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18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대제사장 여호수아
슥 3:1~5
<예수 믿는 믿음>
영이신 하나님!
육신으로 살아가는 우리 인간의 눈 즉,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분입니다.
육신의 귀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방식으로는 만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형식으로는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어떻게,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하려면,
우리 안에 죽어있던 영이 살아나야 합니다.
죽어있던 영이 되살아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은 육신으로 한평생을 살아갑니다.
생애를 마치고 숨을 거두면 육신은 땅 속으로 들어가고 영이 살아납니다.
예수를 믿었든지, 안 믿었든지 간에, 사람이 죽으면 영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은 말하는 겁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육신의 죽음은 곧 영의 살아남이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영의 살아남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육신이 살아있는 중에 영이 살아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구지요? ~ 예수 믿고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들인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믿지 않으면 육신이 죽을 때까지 영은 죽어있습니다.
예수 믿음으로써 살아있으면서 영이 되살아납니다.
믿음이 귀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음은 육신으로 사는 동안에, 영이 살아나서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 믿는 자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을 기억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철학의 등장>
고대에는 사람들이 어렴풋이 신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 “신과 잘 사귀어야 한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신을 노엽게 하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신전을 짓고, 돌탑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신에게 지극정성으로 제사를 지내고 희생제물로써 사람까지 바쳤는데 효과가 미미했습니다.
여전히 쓰나미가 일어나고, 태풍이 불어 건물을 날려버립니다.
장마가 한 마을을 휩쓸고 지나갑니다. 또 전염병이 덥쳐 옵니다.
사람들이 신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인류가 신에게 지극정성을 다 했지만 소용 없다’라는 의식이 점점 싹이 틉니다.
☞ 이때 생겨나는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이 세상에서 신은 어떤 존재인가?’
과연 있기는 한 것인가? 있다면 어떻게 인간과 교류할 수 있는가?
등등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철학이 출발하자마자 신은 있지만, 그들에게 제사를 지낼 필요는 없다는 학파가 나옵니다.
신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신을 섬기고 예배하거나 제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지요!
☞ 대표적으로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입니다.
주전 3세기 그리스 아테네에는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가 있었습니다.
이 두 학파는 신은 있지만, 인간 세상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들은 신들끼리 ‘최고 천’ 즉, 최고의 하늘, 영어로는 ‘엠파이린 empyrean’이라고 합니다.
신들은 자기들끼리 엠파이린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인간은 인간들끼리 행복을 찾아서 누리는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에 행복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인간의 노력으로 인간이 죄악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 있을까요?
☞ 성경은 아니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가장 복되고 귀한 것 ‘믿음’>
성경은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신이심을 선포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라고 천명합니다.
성경만큼 하나님과 인류가 교감하는 것을 진정성 있게 드러내는 책은 없습니다.
☞ 무엇보다도 우리가 증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증인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하면서 숱한 간증 거리를 쌓아왔습니다.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고,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기에 합당한 분이라는 증거는 바로 ‘나’입니다.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복입니까? 할렐루야~ 아멘!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면서 얻은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겨자 씨’보다도 작지만, ‘믿음’입니다.
참된 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중의 복이요, 가장 큰 선물입니다.
☞ 이렇게 귀한 믿음을 우리가 확인하고 오늘 본문에서 주는 은혜를 받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가장 중요한 기초입니다.
우리는 항상, 이 믿음을 간직하고, 이 믿음 안에서 예배하고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스가랴 서>
온고을교회가 수요일 예배에 스가랴 서를 텍스트로 설교하고 있는 중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8번의 환상을 보고, 그 내용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 환상은 ‘먹줄 환상’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뿔 환상’입니다.
세 번째 환상은 ‘불 성곽 환상’입니다.
‘먹줄 환상’은 먹줄을 띠워 심판과 구원을 이루시는 환상입니다.
‘뿔 환상’은 이스라엘을 들이받은 네 개의 뿔을 대장장이로 하여금 짤라내는 환상입니다.
‘불성곽 환상’은 하나님이 불로써 예루살렘 성곽을 둘러쳐 보호하겠다는 환상입니다.
오늘부터 3장입니다.
스가랴 3장에는 스가랴 선지자의 네 번째 환상이 시작됩니다.
네 번째 환상에는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등장합니다.
네 번째 환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알아야 합니다.
‘대제사장’ 하면 여러분은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예수님을 십자가 사형에 처한 대제사장 가야바와 안나스!’
우리 기억에 ‘대제사장’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대제사장, 육신으로 사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때 매우 중요한 직분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부정적 이미지로 못이 박혔습니다. 왜 그렇지요?
직분을 가진 제사장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직분이 오를수록, 직분이 오르는 만큼 타락을 경계해야 합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께 제사를 올리는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올리고자 하는 백성들의 예물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받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손을 댑니다.
그리고 자기의 높아진 직분을 가지고 마치 세상의 권력처럼 휘두릅니다.
이러한 타락이 극치를 이룬 시기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입니다.
너무나 타락하다보니, 자신이 예배해야 하는 하나님을 몰라보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최초의 제사장 멜기세덱>
성경에서 제사장으로서 첫 번째 사람은 누구일까요?
창세기 14장에 등장하는 평화의 왕 ‘멜기세덱’입니다.
창 14: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조카 롯을 구하고 꽤 많은 전리품을 가지고 개선장군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개선장군 아브람을 맞이하는 인근의 여러 왕들 중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었습니다.
살렘은 지금의 예루살렘으로 추정됩니다.
아브람을 영접하는 여러 왕 중에서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창 14:19~20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 대목에서 제사장은 누구인지, 무엇을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가 드러납니다.
멜기세덱은 인근의 왕이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올 때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영접합니다.
축하하러 간 자리입니다. 축하하러 가면서 빈 손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복을 빌어 줍니다.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이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선포합니다.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 다음에 찬송할지로다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제사장의 역할입니다.
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서 이렇게 했을 때, 당사자 아브람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제사장은,
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축하하는 사람입니다.
② 축하의 원인이 하나님에게 있음을 선포합니다.
③ 그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권면합니다.
이렇게 축하를 받은 사람은 십일조를 합니다. 할렐루야~
<제사장의 몰락>
최초의 제사장 멜기세덱이 제사장의 원형입니다.
제사장은 축하하러 가는 사람입니다.
축하하러 갈 때 떡과 포도주 즉,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합니다.
축하받을 일을 만들어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천명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권면합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이 타락하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제물을 들고 오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제물을 가지고 오면 그제서야 축복해 줍니다. 그나마 드린 제물을 제단에 바쳤습니다.
나중에 더 타락합니다. 가져온 제물을 뚝 잘라 따로 챙깁니다.
그리고 축복하는 시늉만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장이 집례하는 제사를 거들떠도 안 봅니다.
오늘 스가랴 본문에 나오는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동안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제사장이 타락을 거듭해왔습니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해서 온 백성이 뿔뿔히 흩어지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하나님은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예루살렘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예루살렘은 천신만고 끝에 다시 시작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대제사장도 새롭게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이 기회를 잘 포착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을까요?
스가랴 선지자가 본, 네 번째 환상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보게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여호수아 이후 예루살렘은 다시 타락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때로부터 100년쯤 지난 이후 하나님이 침묵하기 시작합니다. 침묵기입니다.
하나님의 침묵기 400년이 지나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십니다.
타락의 주기가 급속히 단축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시대의 연장선상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주소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이 더욱 귀하게 우리에게 와 닿을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