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나와 나무 사이에는 삶이 있었네
이태리포플러, 양버들, 미루나무
광화문에서 동십자각으로 가다 민속박물관으로 방향을 틀면 경복궁 주차장 입구이고, 그 앞에 커다란 이태리포플러가 보도 한가운데 서 있다. 보행에 방해가 되지만, 베지 않은 걸 보면 나무 사랑이 남아 있어 기쁘다. 하지만 이 나무를 보고 해설을 하려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양버들이냐, 이태리포플러냐, 미루나무냐 의견 차이가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일단 나무 동정부터 들어가기 위해 아래에 떨어져 있는 잎을 줍는다. 그러고는 서로 살펴본 것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눈다. 의견이 엇갈리면 세 나무 잎의 그림을 보여준다. 그래도 의견 일치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운 잎과 그림의 잎, 그리고 나뭇가지 여기저기 달린 잎 모양이 엇비슷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국의 나무>에 있는 글을 보자.
[이태리포푸라(이태리포플라) : 어긋나며 길이 7~10(~20)cm의 삼각상 난형이고 대개 폭보다 길이가 길다. 끝은 길게 뾰족하고 밑부분은 평평하거나 넓은 쐐기형이며, 가장자리에는 불규칙한 둔한 톱니가 있다. 긴 잎자루는 윗부분의 좌우가 납작하고 털이 없다.]
[양버들 : 어긋나며 길이 5~10cm의 마름모형 또는 난상 삼각형이다. 끝은 길게 뾰족하고 밑부분은 넓은 쐐기형이며, 가장자리에 불규칙하고 둔한 톱니가 있다. 잎자루는 잎과 길이가 비슷하며 윗부분의 좌우가 납작하고 털이 없다.]
다음은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에 있는 미루나무 잎 설명이다.
[잎은 어긋나기하며 난상 삼각형 또는 넓은 달걀모양이며 두꺼운 편이며, 점첨두이고 아심장저 또는 예저이며 길이와 폭이 각각 7-12cm로서 내곡거치(內穀鋸齒)가 있고 털이 없으며 밑부분에 2-3개의 꿀샘(蜜腺)이 있다. 잎표면에 주름이 약간 있다. 엽병은 길고 편평하므로 바람에 잘 흔들린다. 잎밑에 선점(腺點)이 있으며 잎은 폭보다 길이가 길므로 양버들과 쉽게 구별된다.]
이렇게 되면 일단 미루나무는 탈락이 된다. 아쉽다. 초등학교 시절 부른 “미루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 걸려 있네”라는 동요 때문에 추억의 한 동강이 뭉텅 잘려나가는 것 같다. 나는 더 아쉽다. 숲 공부하기 전까지는 나는 고향집 글에 늘 미루나무를 등장시켰다.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 십 리를 걸어서 학교에 다녔는데, 나의 든든한 벗은 미루나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루나무가 아닐 확률이 높았다.
<한국의 나무>에 나오는 글을 보자.
[미루나무와 양버들의 잡종으로서 생장이 매우 빨라서 가로수나 각 지역 산록에 풍치수로 심고 있으며, 국내 도로변에 식재한 포플러류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탈리아에서 들여왔기 때문에 이태리포푸라라고 부른다.]
<한국의 나무> 공저자인 김태영은 숲해설가 양성과정 수업시간에 “우리나라에 미루나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됩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의 시작이 미루나무 가지치기였는데, 가서 동정해 봐야 하지만 미루나무가 아니라 양버들이나 이태리포푸라일 확률이 높습니다”라고 말했다. 전문가의 말이라 나는 받아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분위기 전환을 위해 이렇게 말했다.
“만일 판문점 그 나무가 미루나무가 아니라 양버들이나 이태리포플러라면 우리 역사는 기록을 바꾸어야겠지요. ‘양버들 도끼만행 사건’ 혹은 ‘이태리포플러 도끼만행 사건’이 되는 것이지요.”
그제야 참가자들은 머리 아픈 나무 동정에서 벗어나 나무에 역사를 넣는 시선을 보인다. 그럼 골치가 또 아플 수 있지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루나무는 학명이 Populus deltoides MARSH이고, 이태리포플러는 Populus canadensis이고, 양버들은 Populus nigra var. italica Müench입니다. 여기에 공통으로 들어가는 단어가 Populus인데 이는 라틴어로 여기서 나온 단어가 people 즉 민중, 인민, 국민 등으로 번역됩니다. 그러니까 포플러 종류는 유럽 사람들이 좋아하는 나무로 볼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의 해설도 사람으로 마무리를 했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모네의 이태리포플러 연작 시리즈를 언급하는데, 1830년 공화정을 폐지하고 군주정을 부활시킨 나폴레옹 3세가 싫어 인민의 이름을 가지고 있는 포플러를 그렸다는 이야기이다.
나무, 사람, 정치권력 구도를 연상시킨 것 역시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야기는 인과관계로 이어져가야 하는데, 주어진 공간에서 주어진 사물들을 이야기로 엮기 위해서는 인접한 사항을 꼬리를 물고 가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경복궁 건춘문을 지나 길 건너편을 보면 붉은 벽돌로 지어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서 있다. 길가에 주차된 대형버스들 때문에 그곳을 온전히 보기가 힘들지만, 비어 있는 공간이 보이면 멈춰 서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두환이 12.12사태를 성공시키고 나서 아침에 장성들이 모여 단체사진 찍은 곳이 저 건물 앞입니다. 보안사, 기무사 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미술관으로 되어 있는데, 저곳이 2014년 서태지가 부른 소격동 노래 때문에 주목을 받았습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저 안에서 조사를 받고 군대에 끌려갔다가 영문도 모른 채 죽어서 나온 학생들 때문이었습니다. 이른바 학원녹화사업의 희생자들인데, 여기서 왜 이런 아픈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무거운 침묵이 잠시 이어지면 나도 숨을 고른다. 그러고는 질문을 던진다.
“왜 전두환은 작전명을 학원녹화사업이라고 했을까요? 녹화(綠化)는 푸른 숲을 만들자는 것 아닌가요?”
여러 의견이 나오는데 대부분 붉은색을 푸르게, 즉 사상 때문에 그런 것 아니냐고 말한다.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을 푸르게 한다는 것은 숲이나 나무처럼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는 나무를 너무 우습게 보는 생각이 작동된 것 아닐까요? 제가 숲공부를 하고 보니 나무가 우리보다 나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그럼 하나씩 말해볼까요?”
참가자들은 말한다. 움직이지 않지만 더 나은 번식력을 보여주고, 오래 살고, 협력하고, 배신하지 않고 등등이다. 내가 준비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으면 과감히 말한다.
“우리는 팔과 다리가 잘리면 자라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무는 꺾이고 잘려 나가도 세포 하나만 있으면 전체의 모습으로 자랍니다. 모듈(module)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위대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에서 단순한 점만 보아 작전명을 학원녹화사업이라고 해놓고, 많은 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전두환 정권은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재를 했지만, 치산치수(治山治水) 정신으로 산림녹화사업도 열심히 했습니다. 전두환은 이 나라를 위해 잘한 게 뭐가 있나요?”
이 말에 감정이 격앙된다. 왜 그럴까? 전두환 시절 내가 학생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즉 해설은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그것을 아끼지 말고 최대한 살려 말을 하면 공감을 얻을 수 있다.
임혜원의 <언어와 인지>에 나오는 글이다.
[몸은 우리가 세상을 경험하는 매개물이기도 하지만 몸 그 자체가 우리의 경험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념화의 주체인 우리가 신체적 특성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어를 확장시켜 사용하는 방식에는 일관되고 보편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의 개념 구조는 몸의 경험에 근거하여 구조화되어 있으며, 따라서 몸을 떠나 의미를 논할 수 없다. 몸이 없으면 개념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몸으로 겪은 경험들이 언어로 무의식 속에 들어가 있다. 현재에 그 언어가 달라질 수 있지만, 그 강렬한 느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미래를 저당 잡히고 전두환을 말했던 그 시절의 그 느낌이 몸을 통해 나오게 되면 자극의 정도는 더 강해진다. 그 전두환을 통해 나무의 중요성을 다시 보게 한 이야기 만들기, 억지스러운 면도 있었지만 과감히 시도해 보았다. 좋은 이야기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연결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