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모 곡
하염없는 세월은 언제랄 것도 없이 흐르게 마련인 모양이다.
찌는듯한 더위 속에 좀체 줄 것 같지 않은 여름날의 지루함에 하루하루가 짜증스러웠던 젊은 날도 있었고 엄동설한
기나긴 여름밤이 서럽도록 더디 가던 고달픈 시절도 있었다.
덧없는 인생을 두고 무상한 인생이니 초로 같은 삶이니 하고 구시렁거리다가도 막상 60 평생울 넘자마자 쏜살같은
세월의 흐름에 아뿔싸 놀래며 멈칫했을 때는 계전에 오엽이 나뒹굴고 이미 가을을 넘어 짙은 황혼에 이른 것을 미쳐
몰랐다고도 못하거늘~
작년 까지도 통화했던 친구에게 전화 걸자마자 전화를 받지 않는다느니 결번이라는 멘트가 들려온다. 미쳐 이별의
인사조차 하기 면구스러워 조용히 갔는지 모르지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우스갯소리조차 허락 않는 무정스러움이 너
무 야속하기만 하다.
70여 년 전 함께 죽마 타던 옛 친구 모두 다 떠났다. 아무도 떠난다는 귀띔도 없이 훌쩍 떠나갔다. 행여 붙들세라 겁
먹은 듯 홀연히 떠났다.
금년 연초 첫날에 발생한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의 지진이 안타깝다. 2차 대전 중의 소개(疎開) 기간 동안 초등
학교 4년 동안 거주했던 때가 생각난다. 지진보다도 매일처럼 쏟아지는 미군기로부터의 공습이 더 두려운 시기였다.
주거이전의 제한으로 어머니와 혜어져야했던 오사카 역에서의 모자간의 이별이 떠 오른다. 어머니는 조선으로 아
들은 소개지인 이시카와현으로 생사를 장담 못할 오사카에 아들을 남겨두고 떠날 때 어머니는 아들의 볼을 쓰다듬어
주며 기적소리에 한 많은 이별을 해야 했던 그때가 떠 오른다.
해방과 더불어 온 가족이 다시 만나게 된 행운도 있었지만 추운 겨울이지만 무한히 따듯했던 어머니의 손길을 지금
도 못 잊는다.
어언 어머니를 사별한 지 이 해로 만 서른 해다. 남편보다도 아들을 더 사랑한다던 어머니의 임종도 못 본 불초자식
을 잊고 떠나야 했던 어머니를 생각한다.
사업상 어쩔 수 없이 타지에 나가 있다가 서울 집에 다니러 왔다. 집을 떠나기 전날 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에서 잠
을 잤다. 곁에는 82세의 노모가 내려다보고 계신다. 좀 더 아들과 이야기하고 싶어 했던 어머니의 마음을 안다. 하지만
사업상 문제로 도무지 잠들지 못한 나는 잠든척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잠든 줄 알고 가만히 아들의 얼굴을 쓰다듬는다. 나는 모른 척했다. 옛날 일본 오사카 역에서 아들
의 볼을 쓰다듬던 그때와 같은 따뜻한 손길이 아니라 기름끼 빠지고 거칠어진 노파의 손바닥이었다. 다만 그때와 조금
도 다름이 없었던 것은 생이별할 때와 같은 애처롭고 쓰라린 모정과 50년 지난 늙은 모정의 따스함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아들의 볼을 쓰다듬던 그날로부터 한 달이 못 돼서 아들을 다시 못 보고 타계하셨다. 어머니는 스스로 당신이 사랑
하는 아들을 더 못 볼 것 같은 예감 때문에 아들 머리맡을 지키고 계셨든 것을~ 그때 살포시 거칠어진 어머니의 마지막
손길을 꼭 잡아드리지 못한 후회로움이 30년이 지난 오늘도 가슴 아리도록 쥐어 잡고 있다.
내가 어머니를 찾으며 마음껏 울어 본 것은 오사카에서 헤어지던 날 아버지 가슴에 안겨 울어 본 그때와 어머니장례
를 치르고 사업장이 있는 부산으로 가는 승용차 안에서 어머니의 거친 손을 꼭 잡아 드리지 못한 것이 가슴 아파 울어
본 그 때인 것 같다.
- 글 / 日 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