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손들을 축복합시다(창 48:8-22)
오늘 어린이 주일입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1899-1931) 지금서부터 101년전, 1922년 5월 1일 처음 어린이날이 제정되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여러분, 어린이라는 뜻을 아십니까? 어린이는 ‘어리신 이’, ‘어리신 분’ 그런 뜻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에 어린이들이 멸시 천대받을 당시 아이들에게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존경과 경외심을 담아서 만든 참으로 아름다운 단어가 ‘어린이’입니다.
오늘은 교회적으로 5월 첫 주일 어린이 주일을 맞아 우리 아이들을 하나님 나라의 기둥같은 인물로 세워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세상 그 어느 부모든지 자기 자녀가 잘되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부모는 없을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부모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이며 낙이지만 반면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자녀가 실패하여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녀가 병으로 고통당하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누구나 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실생활 속에서는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소개한 책이지만 늘 기억에 남는 책이 있습니다. 롤프가복이라는 분이 쓴 자기 간증서적, “하루에 한 번 자녀를 축복하라”는 책입니다. 그는 18년동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잠자기 전에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했더니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간증입니다. 목회자가 축도로 회중을 축복하는 것처럼 부모는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녀에게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어게 해주어야 자녀가 잘 되는 것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녀가 망할 길로 걸어가고 있는데도 몰라서 방치하고 있는 부모도 있고 알면서도 방치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부모는 자기의 욕심때문에 자녀 인생 희생시키는 모습도 여러 곳에서 보게 됩니다. 성공적인 생애를 살았던 인물들의 배후에는 언제나 훌륭한 부모가 그 배후에 있습니다. 사무엘 뒤에는 한나같은 어머니가, 모세 뒤에는 요게벳같은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굳이 성경이 아니어도 에디슨의 부모, 아브라함 링컨의 부모, 아인슈타인의 부모, 성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모두가 훌륭한 믿음의 부모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창세기 49장을 보면 야곱이 죽기 전에 자기 자녀들을 다 불러놓고 축복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그러기 전에 야곱이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부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 기독교인은 자녀들을 위해 어떻게 축복해 주어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교훈합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믿고 있는 부모라면, 그리고 구원받은 확신이 있는 부모라면 우리는 자녀가 잘되는 일을 위해 축복을 해 주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축복기도하는 것! 그것은 목사만의 전유물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축복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의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라고 선언했습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사람을 축복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자녀손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가정의 제사장으로서 자녀가 잘 되기를 원하는 부모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 할 축복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위해서 축복기도 해주는 것! 세상에 그보다 더 귀한 모습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 삶의 현장, 여기저기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고 축복기도 해주는 모습! 그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옆사람에게 이렇게 축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신을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와 손자 손녀에게 무엇을 해주실 수 있나요?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이지요. 그러나 영적인 부모라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선물을 줄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축복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 자녀와 손자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어린이 주일에 부모된 자로서 확실히 믿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뭘 믿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말씀에 근거해서 3가지를 믿어야 합니다.
1. 부모는 자식을 축복할 자격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부모에게 특권을 주셨습니다. 자식을 낳아 기를 때 부모의 자격과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권세 중에 최고의 권세는 축복의 권세입니다. 성경을 보면 부모를 가볍게 여기고 부모를 무시하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부모를 공경하고 효를 행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의 복을 받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이렇게 하셨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육신의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제가 한 말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한 말입니다. 그는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다”라고 표현했습니다. 함께 하시겠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의 대리자다” 왜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사랑을 주시고 생명을 주실 때 부모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또 유명한 신학자 한분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우리 곁에 부모님을 주셨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자신을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을까요? 우리가 부모님의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5:16절,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또 잠언 3:9절에 보세요.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이 두 구절에 나오는 공경은 같은 단어입니다. 여기 “공경하라”할 때 “공경”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의 뜻은 우리 몸속에 ‘간장’이라 단어로도 쓰이고 동시에 ‘무겁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내부 장기 중에 제일 무거운 것이 간이라고 합니다. 그러기에 ‘공경’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쓴 것은 “부모님을 매우 무겁게 존중히 여기라”하는 말씀입니다. 어느 정도 존중히 여기라는 것이냐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만큼 존중히 여기라’는 것입니다. 절대로 부모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무겁게 중히 여기라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처럼 부모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옛날 유럽 폴란드에 한 영주가 나폴레옹 황제를 자기 집에 모시어 접대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보좌관들이 초대할 집에 준비가 잘 되었는지 점검하러 왔습니다. 그리고는 묻습니다. ‘나폴레옹 황제가 앉을 자리가 어디입니까?’ 그러자 그 영주가 ‘네 여기입니다.’하고 보여주는 자리는 제일 상석이 아닌 세 번째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보좌관이 막 화를 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소? 어떻게 감히 황제를 세 번째 자리에 앉힐 수 있단 말이요?’ 그때 그 영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는 황제로 제일일지 모르나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다음입니다. 그 사실을 보좌관들이 돌아가서 보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폴레옹은 그것을 수용하고 그영주집을 방문했고 그를 귀하게 썼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님은 하나님 다음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높으신 분,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그 다음에 바로 우리 부모님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가 있을 때 함부로 부모님을 멸시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멸시하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인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모님은 하나님의 대리자입니다. 그러기에 축복할 자격이 있습니다. 만약 부모를 무시하고 경히 여기면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식이 부모의 자격의 유무를 따질 수 없는 것입니다.
2. 자녀 축복의 중요성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셉은 아버지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갑니다. 가되 그냥 가지 않고 두 아들을 데리고 찾아갑니다. 그리고는 두 아들이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게 합니다. 요셉은 누구입니까? 애굽의 2인자 총리입니다. 권세도, 지식도,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을 정도로 풍족하였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아버지 야곱이 비록 눈도 어둡고 병든 초라한 노인이지만 하나님이 세우신 영적 축복권자임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두 아들을 데리고 달려간 것입니다. 그리고는 두 아들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도록 힘쓰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그가 부모의 축복은 매우 소중한 것임을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세요.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오늘날 여러분의 아버지가 병들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아들딸을 데리고 문병을 가셔서 축복해 달라고 하실 수 있습니까? 오히려 자식들이 할아버지에게 간다고 해도 “너희는 공부나 하고 있어라” 야단치고 집에 두고 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 야곱이 병들고 힘없는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우신 영적 축복권자인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야곱도 그런 믿음이 있었습니다. 만약 야곱이 축복의 중요성을 몰랐다면 병든 몸을 일으켜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축복의 중요성을 알기에 비록 병들어 죽게 된 몸일지라도 축복합니다. 그것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보고 배웠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는 어릴 적에 형 ‘에서’가 갖고 있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샀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이삭이 형 에서에게 축복을 베풀려 할 때 어머니의 도움으로 아버지를 속이고 축복을 가로 챈 적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이 아버지의 축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축복권은 이삭과 야곱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여러분에게도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그 축복권을 믿고 우리의 자녀들,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축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부모가 축복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야곱은 그의 손자 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어떤 축복을 하였습니까? 15~16절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16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할아버지 아브라함,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을 의지하고 축복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의 출생부터 지금까지 기르신 하나님을 의지하고 축복합니다. 더 나아가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께서 이 자녀들에게 복을 주십사고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들 조상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며 세상에서 번식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축복은 놀랍게도 그대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경험으로 축복의 중요성을 체험했습니다.
야곱은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축복한 것이 다 이루어진 것을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축복하는 이 축복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손자들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야곱의 손자들이 이 축복사건으로 요셉의 아들을 넘어 이스라엘의 12지파 중에 므낫세 지파와 에브라임 지파가 됩니다. 성경에 요셉 지파라는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의 아들로 인정합니다.
신기한 것은 야곱의 표현입니다. 22절,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여기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장자에게 두 몫을 줍니다. 그런데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이나 유다에게 두 몫을 주지 않고 요셉에게 두 몫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실질적으로 야곱의 장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더 주었나니”했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먼 앞날에 이루어질 것인데 마침 지금 주었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야곱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분배할 것을 미리 내다 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두 몫을 차지할 것을 미리 바라보면서 한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줄 것이다”가 아니고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미 준 것으로 완료형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금 야곱이 준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뭡니까? 그만큼 내가 자녀들을 위해서 한 기도는 이루어진다는 확신을 가졌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야곱처럼 자녀와 손자들을 만날 때 축복할 수 있습니다. 자녀들과 손주들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내가 축복하는 대로 이루어짐을 믿어야 합니다. 창세기에 노아를 보세요. 그가 자녀들을 축복할 때 셈과 함과 야벳에게 한 축복과 저주가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축복과 저주가 지금까지 이루어졌고, 또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자식에게 믿고 축복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축복해야 할까요?
1) 언약의 하나님 이름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야곱은 요셉의 자식들을 축복하면서 자기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리고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하나님은 누굽니까? 그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한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이 맺으신 약속을 붙잡고 축복해야 합니다. 내 판단과 내 욕심을 갖고 축복하는 것이 아닌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을 근거로 축복해야 합니다.
민수기 6:24-26절을 보세요. 하나님이 제사장에게 축복을 명령하며 약속하십니다. “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25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복주시고 지키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은혜 베풀고 평강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모들에게 자녀를 축복할 권세를 주셨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부모가 축복의 기도를 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매일 자녀를 위하여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기도를 해 주는 부모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자녀와 손자를 만나면 당연히 조부모께서 축복해 줄줄 믿고 머리를 내밀 수 있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지금은 자녀들을 매일 만날 수 는 없지만 새벽기도마다 자녀들을 위해 축복합니다. 기도할 때 마다 하나님은 내 기도를 들으시고 반드시 응답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기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을 믿습니다. 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부모님께서 날마다 축복기도를 해 주셨기 때문에 복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에 가야사세미나에 참석한 차성훈목사님이라는 선배목사님을 만났습니다. 아버님이 목사이셨는데 그 형제들이 5명인데 다 목사가 되셨답니다. 그리고 그 자녀손들을 다 헤아려보니까 목사,장로, 권사 집사가 60여명이 되신다는 자랑하시는 것을 들으면서 참 복받은 가정이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정을 신앙의 명문가정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의 가정이 신앙의 명문가정으로 하나님나라에 우뚝서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영적인 감동으로 축복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희한한 일이 일어납니다. 14절을 보세요.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야곱이 손주들에게 손을 얹고 축복하는데 오른 손으로 오른쪽에 있는 손주에게, 왼손으로 왼쪽에 있는 손주에게 축복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손을 엇갈려 손을 얹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오른 손이 장자인 므낫세에게 올려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므낫세를 야곱의 오른손 쪽으로 대어 주고, 차자인 에브라임은 야곱의 왼손 쪽으로 댑니다. 그런데 야곱이 팔을 어긋 맡겨 손을 얹습니다. 요셉이 그리하지 말라고 해도 “나도 안다, 나도 안다” 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엇갈려 축복을 합니다. 이것은 야곱의 영적인 판단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야곱은 외모나 외형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적 감동을 따라 그리한 것입니다. 육신적으로 장자라고 다 장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장자가 장자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장자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보세요. 실제 장자는 이스마엘인데 약속을 따라 낳은 이삭을 장자로 축복합니다. 이삭에게도 장자는 쌍둥이 형 에서입니다.
그러나 이삭이 나이 들고 판단력이 부족해 별미를 먹고 에서에게 축복하려할 때 이삭의 부인 리브가의 간섭으로 차자인 야곱에게 축복이 가게 합니다. 이것은 편애가 아닙니다. 태중에 있을 때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부모가 영적인 판단으로 축복의 물꼬를 돌리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가만히 있었으면 형 에서가 축복을 받았을 복입니다.
그런데 어머님의 개입으로 차자인 자신이 받은 것입니다. 그러기에 야곱은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할 때 개인의 감정이나 이득을 따라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축복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자식이나 손주들을 축복할 때 외모나 조건을 따라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감동과 인도를 따라 해야 합니다. 외형으로는 야곱보다 에서가 훨씬 좋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작은 자를 크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작정이십니다.
3) 내 자녀가 하나님이 주신 자녀임을 믿고 축복해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복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닙니다. 복의 근원이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내가 주는 양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축복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내가 축복하면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아멘? 왜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까요? 내 가정에 있는 자녀는 내 자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가정에 경건하게 키워달라고 맡겨놓은 자녀입니다.
만약에 임금님이 왕자를 맡기면서 ‘내가 바쁘니까 잘 키워주세요’하고 맡겼다면 여러분은 그 왕자를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아마도 내 자식보다도 더 잘 키우려고 노력할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우리가 낳아 기르는 자식은 내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자식은 내가 결혼했기 때문에 당연히 얻는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셔서 내가 키우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믿고 축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어린아이들이 주님께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시고는 그들에게 안수하며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요셉이 뭐라고 합니까? 야곱이 “이 아이들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라고 합니다. 내가 결혼해서 낳았으니 내가 만든 내 자식이 아닙니다. 내 자녀가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이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자녀를 잘 길러야 하는데 거기에 꼭 필요한 것이 부모의 축복인 것입니다. 명심하세요. 우리 자식은 내가 낳고 싶어서 낳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낳은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주신 자녀들을 믿음으로 바르게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부모가 할 일은 자녀를 위해서 매일 축복의 기도를 해주는 것입니다. 야곱의 자녀들이 그 축복대로 복을 받았던 것처럼, 또 요셉의 아들들이 할아버지 야곱에게 축복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자식과 손주들을 믿음으로 축복하는 성도들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