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디쯤 왔으며, 어디쯤 가고 있을까?(연화 2024-7. 8월호 권두언 명예회장/손원익)
나는 1939년 7월 5일, 산골(현 울산시 울주군 두동면 월평리)에서 삼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생후 7개월쯤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님의 슬하에서 자랐으며, 11살 되던 해 경주에서 6.25사변을 맞았고, 26살에 대구에서 결혼했습니다.
1968년 8월 17일(29세), 부산 남구 우암동에서 당시 우암지부장이신 고문계수(전 연합회 부회장)씨의 절복으로 문현 새마을 1반에 입신하였습니다.
처음으로 좌담회에 참석했을 때 너무 까다로운 질문으로 좌담회를 망친 일도 있었습니다. 그때 참석한 중년 부인 한 분이 “이 법은 물어서 이해하기 힘들어요. 본인이 직접 무언가 소원을 세워 제목을 불러보면 깨달음과 현증을 느낄 일이 생겨날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이 진정으로 마음에 와닿아 실천하였습니다. 당시 나는 좌측 폐가 없을 정도로 결핵이 심해 보건소 약을 복용 중이었습니다.
제목을 부르기 시작한 지 6개월이 되었을 무렵, 보건소에서 검진한 결과 이제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여 ‘정말 바로 이것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신심을 한 지 56년이 되어 이제 어느덧 노년이 되고 보니 후회, 반성, 보람 등 만감이 교차합니다. ‘나는 어디쯤 왔으며, 어디쯤 가고 있을까?’를 생각해보았습니다.
‘내 생명의 숙업이 얼마나 소멸되었을까?’ 또 나의 복운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듯이 갈 길도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이 자체가 바로 묘호렌게쿄(妙法蓮華經)인 것을….
‘수행 중 진실되게 본존님을 확신하고 존경, 그리고 여설수행(如說修行)을 했을까?’
‘이곳, 지금이 사고(四苦)의 끝자락인가 보다. 붙잡고 싶은 그리운 법우(法友), 매달리고 싶은 수행의 욕망….’
‘언제쯤 성불의 보처로 갈 것인가? 그래도 주저하지 말자. 적광토(寂光土)의 들녘으로 가는 길을…. 아쉬움도 미련도 보람으로 간직하고 대성인님이 계신 영산정토(靈山淨土)로 가기를!’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또 오늘처럼 제목봉창에 힘쓰며 그냥 앞으로 꾸준히 가자.’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수행의 세월은 필연코 나를 저 광활한 불계(佛界)의 들녘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법우(法友)들이 있어 행복했다. 그래서 살맛이 났고 힘들 때는 많은 위안이 되고 감사했다.’
‘강한 수행력 없이 법우 간의 관계는 원만하게 형성되기 어렵다. 이체동심은 화합성 과정의 필수조건이며, 또한 본존님의 뜻에 의한 숙연이면 필연인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리 건강해도 세월은 당해내지 못하고 늙어지면 내세(來世)로 갑니다. 이것이 삼세관의 순리인 것입니다.
말법의 어본불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의 제자로서 자신의 숙명전환과 광선유포라는 공통 목적관을 가진 법우로서 상호 포용, 관용, 존중하며 행복감을 만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영산정토(靈山淨土)로 가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행복한 날, 내일도 남묘호렌게쿄(南無妙法蓮華經)~~ 불조 대성인님 곁으로 가는 그날까지 간절히 소망하며 강성하고 지속적인 수행을 해가렵니다. 불어실불허[(佛語實不虛): 부처는 진실해 거짓이 없느니라.]를 심간에 새기며….
이제 연합회를 창립한지도 61주년을 맞이합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젏은 층보다 노년층이 많은 실정이어서 10년, 20년 후 조직의 실상을 생각해봅니다.
내가 입신할 무렵과 비교해 지금은 절복이 너무 힘듭니다. 국가적 지원, 복지정책, 그리고 조직 등의 문제가 그 원인이라 생각이 듭니다만 절복 계획, 실천 방안, 결과 확인 등 치밀한 전략이 요망되는 때입니다.
절복은 이강독지(而强毒之), 독고(毒鼓)의 연(緣)의 말씀을 잘 활용함이 어떨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