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4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3-17 그때에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13 예수님께 말로 올무를 씌우려고, 바리사이들과 헤로데 당원 몇 사람을 보냈다. 14 그들이 와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그 신분에 따라 판단하지 않으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바쳐야 합니까,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15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다 보여 다오.” 16 그들이 그것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17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 그들은 예수님께 매우 감탄하였다.
우상에 빠져서 살고 있습니다.
경험론 '철학의 비조'라고 하는 '프란시스 베이컨'은 400여 년 전에 우상론을 발표하였는데 그는 세상살이를 우상에 비유하였습니다. '동굴의 우상'은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되는 편견과 독단을 지적하고 있는데 '정중지와 부지대해'(井中之蛙 不知大海 : 우물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해도 알지 못한다.)의 형국에 빠져 있는 것을 우상론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종족의 우상'과 '시장의 우상', '극장의 우상'으로 4대 우상에 인간의 모습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종족의 우상은 인간의 본질적인 한계 때문에 갖게 되는 편견과 아집을 가리킵니다. 오늘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과 원로들은 동굴의 우상과 종족의 우상에 빠져 있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시장의 우상과 극장의 우상처럼 배우가 된 듯 우월감에 사로잡혀 예수님께 올무를 씌우려고 벼르고 자신들의 편견과 아집으로 올무를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세금을 내야 한다면 침략국인 로마를 비호한다고 올무를 씌울 것이고, 내지 말라고 한다면 로마에 저항하는 세력의 우두머리라고 예수님을 몰아 부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하느님께 소속된 것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두 하느님께 소속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세금 문제로 복음에서 트집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천주 십계명'중 '제4계명'에 나라에 세금을 잘 내는 것도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권리와 의무를 다하는 것이 '제4계명'에서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옹졸하고 편견에 사로잡히고 아집으로 똘똘 뭉쳐있는 자기들과 같은 분으로 몰고 가는 그들이 오히려 우물 안 개구리인 셈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해야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요? 가끔 그런 올가미를 우리 스스로 만들고 있고 율법과 하느님의 법을 그렇게 쉽게 판단하기도 합니다.
미국의 서부 해안에 바위가 유난히 많은 곳이 있는데 바람이 거칠게 불면 많은 배들이 좌초를 하거나 바위에 부딪쳐 난파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날 난파선을 보고 바닷가에 놀러왔던 한 사람이 용감하게 죽음을 무릅쓰고 사람을 구했습니다. 그렇게 구함을 받은 사람이 급기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와 같이 난파선을 구하여 생명을 살리기 위한 클럽을 만들게 되었고 그 숭고한 뜻을 가진 클럽회원들은 점점 그 수가 늘어나게 되었고 아주 유명해졌습니다. 그 후 많은 클럽이 생기게 되었고 생명을 많이 구하기는 했지만 점차적으로 늘어나는 클럽들은 첫 마음이 퇴색되고 모임과 친목에 중점을 두게 되더니 그 정신이 희박해졌습니다. 돈이면 모두 해결되는 듯 했고 최초의 클럽 회원들은 그 곳을 떠나갔지만 묵묵히 일했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많이 생긴 클럽의 명칭과 회관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입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와 유사한 문제가 빈번하게 발견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보상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봉사로 전락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단체의 모임에 생색을 내고, 친목위주로 전락하기도 하는데 비단 평신도뿐만 아니라 성직자나 수도자도 이에 안타깝게도 편승합니다. 하지만 옳게 지도하는 사람은 없고,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공동체를 깨트린다고 심한 질책을 받습니다. 진정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은 본래의 정신을 찾아 떠나가고 봉사단체는 곧 유명무실해집니다. 그것은 참된 의미의 봉사가 아니고,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관행이 판치는 세상에 우리는 무력하게 살고 있습니다. 봉사하는 사람은 대가를 바라지 않다가 생색을 내는 순간 봉사의 숭고한 정신은 사라집니다.
이 세상은 모두 하느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잘못 사용하고 살고 있으면서 잘못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것이지만 우리의 것으로 착각하고 살기도 합니다. 나라, 국토, 바다, 공기, 내 집, 물, 매일 먹는 것조차 나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봉사, 친절, 복음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서로 용서하는 권한과 사랑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임시로 사는 동안 사용하고 관리할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동굴 안의 우상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최고인줄 알고 있는 종족의 우상에 빠져 있고, 유행과 패션과 어우러져 적당히 세상 풍조에 빠져서 황금만능주의의 시장의 우상을 받들고 삽니다. 화려한 갈채를 받으며 뭇사람을 뇌쇄 시키는 배우의 환영에 맞물려 극장의 우상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의 의미도 모르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내 세상인 셈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