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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31일 토요일 [(백) 성탄 팔일 축제 내 제7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 기념 허용 요한 사도는 지금은 마지막 때이며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아 진리를 안다고 말한다(제1독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는데, 그분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으로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고 요한 사도는 말한다(복음).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8-21 18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적’이 온다고 여러분이 들은 그대로, 지금 많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이 마지막 때임을 압니다. 19 그들은 우리에게서 떨어져 나갔지만 우리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 속하였다면 우리와 함께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그들이 아무도 우리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20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에게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21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진리를 알기 때문입니다. 또 진리에서는 어떠한 거짓말도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1,1-18 1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2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3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5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 6 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7 그는 증언하러 왔다. 빛을 증언하여 자기를 통해 모든 사람이 믿게 하려는 것이었다. 8 그 사람은 빛이 아니었다. 빛을 증언하러 왔을 따름이다. 9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10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1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12 그분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 당신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 13 이들은 혈통이나 육욕이나 남자의 욕망에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다. 14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 은총과 진리가 충만하신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을 보았다. 15 요한은 그분을 증언하여 외쳤다. “그분은 내가 이렇게 말한 분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 16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17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다. 18 아무도 하느님을 본 적이 없다. 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께서 알려 주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인간의 몸을 취하시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한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참된 메시아로 고백하며, 그 뜻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올해 초, 우리는 많은 희망을 품었지만, 한 해를 되돌아보면 아쉽기만 합니다. 시련도 많이 겪었지요. 그렇지만 그런 과정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서 사랑의 싹들이 점차 자라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겨자씨와도 같은 ‘나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작년보다는 올해, 조금이라도 나아진 것이 있었고, 하느님께 다가가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지요. 이 작은 변화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더 변하려면 무엇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까? 인간의 소중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고 생명까지 바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을 보면 인간을 위해 헌신하지 않을 수 없지요. 우리 각자, 사람이 가장 귀한 존재임을 인식한다면 세상이 변화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를 위해 우리 스스로 작은 겨자씨가 되어야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올 한 해, 베풀어 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사회를 위해, 우리 공동체를 위해, 가족과 동료를 위해 나의 시간과 재능을 봉헌할 것을 결심했으면 합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고은 시인의 ‘하루’란 시를 읽으며 떠나가는 한해를 뒤돌아봅니다. 저물어 가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하루가 저물어 떠나간 사람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 오 하잘 것 없는 이별이 구원일 줄이야 저녁 어둑발 자옥한데 떠나갔던 사람 이미 왔고 이제부터 신(神)이 오리라 저벅저벅 발소리 없이 신이란 그 모습도 소리도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 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와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산다면 그것 또한 고통일 것입니다. 한번 만개한 꽃이 계속해서 시들지 않는 것도 무척 어색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네 사랑에 이별이 있고, 인생에 기승전결이 있다는 것, 한해의 끝자락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다행한 일입니다. 인생에도 저무는 황혼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황혼 속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착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결론을 내릴 무렵에야 하느님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시 우리는 한해의 끝자락에 매달려있군요. 다들 우여곡절의 한해를 보내고 나서 지난 날을 뒤돌아보니 만감이 교차하겠지요. 복잡 미묘한 감정으로 마음이 많이들 흔들리겠지요. 이런 날은 석양 무렵에 맞춰, 엄청난 새떼가 군무를 추는 철새도래지라도 다녀오면 제격이지요. 그도 아니라면 낙조를 구경하러 가까운 서해안이라도 다녀오고 싶은 날입니다. 어르신들께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한해의 끝에 서니 희망보다는 회한이, 가슴 두근거림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섭니다. 이게 나이를 먹어가는 징조겠지요. 요란스럽게도 이 곳 저 곳에 잡다한 흔적만 많이 남겨놓았지 무엇 하나 제대로 이뤄놓은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아본 지난 한해 주님의 자비 안에 행복했던 날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큰 부족함을 끝까지 참아주셨으니 말입니다. 감사하다고 외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늘을 찌를 듯한 그 숱한 죄와 과오, 부끄러움을 끝까지 인내하셨으니 말입니다.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제게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셨으니 말입니다. 아직 이렇게 살아서 두 발로 서있으니 말입니다. 돌아보니 정녕 우리는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에 은총을 받았습니다. 이 한해의 끝에 선 우리가 결국 해야 할 일은 감사하는 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정녕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묵은 것이 새것과 화해하는 날입니다. 오늘은 절망이 희망과 다시금 손을 잡는 날입니다. 오늘은 고통이 축복으로 변화되는 날입니다. 결국 올 한해의 결론은 감사입니다. 은총의 주님께서는 상처와 고통으로 얼룩진 지난 우리의 한해를 봉헌물로 받으시는군요. 그리고 은혜롭게도 우리 앞에 또 다시 빈 들판 같은 희망만으로 가득 찬 새로운 한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감사하면서, 찬미하면서, 다시 한 번 힘차게 자리를 털고 일어설 때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임마누엘: 사람은 ‘본성’상 혼자이어서는 안 된다 >
연탄길 2’에 ‘어미새의 사랑’이란 제목으로 소개된 짧은 사연입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영훈이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 놀러 갔을 때의 일이다. 친구들과 함께 뒷동산에 올라갔다가 어미새를 따라 둥지 밖으로 나온 새끼 때까치 한 마리를 잡았다. 아직 어린티를 벗지도 못한 새끼 새를 손에 쥐고 신이 나서 집으로 와서 끈으로 다리를 살짝 묶어 감나무 아래 밑동에 매어 놓았다. 그리고 싸리나무로 만든 흑갈색 병아리 막으로 새끼 까치를 덮어 놓았다.
그런데 잠시 후부터 그 감나무 꼭대기에서 새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다. 가만히 보니 분명 때까치였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영훈 머릿속에는 잡혀온 때까치의 어미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불쌍한 새끼새를 빨리 놓아주라는 사촌형의 말에도 영훈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자리에 든 어두운 밤에도 어미새와 새끼 새의 울음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영훈은 일찍 일어나 메뚜기를 잡으러 뒷동산에 갔다. 새끼새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다. 이슬비에 바지가 다 젖도록 돌아다닌 뒤 겨우 메뚜기 몇 마리를 잡아오고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새끼 때까치 주변에 죽은 메뚜기와 거미가 몇 마리 있었던 것이다. “혹시 형이 이 새끼새에게 먹이를 준거야?” “아니” “참 이상하네! 형이 넣어준 줄 알았는데” 아무도 먹이를 넣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면 그 어미가 새끼새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 틀림없었다.
영훈은 그때, 자신이 어린 새를 키울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새끼는 어미새의 보살핌과 사랑 속에 자라야 하는 것이다. 곧바로 다리에 묶여 있던 끈을 풀어 동산으로 날려 보냈다. 새끼 까치가 어미새의 품에서 잘 자라기를 소망하면서....
대수롭지 않은 사연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사랑의 위대함을 많이 보아왔고, 또한 이 사랑이 인간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물이라고 여기는 작은 동물들에게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새끼새를 사랑해도 어미새 만큼 사랑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간을 포함한 세상 모든 생명들은 이런 ‘사랑의 본성’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본성이란 그것이 그것이 되게 하는 절대적인 요소인 것입니다. 만약 기러기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동해야 하는 본성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계절의 변화를 이기지 못하고 얼어 죽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사랑을 받아야 하는 본성 또한 무시된다면 인간이건 동물이건 참다운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26일 태국에서 쓰나미가 단 10분 만에 5,000 명, 30분 만에 13만 명, 그리고 30만 명을 삼켜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성탄절 휴가차 여행을 왔다가 사고를 당했던 한 스페인 가족의 실화를 영화가 근래에 ‘더 임파서블’이란 제목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늘 일 때문에 바쁘기만 했던 ‘마리아’와 ‘헨리’는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아, 세 아들과 함께 태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특별한 문제는 없는 가족이었지만 또한 특별히 사이가 좋은 가족도 아니었습니다. 특히 사춘기를 맞는 큰아들 루카스는 늘 부모에게 불만입니다. 이제는 부모가 거북하고 필요 없게 느껴지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쓰나미로 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을 때 루카스는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엄마는 물에 휩쓸려가는 루카스를 잡기 위해 자신이 잡고 있던 나무를 포기합니다. 그러다가 심한 상처를 입게 됩니다. 루카스는 자신을 위해 부당당한 엄마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며 다시는 말썽부리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빠와 동생들을 찾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성탄 선물은 여행이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며 살아왔던 가족간의 사랑이었음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어떤 때는 가족의 울타리, 또 그 사랑이 부담스럽고 거북할 때가 있습니다. 혼자면 더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그러나 사랑은 본성입니다. 그 본성이 무시될 때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성탄절에도,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랑의 표징으로 사람이 되셨어도 우리는 그 사랑보다는 세상의 즐거움으로 더 자신을 채우려고 합니다. 마구간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보다는 베들레헴의 도시의 어지러움을 택합니다. 그렇게 올 해 성탄절도 그냥 지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또 그래서 외로우면 절대 인간답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낳아주신 분, 즉 우리의 창조자의 사랑이 아니면 결코 만족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그 사랑을 인정하려면 먼저 지금 내가 그분 없이 외로워하고 있다는 것부터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끊임없이 내 외로움을 전혀 상관없는 것들로 채우려하다가 끝나고 맙니다.
저도 어렸을 때는 혼자라는 생각을 해 보지 않았습니다. 가족은 물론이고 제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때 절대고독이 무엇인지 느껴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엔 혼자라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저는 평택 시골에서 수원까지 봉고차를 타고 통학하였는데, 친구들도 사귀고 공부도 하면서 평범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친구가 불량배에게 길에서 끌려갔다고 해서 저는 불량배들이 모여 있다는 곳까지 혼자 친구를 찾아갔고, 또 반 친구가 불량학생에게 맞고 있을 때 저 혼자 그들과 맞선 적도 있습니다. 영화가 애들 다 망친다고 하는 말이 바로 이런 저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그 땐 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름대로는 우정을 중요시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싸움 잘하는 친구와 시비가 붙게 되었습니다. 물론 싸우지는 않았지만, 학교 쌈짱이라고 하는 학생에게 맞서는 제가 어리석어보였는지 저의 친구들은 모두 저를 나무랐습니다. 제가 잘못했더라도 친구들은 저의 편을 들어줄 줄 알았는데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저의 편을 들어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던 것입니다.
고등학교, 한창 공부에 열중해야 할 때였지만 저는 ‘결국엔 세상에 나 혼자구나.’하는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나 자신도 모르게 외롭다는 말을 흘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우울하게 다니자, 한 개신교 신자 친구가 우리가 다 아는 상투적인 충고를 저에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너와 함께 계신데 왜 외로워~?”
저는 성당을 다니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속으로, ‘웃기네!’ 하면서 그냥 넘겨버렸습니다.
‘나도 성당 오래 다녔는데 그걸 모르겠냐?’
그러나 학교 갔다 왔다 하면서 그 말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제가 느끼는 외로움은 사람이 채워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사실 친구들이 있을 때도 외롭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조금 외로움을 채워 줄 수는 있었지만 영혼의 외로움은 채워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친구들의 우정으로 제 외로움을 채우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신앙은 있었지만 진정으로 그분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고 느끼고 있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 이후로 외로운 생각이 들 때마다 예수님이 옆에 계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자 저는 외롭지 않았습니다.그 때 처음으로 예수님은 제 마음에 ‘임마누엘’이란 이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처음으로 저와 함께 계셔주신 것입니다. 아니 항상 함께 계셨지만 처음으로 그분을 진정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아메리카 인디안들은 소년들의 용기를 훈련하는 독특한 방법을 썼습니다. 이들은 소년들에게 숲 속에서 야생동물들과 함께 밤을 지내게 만들면서 소년들의 담력을 키웠습니다. 시험을 받는 날 밤, 소년은 얼마나 무서움을 느꼈겠습니까? 그러나 날이 밝아오면서 소년은 그의 아버지가 가까운 나무 뒤에서 화살을 당긴 채 지키고 있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바로 보이지는 않지만 나와 함께 계셨고 나를 지켜주셨던 그분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인간답게 살 수 없음을 인정해야합니다. 내가 부모의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못하고 외롭다면, 이젠 나에게 주어진 본성상 나를 존재하게 하신 분의 사랑이 있어야만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음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혼자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때, 그렇게 내 마음을 고요한 마구간으로 만들 때 그 마음에 오늘 예수님께서 태어나셔서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선물하실 것입니다.
♣ 우리 가운데 오시어 함께 사시는 빛이신 말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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