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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가을제자수양회 주제2강 (문갈렙)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
말씀 / 히11:1-16, 20-22
요절 / 히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기독교의 기본 뼈대는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수양회 주제). 믿음, 소망, 사랑은 신앙인, 나아가 모든 사람의 삶을 채워주는 귀한 덕목입니다. 하지만 각각 단점이 존재합니다. 사랑은 행하기 어렵고 소망은 유지하기 어려우며 믿음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믿음’이지만, 그 의미가 모호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덕목을 선진들의 행동을 통해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 믿음의 의미를 명확히 알고 선진들의 믿음을 배우기를 기도합니다. (개론 – 내용 – 표현, 적용)
<믿음의 개론>
1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뢰라는 단어로 먼저 접근해 보겠습니다. 믿음(faith)과 신뢰(trust)는 비슷하지만 뉘앙스가 다릅니다. 신뢰는 관계(대상)를 전제합니다. 내가 정말 신뢰하는 사람을 한번 떠올려 보겠습니다. 그 사람에 거는 기대(hope)가 있고 직접 보지 않아도(do not see) 확신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신뢰가 쌓이면 믿음(sure=yes)이 형성됩니다. 우리는 의외로 많은 것을 믿고 살아갑니다. 아니 믿기에 살 수 있습니다. 대중교통이 정확한 목적지로 인도한다고 믿어야 이용할 수 있고, 가족 간에 사랑이나 정, 최소한 의리라도 있다고 믿어야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심지어 돈과 과학도 믿음 위에서 작동합니다(실제론 vs 매트릭스(시뮬레이션) / 지구평면설). 하지만 믿음이 정당성을 갖기 위해서는 경험, 관계가 필요합니다. 제가 처음 지하철을 탔을 때 수시로 노선을 확인했습니다. 목적지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몇 번 타본 후에는 노선이 아니라 빈자리를 먼저 스캔합니다. 지하철을 신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기독교 안에서 믿음을 배우는 방식도 비슷합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성숙자반] 이라는 책에서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자신의 삶으로 연결되는 전 과정을 포함하는 용어’라고 설명했습니다. 말이 좀 어렵죠? 하나님에 대한 앎이 있고(성경공부를 통한 지식)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체험)를 맺게 되면 거기에서 신뢰가 발생합니다. 이것이 삶과 연결되면(예배, 삶의 변화) ‘믿음을 가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삶이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2절을 보십시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선조들은 이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으로 증언되었습니다[새번역])” 앞으로 나올 선진들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삶이 변화되어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선진들은 역사적 사건을 주도하기도 했습니다. 모세는 2백만명을 이끌고 출애굽을 감행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믿음을 통한 변화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선진들의 믿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로운 인식, 지식을 얻게 됩니다. 처음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는 작습니다. 집과 주변, 학교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면 좀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결국 우주라는 넓은 세계를 ‘알게(믿게)’ 됩니다(우주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 존재를 믿습니다). 신앙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체험이 쌓이면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알게’ 됩니다. 이게 믿음이 가진 힘(인식)입니다(인식의 기반은 믿음). 이 세상은 물질이 전부이고, 이 물질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한 본질은 보이지 않습니다. 돈, 당연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사랑, 기쁨, 행복 등은 보이지 않고 돈으로 살 수도 없습니다. 미생물이나 천체를 육안으로는 볼 수 없지만 현미경과 망원경이 있으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이런 도구, 렌즈와 같습니다. 보이지 않는 중요한 것을 보게 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모든 실체의 근원임을 알게 해 줍니다.
여기까지 믿음의 개론을 다루었고, 이제 믿음의 내용과 표현을 살펴보겠습니다.
<믿음의 내용>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은 두 가지 내용을 포함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고 둘째는 하나님이 상 주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존재는 더듬어, 혹은 유추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행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인간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 힘입어 존재합니다. 이성적으로 더듬어 올라가면 하나님의 존재를 어렴풋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신 존재증명-괴델). 또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박해자였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과 함께 목소리로 임한 예수님을 만나고 사도로 변화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바울처럼 극적인 체험을 하는 건 아닙니다. 기도하다가 또는 기도 응답을 통해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냥 믿어지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를 체험하게 되면 성경이 달리 보이게 됩니다. 말씀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고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기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게 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좋은 관계를 맺는 첫 걸음을 떼게 됩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을 주시고 삶을 풍성하게 채우시는 분입니다. 요10:10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정의의 여신 테미스처럼 우리 삶을 달아보시고 부족하면 칼을 휘두르는 분으로 착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기 위해 감시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머니와 같이 우리의 잘못을 감싸주시고 풍성하게 채워주시는 분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가 이 점을 확신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서 3:14에서 ‘부활’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고 생명의 부활을 주심을 믿는 것, 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지막 걸음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으면 믿음의 내용이 완성됩니다.
저는 이 믿음에 대해 개인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는 오전에 학교 끝나면 동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일상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찾으러 오십니다. 엄마는 술래잡기를 잘했는지, 딱지를 얼마나 땄는지 묻지 않습니다. 옷이 더럽다면 화를 내시기도 하지만 집에 데려가 깨끗이 씻겨주시고 저녁과 잠자리를 챙겨주십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메타포)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부모님(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믿고 살면 저녁(죽음)이 되면 데리러 오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업적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 우리가 일생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아빠 또는 엄마라 부르는 자체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자주 하나님을 찾고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연습이 신앙인의 삶에 반드시 필요합니다.
4절부터 믿음의 선진들, 믿음의 전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믿음의 전당을 기초로 ‘믿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믿음의 표현 1> – 관계와 용납
4, 5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아벨(창4장)과 에녹(창5장)은 전혀 다른 삶을 살았습니다. 아벨은 제물 문제로 형인 가인에게 젊은 나이에 살해당했고, 에녹은 365년을 살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 나라로 옮겨졌습니다. 아벨은 ‘더 나은 제사’를 드렸고, 에녹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죽은 아벨과 죽지 않는 에녹이 같은 믿음의 선상에서 서 있습니다. 두 사람의 결과가 반대였어도 성경의 증거는 같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과 에녹의 삶 모두 받아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의 제물과 삶 모두를 받으십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뭔가 엄청난 걸 원하시지 않습니다(부모-자녀). 오히려 우리가 드리는 작은 마음을 기꺼이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믿음을 바탕으로 진심을 드리고 말씀대로 살면 아벨과 에녹같이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질 것입니다.
<믿음의 표현 2> – 경외와 순종
7절은 믿음의 다른 측면인 순종에 대해 말씀합니다. 7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노아는 홍수에 대해 경고를 받았습니다(창6장). 그것도 120년 후에 있을, 현재는 보이지 않는 일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당시 홍수가 어느 정도 있었는지 알 수 없지만, 방주를 준비해야 할 만큼의 홍수는 역사상 없었습니다. 이런 큰 홍수에 대한 경고는 솔직히 믿기 어렵습니다. 또 지어야 할 방주의 크기도 어마어마했습니다(길이 135m, 폭 22.5m, 높이 13.5m). 가족 8명이 120년을 쉬지 않고 일해야 간신히 만들 크기였습니다. 하지만 노아는 말씀을 믿고 방주를 지었습니다. 노아가 방주만 준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사람들에게 전했고 당시 사람들은 노아가 만드는 방주를 목격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방주에 탑승한 사람은 노아와 그 가족 8명이 전부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물에 잠겼습니다.
운명을 가른 노아의 믿음은 경외와 순종입니다. ‘경외’는 존경과 두려움이 복합된 감정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미지(未知)’). 그리고 알 수 없는 존재에 대한 두려움(cosmic horror/ 숭고 sublime)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두려움만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는 우리를 위해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노아도 심판받는다는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그만큼 믿었기에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노아의 순종은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믿음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창19:14 “롯이 나가서 그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 이 시대 사람들의 태도)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라는 구절은 1:14절 “구원받을 상속자들”, 6:l2절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을 따르면 구원과 약속을 받게 됩니다. 구원은 홍수와 같이 세상에 닥치는 재앙과 고난으로부터의 ‘건짐’과 미래적인 ‘부활’을 모두 포함합니다. 약속은 우리나 다음 세대가 받을 ‘축복’을 말합니다. 믿음을 따르는 자들은 ‘건짐’과 ‘부활’, ‘축복’을 상속받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8:1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가 노아와 같은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이 주시는 영광스러운 부활과 축복을 얻게 될 것입니다.
8-10절을 보십시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아브라함이 노아와 같은 선상에 서 있는 이유는 8절 후반부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어디로 인도하실지 알려주지 않으셨고 그냥 고향을 떠나라고만 하셨습니다. 이후에는 상황에 따라 인도하셨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작은 불확실성도 견디기 힘들어합니다(INTJ). 간단한 외출에도 계획이 필요합니다(vs 옥합목자님). 하지만 아브라함은 삶 전체를 불확실성으로 인도하는 음성에 순종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믿음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으로 형상화되었습니다. 이 성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가나안 땅일 수도 있고, 하나님 나라일 수도 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간’ 아브라함은 신뢰를 바탕으로 확실한 미래를 바라보게 되었습니다(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것이 그가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게 된 이유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약속을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11, 12절을 보겠습니다.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사라의 믿음은 노아, 아브라함에 비하면 작아 보입니다. 그녀는 그저 이삭 하나를 낳았을 뿐입니다. 또 창세기 18:12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나님이 1년후 사라에게서 이삭이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지만 사라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습니다(아브라함 99세, 사라 89세). 하지만 사라는 결국 불신을 극복하고 믿음을 가졌고 90세에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 자녀를 통해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은 많은 후손’이 태어났고 예수 그리스도가 그 계보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믿음의 크고 작음, 역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말씀을 순수하게 믿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증거가 바로 사라입니다. 단순히 약속을 믿는 것으로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 삶을 축복해 주십니다.
<믿음의 표현 3> – 약속에 대한 확신
20-22절을 보겠습니다. “20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 21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 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뼈를 위하여 명하였으며” 이삭과 야곱과 요셉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 그들이 모두 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할 먼 미래의 일을 확신하고 대를 이어 믿음을 유지했습니다. 특별히 요셉은 창세기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진 인물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마지막 장인 50장까지 요셉의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히브리서는 요셉이 가졌던 출애굽과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셉의 인간적인 장점과 업적은 출애굽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믿음보다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우리는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땅에서 이루어낸 일로 평가받는 곳이 아닙니다(개인적인 이미지). 사실 믿음의 전당에 오른 선진들도 허물과 약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신뢰하고 확신했기에 인정받았습니다. 우리도 지나온 일이나 잘못에 얽매일 필요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흔들림 없이 살아간다면 선진들과 동일한 축복이 우리에게도 주어질 것으로 확신합니다.
(소감)
결론 : 사실 이렇게 말씀을 들어도 믿음이 손에 잡힐 것처럼 느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모호하고 불확실한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 관계의 본질입니다. 그냥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관계를 이루는 믿음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모님이나 친구를 속속들이 잘 알아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모른다는 점에서 불확실하지만 믿음이 그 관계를 유지해 줍니다. 믿음의 선진들은 불확실성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약속을 얻고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더 풍성한 삶과 부활로 돌아온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선진들처럼 믿음의 길을 걷고 풍성한 삶을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