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하게 앉아 뜻을 세우지 않고
촌음의 시간을 아낄 줄 모른다면
경전과 논을 수련한다 하여도
담벼락이나 바라보고 있는 줄을 어찌 알리.
(자계)
1. 출가한 왕자
고려 문종(11대 임금) 때의 일이다. 1065년 그러니까 의천이 열한 살 때였다.
문종은 가족들을 모아 놓고 자그마한 잔치를 베풀고 있었다. 문종과 왕비 그리고 여러
왕자들이 모인 자리였다. 문종은 왕자들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 중 누가 출가하여 불법을 닦겠느냐?"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하는 나라였고 왕실에서 불교를 크게 장려하였다. 8대 임금인
현종이 어릴 때 출가한 적이 있으며 10대 임금인 정종(문종의 형) 때부터는
사자 출가가 시행될 정도였다. 사자 출가란 왕자가 넷이면 그 중 하나를 출가시켜
불법을 닦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왕자를 부처님께 바친다는 문종의 발상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자 곧 넷째인 의천이 일어나 말했다
"제가 출가하여 불도를 닦겠습니다. 부처님의 생각과 뜻으로 모든 사람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정진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원효 스님이나 의상 스님과 같은
훌륭한 스님이 되어 보겠습니다"
어머니인 인예 왕후는 아들의 출가를 섭섭히 여겼으나 아버지인 문종은 크게
기뻐하였다.
그 해 5월 의천은 머리를 깍고 영통사에서 출가하여 경덕 국사에게서 화엄학을
배웠다. 경덕 국사는 의천의 외숙부뻘 되는 사람이었다. 의천은 출가한 지 5개월 만에
구족계(중이 지켜야 하는 계율)를 받고 완전한 승려가 되었다.
의천은 늘 송나라에 가서 더 배우고 싶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왕인 문종이 허락치
않아 실행하지 못하다가 부왕이 죽자 몰래 송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1년이 넘게
송에 머물면서 여러 종파의 고승들을 만나고 여러 종파의 문헌을 수집하였으며
천태종의 교의를 집중적으로 토론하고 폭넓게 불교의 교리를 습득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귀국하여 한국 천태종을 열었다
2. 고려의 불교
고려가 불교 국가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태조인 왕건은 통일의 과업이 부처의
힘으로 이루어졌다며 전국에 사원을 세우고 고승을 모셔 스승으로 삼았다. 그리고
국가적인 이념을 수립하는 과정에서도 불교가 지도적인 역할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려 불교가 국가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이면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었다. 문제는 신라 불교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신라 불교는 원래 종파가 뚜렷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파쟁도 심하지 않았다.
여러 경전을 두루 공부하여 통합적인 불교를 이룩하고자 하는 기풍이 오히려
지배적이었다. 또 원효에 의해 왕실 불교 귀족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고 민종 불교를
이룩하자는 운동이 나타나면서 더욱 생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고 백 년이 지나자 온갖 재화를 그러모아 부귀를 누리는 귀족과
그 때문에 더욱 큰 희생을 치러야 하는 백성들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또 불교계도 귀족 불교를 추구하는 세력과 이에 반대하여 지방 호족이나 반란
세력들과 손잡고 민중의 불만을 수럼하여 혁신을 표방하는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이 분열의 구체적인 모습이 오교구산으로 대표되는 여러 종파의 난립이었다.
중앙의 귀족 불교는 교종으로 굳어지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과 깊이 연계된 선종의
고승들은 이에 반기를 들고 각기 새로운 교단을 열었다.
이때 불교는 여러 종파로 분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 종파 안에서도 통일을 기할
수 없을 ㅈ도로 심각하게 분열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고려 왕조는
수립되었고 태조 왕건도 이 문제를 모두 해결하지는 못했다.
그 후 고려에서는 불교를 통합하려는 노력이 계속 진행되었다.
광종이 이 일을 앞장서서 수행하였고 의천 역시 그 일의 선두에 섰다. 그러나 통합은
선종은 선종대로 결속하고 교종은 교종대로 결속하는 데 그쳐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넘어서는 차원 높은 통일적인 불교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의천의 생각이었고 그의 사상의 핵심이었다. 그는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는
새로운 종파를 열었다. 바로 천태종이었다.
3. 원효를 계승하고자 하다
출가한 의천은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학문에 용맹 정진하였다.
'고려사'에 의하면 의천은 늘 배우기를 좋아하였고 타고난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다고 한다. 김부식은 의천에 묘비명에 쓰기를 의천은 일정한 스승을 두지
않고 도가 높은 사람이면 누구에게든 쫓아가서 배웠으며 대승 불교와 소승 불교의
경전은 물론 유교의 경전과 역사 서적 및 제자 백가의 사상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그 많은 사상의 본질과 핵심을 꿰고 있어 논의를 펴는 데 막힘이 없을
정도였는데 이렇듯 지식과 덕망이 높았으면서도 스스로는 늘 부족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학문에 정진한 덕에 그의 나이 13세에 스승인 경덕 국사가 죽자 스승의
강의를 대신 맡게 되었고 훌륭한 강의로 인하여 온 나라에 명성을 드날리게 되었다
이때 그는 문종에게서 우세라는 호와 함께 승통의 직책을 받았다. 우세란 넓은
지혜와 덕으로 '세상을 도우라'는 뜻이고 승통은 승려들을 다스리는 직책이다
의천은 특히 원효를 사모하고 추앙했다. 그리고 그를 계승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원효에 대한 그의 마음이 얼마나 지극했던지 경주 분황사를 찾아가서
원효에게 제사를 지내는 글을 지어 올렸다. 그는 법을 구하는 사문 의천이 '해동
보살'인 원효에게 글을 올린다면서 그 동안 풍속이 야박하고 어지러워져 사람은
떠나가고 도가 멸했으므로 내려 주신 가르침을 이을 길이 없다고 한탄하였다.
그리고 원효가 나서서 만 가지 다툼의 실마리를 화ㅎ시키고 일대의 공정한 논의를
내놓았다고 찬양하면서 원효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고 하였으며 원효의 후계자가
되겠다고 다짐하였다.
이처럼 원효를 칭송한 의천이 원효에게서 계승하겠다고 한 것은 화해와 통일의
사상이었다. 앞 장에서 서술했다시피 원효는 우리나라의 '통불교' 전통을 수립한
고승이다. 당시 중국에서는 10여 개의 종파가 서로 시비를 다투며 논쟁하고
있었는데 원효는 당대에 한역된 불교 경전 약 오천 군을 섭렵하고 난 후 그러한
다툼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툴 만하지 않은데도 다투고 있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많은 경전이 그 내용은 서로 달라도 궁극적인 취지는 똑같이 '부처가
되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경전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같은 수학
책이라도 학년별로 다른 것처럼 사람의 정도에 맞추어 인도하른 방편일 뿐 최종
목표는 한결같이 부처의 경지로 끌어올리는 것이기 때문에 시비할 이유도 논쟁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원효는 하나의 불법으로 모든 종파를
회통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종파를 아우르고 위와 아래를
아우르는 민중 불료고서 전환할 수 있었다.
의천도 분열된 불교를 통합하여 국가 불교를 이룩하고자 하였다. 그를 위해 의천은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용하는 방침을 택했다. 그리고 천태종을 교리 자체가
선종을 수용하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일에 적합하다고 보았다. 그러면 의천이
불교 통합의 기초라고 여긴 천태종이란 어떠한 사상인지 살펴보기로 하자.
4. 천태종
천태종은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아 지의가 완성한 불교 사상으로 중국에서
최초로 성립된 종파이다. 지의가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하여 천태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삼는 것은 그것이 부처가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을 때의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은 부처가 열반한 당시에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천태종에서는 이를 '오시 판교'라 하여 부처가 설법한 시기를 다섯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첫째시기:도를 이룬 뒤 21 일간의 설법으로 대승을 가르침(화엄경)
둘째시기:12년간 녹원에서 강의한 때(아함경)
셋째시기:그 후 8년간 대승을 설법한 시기(방등경), (유마경)
넷째시기:21 년간 반야를 강의한 때(반야경)
다섯째시기:열반할 당시(법화경), (열반경)
이처럼 천태종에서 부처 가르침의 진수를 담고 있고 다른 경전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법화경'의 내용은 이전의 여러 가르침은 모두 방편이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회통하여 귀일한다는 것이다. 범부을 인도하고 그 다음에는 소승을 배격하고 대승만
내세우는 두 단계를 거쳐 마지막으로는 대승과 소승이 하나임을 밝힌다는 것이다.
천태종의 중심 사상은 진실한 본마음으로 세 가지를 본다는 일심삼관, 우주의 삼천
가지 법이 하나의 생각에 달려 있다는 일념삼천, 세 가지의 진리는 하나로 원융되어
있다는 삼체원융이다
1. 일심 삼관:진실한 본마음으로 세 가지를 본다는 것은 이 현상의 세계가 공이라는
것을 보며 또 현상의 사물은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허상이라는 것을 보고 나아가
마침내 공이나 허상의 어느 일면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참된 본체인 중을 본다는
것이다.
2. 일념 삼천:삼천이란 전생 현생 내세의 삼세에 두루 갖추어져 있는 삼천 법계를
말하는데 이를테면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도 천도 부처 등등의 세계이다.
그런데 이 세계가 모두 일념에 달려 있다는 것은 지옥과 부처의 세계가 다 마음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마음 먹기에 따라 지옥에 떨어질 수도 있고 부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가을의 국화 한 송이에 우주 전체의
움직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3. 삼체 원융:삼체란 세 가지의 진리이다. 즉 모든 것은 공이라는 공체 모든 사물은
허상이라는 가체 그리고 공과 가를 포함하면서도 또 그것을 넘어서는 절대 본체인
중체를 말한다. 원융이란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뜻이니 이 세 가지 진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융합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깨달아야 진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천태종에서는 천지 만물이 비록 천차 만별의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다만
마음에서 생긴 허상에 불과하며 진실한 본체는 마음을 바로 가짐으로써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음이야말로 가장 근본이 되는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천태종은 화엄종보다 더 실천적인 성격이 강할 수 있고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하는 선종도 포용할 수 있는 것이다.
5. 천태종을 세워 국가 불교를 정립하다
의천은 이 세 가지 중심 사상을 계승하고 전파하면서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과
마음 공부를 통한 깨달음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교관병수를 주장함으로써 교와
선의 일치를 주장한다. 말하자면 경전 공부를 통한 깨달음만을 주장하는 교종과
참선의 실천만을 강조하는 선종을 통합하기 위하여 둘을 다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천은 당시의 교종과 선종의 문제를 이렇게 말하였다.
교를 배우는 자는 대부분 안을 버리고 밖을 구한다. 선을 닦는 자는 인연을 잊은 채
내면만 관조하기를 좋아한다. 모두들 자기 쪽에만 치우쳐 거기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대각국사문집)
의천은 마음을 버리고 바깥에서만 진리를 구하는 것과 바깥을 버리고 마음에서만
진리를 구하는 것에 모두 반대하면서 양면을 아우르는 교선일치를 주장하였지만
평면적으로 두 학설을 합친 것이 아니라 교종을 중심으로 하여 선종을 포용하는
형태를 취하였다. 의천은 선종의 '불립 문자', '이심 전심', '견성 성불' 등의 이론을
비판하면서 이러한 것은 아주 뛰어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보통의 사람들은 교종의 경전을 열심히 배워야 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귀족 불교의 전통인 교종을 중심으로 하여 그 체계를 세웠지만 인간은 누구나
불성을 가지고 있어서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누구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하여 개방성을
한껏 살렸다는 점에서는 화엄종보다 일보 진전을 이루었다.
의천의 이러한 통합 운동은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7년 국청사라는 대사찰이
완성되자 그 절의 주지가 되어 천태종을 강의하였을 때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이
1000여 명이 넘을 정도였고 2년 뒤 천태종을 세웠을 때에는 당시의 고승들이 제자를
이끌고 와서 의천의 제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부터 불료의 주류를 이루었던
선종의 승려들이 열에 예닐곱은 천태종에 귀의하면서 천태종은 국가 불교로서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 되었다.
6. 고려 속장경의 간행
의천은 원효를 계승한다고 하였집만 민중 불교를 계승한 것은 아니었다.
왕실 불교와 국가 불교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불교계의 통합을 위하여 그의 화쟁
사상을 계승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불교를 정신적 지도 원리로 삼아 국가를
통합함으로써 불교 국가를 이룩하고자 했던 당대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불교계의 통합을 위하여 천태종을 표방한 의천은 그러한 교리를 설득력 있게
전파하기 위하여 불령 간행 사업을 벌였다.
그는 송나라에서 돌아오자 그 동안 수집했던 불경을 정리하였다.
먼저 교장 도감을 설치하고 경전을 간행하였다. 요나라 송나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한
4000여 권의 서적과 원효를 비롯한 국내 고승을의 전적을 합하여 모두 4740권의
속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이를 고려 속장경이라고 한다.
의천은 불교 경전의 간행에 힘ㅆ을 뿐 아니라 폭넓은 견문과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을 남겼다. 속대장경의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세 권을
비롯하여 화엄 경전의 핵심 사상만을 정리한 '신집원종문류', 22권 불교 사상 공부에
도움이 되는 문장을 모은 '석원사림' 250권 등이 있고 제자들이 그의 설법과 문장을
모은 '대각국사문집' 23권이 있다. 게다가 화엄경을 국어(당시의 이두)로 번역하여
강의한 것이 300여 권에 이른다고 하지만 그 중 몇 권만이 전해지고 있다.
7. 높은 경지에서도 쉼없이 정진하다
의천은 평생을 불법을 닦으며 나라의 기강을 잡고 국민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닦은 불법으로 세상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는 는 스스로
경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선종의 한 승려에게 준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해인은 고요하게 만물을 비추는 바다
모든 것이 커다란 도량인 것.
나는 바아흐로 교를 전하기에 급하고
그대는 또한 참선을 하기에 바쁘다.
참된 뜻을 얻는다면 둘 다 아름답겠으나
정을 따르면 양쪽이 상처를 입는다.
모든 것이 하나이니 어찌 위하고 버릴 것이 있겟는가.
법계가 바로 내 고향이다(기현거사)
교종과 선종의 승려가 각기 자기 길만 주장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꼬집으면서
자기 일만 주장하며 바쁘게 움직일 것이 아니라 무한한 진리와 합치되어 법계가
내 고향이라는 데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야 할 과제가 있고 그 과제는 만만치 않았다.
인심이 어지러워지고 풍속이 야박해져서 도가 멸할 지경인 상황을 바로잡아야 했고
나라의 힘을 한곳에 모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적인 통합을 이루어야 했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그는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한가하게 지내면서 뜻을
세우지 않고 시간을 아껴 수련할 줄 모른다면 아무리 경전 공부를 많이 하여도
담벼락을 마주보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자신을 조이는 끈을 늦추지 않았다.
자기의 마음을 다잡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의천이 교종과 선종을 포용하는 일에서 성과를 보았다지만 완전한 통합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 귀족 불교를 누르면서 국가 불교를 이룩하기 위하여 선종을
포용햇지만 그 근본에서는 귀족 불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선종의 많은
승려들이 천태종에 귀의하긴 했지만 선종은 천태종에 흡수되지 않았다. 오히려 선종은
귀족 불교의 밖에서 명맥을 유지하면서 그 나름의 춤직임을 보였다.
그것은 원효를 계승한다면서 추진한 통합 운동이 귀족 불교와 민중 불교로서의
불교를 아우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았던 데서 보이는 한계이다. 선종도 이미 민중
불교로서의 생기를 잃었고 화엄종 천태종 등은 이론이 아주 번잡하고 난해한 데다
특정한 귀족 계층과 결합해 있었다. 그리하여 완전한 종파의 통합을 이루고자 한
의천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종파를 하나 늘려 놓는 결과를 낳았다. 의천은 꿈을 다
이루지 못한 채 젊은 나이인 47세에 열반에 들었다. 왕은 대각 국사라는 시호를 내려
그의 덕을 기렸다.
의천이 채 이루지 못한 불교 통합의 꿈을 다시 들고 나온 이는 고려말의
지눌이었다. 의천과 더불어 고려 불교의 쌍벽을 이룬 그는 그러나 의천과는 다른
방향에서 통합을 모색하였다.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포용하려 한 것이다.
첫댓글 의천은 왕족 귀족을 위한 불교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