 있다. 거꾸로 볼 때 땅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나무를 닮고 싶었던 것이다. 영혜는 온몸에 이파리가 피어나고 뿌리가 돋아나는 꿈을 꾼다. 타자에 대한 이해를 넘어 타자와 하나가 되는 꿈이다.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가짐이다.
타자와의 절절한 마주침이 없으면 삶의 고양도 없다. 타자의 문제는 사람살이의 절대 화두이다. 괴테는 다소 신중하게 말한다. "타자를 이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타자를 참아내는 능력이라도 길러야 한다." 장자는 보다 시원스럽게 표현한다. 여물위춘(與物爲春)! "타자와 더불어 봄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